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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건 살이] 동경심이 사라진 나라

Los Angeles

2026.02.12 17:36 2026.02.12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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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건 회계사

이유건 회계사

나는 디즈니에서 일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가져온 인어공주 비디오테이프를 열 번도 넘게 돌려보았고, 디즈니 음악의 상당 부분을 만든 앨런 맨켄의 멜로디를 수없이 반복해 들었다. 세상의 온갖 희망과 사랑을 담은 엔딩 크레딧의 음악은 늘 귀에 맴돌았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군대를 다녀와서도 나는 그 동요 같은 노래들을 간간이 들으며 혼자 행복해했다.
 
사회 초년생이 되기 전에는 디즈니에서 청소부로 일해도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순진한 이력서를 이메일로 보냈다. 한국에서 명문 대학으로 꼽히는 학교를 졸업했으니 어떤 기업이라도 나를 채용할 것이라 믿었고, 비자 문제 같은 건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내 능력과 열정이 이 정도인데, 왜 이 회사는 답장 하나 주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한숨을 쉬었다.
 
나이가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 당시의 나는 비자가 필요했고, 그보다 더 강력한 영주권이나 시민권이 있으면 나보다 조금 못한 사람도 디즈니에서 청소부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이민자가 세운 나라지만, 내가 꿈꾸던 시절에도 이민 문호는 이미 충분히 닫혀 있었다.
 
얼마 전, 1년 전부터 계획한 가족 여행을 떠났다. 플로리다주 올랜도에 내려 디즈니 로고에서만 보던 매직킹덤 캐슬을 직접 마주했다. 미키마우스와 프로즌의 엘사가 함께 춤추는 퍼레이드를 보며 마음속으로는 ‘이게 뭐 대단하겠나’라며 애써 눌렀지만, 수백 번은 더 봤을 성 주변을 걷는 캐릭터들을 실제로 보는 순간, 불혹이 된 내 마음은 두근거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아들을 목마 태워 그 장면을 보여주었다. 디즈니는 여전히 위대했다.
 
조금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어머니는 전축으로 프랭크 시나트라와 빙 크로스비의 캐럴을 틀어주셨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영화 Tootsie의 주제가인 It Might Be You를 듣거나, 녹화해 둔 프렌즈를 반복해서 보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상상했다. 가사와 화면은 직선적이었지만, 그 안에는 신사적인 태도와 예의, 그리고 삶에 대한 낙관이 있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동경해왔다.
 
수많은 무의식의 연결은 결국 나를 미국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어느덧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뒤의 시간은 유난히 빠르고 거칠게 느껴진다. 내가 누리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불과 몇 년 전보다 오히려 퇴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국 사회는 더 거칠어졌고, 여러 인종이 함께 사는 이곳은 공존보다 분열에 더 가까워 보인다.
 
정권이 바뀐 뒤, 이 나라의 분위기는 분명히 달라졌다. ICE(이민세관단속국)이 다시 전면에 등장했고, 불법체류자 단속은 일상의 공포가 되었다. 이민은 더는 미래를 설계하는 문제가 아니라, 언제든 개입할 수 있는 권력의 영역이 되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아시안은 더 조용해졌고 더 조심스러워졌다. 능력은 여전히 요구되지만, 책임은 더 많이 떠안게 되었고, 잘못은 쉽게 전가된다.  
 
나는 이제 백인과 흑인을 이전처럼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이웃에 대한 친근함도 사라졌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라면 받아들이겠지만, 구조적으로 정해진 위치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뒤로는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욕구마저 닳아버렸다.
 
나는 마침내 나의 이민을 후회한다. 외로움 정도는 자유와 푸른 하늘이 보상해 줄 것이라 애써 외면해 왔지만, 더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나는 좌절했고, 지쳤다.  
 
나는 더는 이 나라를 동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전히 미워할 수도 없다. 디즈니 음악처럼, 이 땅은 여전히 내 마음 어딘가를 울리지만 그 울림이 나를 살게 하지는 않는다. 달과 뉴욕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사랑이라고 믿던 아이도 아니고, 기회의 나라를 확신하던 청년도 아니다. 다만, 후회하는 선택을 하고도 아이를 안고 웃을 수 있는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이유건 / 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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