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계사의 한 해는 참 덧이 없다. 4월 15일까지 이어지는 세금보고에 계절을 잊고 살다 보면 어느새 봄은 저만치 가있다. 여름에 잠깐 숨을 고르고 나면 어느새 곤란한 사연이 많아 가을까지 연장을 한 손님들의 보고서를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겨울에는 집에서 노곤한 몸을 뉘어 유튜브에 맥주 한 잔하고 싶지만, 연말 결산을 해야 하는 법인들 때문에 다시 신경을 곤두세운다. 이래저래 다짐한 일들은 1월 1일에 놔둔 채 한 해를 보내 버리게 된다.
추수감사절이 지나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지역 파티가 잦아진다. 밤늦게 연주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연주 후의 허한 마음으로 듬성듬성 불이 켜진 가게들과 크리스마스 장식을 바라본다. 그제야 ‘올 한 해를 나는 어떻게 보냈는가’ 하고 문득 되돌아보게 된다.
오리건의 겨울밤은 유독 길고 어둡다.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데 이보다 더한 조건이 있을까 싶다. 포틀랜드의 위도는 연해주와 맞닿아 있다 하니, 그 쓸쓸함도 어쩐지 이해가 된다.
미국에 온 지도 15년. 어느새 마흔셋이다. 영원할 것 같던 부모님의 건강도 이제는 저물녘에 가까워지고, 나 또한 금세 몸이 축나는 나이가 되었다.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른다. 유난히 밥을 안 먹어 어머니 속을 썩였다. 그 와중에 외할머니는 손자 입에 밥 한 숟가락 넣어보겠다고 가요톱텐 한 곡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셨다가 귀한 미제 스팸을 밥 위에 올려 우겨 넣으셨다. 초등학생 무렵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잘 몰랐다. “이제 다시 못 본다”는 말을 듣고도 ‘아… 그런가 보다’ 하고 순진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와 가요프로를 보던 중 짜고 맛있는 스팸 한 수저를 입에 넣는 순간, 무심코 내뱉었다. “이건 외할머니가 줘야 하는 건데 이제 없네.”
그 말에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셨다. 나도 따라 울었다. 내게 죽음의 정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아 한국을 자주 오가던 때가 있었다. 어머니의 아픔은 어쩌면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그 시기를 무의식적으로 떠올리며 찾아온 것이 아닐까. 본인도 언젠가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셨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지금은 힘든 시기를 잘 넘기셨고, 노년의 중반기를 건강하게 헤쳐나가고 계신다.
어릴 적에는 죽음이 멀리 있어 잘 몰랐고,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 같지만 여전히 두렵다. 이제 겨우 세 살인 아들이 자라나는 모습도 더 오래 보고 싶고, 나 스스로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더 느끼고 싶다. 언젠가 나이가 들어 자식들의 양육을 지켜보며 지난날을 추억하고, 주변 친구와 지인들의 이별을 겪게 되면 비로소 죽음을 담담히 이해하게 되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
한편으로 미주에 사는 40~50대 1세대 이민자에게는 ‘언젠가 반드시 일어날 일’에 바로 달려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부모와 멀리 떨어져 타지에서 살고 있는가 하는 회의감도 든다.
누구나 한 번쯤 겪었겠지만, 아는 지인의 부모님이 소천하시면 새벽 비행기로 급히 떠나고, 다녀와서는 “살아 계실 때 더 함께했어야 했는데”라고 한다. 참 맞는 말이다. 부모님께 “잘 사는 모습 보여주겠다”며 떠났지만, 정작 곁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불효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좋아져 보고 싶으면 화면으로 바로 통화하는 시대다. 하지만 부모님 손 한 번 더 잡아드릴 수 있는 그 소박한 하루를 우리 이민자들은 잃어버렸다. 그 아픔에 조용한 위로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