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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헌수의 활력의 샘물- 죽어야 한다

Chicago

2025.10.1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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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헌수

손헌수

한때 여학생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던 유명 남자가수가 있었다. 그가 중년을 지나 이제 노년의 문턱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이는 참 공평한 것 같아요. 아무리 예쁘고, 힘이 세고, 돈과 능력이 많은 사람도 시간 앞에선 모두 똑같이 한 살씩 먹잖아요.”
 
어느 순간부터 나 또한 나이 드는 일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생일이 반갑지 않다. 금년 생일에도 사무실 벽에 젊은 직원들이 내 나이를 알리는 커다란 숫자를 붙여 놓았다. 내가 앞자리 숫자 ‘5’를 몹시 싫어한다는 걸 아는 그 친구들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숫자를 뒤집어 ‘2’로 만들어 걸어둔다. 덕분에 잠깐 웃는다.  
 
나는 평소에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몇가지가 겹치면 “죽고 싶다”는 말을 습관처럼 중얼거린다. 어느 날 한 직원이 말했다. “오늘 쓸 수 있는 ‘죽고 싶다’는 다 쓰셨어요. 오늘은 그 말 금지니까 그만 쓰세요.” 그렇게 자주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죽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나이를 먹고 언젠가 병이 들고 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살아 온 날보다 살아있을 날이 확실히 더 적게 남았다. 등산보다 하산이 중요하고 비행보다 착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쯤 넉넉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만일 사람이 죽지 않는 세상이었다면 어땠을까.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말한 ‘빅 브라더’가 이미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트럼프나 푸틴, 시진핑 같은 권력자가 영원히 늙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 혹은 시저나 알렉산더 대왕이 아직도 건재하다면? 아마 힘 있는 몇 사람이 세상을 끝없이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섬뜩하다.
 
그래서일까. “죽음이 있기에 삶이 행복하다”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산중에서 한 수도승이 호랑이를 만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간신히 절벽 중턱의 나무뿌리를 붙잡고 매달렸는데, 위에는 자신을 쫓아온 호랑이가 으르렁거리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더 큰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올라가도 죽고, 내려가도 죽는 그때, 수도승은 옆을 바라 보았다. 절벽 틈 사이로 피어난 꽃 한 송이. 그는 그 꽃을 한참 바라보며 그 순간을 온전히 맛보았다고 한다.  
 
불교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 같은데 어떤 버전은 수도승이 절벽에 난 산딸기를 따서 맛있게 먹었다고도 한다.
 
길어야 80~90년을 사는 우리 인생은, 어쩌면 그 수도승이 절벽에 매달려 꽃을 바라보던지 산딸기를 먹는 바로 그 순간과 같다. 위에도 아래에도 호랑이는 여전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피어난 하나의 꽃, 오늘의 공기, 한 사람의 미소, 오늘 나와 한잔하기 위해 나를 기다리는 친구의 모습을 알아보고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그렇기에 지금 살아 있음이, 더 또렷하고 더 귀하다. (변호사, 공인회계사)  
 

손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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