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것들에 연연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뒤돌아보면 어제의 아픈 편린들이 못자국처럼 상처로 남아 있다.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할 때 롯의 아내는 하나님의 경고를 어기고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으로 변한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절벽을 마주하면 어떻게 할까? 뒤는 한치도 물러날 수 없는 막다른 길이다. 이대로 죽을 것인가? 내인생이 여기서 끝장 날 것인가?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서로 부등켜 안고 까마득한 절벽에서 떨어져도 살아남는다.
보통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186미터가 되는 백마강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의 전설은, 그 숫자가 과장 됐다 해도 백제의 멸망과 슬픈 궁녀들의 이야기로 나라 잃은 자의 슬픔과 비통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삶과 죽음은 인생의 잔인한 반복이다. 건강식 챙겨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스트레스 안 받고, 부지런떤다고 오래 살지 않는다. 각자의 시계 추에 맞춰 태어나듯, 죽음은 순서에 관계없이 떠날 시간에 앞을 가로 막는다.
이번 여행 중에 죽었던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6년 전에 죽었었고 기억 속에 지워졌다. 더 이상 친구를 떠올리지 않기로 작정했다. 매달리고 떠올리는 것보다 잊고 단념하며 추억의 잔해들을 땅에 묻을 것이라 생각했다.
많은 사람이 떠나도,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수월할 테니까 살기로 다짐했다.
그렇다고 무지막지하게 그림자마저 지우지 않았다. 벌써 7여년이 지났구나. 뇌경색으로 쓰러져 요양병원에 있는 널 만나러 갔다. 휠체어에 앉아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로 ‘많이 나았다’며 나를 위로했다. 죽지 않으면 사는구나 생각했다.
근데 소식이 끊어졌다. 미국으로 돌아와 전화도 하고 알만한 사람들에게 연락도 해 보았다. 대구 갈 때마다 냉면과 갈치밥 함께 먹던 활선생님께 생사를 묻고 또 물었다. 날 포기시킬 작정으로 ‘마지막 모습 보면 슬퍼할까 봐 친구는 그냥 떠난게 아닐까’라는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내 가슴에 너를 묻었다.
너는 유일한 친구고 동반자였다. 생의 갈림길에서, 선택의 귀로에서 방향을 설정하는 지표였다. 미치도록 글을 쓰고 싶은 나의 희망을 너는 꺾지 않았다.
네가 아니였으면 자서전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음과 모음은 타인의 언어처럼 익숙하지 못해 두려움에 가슴이 떨려왔다.
‘네가 사는 세상 이야기는 누구도 담을 수 없다. 오직 너 만이 쓸 수 있다. 네가 두려워하는, 높이 뜬 별이 지상으로 침몰할 때 어쩌면 북극성처럼 빛나는 시간이 너에게 올 것이다.’라고 친구는 위로했다.
기적은 매일 일어난다. 기적은 기적을 믿는 자의 가슴에 붉은 꽃 한송이 피운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서울 근교에 살아있다는 걸 알아냈다. 단숨에 달려가 극적으로 상봉했다. 세라피를 받는 친구는 ‘네 칼럼은 빠지지 않고 읽는다’며 편안해 보인다. ‘왜 연락 안했니?’라고 묻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아도 만날 사람은 만나지니까. 패티킴 리사이틀 연습시키던 얘기하며 해 지는 줄 모르고 노닥거리다가 명절이라서 늦은 밤중에 택시 못잡아 혼줄이 났다.
세월은 흘러가도 시간은 붙잡고 매달리면 잠시라도 옛날로 되돌릴 수 있다.
살아서 다시 만나는 우리의 만남은 연인처럼 오늘이 1일이다. 세월은 우리편이다. 죽는 날까지, 살아줘서 고마워. (Q7editions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