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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공동체의 힘은 투명한 소통에서

Los Angeles

2025.10.2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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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덕 독자

윤상덕 독자

나는 91세의 노인으로, 가디나 노인아파트에서 22년째 살고 있다.
 
이곳은 일반적인 관리형 아파트가 아니다. 매니저가 아닌, 수십 명의 입주자가 무보수로 참여해 스스로 관리하는 ‘협동조합형 공동주택’이다. 회장(president)은 입주자 전체를 대표하는 책임자이며, 상급 협동조합 연합체에서 고용한 몇몇 유급 직원이 자원봉사자들을 도와 함께 운영한다.
 
내가 80대 중반에 세 번째 회장을 맡았을 때의 일이다. 공고문이나 연설문은 컴퓨터로 문제없이 쓸 수 있었지만, 회원명단(입주자 명단)을 엑셀로 작성해야 한다는 점이 걸렸다. 엑셀을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아들에게 배우기로 했다. 진도가 늦다고 야단을 맞아가며 오래 연습한 끝에 마침내 스스로 명단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약 이곳이 일반 아파트였다면 굳이 입주자 명단을 언급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협동조합 형태의 우리 아파트는 다르다. 일부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를 이유로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그 벽을 조금만 허물면 훨씬 더 따뜻한 공동체가 된다. 실제로 몇 해 전 담당 직원의 도움으로 모든 입주자가 같은 크기의 깔끔한 문패를 달 수 있었는데, 그때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모른다.
 
이제 ‘회원명단’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대형교회에서는 수천 명의 교인명단을 만들어 배포한다. 이름, 전화번호, 주소, 사진까지 포함된다. 교인들이 서로 연락하고 교류하기 위해서다.
 
나도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여러 인종의 이웃과 식사를 하고 커피를 나누었다. 이때 서로 연락하려면 명단이 필요했다.  
 
노인아파트는 세대교체가 계속되는 곳이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입주자를 자주 만나게 된다. 인사를 나누다 보면, “이분은 다음 선거의 자원봉사자로 모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연락처가 무엇인지를 알 길이 없다. 결국 그 정보를 얻을 유일한 원천은 회원명단이다.  
 
그래서 나는 명단 1부를 요청하며 이렇게 약속했다. “맹세코, 옳은 일에만 쓰겠습니다.” 그러나 내 청원은 단칼에 부결되었다.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개인정보는 공개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때 되물었다. “내가 언제 ‘공개(Disclosure)’하자고 했습니까? 나는 ‘공유(Sharing)’하자고 했습니다.” 사전을 펼쳐보라. ‘공개’와 ‘공유’는 전혀 다른 뜻이다.
 
그런데도 마치 군사기밀이나 산업비밀이라도 되는 듯, 명단 하나를 두고 과민하게 반응하니 참으로 안타깝다.
 
더구나 우리 아파트의 자원봉사자 명단은 이미 1층, 2층, 3층의 각 모퉁이에 버젓이 게시되어 있다. 그것이 바로 ‘공개’다. 내가 하려던 것은 그런 공개가 아니다.
 
‘정보 공유’란 이런 것이다. 예를 들어 경찰이 형사 사건으로 입주자 명단을 요청해 가져가는 경우, 그것이 정보의 공유다. 그럼에도 내 청원을 부결시킨 사람들은 나를 ‘비밀 누설자’로 오해한 듯하다.
 
정보의 공개와 공유를 혼동하는 사람들과는 언젠가 마음 터놓고 끝장토론이라도 해보고 싶다. 왜냐하면, 협동조합 공동체의 신뢰는 ‘정보의 벽’이 아니라 ‘정보의 나눔’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윤상덕 /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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