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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서 햄버거까지…97세 위진록의 한 세기 인생

Los Angeles

2025.10.26 19:00 2025.10.2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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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집 '세월의 흔적' 펴낸 KBS 원로 아나운서]
한국 교수와의 8년간 손편지 200통 엮은 문집
22살에 한국 떠나 75년 간 일본·미국 타향살이

북한군 남침·서울 수복 첫 보도한 장본인
맥아더 휘하 유엔군사령부 라디오에 파견

자녀들 교육 고려해 44살 늦깎이 미국 이민
허모사 비치 햄버거 장사 10년에 지역 명사
KBS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이 자택에서 서간집 '세월의 흔적'을 출간하게 된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KBS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이 자택에서 서간집 '세월의 흔적'을 출간하게 된 사연을 설명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맨몸으로 헤쳐온 위진록(97)의 눈시울은 촉촉히 젖었다. 22살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22년, 미국에서 53년, 인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낸 지난 날들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겼다.
 
“한국전쟁이 사람의 생애를 이렇게 슬프게 만들었어요. 전쟁이란 것은 참 무서운 겁니다.”
 
그의 삶의 궤적은 한국현대사의 격변과 맞닿아 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남침 공격 최초 보도. 석달 뒤 9월28일 유엔군과 국군의 서울 수복 최초 보도. 한국전쟁 중 일본 도쿄 유엔군총사령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에서 한국전쟁 전황을 방송한 아나운서. 1972년 미국으로 이민 와 햄버거 가게를 10년 운영하며 지역 명사가 된 한인.  
 
1950년 12월 NHK 스튜디오에서 방송중인 위진록. [본인 제공]

1950년 12월 NHK 스튜디오에서 방송중인 위진록. [본인 제공]

97세에 서간집 펴낸 사연
 
85세였던 2013년 10월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KBS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의 고백적 기록'을 출간했다. 22살 청년이 한국전쟁 통에 도쿄로 파견됐고, 44살 장년이 되어 미국으로 이민가게 된 사연들을 자전적으로 서술했다.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소 겪으면서 만난 인연들에 관해 솔직하고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2018년 문학회 강연차 LA에 방문한 대전대 문예창작학과 정순진 교수에게 이 책을 건네주었다.
 
“건네주신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오는 비행기 안에서 모두 읽었습니다. 한번 손에 들자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와 맞서 싸워온 선생님의 삶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져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이야 말로 삶이 곧 책인 ‘사람책’이시네요.”
 
정 교수가 독후감을 손편지로 보내왔다. 오래간만에 보는 정성스럽게 쓴 독후감 손편지에 감동받아 곧바로 손편지로 답장을 보냈다. 손편지가 태평양을 건너자면 2주, 왕복하자면 거의 한 달이 걸린다. 이 번거로운 편지 주고 받기는 2018년부터 지금까지 200통 가까이 이어졌다. 그는 이를 엮어 '세월의 흔적: 8년간의 손편지에 담긴 인생 이야기'를 최근 출간했다. 출판기념회는 11월1일 LA 한인타운 한 호텔에서 열린다.
 
인터뷰를 요청하고 위 선생이 살고 있는 가디나 자택으로 찾아갔다. 귀는 다소 어두웠지만, 허리는 꼿꼿하고 목소리는 정정했다.
 
19세 최연소 KBS 아나운서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8년 황해도 재령에서 가난한 지방관리의 2남9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관비로 무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평양사범학교에 1940년 입학했다.  
 
평양사범학교 시절 브라스밴드에서 활동하면서 배운 클래식 음악이 나중에 라디오 방송에서 음악 프로그램을 맡는 자양분이 된다. 장차 한국 현대국어학의 초석을 닦은 대표적 한글학자이자 어문학자가 되는 이숭녕 박사를 선생님으로 만난 것도 이 학교에서다. 5.16 군사정변의 주체 세력의 일원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이 된 옥창호를 동기생으로 만난 것도 평양사범학교다.  
 
평양사범학교 3학년 때 기숙사에서 담배를 피우다 걸려 퇴학을 당했다.  
 
경성역(서울역) 역부로 일하는 동안 1945년 해방을 맞이했다. 1947년 KBS 제1회 ‘방송극 연구생’ 모집에 합격해, 라디오 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에서 아저씨 역을 맡아 한국 아동극의 한 장을 여는데 기여했다. 같은 해 9월 KBS 아나운서 모집에 합격했다. 만 19세로 한 나라 국영방송의 최연소 아나운서가 되는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두 번 모두 평양사범학교 졸업 학력 기재로 응모자격을 얻었으며, 그것이 일생 동안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는 점을 자서전에 구구절절 고백해놨다.
 
1948년 12월 이승만 대통령의 지방 초도 순시 때 동행하며 뉴스를 보도했고, 1949년 7월5일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 하관식을 중계 방송하는 등 격동기에 KBS 아나운서로 라디오 방송 일선에서 일했다.
 
그가 한국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 것은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 뉴스를 최초로 보도한 KBS 라디오 방송 아나운서였다.
 
“임시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 괴로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그날 아침 6시, 그의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울려 퍼졌다. 당시 숙직실에서 자고 있던 중 육군본부의 긴급 방문을 받고 새벽에 원고를 써내려갔다.  
 
“그날 방송이 바로 ‘6·25 제1보’로 기록됐습니다.”
 
사흘 뒤 서울이 함락되자 그는 한강 남쪽으로 피하지 않고 집 지하에 몸을 숨겼다. 북한군이 방송국 직원을 불러모아 자백서를 쓰게 했을 때도 그는 생존을 위해 고뇌했다.  
 
“그날 북한군 방송에 협조했다면 나는 자유세계와는 인연이 끊겼을 겁니다. 그래서 도망쳤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 그는 다시 방송국으로 달려갔다. 황급히 떠난 북한군이 완전히 폭파시켜 버려 KBS 정동 라디오 방송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그 길로 바로 당인리 송신소로 내달렸다. 마침 송신소에는 옛 동료들이 있었다. 마이크와 송신시설을 연결해 임시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시민 여러분, 우리는 이제 자유를 찾았습니다!” 감격스러운 서울 수복 소식을 알리는 첫 방송을 내보냈다.
 
한국전쟁 발발과 서울 수복, 두 개의 역사적 소식을 전하는 마이크에는 그의 목소리가 있었다.
 
맥아더 휘하서 라디오 아나운서
 
유엔연합군이 한창 북진을 하고 있던 1950년 11월 유엔군총사령부 심리작전국의 제안을 받고 일본 도쿄로 파견됐다. 목소리가 미국 CBS의 전설적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를 닮았다는 이유였다. “한 달이면 전쟁이 끝난다”는 말을 믿고 떠났지만, 전쟁은 3년을 끌었다.
 
그는 도쿄에서 VUNC(Voice of United Nations Command) 방송 아나운서로 활동하며 일본 땅에서 한국군과 한국 국민을 위한 방송을 이어갔다.
 
1958년 오키나와로 VUNC 방송국을 옮긴 후에도 그는 클래식 해설 프로그램 ‘음악의 향연’을 제작해 한국의 KBS로 보냈다. 방송제작 시설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KBS는 ‘음악의 향연’을 밤늦은 시각에 고정적으로 방송했다. “그 프로그램을 듣고 작곡가가 되고, 대학교수가 됐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오키나와에서 근무하던 1968년에 베트남 전쟁 종군기자로 파견됐다. 주월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을 인터뷰하고 함께 지낸 인연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1969년에는 정일권 국무총리의 방문을 받고 박정희 대통령 인터뷰 주선을 요청했다. 긍정적 답변을 받고 한국으로 출장을 갔지만, 박 대통령 인터뷰 일정에 대한 회신을 받지 못했다. 급한 마음에 평양사범학교 동기였던 옥창호 장군에게 부탁했고,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연락해 육영수 여사까지 인터뷰 요청을 전달하는데 성공했으나, 인터뷰는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1972년 VUNC 방송국이 해체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의 큰 결단을 내렸다. 미국 이민을 단행했다. 미군 산하기관에서 22년을 일한 덕에 특별이민 비자를 받았다.
 
“아이들이 미군 학교에서 영어로만 공부해서 한국에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KBS의 복귀 제안을 뒤로하고 가족과 함께 미국 이민길에 올랐다. 미국 남가주에서 그는 또 한 번 도전을 시작했다. LA 지역 작은 한인 방송국에서 프로그램을 맡아달라는 제안도 받았다. 그러나 미국에 이민 왔으니 새로운 일을 해보겠다는 ‘그저 문득’ 엉뚱한 생각을 했다.
 
LA타임스에 난 광고를 보고 허모사 비치의 햄버거 가게를 6000달러에 인수했다. 가지고 간 전 재산이었다. 7월 말 무렵이었다. 여름방학이라 아이들이 햄버거 가게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8월 말까지는 하루 120달러 매출을 올렸다. 그런데 9월 들어서 문제가 생겼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하자 손님이 뚝 끊겼다.
 
“하루 매상이 6달러밖에 안 될 때도 있었어요. 그때는 정말 막막했죠.”
 
절망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가게 이름을 Wee's Kitchen으로 바꾸고, 아내와 함께 튀김과 불고기, 탕수육 같은 동양음식 메뉴를 개발해 팔기 시작했다. 당시 허모사 비치에는 동양음식을 파는 식당이 없었다.
 
1972년 허모사 비치 식당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있는 모습. [본인 제공]

1972년 허모사 비치 식당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있는 모습. [본인 제공]

삼남매 명문대 보낸 햄버거집  
 
때마침 동네신문 이지리더(Easy Reader)가 그의 사연을 기사로 소개했다.
 
“맥아더 사령관과 함께 일했던 한인 부부가 해변가에서 햄버거를 판다.” 이후 가게에는 손님이 몰려들었다.  
 
사람을 쓰지 않고 아내와 단 둘이서 식당을 꾸려가느라 하루 종일 눈코 뜰새 없이 주방 일을 해야 했다. 도마질은 그의 전담이었다. 햄버거 패티 맛을 지키기 위해 고기를 기계로 썰지 않고 손으로 써는 걸 고집했다. 움푹 패인 도마를 버리고 새것을 산 것이 열 번이 넘는다.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동네 꼬마들은 “Yellow, Yellow!” “Leper, Leper!”라고 놀리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돌이나 계란을 던지기도 했다. 몹쓸 인종차별을 웃음으로 버텼다.  
 
햄버거 장사를 하면서 세 자녀를 모두 명문대에 입학시켰다. 큰 아들은 예일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다. 둘째 딸은 하버드대와 UC버클리 로스쿨을 나왔다. 막내 아들은 UC샌디에고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범상치 않은 햄버거 가게 한인 부부와 자녀들의 이야기는 지역에서 화제가 됐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우체부도, 은행 직원도, 슈퍼마켓 직원도 모두 “하이, 미스터 위!”라며 인사하는 타운의 명사가 됐다. 햄버거 장사 7년, 동양인을 멸시하며 돌을 던지던 동네 아이들이 “하이, 미스터 위!”라며 인사하던 날, 그는 그 인사를 제목으로 수필집을 펴냈다. 책은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고, 방송인 봉두완의 추천으로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햄버거 가게를 팔고 사우스베이에 '아세아 서점'을 열어 아시안 이민자들에게 문화공간을 제공했다. 한 달에 한번 동네신문 [코리안뉴스]를 발행하면서 이민생활의 소소한 일상을 소개하는 수필을 연재했다. 또 라디오코리아에서 '미스터 위의 커먼센스' 프로그램을 맡아 일상의 지혜를 전했다. “내 프로그램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니까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격동기 경험담과 남가주 이민살이, 클래식 음악 이야기를 여러 편의 수필집에 기록으로 남겼다. '하이! 미스터 위(1979)', '이민 10년 생(1984)‘, ’잃어버린 노래(1993)', '낙타의 속눈썹(1997)', '위진록의 커먼센스(1999)', '클래식, 내 마음의 발전소(2011)', '고향이 어디십니까(2013)'등등.
 
라디오 방송활동과 수필집 출간으로 남가주 문학인들 사이에서 명사였고, 가주예술인 연합회 회장과 재미 방송인협회 고문도 역임했다.  
 
2013년 출간한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끝으로 더 이상 책을 출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백세를 바라보는 나이, 다시 새 책을 세상에 내놓을 줄은 그 자신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정 교수와 주고받은 손편지였다. 어쩌면 그가 세상과 맺은 마지막 인연의 기록일지 모른다.  
 
“우연은 신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는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인용하며 미소 지었다.
 
“그 우연을 붙들고 8년 동안 편지를 주고 받았어요. 독자들이 '이렇게까지 정직하게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97세의 노인은 여전히 펜을 놓지 않는다. 그의 삶은 마이크와 원고, 햄버거와 손편지로 이어진 한 편의 역사였다.
 
“나는 나대로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책 읽고 가슴 뭉클해져 편지 썼죠”

공동저자 정순진 교수
정순진 교수

정순진 교수

 
문학평론가 정순진(68) 전 대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세월의 흔적'의 공동저자다. 그는 “이렇게 오래, 이렇게 많은 편지를 주고받게 될 줄도, 그것이 책으로 엮이게 될 줄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18년 5월 재미수필가협회 초청 강연회에서 시작됐다. “강연에 참석하신 위 선생님께서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건네주셨습니다. 귀국 비행기 안에서 책을 단숨에 읽고 가슴이 뭉클해져 감사 편지를 보냈지요. 그 편지에 답장이 오면서 8년간의 서신 왕래가 시작됐습니다.”
 
위진록에게 건네받은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읽으며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인간적 진실에 깊이 매료됐다고 했다.
 
“전쟁 중 아내가 밀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다 표류 끝에 대마도 구치소에 수감되는 이야기, 풀려난 뒤 일본인 신혼부부로 위장해 도피생활을 하게 된 사연,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종이학 천마리를 태우는 장면은 가슴이 저렸습니다. 몇십 년 전 일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숨기지 않고 고백하는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8년째 손편지를 주고받아온 이유에 대해 그는 “서로 손편지에 익숙한 세대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외로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했다. “선생님은 운전면허를 반납하고 외출이 줄어든 시기였고, 저는 병으로 조기 퇴직 후 자발적 은둔 중이었어요. 편지는 서로의 고립된 시간을 잇는 다리가 되었죠.”
 
사적인 편지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에 대해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기록하고, 서로의 일상을 나누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당신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하며 안부를 묻는 거죠. 우리는 모두 생로병사의 길을 함께 걷는 길동무들이니까요.”
 
정 교수는 “우리는 아마 살아 있는 한 계속 대화를 이어갈 겁니다. 편지가 오갈 수 없는 곳으로 이사 가지 않는 한, 우리의 대화는 멈추지 않을 거예요”라며 말을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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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영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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