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주의 설계자 윌리엄 버클리 100주년] 자유방임주의 경제, 고립주의 외교 1955년 '내셔널리뷰' 창간, 신념 전파
우파 헌법으로 불린 '섀런선언' 주도 젊은이 모아 정치운동 동력 만들어
민주당원 레이건, 보수로 돌린 주역 트럼프 시대 빛 잃어, 보수 품위 실종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윌리엄 F 버클리는 보수주의자인 부친에게서 자유방임 경제, 고립주의 외교의 신념을 물려받았다. [중앙포토]
'역사를 거슬러 서서 외쳐라, 멈추라고(Stand athwart history, yelling Stop)'. 1955년 뉴욕의 한 사무실에서 탄생한 시사지 내셔널리뷰 창간사설이 표방한 보수의 정신이다. 발행인 윌리엄 F 버클리(1925~2008)가 썼다. 뉴딜 정책 이후 좌편향으로 건국정신에서 멀어져 가는 미국사회에 대한 경고였다. 내셔널리뷰를 보수의 심장으로 자리매김한 키워드이기도 했다.
오는 25일은 미국 보수주의의 설계자 버클리의 탄생 100주년, 그에 앞서 19일은 내셔널리뷰 창간 70주년이다. 보수 정치사에서 그를 뺀다면 재즈사에서 루이 암스트롱을, 축구사에서 펠레를 생략하는 것과 같은 결례다.
그는 부유한 석유사업가 집안에서 열 명의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공교육을 불신한 부친은 뛰어난 가정교사들을 고용해 집에서 사교육을 시켰다. 버클리는 시사토론.문학.예술.승마 등 다방면에서 귀족적 교양을 갖추게 됐다. 골수 보수주의자인 부친은 경제엔 자유방임주의, 외교엔 고립주의를 지론으로 삼았다. 버클리는 이를 유전자 복제하듯 물려받았다.
그는 2차 대전 말기인 1944년 징집돼 장교 후보생 훈련소를 나왔다. 미국 본토의 행정업무에 배치됐다 종전 후 예일대에 입학한다. 캠퍼스에 발을 디디자마자 토론 클럽을 석권한다. 차분한 바리톤, 여유 있는 미소,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농담, 논박보다 설득을 중시하는 논리, 그리고 사전을 찾으며 들어야 할 정도의 고급 어휘력까지.
글 솜씨도 타고났다. 시퍼렇게 선 논리의 칼날을 풍자와 냉소로 가린 채 바람같이 내리치는 검법과도 같은 필력. 버클리식 문체는 내셔널리뷰의 스타일로 굳어졌다. 그가 평생 쓴 책이 56권, 칼럼은 5600건에 달한다.
졸업 직후 1951년 10월 첫 저서 『예일의 신과 인간』을 냈다. 자유시장과 기독교 윤리를 가르쳐야 할 예일대가 사회주의와 무신론에 지배되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타임, 뉴욕타임스 등이 일제히 서평을 썼다. 겨우 스물다섯 청년의 주장을 반박하는 하버드대 교수의 칼럼도 나왔다. 책은 두 달 만에 2만3000부나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미국 외교를 좌지우지했던 헨리 키신저와 절친했던 윌리엄 버클리는 닉슨 행정부 시절 백악관에 수시로 드나들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왼쪽부터 리처드 닉슨 대통령, 윌리엄 버클리, 프랭크 셰익스피어 커뮤니케이션 보좌관, 헨리 키신저 안보보좌관. [사진 닉슨 파운데이션]
책 56권 저술, 기고한 칼럼만 5600건
그는 유명해지면 곤란한 신분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그는 군 징집 대신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원 훈련을 택했다. 책 출간 당시엔 멕시코에서 좌파 포섭 공작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부른 파장에 고무된 버클리는 언론계에 투신한다며 CIA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 동조하는 글을 썼다. 매카시를 처음 만난 건 1948년인데, 그때부터 그의 반공주의 노선에 공감했다고 한다. 1954년엔 매제 브렌트 보젤과 함께 『매카시와 그 적들』을 썼다. 매카시즘에 대해 "방법이 거칠었지만 옳은 방향"이라고 옹호했다. 이후 그는 매카시주의자로 공격당하곤 했다.
본격적으로 뜻을 세운 건 1955년 부친의 투자를 받아 내셔널리뷰를 창간하면서다. 무식한 보수진영에 품위 있는 지식 잡지가 나온 것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정치학자 허버트 맥클로스키의 1952년 연구에 따르면 당시 대졸자 가운데 보수는 12%인 반면, 진보는 47%에 달했다. 지능 수준을 비교한 결과 보수층에선 66%가 낮고 9%가 높은 데 비해, 진보층에선 9%만 낮고 54%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버클리는 "왜 우리 쪽엔 멍청이투성이냐"며 탄식했다.
그는 정치적 승리를 위해선 지적 우위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를 구현할 수단이 내셔널리뷰였다. 1967년 타임은 그를 표지 인물로 다루며 "보수주의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평했다.
내셔널리뷰가 인정받은 건 인재 풀 덕분이다. 창간 초기 버클리가 영입한 제작진은 화려하다. 트로츠키주의에서 전향해 현실주의 외교전략을 주장한 제임스 버넘, 자유방임주의와 전통주의를 결합한 프랭크 메이어, 정통 보수주의의 기둥 러셀 커크, 버클리의 매제이자 매카시의 연설문 담당 브렌트 보젤… 여기에 공산당을 탈당하고 국무부 고위관리 앨저 히스를 소련 간첩으로 고발한 휘태커 체임버스도 기고했다.
하나하나 탁월한 이론가였으나 따로 놀았다. 이들을 한데 모아 보수 지성집단으로 만든 게 버클리였다. 중요한 건 하나의 목소리보다 하나의 지적 공간이었다. 극우와는 선을 그었다. 그는 1962년 극우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JBS)의 창립자 로버트 웰치의 극단주의적 음모론을 비난했다. 강경 우파의 이탈을 감수하고 원칙을 지킨 것이다. 감명받은 로널드 레이건이 "보수의 양심"으로 극찬하는 편지를 버클리에게 보냈다.
버클리의 활동은 지적 캠페인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보수의 가치를 공유하는 젊은이들을 모으고 연결해 거대한 정치운동의 동력을 만들어냈다. 그 출발선이 우파 청년운동의 헌법으로 불리는 섀런 선언(Sharon Statement)이다. 1960년 9월 11일 코네티컷 섀런의 버클리 집에 100명의 청년들이 모여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들(YAF)'이라는 단체를 만들면서 채택했다. 버클리의 생각을 담아 내셔널리뷰의 스탠턴 에반스(1934~2015)가 썼다. 전통적 보수주의, 자유주의, 반공주의를 두루 담은 이 선언문은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규정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보수운동의 기념비적 문서'로 평가했다.
보수주의를 기성세대가 아닌 청년의 운동으로 전개하려는 전략은 독창적이었다. 이는 버클리의 렘넌트(Remnant) 정신에서 나왔다. 어릴 적 집에 자주 놀러온 저술가 알버트 제이 녹(1870~1945)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세계관이다. 구약에서 렘넌트는 복음의 현장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남겨둔 자를 가리킨다. 렘넌트처럼 뜻을 함께하는 소수를 상대로 보수주의를 전파하겠다는 게 버클리의 구상이었다. 대학 강연 투어나 청년단체 활동이 그에 따른 것이다.
보수논객 조지 윌은 2005년 A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버클리가 아니었으면 내셔널리뷰는 없었고 그 뒤 골드워터도, 공화당의 보수화도, 레이건도, 냉전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일리 있다. 민주당원이던 레이건을 보수로 돌려놓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내셔널리뷰였다.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버클리의 머리에 의존했다.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는 유명한 말은 버클리식 논리에서 따왔다. 베를린 장벽 앞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벽을 허물란 말이요"라는 표현은 연설문 담당 피터 로빈슨이 썼는데, 그 역시 내셔널리뷰 기고자였다. 버클리는 "내 직업은 복화술사"라고도 했다. 입은 레이건이 움직이지만, 말은 자신이 한다는 뜻이다.
헨리 키신저와는 1954년 처음 만나 평생 친구가 됐다. 버클리는 키신저의 정치적 후원자, 키신저는 버클리의 깊숙한 취재원 역할을 했다. 넬슨 록펠러 캠프에 있던 키신저를 1968년 닉슨에게 천거한 것도 버클리였다. 닉슨의 안보보좌관이 된 키신저는 버클리에게 늘 조언을 구했다. 버클리는 백악관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1969년 여행 중이던 버클리에게 키신저는 갑자기 전화해 "제트기를 보낼 테니 빨리 내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때 버클리를 수행한 직원이 훗날 레이건 정부의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였다.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한 1981년 무렵 윌리엄 버클리(오른쪽)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환대해주고 있다. [사진 내셔널 아카이브]
키신저와 평생 친구 … 닉슨에게 천거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뉴욕 요트클럽에서 버클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품성에 반했다"고 했다. 버클리가 본인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해달라고 미리 부탁해둔 이는 아들과 키신저뿐이었다.
버클리는 인종문제에선 늘 발목이 잡혔다. 1957년 흑인 참정권과 관련해 흑인의 열등한 문명 수준을 고려해 제한할 수 있다는 글을 썼다. 이 탓에 그는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2004년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후회막심하다고 털어놨다. 어쨌든 흑인운동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반감을 공화당 표로 결집시킨 데엔 그의 역할이 컸다.
금수저 버클리에게 하늘은 재능까지 양동이째 퍼부어준 듯했다. 그는 항해술에 능해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두 번, 태평양을 한 번 횡단했다. 1976년부터 CIA 요원을 주인공으로 스파이 소설을 11권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를 이기진 못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공화당의 '버클리 룰'은 트럼프 시대에 무력화됐다. 기원은 1964년 공화당 대선 경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골드워터와 록펠러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를 두고 에디터들이 팽팽히 갈리자 버클리가 결론을 냈다. "가장 오른쪽이면서도 해볼 만한 후보(the rightwardmost viable candidate)를 지지한다." 그냥 이길 사람보다 보수주의를 지켜내며 선거에서 싸울 사람을 밀자는 것이다. 내셔널리뷰는 골드워터를 지지했다.
이는 2016년 죽기 살기로 트럼프를 뽑자는 마이클 앤턴(현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의 '플라이트93 선거론'에 밀려났다. 9.11 때 테러리스트에 맞서 싸우다 죽은 유나이티드항공 93편 승객들처럼 트럼프를 지지해 좌파의 하이재킹을 막자는 말이 먹혔다. 보수의 품위는 사라지고 승패의 계산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는 생전에 트럼프에 부정적이었다. 내셔널리뷰도 2015년 트럼프를 향해 "버클리의 사업에 헌신해온 모든 이들에게 모욕적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지난 1월 복역 중이던 의사당 폭동범들을 사면했고, 여기에 브렌트 보젤 4세라는 청년이 포함됐다. 버클리의 종손이다. 보수 종가집에서도 세대차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