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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층 진입 막힌 '백인 은수저들'… 급진 좌파에 매력 느껴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승리의 공기는 산뜻했지만, 승리의 메시지는 진부했다. 한 세기쯤 지난 소비에트 계획경제와 페로니즘을 되새김질하는 듯했다. 지난 11월 4일 뉴욕시장 당선 직후, 조란 맘다니(34)의 연설이 그랬다.   23분짜리 연설의 핵심은 이 한 마디였다. "정부가 해결하지 못할 만큼 큰 문제도 없고, 정부가 보살피기에 너무 사소한 문제도 없다." 큰 정부에서 한참 더 나아간 전지전능한 정부 선언이다. 전체주의 문턱에까지 간 건 아닌가. 그는 사회주의자 유진 데브스, 인도 독립운동가 네루의 감성적 인용을 연설 곳곳에 인공감미료처럼 흩뿌렸다. 들쩍지근한 수사에 가려진 그의 진의를 알아차린 청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정부 권한에 대한 시각은 보수와 진보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미국에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로널드 레이건의 규제 완화와 감세가 대척점에 있다. 맘다니는 루스벨트보다 더 왼쪽으로 기운다. 1981년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말했다. "정부는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다." 비대한 정부에 대한 반감을 담았다. 이에 비해 맘다니의 뉴욕시청은 시민의 살림살이를 일일이 챙겨주겠다고 한다. 대놓고 사회주의를 하자는 뜻이다.   그러고도 어떻게 자본주의 심장부의 시장이 됐냐고 묻는다면 우문이다. 그런 말을 했기에 당선된 것이다. 이념보다 생활정치를 파고든 게 비결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거꾸로 본 것이다. 맘다니의 '생활부담 경감(affordability)'이란 것도 사회주의적 통제로 실현하자는 것이니, 극히 이념적이다.    시애틀선 '제2 맘다니' 윌슨 시장에 당선   문제는 유권자 반응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다. 지난 5월 케이토(CATO)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18~29세 연령대에서 사회주의에 호감을 느낀다는 비중이 무려 62%에 달했다. 공산주의에 호감을 보인 이들도 34%나 됐다. 미국 청년 3200만 명이 사회주의에, 1768만 명이 공산주의에 호감을 보이는 셈이다. 2021년 10월 갤럽 조사에선 사회주의를 긍정한다는 18~34세의 응답이 47%였다. 두 곳의 조사 대상이 다소 다르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청년층의 호감도는 4년 새 분명히 상승했다.   청년층이 사회주의에 끌리는 모습은 대도시에서 실감할 수 있다. 지난 10월 LA 한인타운 일대엔 마르크스 스쿨 수강생을 모집하는 전미혁명공산주의동맹(RCA)의 선전 포스터가 나붙었다. 강습 주제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레닌의 혁명전위론 등이었다. 지난 7월엔 시카고에서 '소셜리즘 2025'라는 행사가 열려 사회주의 이론 강연이 진행됐다.   좌파의 조직적인 정치세력화도 두드러진다. 도시 좌파 블록의 대표적인 조직이 민주사회주의연맹(DSA)이다. 맘다니를 비롯해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도 DSA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공화당과 정면으로 맞붙어 의석을 탈취하는 대신 푸른색 말뚝만 박아도 찍어주는 민주당 텃밭을 노린다. 뉴욕.시카고.LA.시애틀 등이 주무대다. 그중에서도 부패 추문 등으로 인기가 추락한 민주당 현역을 겨냥한다. 신선한 이미지와 개혁 프레임을 내걸고 승률을 확 끌어올린다. 이번에 뉴욕의 제물은 성추문 탓에 정치적으로 폐차 직전인 앤드루 쿠오모 전 주지사와 민심을 잃을 대로 잃은 에릭 애덤스 현 시장이었다. 이는 정당 하이재킹이나 다름없다. 외연 확장이 급한 민주당은 DSA에게 이끌려 외려 더 왼쪽으로 이동하는 양상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제2, 제3의 맘다니들이 일제히 등장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시애틀에선 무상 주택, 경찰 해체를 내건 케이티 윌슨(43)이 현역 민주당 시장을 누르고 당선됐다. 떨어지긴 했지만 미니애폴리스에서도 오마 파테(35)가 맘다니와 흡사한 공약을 내걸고 출마했다. 또 LA에선 레이 황(43)이 다음 선거에서 캐런 배스 시장에게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두 사회주의자들이며, 무상 복지 시리즈를 공약으로 삼는다.   소련이 붕괴한 지 34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서 나타난 이 역설을 어떻게 봐야 하나. 역사의 법칙성을 찾는 수리역사학자 피터 터친은 이를 '엘리트 과잉생산'의 귀결로 본다. 그에 따르면, 경제성장과 고등교육은 고학력 엘리트 지망자들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 그런데 권력.명예.소득을 나눠줄 상층부 자리는 제한된 탓에 계층 경쟁의 압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밀리거나 좌절한 집단이 갈 길은 정해져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즉, 성공한 엘리트들을 끌어내리거나, 자신을 밀어낸 시스템 자체를 뒤엎으려 급진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상류층 문턱에서 밀려난 은수저의 봉기다. 엘리트 과잉에 따른 사회불안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데, 지금 미국이 그 불안정 주기에 들어섰다고 한다.   뉴욕의 각종 출구조사에 따르면 가구소득 20만~30만 달러에 달하는 고소득층에선 맘다니가, 3만 달러 미만의 저소득층에선 쿠오모가 앞섰다. 연령별로는 30세 미만의 78%, 대졸자의 69%가 맘다니를 찍었다. 그의 핵심 지지층이 백인 고학력 전문직이라는 점은 터친의 설명과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진다. 맘다니는 자신의 승리를 노동자들의 승리로 포장했으나, 실제론 계층 상승에 좌절해 분노하는 고학력층의 승리였다.   사실 미국에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찾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1970년 5월 8일 뉴욕의 '안전모 폭동'을 돌이켜 보자. 세계무역센터 건설 근로자들이 반전 시위대 학생들을 덮쳤다. 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 소속 노조원들이었다. 2000여 명이 애국과 반공을 외치며 학생들을 마구 두들겨 팼다. 대학생 6명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당했다. 6일 뒤 노조 간부들은 백악관에 초대받았고, '최고사령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헬멧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뉴욕 건설노조위원장 피터 브레넌은 공화당 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노동계로선 참 민망한 과거다. 노조가 우익 깡패처럼 학생들을 패질 않나, 보수정권에 붙질 않나. 계급의식이고 뭐고 찾을 수가 없다.   사회학자 무사 알가르비의 분석도 일맥상통한다. 경제적으로 상향 이동의 사다리를 타지 못한 명문대 출신들의 불안과 좌절이 급진화로 옮겨붙는다는 것이다. 인종이나 젠더 이슈에서 흔히 드러내는 고학력 엘리트들의 선민의식 역시 그 부산물이라는 게 알가르비의 진단이다. 그는 이를 엘리트의 '대각성(Great Awakening)'이라 부르며 좌파 급진화의 원동력으로 지목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한국계 심리학자 롭 헨더슨도 비슷한 논리를 편다. 과거 부유층이 사치품으로 지위를 과시했다면 요즘 고학력 고소득층은 진보 이념을 신분 과시 수단으로 삼는다고 한다. 윤택하게 살면서도 좌파적 태도를 취하면 폼 나는 법이다. 도덕적 우월감을 통해 계층적 지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헨더슨은 '허세 신념(luxury belief)'이란 말을 만들었다. 진보 호소인, 개념 연예인, 깨시민의 언행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결론은 비슷하다. 청년층의 좌경화는 좌절한 엘리트층의 반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대도시가 조만간 평양처럼 변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멀리서 보면 맘다니의 당선으로 뉴욕이 온통 사회주의의 불길에 휩싸인 듯 비칠 수 있다. 실상은 좀 다르다. 최초의 무슬림, 인도계, 우간다 출생이라는 이색적 이미지에 의한 착시효과가 크다.    일부 고소득층 '진보'를 신분 과시용으로   그의 득표력을 따져보자. 2001년 이후 최고의 투표율을 보인 이번 선거에서 그는 50.39%를 얻었다. 이 정도가 압승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1977년 에드 코크가 50%를 얻어 마리오 쿠오모를 힘겹게 누른 이후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로 최저 수준이다. 크고 작은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60~70%쯤 쓸어담는 곳이 뉴욕이다. 인기 없던 카멀라 해리스도 지난해 대선 때 68%를 득표했다. 대선에선 1972년 조지 맥거번 이후 최저였다. 전임 조 바이든의 뉴욕 득표율은 76%였다. 곧 시장에서 물러날 에릭 애덤스는 4년 전 67%로, 급진적 공약을 앞세우던 빌 드블라지오는 2013년 73.15%의 득표율로 각각 당선됐다. 뉴욕과 함께 치른 버지니아와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들은 56~57%를 득표했다. 맘다니의 득표율은, 뉴요커들이 그를 얼마나 지지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망설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의식하듯 당선 뒤 맘다니의 행보는 신중해졌다. 범죄에 강경 대응해온 제시카 티시 뉴욕시 경찰국장을 유임시키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와는 백악관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과거의 거친 말들도 주워 담고 있다. 사유재산 폐지, 경찰 축소 등은 없었던 말이 됐다.   두 달 전 보수논객 조지 윌이 맘다니의 당선을 바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정된 지역에서 20년마다 사회주의를 실험해봐야 한다. 그래야 그 허상을 깨버릴 수 있다." 사회주의의 해악을 말로는 설득하기 어려우니 직접 겪어보라는 독설이다. 일리 있지만 무책임하다. 그 고통은 맨해튼의 금융 엘리트가 아니라 브롱크스의 택배 기사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미국 운동가 뉴욕시장 당선 사회주의자 유진 사회주의적 통제

2025.12.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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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지적 우위·품위 추구, 청년 전면에 내세운 운동가

'역사를 거슬러 서서 외쳐라, 멈추라고(Stand athwart history, yelling Stop)'. 1955년 뉴욕의 한 사무실에서 탄생한 시사지 내셔널리뷰 창간사설이 표방한 보수의 정신이다. 발행인 윌리엄 F 버클리(1925~2008)가 썼다. 뉴딜 정책 이후 좌편향으로 건국정신에서 멀어져 가는 미국사회에 대한 경고였다. 내셔널리뷰를 보수의 심장으로 자리매김한 키워드이기도 했다.   오는 25일은 미국 보수주의의 설계자 버클리의 탄생 100주년, 그에 앞서 19일은 내셔널리뷰 창간 70주년이다. 보수 정치사에서 그를 뺀다면 재즈사에서 루이 암스트롱을, 축구사에서 펠레를 생략하는 것과 같은 결례다.   그는 부유한 석유사업가 집안에서 열 명의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공교육을 불신한 부친은 뛰어난 가정교사들을 고용해 집에서 사교육을 시켰다. 버클리는 시사토론.문학.예술.승마 등 다방면에서 귀족적 교양을 갖추게 됐다. 골수 보수주의자인 부친은 경제엔 자유방임주의, 외교엔 고립주의를 지론으로 삼았다. 버클리는 이를 유전자 복제하듯 물려받았다.   그는 2차 대전 말기인 1944년 징집돼 장교 후보생 훈련소를 나왔다. 미국 본토의 행정업무에 배치됐다 종전 후 예일대에 입학한다. 캠퍼스에 발을 디디자마자 토론 클럽을 석권한다. 차분한 바리톤, 여유 있는 미소,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농담, 논박보다 설득을 중시하는 논리, 그리고 사전을 찾으며 들어야 할 정도의 고급 어휘력까지.   글 솜씨도 타고났다. 시퍼렇게 선 논리의 칼날을 풍자와 냉소로 가린 채 바람같이 내리치는 검법과도 같은 필력. 버클리식 문체는 내셔널리뷰의 스타일로 굳어졌다. 그가 평생 쓴 책이 56권, 칼럼은 5600건에 달한다.   졸업 직후 1951년 10월 첫 저서 『예일의 신과 인간』을 냈다. 자유시장과 기독교 윤리를 가르쳐야 할 예일대가 사회주의와 무신론에 지배되고 있다는 고발이었다. 타임, 뉴욕타임스 등이 일제히 서평을 썼다. 겨우 스물다섯 청년의 주장을 반박하는 하버드대 교수의 칼럼도 나왔다. 책은 두 달 만에 2만3000부나 팔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책 56권 저술, 기고한 칼럼만 5600건   그는 유명해지면 곤란한 신분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 직후 그는 군 징집 대신 중앙정보국(CIA)의 공작원 훈련을 택했다. 책 출간 당시엔 멕시코에서 좌파 포섭 공작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부른 파장에 고무된 버클리는 언론계에 투신한다며 CIA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미국에 돌아온 그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에 동조하는 글을 썼다. 매카시를 처음 만난 건 1948년인데, 그때부터 그의 반공주의 노선에 공감했다고 한다. 1954년엔 매제 브렌트 보젤과 함께 『매카시와 그 적들』을 썼다. 매카시즘에 대해 "방법이 거칠었지만 옳은 방향"이라고 옹호했다. 이후 그는 매카시주의자로 공격당하곤 했다.   본격적으로 뜻을 세운 건 1955년 부친의 투자를 받아 내셔널리뷰를 창간하면서다. 무식한 보수진영에 품위 있는 지식 잡지가 나온 것 자체가 획기적이었다. 정치학자 허버트 맥클로스키의 1952년 연구에 따르면 당시 대졸자 가운데 보수는 12%인 반면, 진보는 47%에 달했다. 지능 수준을 비교한 결과 보수층에선 66%가 낮고 9%가 높은 데 비해, 진보층에선 9%만 낮고 54%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버클리는 "왜 우리 쪽엔 멍청이투성이냐"며 탄식했다.   그는 정치적 승리를 위해선 지적 우위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를 구현할 수단이 내셔널리뷰였다. 1967년 타임은 그를 표지 인물로 다루며 "보수주의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고 평했다.   내셔널리뷰가 인정받은 건 인재 풀 덕분이다. 창간 초기 버클리가 영입한 제작진은 화려하다. 트로츠키주의에서 전향해 현실주의 외교전략을 주장한 제임스 버넘, 자유방임주의와 전통주의를 결합한 프랭크 메이어, 정통 보수주의의 기둥 러셀 커크, 버클리의 매제이자 매카시의 연설문 담당 브렌트 보젤… 여기에 공산당을 탈당하고 국무부 고위관리 앨저 히스를 소련 간첩으로 고발한 휘태커 체임버스도 기고했다.   하나하나 탁월한 이론가였으나 따로 놀았다. 이들을 한데 모아 보수 지성집단으로 만든 게 버클리였다. 중요한 건 하나의 목소리보다 하나의 지적 공간이었다. 극우와는 선을 그었다. 그는 1962년 극우단체 존 버치 소사이어티(JBS)의 창립자 로버트 웰치의 극단주의적 음모론을 비난했다. 강경 우파의 이탈을 감수하고 원칙을 지킨 것이다. 감명받은 로널드 레이건이 "보수의 양심"으로 극찬하는 편지를 버클리에게 보냈다.   버클리의 활동은 지적 캠페인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보수의 가치를 공유하는 젊은이들을 모으고 연결해 거대한 정치운동의 동력을 만들어냈다. 그 출발선이 우파 청년운동의 헌법으로 불리는 섀런 선언(Sharon Statement)이다. 1960년 9월 11일 코네티컷 섀런의 버클리 집에 100명의 청년들이 모여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들(YAF)'이라는 단체를 만들면서 채택했다. 버클리의 생각을 담아 내셔널리뷰의 스탠턴 에반스(1934~2015)가 썼다. 전통적 보수주의, 자유주의, 반공주의를 두루 담은 이 선언문은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규정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를 '보수운동의 기념비적 문서'로 평가했다.   보수주의를 기성세대가 아닌 청년의 운동으로 전개하려는 전략은 독창적이었다. 이는 버클리의 렘넌트(Remnant) 정신에서 나왔다. 어릴 적 집에 자주 놀러온 저술가 알버트 제이 녹(1870~1945)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세계관이다. 구약에서 렘넌트는 복음의 현장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이 남겨둔 자를 가리킨다. 렘넌트처럼 뜻을 함께하는 소수를 상대로 보수주의를 전파하겠다는 게 버클리의 구상이었다. 대학 강연 투어나 청년단체 활동이 그에 따른 것이다.   보수논객 조지 윌은 2005년 A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버클리가 아니었으면 내셔널리뷰는 없었고 그 뒤 골드워터도, 공화당의 보수화도, 레이건도, 냉전의 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일리 있다. 민주당원이던 레이건을 보수로 돌려놓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내셔널리뷰였다.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버클리의 머리에 의존했다.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문제 그 자체"라는 유명한 말은 버클리식 논리에서 따왔다. 베를린 장벽 앞에서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벽을 허물란 말이요"라는 표현은 연설문 담당 피터 로빈슨이 썼는데, 그 역시 내셔널리뷰 기고자였다. 버클리는 "내 직업은 복화술사"라고도 했다. 입은 레이건이 움직이지만, 말은 자신이 한다는 뜻이다.   헨리 키신저와는 1954년 처음 만나 평생 친구가 됐다. 버클리는 키신저의 정치적 후원자, 키신저는 버클리의 깊숙한 취재원 역할을 했다. 넬슨 록펠러 캠프에 있던 키신저를 1968년 닉슨에게 천거한 것도 버클리였다. 닉슨의 안보보좌관이 된 키신저는 버클리에게 늘 조언을 구했다. 버클리는 백악관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1969년 여행 중이던 버클리에게 키신저는 갑자기 전화해 "제트기를 보낼 테니 빨리 내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이때 버클리를 수행한 직원이 훗날 레이건 정부의 국무장관 알렉산더 헤이그였다.   키신저와 평생 친구 … 닉슨에게 천거   키신저는 회고록에서 뉴욕 요트클럽에서 버클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품성에 반했다"고 했다. 버클리가 본인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해달라고 미리 부탁해둔 이는 아들과 키신저뿐이었다.   버클리는 인종문제에선 늘 발목이 잡혔다. 1957년 흑인 참정권과 관련해 흑인의 열등한 문명 수준을 고려해 제한할 수 있다는 글을 썼다. 이 탓에 그는 백인 우월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2004년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후회막심하다고 털어놨다. 어쨌든 흑인운동에 대한 남부 백인들의 반감을 공화당 표로 결집시킨 데엔 그의 역할이 컸다.   금수저 버클리에게 하늘은 재능까지 양동이째 퍼부어준 듯했다. 그는 항해술에 능해 요트를 타고 대서양을 두 번, 태평양을 한 번 횡단했다. 1976년부터 CIA 요원을 주인공으로 스파이 소설을 11권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하지만 세월의 변화를 이기진 못했다. 그의 이름을 딴 공화당의 '버클리 룰'은 트럼프 시대에 무력화됐다. 기원은 1964년 공화당 대선 경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골드워터와 록펠러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를 두고 에디터들이 팽팽히 갈리자 버클리가 결론을 냈다. "가장 오른쪽이면서도 해볼 만한 후보(the rightwardmost viable candidate)를 지지한다." 그냥 이길 사람보다 보수주의를 지켜내며 선거에서 싸울 사람을 밀자는 것이다. 내셔널리뷰는 골드워터를 지지했다.   이는 2016년 죽기 살기로 트럼프를 뽑자는 마이클 앤턴(현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의 '플라이트93 선거론'에 밀려났다. 9.11 때 테러리스트에 맞서 싸우다 죽은 유나이티드항공 93편 승객들처럼 트럼프를 지지해 좌파의 하이재킹을 막자는 말이 먹혔다. 보수의 품위는 사라지고 승패의 계산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는 생전에 트럼프에 부정적이었다. 내셔널리뷰도 2015년 트럼프를 향해 "버클리의 사업에 헌신해온 모든 이들에게 모욕적 존재"라고 했다. 그런데 트럼프는 지난 1월 복역 중이던 의사당 폭동범들을 사면했고, 여기에 브렌트 보젤 4세라는 청년이 포함됐다. 버클리의 종손이다. 보수 종가집에서도 세대차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운동가 보수 버클리식 문체 설계자 버클리 내셔널리뷰 창간

2025.11.1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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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인권운동가 쿼터 나왔다…스테이시 박 밀번 동전

  한국계 장애인 인권운동가가 새겨진 미국 동전(사진)이 오늘부터 유통된다.   지난주 조폐국은 스테이시 박 밀번(한국명 박지혜)의 25센트(쿼터) 동전을 11일부터 유통한다고 밝혔다. 한국계가 미국 화폐의 주인공이 된 것은 그가 처음이다.   밀번 쿼터는 여성 선구자의 업적을 기념해 2022년부터 발행된 ‘미국 여성 쿼터’ 시리즈 중 19번째 디자인이다. 동전의 둥근 테두리를 따라서는 ‘DISABILITY JUSTICE(장애인의 정의)'라는 문구와 밀번의 이름인 ‘Stacey Park Milburn’이 쓰여 있다.   재무부 등은 참정권, 시민권, 노예제 폐지, 과학,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미국 사회의 발전에 공헌한 여성들을 기리기 위해 2022년부터 올해까지 총 20명의 여성을 쿼터 뒷면에 등장시키는 캠페인을 진행해왔다. 동전 앞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뒤에는 전동 휠체어에 앉아 연설하는 밀번의 모습이 새겨졌다.   밀번은 1987년 서울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주한미군, 어머니는 한국인이었다. 퇴행성 근육 질환을 앓았던 그는 블로그를 통해 장애인이 겪은 불편함과 부당함을 알렸고, 이 글이 반향을 일으키며 장애인 인권 운동가로 주목받았다.   밀번은 2014년에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지적장애인위원회 위원으로 지명돼 정책 자문 활동도 했다.   신장암으로 투병했던 밀번은 코로나19 때 사회적 약자들에게 긴급 의약품 등을 전달하다 건강이 악화돼, 33번째 생일(2020년 5월 19일) 세상을 떠났다. 최인성 기자 [email protected]운동가 장애 한인 인권운동가 장애 한인 여성 쿼터

2025.08.1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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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 운동가 이행우 선생 추도식

3일 뉴욕우리교회에서 지난달 16일 90세로 별세한 평화통일 운동가 고 이행우 선생을 추모하는 예배의식이 개최됐다. 이행우 선생을 기억하고 기리는 40여명이 모인 가운데 조원태 뉴욕우리교회 담임목사의 인도로 후러싱제일교회 김정호 담임목사의 설교, 양호 뉴욕평통 전임회장의 약력 소개, 김명숙·조동인의 추모사 등이 이어졌다.     [이행우를 사랑하는 사람들]평화통일 운동가 평화통일 운동가 이행우 선생 선생 추도식

2021.11.04.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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