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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지적 우위·품위 추구, 청년 전면에 내세운 운동가

Los Angeles

2025.12.07 17:00 2025.12.0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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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고학력 엘리트의 좌경화]
명예·소득 거머쥘 상층부 자리 제한
계층경쟁 압력 높아지며 사회 불안

미국 청년층 62% 사회주의에 호감
LA 한인타운 등 마르크스·레닌 강좌

도시 좌파 'DSA' 중심 정치 세력화
민주당 텃밭만 노려 제도권에 진입
좌파 이념을 내걸고 뉴욕시장에 당선된 조란 맘다니(왼쪽). 그는 선거운동 기간 중 내세웠던 급진적 공약들을 당선 직후 일부 철회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뉴욕 시장 당선인 조란 맘다니가 지난달 21일 워싱턴 D.C. 백악관 타원형 사무실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좌파 이념을 내걸고 뉴욕시장에 당선된 조란 맘다니(왼쪽). 그는 선거운동 기간 중 내세웠던 급진적 공약들을 당선 직후 일부 철회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뉴욕 시장 당선인 조란 맘다니가 지난달 21일 워싱턴 D.C. 백악관 타원형 사무실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밤은 젊고 그도 젊었다. 승리의 공기는 산뜻했지만, 승리의 메시지는 진부했다. 한 세기쯤 지난 소비에트 계획경제와 페로니즘을 되새김질하는 듯했다. 지난 11월 4일 뉴욕시장 당선 직후, 조란 맘다니(34)의 연설이 그랬다.
 
23분짜리 연설의 핵심은 이 한 마디였다. "정부가 해결하지 못할 만큼 큰 문제도 없고, 정부가 보살피기에 너무 사소한 문제도 없다." 큰 정부에서 한참 더 나아간 전지전능한 정부 선언이다. 전체주의 문턱에까지 간 건 아닌가. 그는 사회주의자 유진 데브스, 인도 독립운동가 네루의 감성적 인용을 연설 곳곳에 인공감미료처럼 흩뿌렸다. 들쩍지근한 수사에 가려진 그의 진의를 알아차린 청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정부 권한에 대한 시각은 보수와 진보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미국에선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로널드 레이건의 규제 완화와 감세가 대척점에 있다. 맘다니는 루스벨트보다 더 왼쪽으로 기운다. 1981년 레이건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말했다. "정부는 문제의 해법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다." 비대한 정부에 대한 반감을 담았다. 이에 비해 맘다니의 뉴욕시청은 시민의 살림살이를 일일이 챙겨주겠다고 한다. 대놓고 사회주의를 하자는 뜻이다.
 
그러고도 어떻게 자본주의 심장부의 시장이 됐냐고 묻는다면 우문이다. 그런 말을 했기에 당선된 것이다. 이념보다 생활정치를 파고든 게 비결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거꾸로 본 것이다. 맘다니의 '생활부담 경감(affordability)'이란 것도 사회주의적 통제로 실현하자는 것이니, 극히 이념적이다. 
 
지난 10월 초 LA 한인타운 일대에 일제히 나붙은 마르크스 스쿨의 선전 포스터. 김상진 기자

지난 10월 초 LA 한인타운 일대에 일제히 나붙은 마르크스 스쿨의 선전 포스터. 김상진 기자

시애틀선 '제2 맘다니' 윌슨 시장에 당선
 
문제는 유권자 반응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다. 지난 5월 케이토(CATO)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18~29세 연령대에서 사회주의에 호감을 느낀다는 비중이 무려 62%에 달했다. 공산주의에 호감을 보인 이들도 34%나 됐다. 미국 청년 3200만 명이 사회주의에, 1768만 명이 공산주의에 호감을 보이는 셈이다. 2021년 10월 갤럽 조사에선 사회주의를 긍정한다는 18~34세의 응답이 47%였다. 두 곳의 조사 대상이 다소 다르지만, 사회주의에 대한 청년층의 호감도는 4년 새 분명히 상승했다.
 
청년층이 사회주의에 끌리는 모습은 대도시에서 실감할 수 있다. 지난 10월 LA 한인타운 일대엔 마르크스 스쿨 수강생을 모집하는 전미혁명공산주의동맹(RCA)의 선전 포스터가 나붙었다. 강습 주제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레닌의 혁명전위론 등이었다. 지난 7월엔 시카고에서 '소셜리즘 2025'라는 행사가 열려 사회주의 이론 강연이 진행됐다.
 
좌파의 조직적인 정치세력화도 두드러진다. 도시 좌파 블록의 대표적인 조직이 민주사회주의연맹(DSA)이다. 맘다니를 비롯해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하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즈도 DSA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공화당과 정면으로 맞붙어 의석을 탈취하는 대신 푸른색 말뚝만 박아도 찍어주는 민주당 텃밭을 노린다. 뉴욕.시카고.LA.시애틀 등이 주무대다. 그중에서도 부패 추문 등으로 인기가 추락한 민주당 현역을 겨냥한다. 신선한 이미지와 개혁 프레임을 내걸고 승률을 확 끌어올린다. 이번에 뉴욕의 제물은 성추문 탓에 정치적으로 폐차 직전인 앤드루 쿠오모 전 주지사와 민심을 잃을 대로 잃은 에릭 애덤스 현 시장이었다. 이는 정당 하이재킹이나 다름없다. 외연 확장이 급한 민주당은 DSA에게 이끌려 외려 더 왼쪽으로 이동하는 양상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제2, 제3의 맘다니들이 일제히 등장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시애틀에선 무상 주택, 경찰 해체를 내건 케이티 윌슨(43)이 현역 민주당 시장을 누르고 당선됐다. 떨어지긴 했지만 미니애폴리스에서도 오마 파테(35)가 맘다니와 흡사한 공약을 내걸고 출마했다. 또 LA에선 레이 황(43)이 다음 선거에서 캐런 배스 시장에게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모두 사회주의자들이며, 무상 복지 시리즈를 공약으로 삼는다.
 
소련이 붕괴한 지 34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서 나타난 이 역설을 어떻게 봐야 하나. 역사의 법칙성을 찾는 수리역사학자 피터 터친은 이를 '엘리트 과잉생산'의 귀결로 본다. 그에 따르면, 경제성장과 고등교육은 고학력 엘리트 지망자들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킨다. 그런데 권력.명예.소득을 나눠줄 상층부 자리는 제한된 탓에 계층 경쟁의 압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밀리거나 좌절한 집단이 갈 길은 정해져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즉, 성공한 엘리트들을 끌어내리거나, 자신을 밀어낸 시스템 자체를 뒤엎으려 급진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상류층 문턱에서 밀려난 은수저의 봉기다. 엘리트 과잉에 따른 사회불안은 역사적으로 반복되는데, 지금 미국이 그 불안정 주기에 들어섰다고 한다.
 
뉴욕의 각종 출구조사에 따르면 가구소득 20만~30만 달러에 달하는 고소득층에선 맘다니가, 3만 달러 미만의 저소득층에선 쿠오모가 앞섰다. 연령별로는 30세 미만의 78%, 대졸자의 69%가 맘다니를 찍었다. 그의 핵심 지지층이 백인 고학력 전문직이라는 점은 터친의 설명과 놀라울 정도로 맞아떨어진다. 맘다니는 자신의 승리를 노동자들의 승리로 포장했으나, 실제론 계층 상승에 좌절해 분노하는 고학력층의 승리였다.
 
사실 미국에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찾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1970년 5월 8일 뉴욕의 '안전모 폭동'을 돌이켜 보자. 세계무역센터 건설 근로자들이 반전 시위대 학생들을 덮쳤다. 노동총연맹-산업별조합회의(AFL-CIO) 소속 노조원들이었다. 2000여 명이 애국과 반공을 외치며 학생들을 마구 두들겨 팼다. 대학생 6명이 의식을 잃을 정도로 구타당했다. 6일 뒤 노조 간부들은 백악관에 초대받았고, '최고사령관'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헬멧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선물했다. 뉴욕 건설노조위원장 피터 브레넌은 공화당 정부 노동장관으로 입각했다. 노동계로선 참 민망한 과거다. 노조가 우익 깡패처럼 학생들을 패질 않나, 보수정권에 붙질 않나. 계급의식이고 뭐고 찾을 수가 없다.
 
사회학자 무사 알가르비의 분석도 일맥상통한다. 경제적으로 상향 이동의 사다리를 타지 못한 명문대 출신들의 불안과 좌절이 급진화로 옮겨붙는다는 것이다. 인종이나 젠더 이슈에서 흔히 드러내는 고학력 엘리트들의 선민의식 역시 그 부산물이라는 게 알가르비의 진단이다. 그는 이를 엘리트의 '대각성(Great Awakening)'이라 부르며 좌파 급진화의 원동력으로 지목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한국계 심리학자 롭 헨더슨도 비슷한 논리를 편다. 과거 부유층이 사치품으로 지위를 과시했다면 요즘 고학력 고소득층은 진보 이념을 신분 과시 수단으로 삼는다고 한다. 윤택하게 살면서도 좌파적 태도를 취하면 폼 나는 법이다. 도덕적 우월감을 통해 계층적 지위를 과시한다는 점에서 헨더슨은 '허세 신념(luxury belief)'이란 말을 만들었다. 진보 호소인, 개념 연예인, 깨시민의 언행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결론은 비슷하다. 청년층의 좌경화는 좌절한 엘리트층의 반발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 대도시가 조만간 평양처럼 변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멀리서 보면 맘다니의 당선으로 뉴욕이 온통 사회주의의 불길에 휩싸인 듯 비칠 수 있다. 실상은 좀 다르다. 최초의 무슬림, 인도계, 우간다 출생이라는 이색적 이미지에 의한 착시효과가 크다.
  
1970년 뉴욕서 벌어진 '안전모 폭동'. 건설 근로자들이 반전 시위대를 무차별 폭행해 대학생 다수가 부상을 당했다. [뉴욕 시립 기록보관소]

1970년 뉴욕서 벌어진 '안전모 폭동'. 건설 근로자들이 반전 시위대를 무차별 폭행해 대학생 다수가 부상을 당했다. [뉴욕 시립 기록보관소]

일부 고소득층 '진보'를 신분 과시용으로
 
그의 득표력을 따져보자. 2001년 이후 최고의 투표율을 보인 이번 선거에서 그는 50.39%를 얻었다. 이 정도가 압승일까. 천만에 말씀이다. 1977년 에드 코크가 50%를 얻어 마리오 쿠오모를 힘겹게 누른 이후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로 최저 수준이다. 크고 작은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들이 60~70%쯤 쓸어담는 곳이 뉴욕이다. 인기 없던 카멀라 해리스도 지난해 대선 때 68%를 득표했다. 대선에선 1972년 조지 맥거번 이후 최저였다. 전임 조 바이든의 뉴욕 득표율은 76%였다. 곧 시장에서 물러날 에릭 애덤스는 4년 전 67%로, 급진적 공약을 앞세우던 빌 드블라지오는 2013년 73.15%의 득표율로 각각 당선됐다. 뉴욕과 함께 치른 버지니아와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들은 56~57%를 득표했다. 맘다니의 득표율은, 뉴요커들이 그를 얼마나 지지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망설였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의식하듯 당선 뒤 맘다니의 행보는 신중해졌다. 범죄에 강경 대응해온 제시카 티시 뉴욕시 경찰국장을 유임시키기로 했다. 도널드 트럼프와는 백악관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과거의 거친 말들도 주워 담고 있다. 사유재산 폐지, 경찰 축소 등은 없었던 말이 됐다.
 
두 달 전 보수논객 조지 윌이 맘다니의 당선을 바란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정된 지역에서 20년마다 사회주의를 실험해봐야 한다. 그래야 그 허상을 깨버릴 수 있다." 사회주의의 해악을 말로는 설득하기 어려우니 직접 겪어보라는 독설이다. 일리 있지만 무책임하다. 그 고통은 맨해튼의 금융 엘리트가 아니라 브롱크스의 택배 기사들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남윤호 미주중앙일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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