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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북극 실크로드, 120년의 꿈

Los Angeles

2025.11.20 17:46 2025.11.2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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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원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교수

김용원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교수

몽골계 인류는 약 1만5000~2만 년 전 ‘베링지아(Beringia, 베링육교)’를 건너 아시아에서 아메리카로 이동했다. 당시 베링해는 얼어 있거나 해수면이 낮아 육지로 이어져 있었고, 이 때문에 인류의 대이동이 가능했다. 북미 원주민의 몽골반점은 그 흔적을 오늘날까지 남기고 있다. 얼음 위를 걸어간 인류의 첫 발자취는 2만 년이 지난 지금, ‘철의 터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소환되고 있다.
 
20세기 초 미국의 철도 재벌들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알래스카를 잇는 ‘시베리아-알래스카 철도 계획’을 제안했다. 베링해협 아래에 터널을 뚫어 대륙을 연결하자는 발상이었다. 이 구상은 훗날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설계한 엔지니어 요제프 슈트라우스(Joseph Strauss)의 초기 교량안에서 비롯됐다.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철도가 북극을 관통해 세계를 좁힌다”는 상상은 인류의 기술 낙관주의를 보여줬다.
 
1960년대 냉전의 긴장 속에서도 베링해협은 ‘평화의 상징’으로 다시 등장했다. 로이터통신이 공개한 소련 지도에는 ‘케네디-흐루쇼프 세계 평화의 다리’라는 표기가 있었고, 지도 한켠에는 “즉시 건설될 수 있고, 또 건설되어야 한다”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현실의 철도가 아닌, 냉전 시대의 ‘데탕트(긴장완화)’를 상징하는 상상 속의 다리였다.
 
21세기에 들어 러시아는 ‘TKM-월드 링크(TKM-World Link)’라는 이름으로 이 구상을 부활시켰다. 6000km 길이의 철도와 100km 해저터널, 총사업비 650억 달러에 달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푸틴 총리는 극동 개발 전략의 일환으로 이를 승인했고, 2011년 야쿠츠크 회의에서 고위 관리들은 재차 지지를 표명했다. 중국 역시 자국 북동부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베링해협을 통과, 알래스카로 잇는 200km 해저터널을 검토했지만 두 계획 모두 진전되지 않았다. ‘극지의 실크로드’는 여전히 지도 위의 선으로만 남았다.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계획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래스카 주지사 출신 월리 히켈(Wally Hickel)은 “대륙간 평화의 다리”를 주창하며 수십 년간 민간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구상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지만, 연방정부의 허가와 예산은 끝내 얻지 못했다. 냉전의 유산이 낭만의 설계도로만 남은 셈이다.
 
올해 초 러시아 직접투자기금(RDIF)의 키릴 드미트리예프 특사는 ‘푸틴·트럼프 터널’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제안을 발표했다. 모스크바와 익명의 해외 투자자들이 80억 달러를 투자해 8년 내 완공 가능한 112km 해저 철도 터널을 건설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는 일론 머스크의 보링컴퍼니(Boring Company)가 공사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흥미롭다”고 했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즉각 반발했다. ‘북극의 다리’는 다시 국제 정치의 무대 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 프로젝트의 실현 가능성을 낮게 본다. 추코트카와 알래스카를 잇는 6000km 구간은 지진대이자 영구동토층 지역으로, 건설이 불가능에 가깝다. 미·러 무역은 제재로 위축돼 안정적 물류 수요가 없으며, 자금 조달과 보험, 허가 절차 역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터널보다 두터운 것은 빙하가 아니라 ‘정치의 장벽’이다.
 
결국 지난 120년 동안 베링해협 횡단 구상이 좌초한 이유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시스템의 부재였다. 시장과 거버넌스, 물류 네트워크가 맞물리지 않으면 아무리 긴 터널도 현실의 대륙을 잇지 못한다. 드미트리예프의 ‘저비용 터널’이 언론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만, 경제와 정치가 얼어붙은 상태에서 그 꿈은 여전히 북극의 빙하 속에 묻혀 있다.
 
언젠가 인류가 다시 그 바다를 건넌다면, 그것은 철이 아니라 신뢰와 협력으로 놓은 다리가 될 것이다.

김용원 / 알래스카주립대 페어뱅크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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