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스키드로에서 자신을 호세라고 밝힌 노숙자가 비닐 커버를 뒤집어쓴 채 거센 빗줄기를 피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이날 오전 자바시장 인근 골목에선 한 여성 노숙자가 폭우에 대비해 노상의 화덕에서 몇 끼분의 음식을 미리 조리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샌피드로 스트리트와 14가. 자바시장 인근 공장 지대 주변으로 노숙자 텐트들이 줄지어 있다.
20일 오전 11시, LA의 두 번째 겨울 폭우가 닥치기 직전이다. 국립기상대(NWS)는 21일까지 이 지역에 홍수주의보를 발령했다. 잿빛 하늘은 곧 폭우가 쏟아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노숙자들이 텐트 위에 비닐봉투를 덧대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노끈으로 감아두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폭우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지만, 이런 임시방편은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면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LA 지역에서 노숙자 급식 사역을 하고 있는 아버지밥상의 무디 고 목사는 “비가 오면 텐트로 물이 스며들어 옷과 이불이 모두 젖는다”며 “젖은 옷과 이불 탓에 체온이 떨어지면 병에 취약한 노숙자들에게는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이날 자바시장 상인들도 마네킹마다 덮개를 씌우고 천막을 치는 등 폭우 대비에 나섰다. 생명이 없는 마네킹도 비를 맞지 않도록 덮어두는데, 우산도 우비도 없는 노숙자들은 고작 몇 장의 비닐봉투로 몸을 가리는 것이 전부다.
한 여성 노숙자가 텐트 옆의 화덕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있었다. 그는 “비가 오면 불을 켤 수가 없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며 “폭우가 쏟아지기 전에 하루 종일 버틸 만큼 음식을 미리 만들어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차갑게 식어버린 음식을 먹는 것보다 더 슬픈 건, 빗줄기에 함께 젖어야 하는 몸과 마음이다.
텐트조차 없는 노숙자들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폐지나 종이박스를 쌓아 만든 좁은 공간이 전부다. 비가 오면 금방 젖어 무너질 게 뻔하지만, 그 위에 얇은 비닐을 덮는 것이 유일한 대비책이다.
별것 아닌 처마도 이들에겐 폭우 속 생존을 위한 피난처다.
한 상점 앞에서 노숙자가 처마 밑에 자리를 잡으려 하자 경비원이 나타나 “저리 가라”며 다른 곳으로 쫓아내는 모습도 보였다.
빗줄기가 땅을 적시기 시작하자 체념한 듯한 이도 있다. 낡은 담요를 두르고 그 위에 비닐포대를 덮은 채 벽에 기대 앉아 있는 노숙자도 있었다. 한인타운 후버와 윌셔 불러바드 인근에는 LA시의 노숙자 셸터가 있다. 주변에는 셸터에 들어가지 못한 노숙자들이 다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노숙자인 마이키는 곧 폭우가 쏟아질 것을 알지만 마땅한 대책이 없다. 소지품이라고는 얇은 겉옷과 라이터 하나뿐이다. 그는 “셸터에 사람이 다 차서 들어갈 수 없다”며 “우산과 텐트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겨울 폭우 속에서 노숙자들에게는 특별한 선물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LA 다운타운 스키드로에서 노숙자 사역을 하고 있는 변재성 장로(라이프웨이교회)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은 특히 노숙자들이 더 힘들어한다”며 “처마 밑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는 노숙자들을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노숙자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우비와 따뜻한 음식”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LA시에는 약 4만3000명의 노숙자가 있다. 폭우가 쏟아지면 봉사단체나 자선기관이 제공하는 음식조차 먹기 어려워진다.
무디 고 목사는 “비가 오는 날에는 음식을 받으러 오는 노숙자의 수가 절반가량 줄어든다”며 “비 때문에 거리로 나오지 못하는 노숙자가 많아 우리가 직접 찾아가 음식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