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마저 사라진 캄캄한 밤, 흐느껴 울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몸을 사린다. 눈발이 목화밭처럼 대지를 하얗게 덮으면 슬픔은 새가 되어 회색빛 하늘가를 맴돌다가 마지막 얼굴 내미는 마른 잎새에 방울로 반짝인다.
고통은 아픔을 삼키며 슬픔이 땅에 닿을 때까지 심장에 박힌 못을 뽑는다. 세월이 가면 상처에는 새 살이 돋고, 대지에 뿌리내리는 단단한 나무 될 거라고, 부대껴도 흔들리지 말고, 눈처럼 그냥 녹아내리라고 말한다.
목숨만 살아있으면 슬픔도 아픔도 지나가는 바람이다.
절망은 깊고 어두운 웅덩이에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가둔다. 빠져나올 수 없어 웅크리고 견디면 잘 익은 포도주처럼 달콤한 날이 올 거라 믿었었다.
아픔은 입술 깨물고 상처를 숨길 수 있었지만 흐르는 눈물은 감출 수 없다.
꿈은 꿈을 먹고 자란다. 아지랑이처럼 따습고 포근한 유년의 꿈을 꾸었다.
시인이 되고 싶었다. 전국 여고생 백일장에 ‘백목련’이 당선, 고김춘수 시인의 칭찬 듣고 양키시장에서 헐값에 구입한 바바리코트 입고 시인 흉내내며 동성로를 왔다 갔다 했다. 아무도 날 알지 못해도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월 대보름 삼만이 아재가 연실을 풀어 날리면 내 연은 곤두박질 쳤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실을 단단히 감아 또 날리면 된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 햇빛에 대하여 / 바람에 대하여 /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 (중략) 그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 견딜 수 없었던 / 폭풍우의 폭력에 대하여-정호승의 ‘낙과(落果)’ 중에서
미국으로 왔다. 꿈 같은 무지개는 잠시 떴다가 지축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국어선생님 격려(?)로 국문학을 전공한 탓에 영어 실력은 미국 어린이 수준도 안 됐다. 당시에는 한국말을 잊을 정도로 인터넷과 유투브가 발달되지 않았다.
일요일 한국교회에서 한국말로 떠들며 무인도에서 홀로 물구나무서기를 했다.
사업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미국사람보다 더 확실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뼈가 삭도록 노력했다. 열심히 공부했다. 혀가 플리기 시작했다.
‘살만하면 죽는다’는 맞는 말이다. 사업하고 애들 뒷바라지하고 아메리칸 드림이 가까워지자 흘러간 시간의 파편들이 꿈틀거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제일 두려운 것은 어머니 젖줄 같은 모국어를 잊어버리는 일이다.
시인의 꿈이 사라져도 어머니 젖꼭지 만지작거리던 유년의 기억은 자음과 모음으로 남아 어머니의 젖줄처럼 내 핏속으로 스며들었다.
20년이 넘도록 어떻게 매주 칼럼을 쓰느냐고 묻는다. 목숨 부지하기 위해 숨을 쉬듯, 한국인으로 남기 위해 나는 모국어를 껴안고 산다. 시인이 되지 못했어도 꿈의 흔적을 따라가는 일은 나의 약속을 지키는 당당한 내 길이다.
‘꿈은 꿈꾸는 자의 몫이다. 옷은 바겐세일로 사 입더라도 꿈은 절대로 헐값에 사서는 안 된다. 네 아름다운 꿈을 가로막은 어떤 것들과도 타협해선 안 된다.’ 내 자전 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 표지에 적힌 문구다.
물레방아는 물이 떨어지는 여린 힘으로 큰 바퀴를 굴려 곡식을 찧는다.
생의 소중함을 알면 고통이 위로가 되고 아픔이 슬픔의 눈물을 닦는다. (작가, Q7editions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