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구조주의 사상 사회에 맞는 교육 받고 성장 사고와 행동 지배당하면서 구조 속에 살 수밖에 없어
소쉬르는 어떤 사물의 성질이나 의미, 기능은 그 사물이 포함한 관계망 또는 시스템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따라 차후에 결정된다는 것으로, 사물 자체에 생득적이거나 본질적인 어떤 성질이나 의미가 내재하여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즉,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즉, 어떤 사물에 쓰이지 않는 새로운 기표를 붙여주고, 그것이 기의를 가지면서 그 사물에 이름이 생기는 것이다. 즉, 기표가 먼저 생기고 기의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은 그 사회의 구조 속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갓난아이가 태어나면서 이름을 갖고 태어나는 생명체가 아니라 태어난 후에 부모가 이름을 지워주고 그것을 불러줌으로써 자신의 이름이 생기는 것이다. 역시, 구조주의 속에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사람은 그 사회에 맞는 교육을 받고 성장하기 때문에 틀 속에 갇힐 수밖에 없고, 사고와 행동도 그 사회의 질서와 문화에 지배당하게 된다. 이것이 구조주의의 맹점이자 필연이다.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말을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타인의 언어라는 것이다. 자크 라캉은 상징계는 언어를 익히면서 진입하며, 언어의 지배를 받는 구조로 되어있다고 한다. 다분히 소쉬르 언어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가령, 누군가에게 확신을 두고 말을 술술 한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들은 문장이나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앵무새가 사람이 한 말의 모든 뜻을 이해하고, 지껄이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 선 것은 아테네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했기 때문이다. 죄명은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의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비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이 있는 말을 했다. 자신은 젊은이든 늙은이든 만나면, 영혼이 훌륭하게 되도록 마음 써야 하고, 그보다 먼저 신체나 재물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런 행동은 아폴로 신의 신탁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했다. 그 근거를 다이몬(Daimon)에서 찾았다. 다이몬이란 내면의 소리를 말한다. 이러한 내면의 소리는 소크라테스에게 귀담아듣지 않을 수 없는 경고로 들려왔다고 했다.
무지를 알고 있는 인간인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불의(不義)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째서 무조건 확실한지를 증명할 수 없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증명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았다. 어떤 이론적 확실성보다도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확실성으로 간주했다. 이것을 '마음의 확실성'이라고 한다. 훗날 칸트는 그의 '도덕법칙'에서 보편적인 도덕을 소크라테스의 '마음의 확실성'에서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파괴될 수 없는 마음의 바탕 속에 자리 잡는 정의로운 행동에 대한 절대의무이며,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위대한 발견이라고 니체는 주장했다.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면서도 이 의무에 충실하였고, 그 의무를 위해 자신의 운명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이라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고 보았다. 언어학자인 소쉬르의 구조주의가 사회와 문화를 지배하는 사상으로 될 줄, 소쉬르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아 중심주의 사상에서는 경험이란 내가 외부에 나가서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며, 표현이란 나 자신의 내부에 담겨있는 생각을 이런저런 매개체를 경유해서 표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길 원하겠지만, 구조주의에서는 자신이 아닌 사회의 질서와 구조 속에서 타인의 사상과 말을 그저 자신이 전달하는 것이라는 충격적인 관념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