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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언어를 어떻게 나눌까?

세계에는 수많은 언어가 있다. 그 언어들은 어떤 언어와는 가까워서 이해가 가능할 정도이며, 어떤 언어는 알아들을 수 있는 부분이 있기도 하다. 물론 대부분의 언어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언어를 분류할 때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서로 이해 가능한 정도도 한 기준이 된다. 역사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같은 계통의 언어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고, 공시적으로 본다면 같은 유형의 언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유형적 분류는 같은 역사적 계통을 염두에 두고 진행하는 연구는 아니다. 따라서 유형 연구에서 역사와 지리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언어가 어떤 유형을 나타내는지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형 연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어의 변화이다. A. W. Schlegrl(1818)에 따르면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로 나눌 수 있다.     고립어는 중국어가 대표적이다. 각 단어는 각각의 의미를 갖고 다른 단어와 분리된다. 고립어 중에는 성조가 발달한 경우가 있어서 주목된다. 교착어의 대표적인 언어는 한국어이다. 각 단어에 다양한 의미요소가 첨가된다. 각각의 요소는 한 가지 기능을 담당한다. 조사, 접미사, 어미가 연속적으로 첨가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부터조차도’ 같은 형태도 가능하며, ‘가시었겠다’와 같은 결합도 가능하다. ‘어간 + 존경 + 과거시제 + 추측 + 어미’의 첨가가 가능한 것이다.   굴절어의 대표는 라틴어나 영어를 들 수 있다. 굴절어는 하나의 요소가 둘 이상의 의미요소를 혼합하여 사용하거나 변형하여 사용한다. 영어의 is는 단수와 현재, 3인칭을 동시에 나타낸다. go와 went로 시제가 달라지는 예, ‘man - men, foot - feet’처럼 모음을 바꿔 복수로 나타내는 예 등이 있다. 세 가지 유형 분류 외에 후에 포합어의 분류가 추가된다. 대표적으로는 아메리카 인디언어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적 분류에는 몇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우선 모든 언어가 한 가지 유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립어도 첨가어의 요소가 있는 경우가 있으며, 첨가어에도 굴절어, 고립어의 요소가 있고, 굴절어에도 첨가어적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복수형 접미사인 ‘s’의 경우는 첨가어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포합어가 유형 분류에 후에 추가 되었듯이 언어에 따라 새로운 유형을 설정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될 수도 있다. 한국어를 예로 들자면 체언에 붙는 ‘조사’와 용언 어간에 붙는 어미를 같은 유형으로 취급하여 교착한다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는 단어의 자립성과도 관계되어 복잡성을 더한다.   유형 논의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분류는 어순일 것이다. 어순은 S(주어)+O(목적어)+V(서술어), S+V+O의 유형이 대표적이나 그렇지 않은 유형의 언어도 나타난다. 한국어처럼 격표지가 발달한 언어는 사실상 자유 어순으로 볼 여지도 있다. ‘한국어는 밥을 나는 먹었다.’와 같이 OSV의 형식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어순의 도치도 강조 등의 화용적 목적을 위해서 가능하다.   고립어는 고정 어순일 가능성이 높고, 반면에 형태소에 의해서 격을 표시하는 언어는 자유 어순일 가능성이 높다. 알타이어 중에서도 주격 표지, 목적격 표지가 발달한 한국어와 일본어가 자유 어순일 가능성이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몽골어 등은 주격 표지가 없으므로 어순 이동에 제약이 있을 수 있다. 물론 주어의 혼동이 없는 예라면 표지가 없어도 어순의 이동이 가능하다. ‘나 밥 먹었어’와 ‘밥 나 먹었어’에서 주어의 혼동은 없다. 고대 라틴어, 그리스어, 게르만어 등도 SOV 형태의 언어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순의 유형이 변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어순이 언어의 계통에 절대적인 기준일 수는 없다.   한편 언어의 분류에서 주변의 언어와 연관성이 매우 낮은 언어가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스페인 북부와 프랑스 남부에서 사용하는 바스크어다. 이는 고대어가 유일하게 남은 것일 수도 있다. 반대로 다른 지역의 언어가 이른 시기에 이동해 와서 오랜 세월 정착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국어와 일본어도 다른 알타이어와의 공통점이 적어서 계통의 섬처럼 취급하는 학자도 있다. 언어를 나누는 기준을 살펴보면서 한국어는 어떤 계통에 포함시켜야 할까 생각이 깊어진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아메리카 인디언어 유형적 분류 유형 분류

2024.12.2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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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언어의 역사를 왜 공부하는가?

언어는 늘 변한다. 그러면서도 늘 동시대 언중과 소통이 가능하다. 늘 변하면서도 늘 소통 가능한 언어를 연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는 개인 차원에서도 늘 변한다. 어린 시절의 내 언어와 현재의 내 언어는 전혀 다르며 앞으로의 언어도 달라질 것이다. 어릴 때 나의 말소리와 현재, 미래의 음성은 차이가 있다. 귀여운 목소리와 쉰 목소리가 같을 수 없다.     사용하는 어휘도 다르다. 어휘의 양과 질은 끊임없이 변한다. 어릴 때 내가 사용한 어휘의 총량과 현재, 미래의 어휘량은 다르다. 지금 쓰고 있는 어휘를 어릴 때는 쓰지 않았던 경우가 많으며, 지금 쓰고 있는 어휘를 앞으로 계속, 자주 사용할지는 알 수 없다. 자주 쓰는 표현, 자주 쓰는 문법도 달라지고, 유행하는 새로운 말 등 계속해서 개인의 언어는 달라진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언어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늘 변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모여산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라는 말은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를 보면 ‘사회(社會)’인데 여기서 사(社)는 토지의 신을 의미하며, 땅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소사이어티의 번역어로서 ‘사’를 택한 것은 ‘축제, 제사’를 위해 모여있는 인간의 모습을 ‘사회’의 모습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사는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고도의 정신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제사에는 감사, 경배, 용서 등의 다양한 감정과 행위가 동반되었다. 이 속에서 조화와 협조가 필요하고, 그때 언어의 의사소통 기능이 힘이 발휘한다.   따라서 언어는 사회 속에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이 된다. 함부로 바뀌어서도 안 되고, 나만 바뀌어서는 안 되는 모순적 관계다. 사실 이는 개인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만 빠르게 변해서는 안 되므로 사회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는 하나가 아니다. 내가 머물고 활동하는 사회와 다른 사회는 항상 소통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 서로 떨어진 사회일수록 변화의 속도도 다르고, 변화의 결과도 다르다. 지역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는 것은 그러한 이유다. 또한 공유한 집단에 따라서도 언어는 달라진다.   계층이나 계급에 따라 언어가 달라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회도 시간에 따라 언어가 변한다. 그 속도와 형태는 지역과 계층 또는 둘의 합 속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 변화의 모습을 살피고, 변화하기 전의 상태를 거슬러 오르는 것을 통시적 연구, 역사언어학이라고 할 수 있다. 통시는 기본적으로 둘 이상의 시기를 전제로 한다. 조선시대의 언어가 현대에는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연구하면 통시적 연구이다. 신라시대의 언어와 고려시대의 언어와 조선시대, 현재의 언어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연구하면 통시적 연구인 것이다. 종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엄밀히 말해서는 정확한 한 시기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 시기가 있다고 가정하고 연구하는 것을 공시적 연구라고 한다. 16세기, 17세기 등등은 각각 공시적이고, 현대어 역시 공시적이다. 수많은 공시가 모여서 통시가 된다. 달리 말해 수많은 공시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이 통시적 연구이다. 역사언어학은 수많은 공시의 묶음을 다루는 학문이다. 따라서 꼭 여러 언어를 비교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언어학이 비교언어학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언어를 통시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언어의 분기점을 만나게 된다. 그 꼭짓점을 찾다 보면 서로 관계있는 언어를 만나게 되고, 그 언어 사이의 공통점을 찾고, 변화 양상을 찾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역사언어학은 비교언어학이 된다. 비교언어학은 그 시작점이 역사언어학일 수밖에 없다. ‘비교’는 같은 계통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며, 같은 계통 언어의 공통점과 차이점, 변화과정을 논하는 연구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변한다. 언어는 변화 속에서 소통하며, 소통 속에서 변화한다. 역사언어학은 공통점을 찾는 과정이며, 우리가 서로 관련 있음을 찾는 과정이다. 언어의 형태, 음운, 의미의 변화를 살피면서 인간의 기원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변화의 자유로움을 찾기도 한다. 언어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역사 계통 언어 언어 사이 그때 언어

2024.10.13. 17:30

[삶의 뜨락에서] 폭력의 언어

18년 전쯤 된 것 같다. 댈러스를 방문했을 때 The Fifth Floor Museum(5층 박물관)을 찾은 적이 있었다. 나는 처음 이 생소한 이름의 박물관에 의아해했다. 1963년 11월 John F Kennedy 대통령 저격 현장을 보여주는 박물관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부인 재클린 여사와 함께 오픈카를 타고 Dealey Plaza를 지나고 있었다. 이때 인근 빌딩 5층에서 총탄이 날아왔다. 리 하비 오즈월드가 교과서를 저장하고 있는 5층 건물 창을 통해 쏜 총알이었다. 케네디는 머리에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박물관에는 당시 비극을 말해주는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암살 동기, 배후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었다.     언젠지는 기억이 나지 않은데 워싱턴DC 방문 중 Ford’s Theatre(포드 극장)을 찾았다. 1865년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이 극장에서 Our American Cousin이라는 연극을 보고 나오다 발코니에서 John Wikes가 쏜 총을 맞았다. 저격범은 남북전쟁 후 노예해방을 단행한 링컨을 저주한 사람이었다.     1981년 로널드레이건 대통령은 워싱턴 힐튼 호텔에서 연설을 하고 나오다 힌클리 주니어가 쏜 총을 맞았다. 대통령은 심각한 부상을 당해 조지 워싱턴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열흘간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미국 역사를 보면 이 밖에도 로버트 케네디 상원의원, 시어도르루스벨트 대통령 등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암살됐거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범행동기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주’가 극단적인 폭력을 일으키게 했을 것이다.   폭력은 그들이 외친 마지막 언어, 메시지였다. 지난 토요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펜실베이니아 유세 중 총을 맞았으나 하늘의 도움인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저격범은 20살 청년, 동기는 아직 모호하고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총알은 트럼프의 오른쪽 귀를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연설 중 밀입국자 숫자 차트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트럼프가 피를 흘리면서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하는 모습을 잡은 이미지는 길이 역사에 남을 것이다. 성조기기 펄럭이는 파란 하늘, 어떠한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투쟁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트럼프는 별난 사람이다. 그는 수많은 물의(Controversy)를 일으키며 살아왔다. 이 나라에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갈라져 있고 이런 극단적인 사건에도 큰 인식의 변화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석 달 반 동안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다. 바이든 대통령, 트럼프 모두 지금은 극단적인 선거 운동을 피하겠다고 말하고 있으나 막판으로 갈수록 온도는 상승할 것이다.   11월 5일 밤을 상상해본다. 어차피 바이든, 트럼프 둘 중 한 사람은 패배할 것이다. 대통령 선거뿐 아니라 상하원이 어떻게 될지도 의문이다. 현직은 큰 실책이 없는 한 재선됐다. 바이든이 첫 번째 토론에서 처절할 정도로 초라한 모습을 보였고, 트럼프 암살시도라는 악재를 이기고 승리한다면 기적이다. 두 번의 탄핵, 검찰에 기소돼 피고인으로 재판을 받고 유죄 평결을 받은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이 또한 기적이다. 아직 이야기는 진행 중이다. 클라이맥스가 이어지고 스토리는 결론을 향해 달리고 있다. 과정이 너무 길어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있다. 언젠가 결론에 도달할 것이지만 스토리가 그때끝날지 의문이다. 언어의 폭력, 총탄의 메시지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기다려 봐야겠다.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폭력 언어 대통령 트럼프 케네디 대통령 로널드레이건 대통령

2024.07.16. 17:49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로 보는 세상

우리가 언어를 보는 관점은 학자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언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학설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언어와 사고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논의가 많습니다. 사고가 먼저인지, 언어가 먼저인지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논의만큼이나 풀리지 않는 논제입니다.     인간은 모두 개인입니다. 각각 따로 살고, 따로 보고, 따로 냄새 맡고, 따로 듣고, 따로 느낍니다. 당연히 우리는 주관의 세상을 삽니다. 우리는 나 아닌 사람의 세상을 모르고, 나 아닌 사람의 감각을 모릅니다. 우리는 마치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듯하나 우리는 다른 이의 경험을 직접 공유한 적이 없습니다. 서로 어떻게 보고 듣는지 알 수 없고, 어떻게 느끼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내가 본 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 자식 사이에도, 부부 사이에도, 쌍둥이 사이에도 똑같이 감각을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내 감각은 나만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주관의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객관의 세상을 꿈꿉니다. 왜냐하면 주관의 세상에서는 소통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모르는데 소통을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하나가 되려고 노력합니다. 공감이나 동감이나 동정은 다 하나가 되자는 표현입니다. 내 속 깊이에 있는 그 무엇이 그의 속 깊은 곳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희망합니다. 이심전심의 세계는 주관과 주관의 소통을 깊이 보여주는 경지입니다.   모두 서로 다른 주관으로 살아간다면 소통은 어렵습니다. 상대의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바로 언어입니다. 언어는 주관을 객관화하는 장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색을 볼지 모르지만 파란색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 사이에도 차이가 있겠으나 우리는 그 차이마저 지우고 하나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은 같은 곳, 같은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이 흰색이고, 하늘이 파란색이고, 불이 붉은색임을 압니다. 저는 언어는 우리 주관이 약속한 객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어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화자의 머릿속에 있는 주관적 개념을 언어라는 청각영상을 통해서 구체화, 객관화합니다. 그러면 그 객관화된 언어는 청자의 머릿속에 다시 개념으로 주관화합니다. 언어가 없다면 객관적 소통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서로 다른 언어에는 분명하고도 깊은 골짜기가 놓입니다. 서로 이해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언어가 다르면 머릿속 개념은 일치할 수 없습니다. 어느 언어에서나 바라보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한 세계라는 말은 그래서 너무나도 맞는 말입니다. 우리말의 푸른색과 영어의 푸른색은 다릅니다. 우리말의 ‘춥다’와 태국어의 춥다는 느낌이 다를 겁니다. 세상은 그대로 존재하는 듯이 언어로 본 세상은 시시각각 달라지기도 합니다. 언어로 본 세상은 곳곳마다 변화합니다. 언어는 우리 마음과 마음을 이어줍니다. 이심전심이 있다면 그것은 언어의 세상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언어를 떠나야 마음의 세상이 오는 것처럼 말하지만 언어의 세상이야말로 공통의 세상이고 소통의 세상입니다.     언어가 또 다른 언어를 만나는 순간은 늘 흥미롭습니다. 개인 간의 언어가 만나고, 사회 간의 언어가 만납니다. 서로 다른 언어를 만나 서로의 특별함에 놀라고 기뻐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모르는 세상이 펼쳐집니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보고 있는 겁니다. 언어가 사고이고, 사고가 언어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주관적 개념 주관과 주관 머릿속 개념

2024.07.07. 17:26

[문장으로 읽는 책] 산책의 언어

눈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날씨 중 가장 감각적인 날씨다. 만질 수 있고 뭉칠 수 있다. 밟을 수 있고 그 위에 누울 수 있다. 냄새를 맡고 먹어볼 수도 있다. 겨우 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자국눈은 금세 사라지지만, 깊게 쌓인 길눈은 단단하게 굳어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눈다리가 된다. 싸락싸락 내린 쌀알 같은 싸라기눈은 사박사박 쉽게 밟고 걸어갈 수 있지만, 발등이 빠질 정도로 내린 발등눈은 뽀드득 소리와 함께 발이 푹푹 빠진다. 고체였다가 액체가 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쌓이기도 한다.   우숙영 『산책의 언어』   아무 데나 펼쳐진 페이지부터 읽으면 된다. 하늘과 땅, 식물과 동물, 날씨와 계절, 시간 등 자연에 대한 짧은 글이 담백하다. 매 장 뒤엔 어휘 사전도 실었다. 윗글만 해도 ‘자국눈’ ‘길눈’ ‘발등눈’ 같은 처음 들어본 우리말이 아름답다.   저자는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나무와 꽃, 초록색과 붉은색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가난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자연에 대해 풍부한 언어를 갖게 된다는 건, 세상에 대해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책하다 말고 쭈그리고 앉아 꽃 사진을 찍다 ‘너도 나이 들었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친구의 말대로 이제야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계가, 나와 인간이 중심이 아닌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라면서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조각이기도 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발견한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세계의 확장이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산책 언어 동물 날씨 계절 시간 어휘 사전도

2024.01.31. 19:35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의 기원을 묻는다

언어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제일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100여 년 전에 파리언어학회에서 언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를 그만두기로 하였다는 인용입니다. 이 이야기를 인용하는 순간 언어의 기원에 관한 논의는 허황된 논의가 됩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고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이니 논의를 그만하자는 것이죠. 사실 학문은 허황된 것도 문제지만, 허황되다고 논의를 그만두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언어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또 다른 이야기로는 ‘멍멍설’, ‘피피설’, ‘영차영차설’, ‘흥얼흥얼설’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이름들입니다. 용어는 개념을 명확히 하고, 신뢰성을 보여주는데 용어나 명칭이 우스우니 도대체 신뢰가 안 갑니다. 저는 이 용어를 다시 살피고, 신뢰를 회복하는 게 언어 기원 논의의 출발점이라고 봅니다.   ‘멍멍설’은 ‘언어자연모방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뛰어난 두뇌와 소리를 낼 수 있는 훌륭한 발성기관이 있습니다. 이는 사고와 음성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발성 기관은 자연 소리를 모방하는 데도 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인간은 새를 유혹할 정도로 새 소리를 흉내 내기도 합니다. 자연의 소리를 모방하면서 인간의 발성 기관은 정교화되고 분절음에 의한 음운의 구별이 가능해졌음을 충분히 추론 가능합니다. 많은 언어에서 의성어가 발달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물소리, 바람소리, 천둥소리, 빗소리, 새 소리와 온갖 동물의 울음소리는 인간에게 수많은 자극이 되었을 겁니다. 자연소리 모방설은 추론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논의입니다.   ‘피피설’은 인간의 감정에서 시작되었다는 논의입니다. 따라서 ‘언어감정기원설’으로 명명이 가능합니다. 사실 저는 이 논의야말로 현대사회에도 현대언어학에도 의미 있는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 피피설의 ‘피’는 경멸의 느낌이라는데 저는 용어를 정할 때 예를 잘못 썼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안 좋은 감정을 명명으로 삼은 겁니다. 당연히 말 그대로 감탄을 주된 예로 삼았어야 합니다. 기분 좋았을 때 내는 소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 오!’와 같은 표현도 좋은 감정이 표현이니 굳이 이런 방식으로 명명한다면 ‘와! 설’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 오, 우, 으, 이’와 같은 모음이 전부 감탄사로 쓰인다는 점입니다. 특히 밝은 모음과 어두운 모음의 느낌까지 나타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인간의 감정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감탄사에서 모음이 분화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영차영차설’은 어떤가요? 같이 일하려고 반복적으로 내던 소리라는 설명은 ‘언어노동기원설’이라고 명명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입니다. 소통의 이유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으나 개인이 아닌 집단생활에서 언어는 함께 힘을 내는 소통의 도구가 됩니다. 실제로 언어는 협력의 힘으로 작용하기도 하고, 스스로 힘을 낼 때도 사용됩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응원의 소리와 함께하는 구호, 자신을 향한 다짐은 모두 힘을 줍니다. 언어노동기원설은 언어의 힘을 보여줍니다.   ‘흥얼흥얼설’은 어떤가요? 즐거움에서 언어가 시작하였다면 ‘언어유희기원설’로 명명할 수 있을 겁니다. 언어의 기능 중에서 표현적 기능, 시적 기능이 여기에 속합니다. ‘시(詩)’의 시작은 노래입니다. 노래의 가사는 그대로 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즐거움과 기쁨, 슬픔과 아픔을 노래하던 것이 언어의 기원이 될 수 있습니다. 청산별곡의 ‘얄리 얄리얄라셩’ 같은 노래의 후렴구나 무가(巫歌)의 소리도 여기에 속합니다. 소리를 내며 감정을 표현하였던 것이 언어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겁니다.     인간 언어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한 논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어의 기원을 고민하고 논하다 보면 언어의 기능과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언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주기도 합니다. 언어는 자연과 함께합니다. 언어는 함께 일을 하며 힘을 내자고 합니다. 기쁜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 위로합니다. 언어는 그대로 인간의 삶입니다. 언어의 기원은 인간의 기원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기원 언어 기원 인간 언어 순간 언어

2023.10.29. 17:14

[잠망경] 언어의 희롱

“대체로 언어는 진실을 감추는 도구다”라는 명언을 남긴 코미디언, 조지 칼린(1937~2008)의 ‘완곡한 표현에 대하여(On Euphemisms)’를 유튜브로 다시 본다.   전쟁 중 병사들이 겪는 신경 증상을 1차 세계대전 때 ‘전쟁 신경증(shell shock)’이라 했고, 월남전 후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한다. 1920년대 초의 ‘신경증’이 반백 년 후 정신병으로 변한 것이다. 정부 지원 치료를 받기 위해서다.   장님을 ‘시각장애인(visually impaired)’으로, ‘지체장애인(physically handicapped)’을 ‘신체장애인(physically challenged)’으로 호칭을 바꾸는 사태에 대하여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소리친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컨디션을 바꾸어 부르면 컨디션이 바뀐다고 믿게 됩니다.”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말 바꿈 하면 망자(亡者)의 컨디션이 바뀐다는 심리상태다.    ‘말 바꾸기 운동’이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정신분열병을 조현병(調絃病)이라 부르면서 ‘분열’이라는 불쾌한 의미를 감추는 데 성공한다. 정신분열병을 의미하는 ‘schizophrenia’의 ‘schizo-’부분은 ‘찢어지다’라는 뜻으로 ‘가위(scissors)’와 말뿌리가 같다.   조현은 줄을 고르게 조절한다는 뜻. 줄을 조절한다는 의미가 마음 줄의 긴장도를 알맞게 하겠다는 뜻인지. 느슨하게. 아니라고?   편도선염, 대퇴골절, 대장암처럼 병변(病變)을 기술하는 진단명에서 멀리 가도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무엇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진술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엇인지를 조율하겠다는 치료 의도를 암시하는 진단을 내리는 것이 한국의 의학 수준인가.   반대로, 부드러운 표현이 강력한 표현으로 변하는 일이 정신과에서 터진다. 2023년 8, 9월에 걸쳐 월간 ‘Psychiatric Times’는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ADHD)’에 대한 톱 기사가 표지를 덮었다. 주의가 산만한 것을 정신병으로 간주하다니.   미국에서 마약이 주성분인 ADHD 약이 동이 났다는 소식! 지난 20년에 걸쳐 꾸준히 상승하는 ADHD 과잉진단의 결과로 2023년 현재 약의 수요가 미국 제약회사의 공급 능력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분석이다.   과잉진단의 가장 큰 요인은 제약회사의 약 선전에 부응하여 진단의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 약이 먼저고 진단이 나중이라는 사연이며 의사들의 진단기준이 허술하다는 방증이다.   사회적인 압력도 큰 역할을 한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부모가 ADHD 자가진단을 내리고 의사에게 약 처방 압력을 넣는 것이다. 약은 코카인과 화학성분이 매우 비슷한 중독성 각성제다.   높지 않은 지능, 아동학대, 부모의 이혼 과정 같은 이유로 아이는 공부를 못하면서 마약 각성제를 먹는다. 그리고 약물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성적이 뒤떨어지면 큰일 난다는 부모의 강박관념 때문에 제약회사들이 학술용어까지 써가면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속으로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2023년 가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언어 희롱 전쟁 신경증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마약 각성제

2023.10.0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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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언어의 희롱

“대체로 언어는 진실을 감추는 도구다.”라는 명언을 남긴 코미디언, 조지 칼린(George Carlin, 1937~2008)의 유튜브, ‘On Euphemisms, 완곡한 표현에 대하여’(1990)를 다시 본다.   전쟁 중 병사들이 겪는 신경 증상을 1차 세계대전 때 ‘shell shock, 전쟁 신경증’이라 했고, 월남전쟁 후에는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한다. 1920년대 초의 ‘신경증’이 반백 년 후 정신병으로 변한 것이다. 정부 지원 치료를 받기 위하여.   ‘blind, 장님’을 ‘visually impaired, 시각장애자’로 ‘physically handicapped, 지체부자유자’를 ‘physically challenged, 신체장애인’로 미국이 장애인들의 호칭을 바꾸는 사태에 대하여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소리친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컨디션을 바꾸어 부르면 컨디션이 바뀐다고 믿게 됩니다.”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고 말 바꿈 하면 망자(亡者)의 컨디션이 바뀐다는 심리상태다.   ‘말 바꾸기 운동’이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정신분열병을 조현병(調絃病)이라 부르면서 ‘분열’이라는 불쾌한 의미를 감추는 데 성공한다‘schizophrenia’의 ‘schizo-’부분은 전인도 유럽어로 ‘찢어지다’라는 뜻으로 ‘scissors, 가위’와 말뿌리가 같다.   조현. 고를 調, 줄 絃. 줄을 고르게 조절한다는 뜻.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무대 왼쪽에서 걸어 나오기 전까지 현악기 주자들이 징~ 징~ 현을 조율하는 정황을 연상시킨다. 줄을 조절한다는 의미가 마음 줄의 긴장도를 알맞게 하겠다는 뜻인지. 느슨하게. 아니라고?   편도선염, 대퇴골절, 대장암처럼 병변(病變)을 기술하는 진단명에서 멀리 가도 너무 멀리 갔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무엇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진술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무엇인지를 조율하겠다는 치료 의도를 암시하는 진단을 내리는 것이 한국의 의학 수준인가.   반대로, 부드러운 표현이 강력한 표현으로 변하는 일이 정신과에서 터진다. 2023년 8, 9월 양달에 걸쳐 월간 ‘Psychiatric Times’에서 ‘ADHD, Attention Deficit Hyperactivity Disorder,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에 대한 톱 기사가 표지를 덮었다. 주의가 산만한 것이 정신병으로 간주하다니.   미국에 마약이 주성분인 ADHD 약이 동이 났다는 소식! 지난 20년에 걸쳐 꾸준히 상승하는 ADHD 과잉진단의 결과로 2023년 현재 약의 수요가 전 미국에 산재한 제약회사의 공급 능력을 훌쩍 뛰어넘었다는 분석이다.   과잉진단의 가장 큰 요인은 제약회사의 약 선전에 부응하여 진단의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 약이 먼저고 진단이 나중이라는 사연이며 의사들의 진단기준이 허술하다는 방증이다.   사회적인 압력도 큰 역할을 한다. 아이가 공부를 못하면 부모가 ADHD 자가진단을 내리고 의사에게 약 처방 압력을 넣는 것이다. 약은 코카인과 화학성분이 매우 비슷한 중독성 각성제!   높지 않은 지능지수, 아동학대, 부모의 이혼 과정 같은 이유로 아이는 공부를 못하면서 마약 각성제를 복용한다. 그리고 약물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아이들에게 성적이 뒤떨어지면 큰일난다는 부모의 강박관념 때문에 제약회사들이 학술용어까지 써가면서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속으로는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2023년 가을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잠망경 언어 희롱 disorder 주의력결핍 마약 각성제 stress disorder

2023.10.03. 21:23

[삶의 뜨락에서] 쌀의 언어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 인연이다. 순간, 감동으로 마주했어도 바람에 날리는 향기처럼 사라져 버리는 작품이 있고 오랜 되새김의 여운으로 생각의 지표에 무늬를 남기는 작품이 있다. 쌀을 오브제로 회화, 설치 등 다양한 작업을 한다는 작가의 전시회가 있다기에 강렬한 호기심이 들었다. ‘밥상’ 밥을 먹으며 ‘젓가락 당신’ 등의 시(詩)를 써온 나에게 쌀이란 언제나 근원적 질문이었기에 더욱 작품을 만나고픈 목마름이 강했다.     나는 쌀 작품을 만나러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맨해튼으로 향하였다. 첼시의 도심을 걸어 홀리시 타가트(Hollis Taggart)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섰다. 흰 공간의 바닥에 놓인 커다란 북과 둥그런 원, 높은 천장에 매달린 붉은 쌀 주머니! 압도적이었다. 한 작품, 작품 안으로 깊이 시선과 마음을 모으며 바라보는 나의 가슴에는 1000만 개의 이야기가 봇물처럼 터져 흘러내렸다.     쌀! 쌀! 이란 얼마나 할 말이 많은가. 생존이고 밥인 엄마의 젖과 같은 순수의 모성! 하지만 그 쌀이 돈으로 재물로 욕망으로 둔갑하는 순간, 쌀은 전쟁이고 슬픔이고 참혹해지는, 쌀은 영원히 안식처이고 또한 영혼의 물음표가 아니던가? 50억을 뇌물로 받고도 무죄를 받는 쌀이 욕망의 똥 덩어리로 둔갑하는 참담과 생활고에 시달려 배가 고파 달걀 한 판을 훔치고 실형을 받은 40대의 눈물이 ‘내 엄마의 땅(my mother’s land)’이란 쌀 작품 앞에 떠올라 나는 주체할 수 없이 슬퍼지기도 하고 울분이 터져 나도 모르게 숨을 고르기도 하였다. 어떤 예술 작품은 이리도 곡진(曲盡)하다. 인간의 삶을 관통하지 않은 예술은 있을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포개듯 쌀 한 톨 한 톨을 가슴으로 주물러 어둠과 빛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예술가의 혼에 박수를 보낸다.     세상은 어지럽고 쌀은 계단이 되었고 계급이 되었고 쌀은 공평하지 않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에는 묘판에 정성을 다해 볍씨 뿌리듯 소외당한 자를 위해 마음의 밥을 지어 나누는 초록 대지 같은 선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꿈꾼다. 나는 청색으로 풀어놓은 바다와 하늘 아래 산과 대지의 굴곡과 평안이 얼개로 누워 있는 드림 랜드(Dream Land) 작품 앞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오래 서 있었다.     전시회는 끝나고 작가가 전해 준 각자의 메시지를 가슴에 안고 총총히 빗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와 이름 앞에 쌀의 여신, 쌀 작가라는 호명을 지닌 이 작가가 궁금하여 구글 검색을 해 보았다. 일본대사관 건너 소녀상 앞에서 온몸에 흘러내리는 쌀을 받아내며 대사관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채 침묵으로 응시하는 그녀의 영상을 보며 나도 잠시 모진 삶을 살아온 그분들을 위하여 기도드렸다. 그렇다. 역사를 관통하지 않은 인간의 삶이란 있을 수 없다. 한 예술가로서 방관하지 않고 역사 속에 아픈 사람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래는 예술가의 위무(慰撫)를 다하는 이하윤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내가 본 작품은 오랜 나의 질문, 밥이란? 삶이란? 생존이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빛으로 살아야 하는가? 의 물음을 다시 깊게 사유하게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춤추는, 서슬 푸른 눈으로 읽은 절창의 서사시가 분명하였다고 나직이 읊조렸다. 곽애리 / 시인삶의 뜨락에서 언어 예술 작품 작품 작품 dream land

2023.03.28. 17:25

[아름다운 우리말] 반언어(反言語)는 언어

언어의 기본적 기능은 소통에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가장 특별한 특징이 언어인 셈입니다. 물론 언어는 인간과 신, 인간과 동물의 의사소통에도 쓰입니다. 상대가 잘 알아들었는지는 차치(且置)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언어의 목적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것에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기호라면 주로 암호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폭넓게 사용하는 것은 은어(隱語)입니다. 은어는 특수한 집단에서 사용합니다.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특성이 있는 모임에서 주로 은어를 사용합니다. 은어를 특수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특수한 집단에서만 사용하기에 자연스레 은어가 되기도 합니다. 의사끼리 하는 말을 환자들이 못 알아들으면 특수어이면서 동시에 은어입니다. 집단 속에서 전문어를 사용하는 게 결과적으로 환자들이 못 알아듣게 일부러 사용하는 게 됩니다.    은어를 그래서 반언어라고도 합니다. 반언어는 단순히 설명하자면 언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해서 소통의 단절을 목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반언어가 주로 쓰이는 장면은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대표적으로는 범죄 집단을 들 수 있습니다. 조폭이나 사기꾼 등은 자신의 말을 일반인이나 경찰이 알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은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은어에 관한 연구를 보면 이미 일반인도 널리 아는 표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감옥에 가는 것을 큰집에 간다거나, 별을 단다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일반인까지 알 정도면 이미 은어가 아닙니다. 경찰을 ‘짭새’라고 하는 것을 은어의 예로 들기도 하는데, 경찰도 자신을 짭새라고 부른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전혀 은어가 아닌 셈입니다.    예전에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하는 경우에도 언제든 잡혀갈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때 사용하던 많은 은어가 있었습니다. ‘피’를 유인물의 뜻으로 쓴다는 것에 놀란 적도 있습니다. 피를 뿌리는 것이 유인물을 돌린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피는 ‘paper’의 ‘P’를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러한 은어도 금방 사지거나 변화하였을 겁니다. 은어는 숨기고 싶었던 상대가 의미를 알게 되면 더는 은어가 아닙니다.    한편 심마니의 은어는 조금 더 특별한 면을 담고 있습니다. 산삼을 캐는 행위에 부정이 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일상어와는 다른 말을 쓰기도 하는 겁니다. 불을 ‘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말은 일반인이 알기도 어렵지만 알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산신과의 관계에서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종교에서 사용하는 은어는 이런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고생이 사용하는 은어에는 여러 측면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이나 어른들이 모르기를 바라는 속성과 또래 집단의 문화를 강화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어른은 청소년의 은어를 거칠다고 나무라지만 사실 청소년은 개의치 않습니다. 그게 청소년의 문화이고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약어를 사용하고, 신조어를 만들고, 비속어를 개발하는 등 다양한 창의성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은어는 성인이 되면 서서히 사용하지 않습니다. 세대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군인의 은어도 비슷한 특성이 있습니다. 군대 안에서는 암호와 같은 기능과 함께 동질성을 보여줍니다. 제대하고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그런 말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은어는 반언어면서 동시에 언어입니다. 언어 중에서도 소통의 농도가 짙은 언어입니다. 같은 집단의 사람들이 위험 앞에서 결연한 자세로 사용하는 살아있는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반언어 언어 범죄 집단 또래 집단 사실 청소년

2023.01.15. 17:04

[글마당] 언어가 없는 겨울 산책

고단한 참새들의 쉼터   음습한 대나무 숲길에   새벽 산책길   속없는 집사가 된다       소한과 대한 사이   이상 기온이라 소근거리는   고립된 펜데믹에도   짙은 안개는 땅끝까지 내려오고       언어가 없는 새벽 음악은   일상의 먼지를 털고   하루를 춤추게 한다       바람의 말이 모이는   외진 비밀 장소   길고 가는 샛 강 품은 길       사그락 거리는 속살의 울음으로   안부 없는 긴 겨울   한가득 초록이어서   눈물겹도록 달콤하다 박선원 / 시인·웨스트체스터글마당 언어 겨울 겨울 산책 새벽 산책길 새벽 음악

2023.01.13. 17:46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의 화석

화석은 흔적입니다. 옛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화석은 흥미로운 자료입니다. 한편 화석은 달리 표현하자면 그 당시대로 굳은 모습입니다. 변하지 않고 멈춰있는 것이지요. 화석의 이런 두 가지 특징 때문에 어느 쪽을 강조하는가에 따라서 대상에 대한 태도는 긍정과 부정으로 나뉩니다.   언어에서도 그렇습니다. 언어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화석은 귀한 자료입니다. 옛 흔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 화석은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만, 아무래도 가장 흔적이 깊게 남아 있는 곳은 속담입니다. 속담의 기본 특성이 오랫동안 민중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기에 변화가 적습니다. 예전의 단어나 문법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속담을 보면 옛사람의 모습이 많이 담겨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에서 포도청이 무언지,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할 때 풍월이 무언지 모르는 경우가 늘고 있습니다.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할 때 오뉴월은 정확히 언제인가요? 그나마 이런 속담은 많이 알려진 것이라 의미 추측이 가능하지만 자주 듣지 못한 속담은 아예 의미가 미궁 속에 빠집니다. 포도청이나 풍월, 오뉴월은 아직 화석이라고까지는 보기가 어렵습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와 같은 속담은 문화를 한참 설명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는 속담입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는 어떤가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는 말을 아이들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어쩌면 속담 전체가 화석 자료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임동권 선생의 ‘속담사전’을 보면 화석이 한 가득합니다. 고고학의 전시장이라고나 할까요?   ‘아니 땐 굴뚝’이라는 표현은 문법의 화석을 보여줍니다. 현대어라면 ‘안 땐’이나 ‘때지 않은’이라고 표현할 겁니다. ‘아닌 밤중’도 비슷합니다. ‘하나님 맙소사’라는 표현의 ‘맙소사’는 옛 흔적을 보여주는 문법 표현입니다. 현재라면 ‘마소서’라고 표현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 속에는 앞으로도 많은 표현이 화석으로 남게 될 겁니다.     한편 언어교육에서 사용하는 화석화라는 말은 오류가 굳어져서 고쳐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주로 발음에서 화석화된 오류가 많이 나타납니다. 자주 틀리는 문법이나 어휘도 화석화의 근거가 될 겁니다. 그런데 달리 보면 왜 외국어를 배울 때 화석화가 일어날까요?   저는 화석화도 중요한 의사소통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화석화된 발음이나 문법으로 이야기했을 때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방법을 생각했을 겁니다. 발음을 고치려고 더 애를 썼겠지요. 하지만 화석화로 굳어졌다는 말은 그 자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음을 의미합니다. 저는 언어교육에서 화석화가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사소통의 한 방법으로 이루어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화석화라는 용어는 비유입니다. 비유는 이야기하고자 하는 마음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언어학과 언어교육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쓰입니다. 화석이라는 비유에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편견에서 벗어나서 어휘를 바라보는 것이 공부의 시작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화석 어휘도 화석화 언어 화석 화석 자료

2022.12.18. 18:33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와 치유

말은 인간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말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을 사고의 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말이 있었기에 서로 소통하였을 것이고, 그 소통의 흔적이 자식에게로 이어져 새로운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음성언어인 말이 문자언어인 글로 바뀌면서 생명력은 더 길어졌습니다. 말씀이 곧 사람입니다.    사고가 먼저인가 말이 먼저인가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의 논란처럼 보입니다. 말이 없으면 사고할 수 없고, 사고를 못 하면 말은 말이 아니라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럼도 이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사고를 말로 풀어내어야 비로소 생각이 된다는 점입니다. 말로 하는 것이 생각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로 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저 생각만으로는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말에서는 이 경우에 ‘말로 하다’라고 표현합니다. 말로 한다는 말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만,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언어화(言語化)일 겁니다. 생각을 말로 나타내는 것을 언어화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어화를 하고 있습니다. 언어화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이나 아픔으로 가득한 경우에도 언어화는 도움이 됩니다. 언어화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위로가 됩니다.    물론 종교나 철학에 따라서는 말 이전의 세계, 말이 끊어진 세계, 말을 넘어서 공감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말의 한계를 느끼곤 합니다. 맞습니다. 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내 생각을 고스란히 담을 수 없어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말로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말로 해 본 후에 말의 한계를 느끼는 겁니다. 언어화가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로 하는 것이 오해가 되기도 하고 말에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니까 말을 떠나는 세계를 꿈꾸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말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합니다. 생각 속에서는 정리되지 않던 수많은 감정이 언어화하는 순간 가라앉고 정리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은 특별한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단순히 말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기도 합니다.    상담은 그런 과정을 보여줍니다. ‘말을 해야 알지’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말을 하면서 자연스레 자신의 감정도 가라앉고, 채로 걸러집니다. 상담을 하고 났더니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꺼내어 말로 하고, 이를 누군가와 나누는 과정은 말의 힘을 보여줍니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소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글도 말입니다. 언어화의 중요한 수단으로는 글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은 쉽기도 하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주 써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말은 끊임없이 하지만, 글은 그다지 쓰지 않습니다. 글이 어려운 이유는 해 보지 않아서입니다.   글도 언어화라는 차원에서 매우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도 매력적이고, 고마운 일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어, 차분히 써 내려 가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정리됩니다. 글을 쓰고 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따뜻해집니다. 머릿속에 엉켜있는 생각의 실타래를 말로 풀어내고, 글에 담아 보세요. 생각보다 훨씬 힘이 될 겁니다. 언어는 치유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치유

2022.10.23. 18:14

[삶의 뜨락에서] 두 번째 언어

(…)// 꿈이 고이는 밤이 되면/ 옷을 벗고/ 가면을 내려놓고/ 화장을 지운다/ 낮에 걸쳤던 나를 벗어 던지고/ 봄의 잔상에 젖은 불 속으로 찬란하게 타들어 간다// ‘타오르는 방’이라는 2014년에 쓴 나의 졸 시다.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 제3부에서는 역할놀이의 법칙(Role Playing)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가장 멋지게 보일 수 있는 가면을 쓴다. 겸손하고 자신감 있고 성실한 모습을 가장한다. 상대에 관심이 있는 척하고 내면의 불안과 시기심을 감춘다. 그런 겉모습을 실제라고 착각하지만 다행히 사람이 쓰는 가면 틈 사이로 가끔 진짜 감정이나 무의식적 욕망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사람은 표정이나 목소리 그리고 초조할 때 나오는 몸동작 같은 비언어적 신호(두 번째 언어)까지 완벽히 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두 번째 언어를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어떻게 하면 가장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맡은 역할을 가장 잘 연기할지 그 방법도 알려준다.     이에 관련해 가장 유명한 말을 남긴 사람은 셰익스피어다. “세상이 모두 무대요 사람은 모두 배우일 뿐이죠”라고. 더 나은 의사소통을 위해 두 번째 언어를 공부하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고 오해의 소지를 좁혀주지 않을까 생각된다. 특히 중환자실에서는 대부분의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꽂고 있어 환자와 의사소통이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환자에게서 두 번째 언어를 읽어내야 한다. 환자의 눈빛과 몸짓을 통해 환자의 마음을 읽고 예,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유도한다. 또한 환자의 신체가 내보내는 에너지를 흡수해 그들의 미세표정까지 살펴야 하고 그들의 감정에 전염되어야만 그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또 병원에서 자주 만나는 환자 중에 뇌졸중 환자가 많이 있다. 뇌졸중 환자의 후유증은 천차만별이다. 심하면 수 시간 내에 사망하는 경우에서 약한 경우는 후유증 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보통 반신마비나 언어장애로 말을 못하는 경우, 혹은 인지장애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두 번째 언어만이 유일한 소통의 수단이 된다. 한번은 파킨슨 질병이 빠르게 진행되는 바람에 몸의 근육이 다 마비되어가는 환자를 방문하게 되었다. 정말 놀랍게도 인공호흡기와 호스로 음식공급을 받을 뿐만 아니라 안면근육도 다 마비되었고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부위는 눈동자뿐이었다. 다행히 간병인이 그녀의 눈동자를 읽어주어 우리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감동 그 자체였다.     인간이 나누는 모든 의사소통 중에 65% 이상이 비언어적 소통이지만 그중에 사람들이 인지하고 내면화하는 정보는 겨우 5%에 불과하다는 연구가 있다. 우리는 대부분 ‘말’에 비중을 두지만 실제로 말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데 더 많이 사용한다. 비언어적 신호는 말로 강조하려는 내용과 메시지의 숨은 뜻, 뉘앙스를 알려준다. 두 번째 언어는 사람들의 기분과 정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여러 감각을 다 열어 놓기 때문에 신체적인 차원에서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 악마나 바보는 뿔을 달고 있거나 종을 울리며 다니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치 달과 같아 오직 한 쪽밖에 보여주지 않는다’라고 했다. 인격(personality)이라는 말은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에서 나왔다. 페르소나는 ‘가면’이라는 뜻이다. 남들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가면을 쓴다. 인간의 본성 중에 있는 부정적인 면들이 가면 없이 다 보인다면 우리는 상처받을 일이 너무도 많을 것이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언어 비언어적 신호 뇌졸중 환자 보통 반신마비

2022.09.09. 17:26

[문장으로 읽는 책] 산책의 언어

눈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날씨 중 가장 감각적인 날씨다. 만질 수 있고 뭉칠 수 있다. 밟을 수 있고 그 위에 누울 수 있다. 냄새를 맡고 먹어볼 수도 있다. 겨우 발자국이 날 만큼 적게 내린 자국눈은 금세 사라지지만, 깊게 쌓인 길눈은 단단하게 굳어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눈다리가 된다. 싸락싸락 내린 쌀알 같은 싸라기눈은 사박사박 쉽게 밟고 걸어갈 수 있지만, 발등이 빠질 정도로 내린 발등눈은 뽀드득 소리와 함께 발이 푹푹 빠진다. 고체였다가 액체가 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쌓이기도 한다.   우숙영 『산책의 언어』   아무 데나 펼쳐진 페이지부터 읽으면 된다. 하늘과 땅, 식물과 동물, 날씨와 계절, 시간 등 자연에 대한 짧은 글이 담백하다. 매 장 뒤엔 어휘 사전도 실었다. 윗글만 해도 ‘자국눈’ ‘길눈’ ‘발등눈’ 같은 처음 들어본 우리말이 아름답다.   저자는 “자연과 함께 하는 시간을 나무와 꽃, 초록색과 붉은색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가난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자연에 대해 풍부한 언어를 갖게 된다는 건, 세상에 대해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산책하다 말고 쭈그리고 앉아 꽃 사진을 찍다 ‘너도 나이 들었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친구의 말대로 이제야 꽃이 보이기 시작했다. 꽃의 시점으로 바라본 세계가, 나와 인간이 중심이 아닌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라면서 잊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조각이기도 하고, 이 나이가 되어서야 발견한 새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세계의 확장이었다.” 양성희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문장으로 읽는 책 산책 언어 동물 날씨 계절 시간 어휘 사전도

2022.08.29. 19:21

[아름다운 우리말] 언어 치유와 교수법의 변천

외국어교육의 본격적인 시작으로는 문법 번역식 교수법을 들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한자교육과 한문교육이 외국어교육의 핵심을 이룹니다. 물론 범어교육도 불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한문으로 불경을 번역하였기 때문에 한자문화권에서는 직접적인 범어학습은 깊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문교육은 사서삼경으로 대표되는 유교 교육, 도덕경 등으로 대표되는 도교 교육 등을 위한 교육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교재로 삼는 것도 소학, 명심보감 등을 시작으로 사서삼경이 주요 교재가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내용 중심의 교육이라 할 수 있으며 삶의 방향, 가치관 형성에 대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에서는 희랍어,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문법 번역식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역시 의사소통 중심의 교육이라기보다는 읽기, 쓰기 중심의 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시대와 로마시대의 책을 읽고, 기독교의 성경을 읽는 등 읽기 중심의 행위가 이루어졌으므로 고전 읽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과 마찬가지로 경전, 역사 등의 교육을 위한 언어교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를 배우는 목적 자체가 선인의 지혜를 학습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각 구두식 교수법을 군대교수법이라고도 합니다. 이 점은 언어교육의 목적에 심각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어교육의 목적이 고전의 해석과 삶의 지표에 있었다면 이 교수법에 와서는 빠른 습득과 전쟁의 승리가 교육의 목적이 됩니다. 따라서 교육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정확하고 빠른 습득을 목표로 하면서 언어를 통한 가치관 형성은 관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단지 도구로서의 언어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듣기를 강조하고, 습관형성을 중요시하며 이를 통한 정확성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군대교수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언어치유와는 가장 관계가 먼 교수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적국의 언어를 빠르게 습득하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치유의 장면이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교육의 내용에도 군대 관련 용어나 표현 등이 담겨 있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장기적으로는 군대교수법의 대상자라고 할 수 있는 군인들을 위한 언어치유 교육의 모색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의사소통식 접근법은 학습자 중심의 교수법과도 연관이 됩니다. 학습자가 교육과정 설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등 교육 철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정확성보다는 유창성을 강조하는것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문어보다는 구어를 강조하게 됩니다. 학습자들의 상호작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도 앞의 문법 번역식 교수법이나 청각 구두식 교수법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소통식 접근법 자체가 언어치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다만 언어교육의 관점을 교수자에서 학습자, 혹은 상호협력으로 바꾸면서 학습자의 불안이나 청취감, 자기효능감 등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침묵교수법이나 전신반응교수법, 공동체 학습법 등은 이런 점에서 연계 가능한 학습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소통이라는 말은 서로의 마음, 감정의 소통도 의미합니다. 따라서 제 2언어를 통해 언어와 문화를 소통하는 것은 도구로서의 언어뿐 아니라 능력으로서의 언어, 치유로서의 언어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합니다. 의사소통식 접근법을 기반으로 하여 치유에 초점을 두는 교수 방안의 개발이 필요할 것으로 봅니다.   가치 중심 언어 교육은 실제로는 실행되어 왔지만 한 가지의 교수법으로 자리잡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언어 교육의 내용적 측면에서 언어 속에 담긴 가치나 교훈을 강조하였기는 했지만 그것을 주 대상으로는 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언어 치유교육에서는 가치 중심 언어 교육의 지향점을 잘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는 언어 교육을 통해서 인간의 마음 치유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가능성에 교육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교수법 언어 언어치유 교육 언어 교육 언어 치유

2022.07.10. 17:01

[열린 광장] 위험 수위 넘어선 ‘언어 오염’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부모 세대에는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시절이 지나며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일상에서 일본어가 하나둘 사라지고, 오봉·벤또 같은 어휘들이 쟁반·도시락이라는 우리말로 돌아왔다. 물론 우와기는 윗도리, 쓰봉은 바지로.     〔〈【이렇게 우리 삶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일본어의 잔재나 어쭙잖은 일본식 영어 발음의 쓰봉·도란스·바께쓰 같은 괴상한 단어를 생각하다, 상처에 바르던 옥도정기가 아까징끼였다가 ‘빨간약’으로 불리던 대목에서는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난다.   】〉〕1980~90년대를 아우르면서 왜색 흔적을 지우고, 우리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학가에서는 ‘국풍’에 이어 ‘신토불이’의 신바람과 함께 우리 전통의 풍물패 장단이 큰 물결을 이루었다. ‘우리 것’ 혹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선언문과 함께 우리 문화의 숨결을 담은 활동이 학교 안팎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한류의 이름으로 K팝을 비롯한 】〉〕다양한 K문화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런 열풍은 80~90년대를 이어 다시금 ‘우리 것’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지구 곳곳을 들썩이게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말이 또다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영어 같기도 하고, 일본어 같기도 하고, 낯선 외국어 같기도 하고, 또 우리말 같기도 하고. 영 종잡을 수 없는 혼종 표현들이 넘쳐난다. ‘멘붕’처럼 절반은 영어에 절반을 한자어로 섞어 놓은 것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할 초두음만으로 된 연속체도 등장했다. ‘자(동)판(매)기’나 ‘야(간)자(율학습)’처럼 음절 단위의 줄임만은 있어도 초두음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말 어법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온라인 메신저의 등장과 더불어 ‘ㅅㄹㅎ(사랑해)’ 같은 표현을 지나, ‘ㅇㅋ(OK)’ 혹은 ‘ㄹㅇ(real)’처럼 영어의 한국어 표기를 따온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난무한다. 이제는 너무나 흔한 상투어가 되어버린 ‘ㅎㅎ’ ‘ㅋㅋㅋ’ 등은 대화 상대를 잘 가려서 써야 한다는 주의도 듣는다. 상대방에 따라서는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다기에.   언어도 유행을 타듯 사라지는 것도 있고, 또 새로운 표현이 생겨나 우리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렇게 우리말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또 하나의 현상은 말장난 같은 사자성어가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나 ‘폼생폼사(form生form死)’ 같은 국적 모를 네 글자 조합이 창의적 기발함을 업고 천연덕스럽게 활개를 친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대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나 ‘감탄고토(甘呑苦吐)’를 몰라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익숙한데, 요사이 유행에 빗대면 ‘고끝낙온’이나 ‘달삼쓰뱉’이 시대에 어울리는 사자성어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국적도 정체성도 가늠되지 않는 마구잡이 조합이다.    더 이상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디지털 문명 안에서, 수천 년을 거스르는 동서양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인문학으로 소환되어 가르침의 소재가 된다. 반면 로봇과 인공지능에 지배되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온통 영어로 채색된 것 같은 낯선 단어들을 체화해야 한다.     고전과 미래를 오가는 사이 말이 곧 ‘얼’이라는데, 흔들리는 우리의 정신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살아야 할까. 최명원 /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열린 광장 수위 언어 우리말 어법 우리말 같기 혼종 표현들

2022.03.28. 19:57

[열린 광장] 위험 수위 넘어선 ‘언어 오염’

일제강점기를 지나오면서 우리 부모 세대에는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나도 어린 시절 엄마 심부름을 다닐 때면 몇몇 일본어를 곧잘 우리말인 양 알아듣곤 했었다. 그 시절이 지나며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일상에서 일본어가 하나둘 사라지고, 오봉·벤또 같은 어휘들이 쟁반·도시락이라는 우리말로 돌아왔다. 물론 우와기는 윗도리, 쓰봉은 바지로.     이렇게 우리 삶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일본어의 잔재나 어쭙잖은 일본식 영어 발음의 쓰봉·도란스·바께쓰 같은 괴상한 단어를 생각하다, 상처에 바르던 옥도정기가 아까징끼였다가 ‘빨간약’으로 불리던 대목에서는 슬그머니 웃음이 배어난다.   1980~90년대를 아우르면서 왜색 흔적을 지우고, 우리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대학가에서는 ‘국풍’에 이어 ‘신토불이’의 신바람과 함께 우리 전통의 풍물패 장단이 큰 물결을 이루었다. ‘우리 것’ 혹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아름답다’라는 선언문과 함께 우리 문화의 숨결을 담은 활동이 학교 안팎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교내 어디서나 꽹과리와 장구 소리가 들리고, 널찍한 공간만 있으면 상고를 쓰고 북과 징을 두드리는 동아리 구성원들의 춤사위가 판을 이루었다.   최근에는 한류의 이름으로 K팝을 비롯한 다양한 K문화 열풍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런 열풍은 80~90년대를 이어 다시금 ‘우리 것’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지구 곳곳을 들썩이게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말이 또다시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영어 같기도 하고, 일본어 같기도 하고, 낯선 외국어 같기도 하고, 또 우리말 같기도 하고. 영 종잡을 수 없는 혼종 표현들이 넘쳐난다. ‘멘붕’처럼 절반은 영어에 절반을 한자어로 섞어 놓은 것뿐만 아니라,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할 초두음만으로 된 연속체도 등장했다. ‘자(동)판(매)기’나 ‘야(간)자(율학습)’처럼 음절 단위의 줄임만은 있어도 초두음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말 어법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그런데 온라인 메신저의 등장과 더불어 ‘ㅅㄹㅎ(사랑해)’ 같은 표현을 지나, ‘ㅇㅋ(OK)’ 혹은 ‘ㄹㅇ(real)’처럼 영어의 한국어 표기를 따온 수수께끼 같은 표현이 난무한다. 이제는 너무나 흔한 상투어가 되어버린 ‘ㅎㅎ’ ‘ㅋㅋㅋ’ 등은 대화 상대를 잘 가려서 써야 한다는 주의도 듣는다. 상대방에 따라서는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다기에.   언어도 유행을 타듯 사라지는 것도 있고, 또 새로운 표현이 생겨나 우리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렇게 우리말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또 하나의 현상은 말장난 같은 사자성어가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나 ‘폼생폼사(form生form死)’ 같은 국적 모를 네 글자 조합이 창의적 기발함을 업고 천연덕스럽게 활개를 친다. ‘고진감래(苦盡甘來)’ 대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나 ‘감탄고토(甘呑苦吐)’를 몰라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익숙한데, 요사이 유행에 빗대면 ‘고끝낙온’이나 ‘달삼쓰뱉’이 시대에 어울리는 사자성어다.     그런데 어떤 것들은 국적도 정체성도 가늠되지 않는 마구잡이 조합이다. 이렇게 뒤엉킨 창조적 발상은 말에 깃들인 생각의 틀마저 뒤틀어 놓는다.   더 이상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는 디지털 문명 안에서, 수천 년을 거스르는 동서양 역사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인문학으로 소환되어 가르침의 소재가 된다. 반면 로봇과 인공지능에 지배되는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온통 영어로 채색된 것 같은 낯선 단어들을 체화해야 한다.     고전과 미래를 오가는 사이 말이 곧 ‘얼’이라는데, 흔들리는 우리의 정신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살아야 할까. 최명원 / 성균관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열린 광장 수위 언어 우리말 어법 우리말 같기 혼종 표현들

2022.03.25. 18:57

[문화예술톡] 정치가의 언어, 예술가의 언어

 한국이나 프랑스나 대선 경쟁이 한창이다. 후보들은 저마다 큰소리로 힘차게 공략을 외치며 세상을 바꾸겠다 한다. 우렁차다 못해 공격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언어의 직접성에 살짝 마음이 놀라기도 한다. 20년 넘게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간접적이고 시적이고 은유적인 언어에 익숙하게 살아온 나에게 정치인들의 언어는 참으로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다가온다.   얼마 전에 중동 지역 알자지라 방송국에서는 두 명의 인물을 초대해서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현대미술 작가인 아이웨이웨이(艾未未)와 아니쉬 카푸어가 나왔다. 마침 이 둘은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파헤치고, 이를 예술 작품으로 고발해온 중국 출신 작가 아이웨이웨이는 고국인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럽으로 망명하여 창작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인도 태생으로 영국에서 살면서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는 아니쉬 카푸어는 공간을 압도하는 대형 설치와 조각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의 작품에서는 아이웨이웨이 작품과 달리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강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과 사회에 대한 시적이며 철학적인 사고를 공유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보다 적극적인 행동파 예술가인 아이웨이웨이에게 아니쉬 카푸어는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이 어떠한 정치적인 아이디어나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아이웨이웨이는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예술가가 소유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코멘트이다” 라고 답한다. 결국 예술가의 언어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세상을 향한 예술가들이 지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결국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 피카소가 “여러분 나의 그림은 단순히 거실의 벽에 걸린 장식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피카소가 말한 전쟁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개인의 삶의 음지와 양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신저로서의 예술가의 투쟁과 책임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언어는 소프트하고 느리고 굽이굽이 좁은 길을 돌아서 도달해야 하는 언어다. 아니쉬 카푸어는 자기가 태어난 인도에서는 자신의 코를 만지기 위해 머리 뒤편으로 손을 돌려서 어렵게 잡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예술이 지니는 정치적 언어를 설명해준다고 한다. 예술은 항상 세상을 향해 이야기를 해왔다. 조용하게 혹은 저항하는 목소리로. 직설적인 목소리보다 오랫동안 조용히 세상을 바꾸는 간접적이지만 파워풀한 예술가의 언어로. 최선희 /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문화예술톡 언어 정치가 언어 예술가 정치적 언어 아이웨이웨이 작품

2021.12.26. 16:57

[기고] 정치가의 언어, 예술가의 언어

 한국이나 프랑스나 대선 경쟁이 한창이다. 후보들은 저마다 큰소리로 힘차게 공약을 외치며 세상을 바꾸겠다 한다. 20년 넘게 예술가들이 표현하는 간접적이고 시적이고 은유적인 언어에 익숙하게 살아온 나에게 정치인들의 언어는 참으로 직설적이고 단순하게 다가온다.   얼마 전에 중동 지역 알자지라 방송국에서는 두 명의 인물을 초대해서 대화하는 프로그램을 제작했는데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현대미술 작가인 아이웨이웨이와 아니쉬 카푸어가 나왔다. 마침 이 둘은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매우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파헤치고, 이를 예술 작품으로 고발해온 중국 출신 작가 아이웨이웨이는 고국인 중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유럽으로 망명하여 창작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인도 태생으로 영국에서 살면서 자유롭게 창작 활동을 하는 아니쉬 카푸어는 공간을 압도하는 대형 설치와 조각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의 작품에서는 아이웨이웨이 작품과 달리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강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과 사회에 대한 시적이며 철학적인 사고를 공유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보다 적극적인 행동파 예술가인 아이웨이웨이에게 아니쉬 카푸어는 말한다. “나는 내 작품이 어떠한 정치적인 아이디어나 메시지를 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아이웨이웨이는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예술가가 소유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코멘트이다”라고 답한다. 결국 예술가의 언어는 그것이 어떤 형태이건 세상을 향한 예술가들이 지닌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결국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 피카소가 “여러분 나의 그림은 단순히 거실의 벽에 걸린 장식품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쟁’입니다”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피카소가 말한 전쟁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개인의 삶의 음지와 양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신저로서의 예술가의 투쟁과 책임감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 언어는 소프트하고 느리고 굽이굽이 좁은 길을 돌아서 도달해야 하는 언어다. 아니쉬 카푸어는 자기가 태어난 인도에서는 자신의 코를 만지기 위해 머리 뒤편으로 손을 돌려서 어렵게 잡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예술이 지니는 정치적 언어를 설명해준다고 한다.     예술은 항상 세상을 향해 이야기를 해왔다. 조용하게 혹은 저항하는 목소리로. 직설적인 목소리보다 오랫동안 조용히 세상을 바꾸는 간접적이지만 파워풀한 예술가의 언어로. 최선희 / 초이앤라거 갤러리 대표기고 언어 정치가 언어 예술가 정치적 언어 아이웨이웨이 작품

2021.12.26.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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