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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몇개 안 남은 볶은 콩

Los Angeles

2025.12.22 18:39 2025.12.22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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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종 / 수필가

이효종 / 수필가

요즘 손주들의 재롱에 심심치 않다. 얼굴을 맞대고 재롱을 보기도 하지만 멀리서 사는 손주들은 카톡으로 본다. 시간이 가면서 할아버지를 알아보고 장난기를 부리는 손녀딸이나 아직 말은 못 하지만 눈빛으로 반가움을 표현하는 놈들 모두가 귀엽다.
 
제 어미가 식탁에 놓아준 간식을 통통한 고사리손으로 하나씩 집어먹는 모습이 진지하다. 가만히 보니 간식이 떨어질 때쯤에는 어린 마음에도 아껴먹듯이 천천히 집어서 오랫동안 먹는 것이다. 나도 유년 시절에 그러한 기억이 있다.
 
지금 마트에 가면 형형색색으로 포장된 간식거리가 즐비하다. 내 어릴 적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들이다. 옛날 간식거리는 누룽지나 찐 감자 같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니는 가끔 시장에 가서 쌀튀밥을 튀어오거나, 집에서 검은콩을 볶아 주기도 했다.  
 
어머니가 볶은 콩을 밥그릇으로 형제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주면 우리는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콩이 그릇 바닥에 깔리면 우리는 천천히 아껴 먹기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 내 볶은 콩이 먼저 떨어졌는데 다른 형제들은 여전히 먹고 있다면 매우 서운했다. 자연 콩이 떨어질 즈음에는 천천히 아껴 먹었다.
 
볶은 콩처럼 많다고 생각했던 나머지 인생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 인생 초반에는 한 그릇의 볶은 콩을 받고 즐겁게 먹던 아이처럼 삶의 끝을 상상하지도 않았다. 무진장으로 주어질 것 같은 인생이 정년을 맞이하고 나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친구의 부모가 상을 당했다는 소식은 언제부터인지 시나브로 사라졌다. 대신 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들이 상을 당했다는 문자가 왔다. 가끔은 친구의 부인이 상을 당했다는 문자도 온다.
 
이제 12월도 끝나간다. 곧 새해 달력으로 바꾸어야 한다. 앞으로 나에게 몇 번의 동짓달이 남았을까.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남은 시간은 모두가 소중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삶의 가치가 축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에 집착하는 대신,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생각해 본다.  
 
열정이 이상을 사로잡던 젊은 날에는 눈에 보이는 명성을 향해 달려갔었다. 고지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했기 때문에 많은 것을 참고 미루면서, 싸움터의 용사처럼 삭막하게 살아왔다.
 
이제는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보이는 듯하다. 바로 옆에 있는 가족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며 보듬어 주고 싶다. 세상 풍파를 견디어 오면서 서로가 받았던 육신과 마음의 상처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함께하는 이웃에게 관용을 베풀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다. 슬픈 일보다 기쁜 일을, 부정적인 생각보다 긍정적인 생각을, 비난보다 이해의 눈으로 삶을 살고 싶다.
 
다가오는 새해는 나에게 몇 개 남지 않은 소중한 볶은 콩의 한 알이니까. 

이효종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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