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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미 리 박사 "한인 정치인 많아져야 한인 사회가 발전"

Los Angeles

2025.12.31 19:10 2025.12.31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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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영웅' 새미 리 박사
수영장 출입 제한, 모래 구덩이 연습
인종차별 탓에 집 구입에도 어려움

이비인후과 의사 일하며 후배 양성
한인 사회 정치력 신장 활동에 앞장
2010년 8월 5일 LA 한인타운에서 '새미 리 광장 명명식'이 열렸다. 새미 리(오른쪽에서 네 번째) 박사와 가족, 정치인 등이 새미 리 광장 표지판 앞에 모였다. [연합뉴스]

2010년 8월 5일 LA 한인타운에서 '새미 리 광장 명명식'이 열렸다. 새미 리(오른쪽에서 네 번째) 박사와 가족, 정치인 등이 새미 리 광장 표지판 앞에 모였다. [연합뉴스]

1948년 8월 5일 런던의 다이빙 경기장. 신장 5피트 3인치에 다부진 체격의 아시안 남성이 10m 높이 플랫폼에 섰다.
 
관중의 수군거림이 잦아들고 적막이 찾아온 가운데 아시안 남성이 돌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찰나의 순간 새의 날개처럼 뻗었던 팔과 두 발을 모은 남성은 이내 입수했다. 수면과 수직에 가까운 깔끔한 입수에 박수가 쏟아졌다.
 
잠시 후 아시안 남성은 시상대 중앙에 올랐다. 성조기가 펄럭이는 가운데 목엔 찬란한 금메달이 걸렸고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새미 리 박사가 미국 최초의 아시아계 남성 금메달리스트로 역사에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런던 올림픽 3m 스프링보드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한 리 박사는 4년 뒤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10m 플랫폼 2연패에 성공했다.
 
올림픽 다이빙 2연패를 달성한 리 박사는 일약 영웅이 됐지만, 뿌리 깊은 인종차별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리 박사는 1920년 프레즈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지만, 낙천적인 성격과 불굴의 의지로 이에 맞섰다.
 
 리 박사는 장태한 UC 리버사이드 교수와 가진 인터뷰에서 학창 시절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고교 시절, 백인 여학생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는데  여학생의 어머니가 아시안이 있다며 파티를 시작하지 않아 결국 그 자리를 떴다는 것이다.
 
당시 아시안에겐 수요일에만 수영장 사용이 허락됐다고 한다. 리 박사의 코치는 자신의 집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래를 채워 넣었다. 리 박사는 모래 구덩이에서 피나는 연습을 한 끝에 올림픽 2관왕이 될 수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리 박사는 후진 양성에 모래 구덩이를 이용한 적이 있다.
 
1948년 7월 27일 런던의 엠파이어 수영장에서의 새미 리 박사. [중앙포토]

1948년 7월 27일 런던의 엠파이어 수영장에서의 새미 리 박사. [중앙포토]

수영장이 없는 샌타애나 주니어 칼리지에 다니던 밥 웹스터의 자질을 알아보고 "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 있다"며 격려하고 다이빙 기초를 다져준 것이다. 리 박사는 웹스터를 포함한 제자들을 무보수로 가르쳤다.
 
웹스터는 '디 올림피안'과의 인터뷰에서 리 박사가 그의 집 마당에 모래 구덩이를 파고 다이빙 보드를 설치해 자신을 가르쳤다고 밝혔다. 웹스터는 "리 박사는 내가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제대로 할 때까지 계속 다이빙을 시켰고, 난 그가 하라는 것을 모두 했다"고 말했다.
 
웹스터는 1960년 로마 올림픽과 1964년 도쿄 올림픽 10m 플랫폼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스승의 발자취를 이었다. 1984년과 1988년 올림픽에서 10m와 3m 종목 금메달을 석권한 그레그 루가니스 역시 15살 때, 리 박사의 지도를 받아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리 박사는 선수, 코치로서 많은 성취를 이뤘다. 1953년 소수계로는 처음으로 최우수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어지는 제임스 설리번 상을 받았다.
 
해마다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체육인 한 명에게만 수여되는 상이다. 1990년엔 미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리 박사는 운동과 학업을 병행해 USC 의대를 졸업했다. 은퇴 후 군의관으로 자원입대, 1953~1955년까지 주한미군에서 복무했다. 이후 1990년까지 이비인후과 의사로 활동했다.
 
남부럽지 않은 성공적인 인생으로 보이지만, 리 박사도 인종차별에선 자유롭지 못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오렌지카운티에 집을 사려고 했지만, 백인들은 모두 거래를 거부했다. 결국 한 기자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인종차별 때문에 집을 사지 못하고 있다"고 보도, 큰 논란이 일었다. 오렌지카운티 출신인 리처드 닉슨 당시 부통령이 리 박사를 돕겠다고 나선 뒤에야 리 박사는 원하는 집을 살 수 있었다.
 
리 박사는 오랜 기간 인종차별과 맞닥뜨렸지만, 자신을 "뼛속까지 미국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미국을 사랑했다. 1960년대 대통령 스포츠 특사로 임명돼 아시아 각국을 순회 방문한 리 박사는 '그렇게 차별을 당하면서도 미국에 사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때마다 리 박사는 "미국도 많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치부를 솔직히 인정하고 시정한다"고 답했다.
 
리 박사는 노년에 접어든 후 한인 정치력 신장에 앞장섰다.
 
리 박사는 강석희 전 어바인 시장, 미셸 박 스틸 전 연방하원의원, 영 김 연방하원의원이 선거에 나설 때마다 기금 모금을 돕고, 한인들의 정치력이 나날이 커지는 모습을 보며 기뻐했다.
 
강석희 전 시장은 "2008년 시장 선거에 출마하며 지지를 부탁했더니 리 박사가 '난 골수 공화당원이지만 한인사회를 위해 당신을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리 박사는 이후 여러 모임에서 날 위해 찬조연설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리 박사의 부친(이순기)은 하와이를 거쳐 가주에 정착한 미국 이민 초기 세대였다. 그는 리 박사에게 "네 피부색을 부끄럽게 여기면 훌륭한 미국 시민이 될 수 없다. 다인종 사회에서 아시안의 긍지를 퍼뜨리는 것이 네 의무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리 박사는 한인, 아시안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았으며,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사랑했다. 리 박사는 여러 나라 다이빙 대표팀이 거액을 약속하며 코치 제안을 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미국과 한국 선수들만 지도했다.
 
리 박사의 삶은 남가주 한인사회는 물론 미국에 큰 울림을 줬다. LA 한인타운에는 새미 리 광장이, 웨스트모어랜드 길에는 새미 리 박사 초등학교가 있다.
 
리 박사는 2016년 12월 2일 뉴포트비치의 한 병원에서 폐렴으로 타계(향년 96세)했다. LA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언론 매체들은 올림픽 영웅의 별세를 애도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리 박사가 세상을 떠난 지 9년이 흘렀지만, 그의 유산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오렌지카운티 수퍼바이저위원회는 지난 12월 9일 샌타애나의 OC정부 청사에서 ‘2025 OC 명예의 전당’ 헌액식을 열어 리 박사를 포함, OC를 빛낸 10명의 공로를 기렸다. 리 박사는 수퍼바이저위원회가 지난 2023년 헌액을 시작한 이후 명예의 전당에 오른 최초의 한인이다.
 
필자는 강석희 전 시장 후원 행사에서 리 박사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내내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하던 리 박사는 "당적과 관계없이 한인 정치인을 늘려야 한인사회가 발전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리 박사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잠시 걷힌 유일한 순간이었다.
 

☞새미 리 박사는

 
1920년 8월 1일 프레즈노에서 태어났다. 프랭클린 고교, 옥시덴탈 칼리지를 거쳐 1947년 USC 의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42, 1946년 전국 다이빙 챔피언십 대회에서 우승했고 1948년 런던 올림픽 10m 플랫폼 금메달, 3m 스프링보드 동메달을 획득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10m 플랫폼 금메달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1953년 제임스 설리번 상을 받았으며, 1953~1955년 주한미군 군의관으로 근무했다. 1968년 세계 수영 명예의 전당에, 1990년 미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됐다. 2016년 12월 2일 뉴포트비치 자택에서 영면했다.

임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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