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지도와 교훈이라도,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릴’ 한낱 사소한 잔소리에 불과하다. 특히 우리의 가슴이 시꺼먼 구름으로 싸여 교란 상태이거나 정신이 심히 혼란스러울 때는 더 더욱 남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통 인간의 자아(ego)는 초자아(superego)에 앞서며, 감정과 정서는 이성과 논리, 합리적 사고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와 크고 작은 문제들로 충돌할 때, 우선 침착과 안정을 찾고 나서, 상대방과 연결과 교류를 통해서 마음을 트고, 시야를 열어야 한다. 그러면 보다 이성적으로 초자아를 발휘하여 서로 간에 협력하며 해결책을 모색하게 된다. 말하자면, ‘심신의 규제와 정서적 유대와 합리적 이성’의 세 가지 개념을 내재화하고, 지속적으로 습관화해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먼저 안정을 찾고, 화의 감정이 가라앉은 다음에 비로소 반성, 반추의 사고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정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 상황을 보다 더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해준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만약 어린 아들이 집 안에서 뛰어놀다가 가보인 값비싼 도자기를 깼다고 치자. 부모는 당연히 엄청 화가 날 것이다. 반면에 아이는 이미 상당히 겁을 먹고, 그저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거나 아니면 몸이 얼어붙은 상태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너는 항상 왜 그렇게 부주의하냐!”며 소리 질러 비난하고, 다그치고, 나무라기 쉽다.
하지만 일단 참자. 그리고 아이와 한 5분 내지 10분 정도 거리를 유지하고 떨어져서, 각자 숨을 고를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이제 아이가 눈물도 어느 정도 멈추고 안정을 찾았으면, 아이를 안아주고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해준다. 부모는 이내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무척 미안해하고 있을) 아이와 앞으로의 해결책을 모색하게 된다.
또 다른 예로, 내가 실제로 바로 눈앞에서 우연히 보았던 일이다. 한 딸아이가 계속해서 엄마가 이미 산 샌드위치를 안 먹는다며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엄마는 심하게 생떼만 쓰는 아이에게 절대로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의 작은 ‘손가락 세 개’만 살짝 잡고서, 조그만 목소리로 조곤조곤 달래기 시작했다. 그 엄마는 딸에게, ‘자신이 무엇을 원할 때 상대방에게 요청하는 방법’을 대화로 가르치고 있었다. 이내 엄마와 아이는 포옹을 했고, 아이는 사과주스에 엄마가 작게 잘라준 샌드위치를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이 사건에서 엄마는 몹시 성질을 부리는 아이에게 시종일관 침착하게 대함으로써, 아이와 함께 평온한 오라(aura)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아이의 ‘손가락 세 개’의 끝만을 아주 가볍게 터치해서 아이와의 연결 끈(감정선)을 만들었다. 이는 아이가 자신의 성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엄마 말을 들을 준비가 되도록 도와주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그 아이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깨무는 것을 보고, 괜스레 흐뭇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났던 기억이 난다! 결국 자아가 먼저 심신의 균형을 이루어야 초자아가 타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고, 이해와 수긍을 하고, 조언을 받아들여 비로서 내면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평화는 타인이나 외부적 요인들이 우리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않을 때, 비로소 싹이 트고 꽃을 피운다.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의 역사 자체가 타자의 억제와 통제, 강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자주와 자유를 향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타인에게 조언과 지도를 할 때, 조금 더 조심스럽게 겸손한 자세로 상대방의 상황을 존중해주며 다가가자. 자고로 평화로운 관계의 형성에 있어서 용서와 인내심과 이해는 필수적인 요건임에 틀림이 없다.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