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1980년대 심각한 사회 변동을 겪으면서 발틱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서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약 10년 가까이 감소했다. 원인을 추적한 결과, 자살 인구의 급증 때문이었다. 자살자의 90% 이상이 남성이었고, 특히 리투아니아는 한때 세계 최고 자살률 국가로 기록됐다.
위기의 심각성을 인식한 리투아니아 정부는 지역 곳곳에 정신과 외래 진료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자살률은 줄지 않았고, 치료소를 찾은 환자의 80~90%는 여성이었다. 정작 위험군인 남성들은 상담실을 외면했고, 결국 상당수 시설은 문을 닫았다.
이 실패는 중요한 사실을 드러냈다. 남성들은 ‘도움을 청하는 장소’를 기피했다. 이후 공장과 회사 사무실, 스포츠 클럽, 노조 회의장, 교회 등 남성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공간에 상담사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접근이 바뀌었다. 가족이나 친구가 자연스럽게 남성을 데려오는 구조였다.
1991년 세계보건기구 조사에서도 같은 양상이 확인됐다. 미국과 서유럽에서는 우울증 진단이 많았지만, 정치·사회적 격변을 겪은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진단 비율이 낮았다. 이 지역 남성들은 우울함 대신 분노를 폭발시키며 폭음과 폭력, 도박, 과도한 운동으로 감정을 분출했다. 정신과 치료는 회피했고, “혼자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중독으로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웨덴 정부는 자살 시도자 상당수가 극단적 선택 이전에 가정 주치의를 찾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1994년부터 1차 진료 의사들에게 ‘남성형 우울증’을 진단하는 교육을 실시했고, 특히 고트랜드 섬의 주치의들에게 집중 교육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활용된 것이 ‘고트랜드 남성 우울증 척도(Gotland Scale for Male Depression)’였다. 이 설문은 전통적인 우울 증상뿐 아니라 신경질, 분노, 알코올·약물 사용 등 남성에게 흔한 ‘가면 우울증’을 평가하도록 설계돼, 주치의나 내과 의사도 남성 우울증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게 했다.
필자가 리투아니아 사례를 언급한 이유는, 몇 해 전 미국 의대생용 정신과 교과서에서 “과거에는 리투아니아가 세계 최고 자살률 국가였지만, 최근에는 한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문장을 읽었기 때문이다.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연간 자살자 수를 의미한다. 미국은 자살률이 12에서 14로 오르자 즉각적인 예방 캠페인을 벌였고, 중·고교 학생증에 ‘988’ 위기 전화번호를 인쇄해 많은 생명을 구조했다. 반면 자살률이 미국의 거의 두 배에 이르는 한국은 어떤 예방 전략을 갖고 있는지 묻게 된다.
이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필자는 ‘수잔 정 마음건강 열린 상담실’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많은 환자와 가족들이 치료와 상담에 대해 질문했고, 그 과정에서 필자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여전히 남는 질문은 하나였다. 리투아니아는 어떻게 ‘자살 왕국’에서 벗어났고, 한국도 그 경험을 참고할 수는 없는가였다.
2024년 개정판으로 출간된 Oxford Textbook of Suicidology and Suicide Prevention을 통해 몇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한국 역시 알코올 사용 장애가 광범위하고, 정신과 치료에 대한 불신과 회피가 우울증을 개인의 약점으로 방치하며 자살 위험을 키우고 있다. 가족력이 수치와 금기로 남아 파괴적 문화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우울한 남성의 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 전체를 신체적·정신적 학대에 노출시키고, 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우울과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안고 성장한다. 자살은 그렇게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수십 년 이어진 한국의 음주 문화와 성 불평등, 극심한 빈부 격차를 단기간에 바꾸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울의 신호를 놓치지 않는 시민의식과, 극단적 선택 직전의 순간을 포착해 치료로 연결하는 주치의들의 역할이 쌓인다면, 한국의 자살률도 언젠가는 분명히 낮아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