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6일은 윤동주 시인의 제삿날이다. 그는 광복을 6개월 앞둔 1945년 이날, 스물여덟 푸른 나이에 후쿠오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다시 읽는다. 이 시는 시인이 연희전문대학 4학년인 1941년 11월 20일,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 쓴 시이다.
1941년은 어떤 해였을까. 한 해 전인 1940년 2월, 일제는 조선인에게 한국 고유의 성과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성(氏)과 이름으로 바꾸도록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하지만 조선사람이 따르지 않자, 총독부는 이광수 등 유명인을 동원하여 1940년 8월까지 80%로 끌어 올렸다. 다음은 이광수(카야마 미츠로)가 1940년 2월 20일 자 매일신보에 게재한 글이다.
‘내선일체를 국가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香山)이라는 씨를 창설하였다.’
그래도 일부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따르지 않자 1941년 11월, 총독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제재를 내렸다.
▶자녀에 대해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전학을 거부한다. ▶아동들을 이유 없이 질책 구타하여 아동들의 애원으로 부모들의 창씨를 강제한다. ▶공·사 기관에 채용하지 않으며 현직자도 점차 해고 조치를 취한다. ▶행정기관에서 다루는 모든 민원사무를 취급하지 않는다. ▶창씨하지 않은 사람은 비국민,불량선인으로 단정하여 경찰 수첩에 기재해서 사찰을 철저히 한다. ▶우선적인 노무 징용 대상자로 지명한다. ▶철도수송 화물의 명패에 조선인 이름이 쓰인 것은 취급하지 않는다.
그런 시절이었다. 일제가 막바지로 발악하던 그 암울하고 어둡고 무서웠던 시절에 서시가 발표됐다.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쓴 서문에서 정지용 시인은 “동지섣달 꽃과 같은, 얼음 아래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고 말했다.
시인은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혔다. 일제가 실시한 생체실험의 아바타가 되어 매일 정체 모를 주사를 맞았고, 결국 뜻 모를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이역 땅 감옥에서 숨졌다. 윤동주와 동갑이자 평생 동지였던 외사촌 형 송몽규도 같은 해 3월 7일 같은 감옥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2월, 서시의 마지막 행을 가만히 읊조려본다.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이 남긴 시는 119편이다. 그는 갔지만 그의 시들은 어둠을 밝히는 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