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과 점심 사이가 비어 있어 공백을 메우려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는데 텅 빈 마음만 남았다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어 점심을 만들어 먹기로 결심하고 냄비에 물을 올리고 누룽지를 부숴 넣었다 뽀글뽀글 방울이 오르더니 넘쳐 버렸다 채워도 텅 비워진 것은 어쩔 수 없다 텅 빈 속을 채우려고 텅 빈 공원에 텅 빈 내가 앉아 있다 텅 빈 오후가 텅 빈 하늘에 촘촘히 박혀있다 텅 빈 꽃밭에 하얀 꽃이 피어 가까이 가보니 꾸겨진 종이였다 텅 빈 마음만 도닥이며 돌아왔다 이 텅 빈 시간이 내게 무엇인가를 해줄 거라는 착각은 안 하는 것이 맞다 텅 빈 손을 쥐어본들 텅 빈 마음을 채울 수 없으니까 공수래공수거 맞다 텅 빈 대낮에 불현듯 스쳐 가는 그것도 텅 빈말뿐이었다 마음으로 가늠하고 자로 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텅 빈 아침과 점심 사이
2 움직이는 풍경이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소리가 들려왔다 침묵 속에 들리는 자연의 소리였다 숲길 가장자리를 따라 바람이 운다 바람이 갈대의 긴 목을 껴안고 한쪽으로 기울다 다시 일어나고 다시 쓰러진다 갈대의 춤사위는 텅 빈 들판을 메운다 바람의 지휘에 따라 빈 들은 공연장을 방불케 한다 사람의 거친 손길에 비해 바람의 손은 곱고 부드럽다 온 들을 들썩이게 하는 바람의 힘 그 힘은 물리적인 힘이라기보다 화가의 손길같이 가볍고 섬세하다 파스텔의 질감처럼 몽혼적이다 갈대의 좁은 길을 걸었다 거의 온몸에 갈대를 안고 걸었다 텅 빈 마음에 바람이 분다 움직이는 풍경이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하였다
3 당신의 슬픔이 뼈가 되었다 뼈가 녹아내려 눈물이 되었다 뼈를 녹이는 그 무엇이 있다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말이 없다 생소한 것에 길들여지다 보면 익숙해진다는 게 이유의 전부다 나목의 가지 사이로 새의 둥지가 보인다 텅 빈 둥지엔 새들이 없다 한때 온기와 사랑이 가득한 낙원이었으리라 생명이 깨어나고 어미 품이 그리운 울음이 거기 있었다 텅빈 둥지엔 허기진 바람이 잦아들고 청설모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아기도 한다 더 이상 온기는 온데간데없다 어머니의 부재 후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텅 빈 슬픔이 옹이가 되었다 길들여진 오랜 시간의 촉 사랑을 지켜내느라 견디어낸 기억은 텅 빈 내 마음을 채우는 또 하나의 길이 되었다 갈망은 버려야 할 몸짓이었다 텅 빈은 그대로의 텅 빈으로 채움이지 않은가
4 호수엔 빛들이 별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골목엔 담장 너머 붉게 쏟아지는 장미 창가로 앉은 별빛도 지고 바닥에 떨어지는 장미 넝쿨 고개를 떨구어야 할 시간 이젠 참고 견디는 일만 남겨둔 채 비밀의 정원으로 모이는 기억의 뿌리 이별에 잠시 머물다간 이름이 머리를 누른다 사라지는 연기처럼 몽롱한 기억의 향기 눈 내리는 밤에 늘 눈 쌓인 언덕으로 가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을 쓸쓸함의 시간 손을 꼭 잡은 약속하지 않은 묵언이 있었다 서로의 손짓에 놀라기도 다짐하기도 하는 슬픔이 뼈가 되는 바람에도 시린 텅 빈 (시인,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