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도덕 선생님의 별명은 ‘탱크’였다. 자신이 옳다고 믿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다. 그분이 가장 사랑한 것은 도덕이나 정의가 아니라 자기 반 학생들이었다. 체육대회든 교내 응시 대회든, 자기 반이 관련되면 그분은 탱크였다.
반 대항 축구 경기에서 그분이 자기 반 경기의 심판을 맡은 적이 있었다. 공이 자기 반 학생 발에 맞고 나가도 드로잉은 늘 자기 반 몫이었다. 엉켜 넘어지면 반칙은 상대편 선수, 프리킥은 언제나 자기 반 몫이었다. 어린 나는 혼란을 느꼈다. 정의란, 어쩌면 자기 편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제대로 된 어른을 많이 보지 못했던 나는, 정의와 편파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렇게 자라났다.
그 즈음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영화를 보다가 또 다른 혼란을 겪는다. 어린 주인공은 엄마를 찾아 낯선 나라를 여행하다가, 어른들이 칠면조를 사냥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집단으로 짐승을 몰아 죽이는 모습이 잔인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얼마 뒤, 춥고 깜깜하고 배고픈 상황에 처한 주인공은 길가에 쓰러진다. 하지만 곧 좋은 노부부를 만나 따뜻한 스프를 얻어먹고 살아난다. 그 스프가 아마도 칠면조로 만든 스프였던 것 같다. 방금 전까지 잔인해 보였던 그 칠면조의 죽음이, 이번에는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이 된다. 집단으로 사냥하면 잔인하고, 한 마리 잡아 끓이면 따뜻해지는 것인가?
이 혼란은 인디언의 사냥 이야기를 접하며 조금은 풀렸다. 그들은 필요한 만큼만 잡는다고 한다. 딱 먹을 만큼만 사냥하고, 팔기 위해 더 죽이지 않고, 재미로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냥도 돈도 생존을 위해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충족이 되면 멈출 줄 아는 절제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늘 절제가 승리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정도를 지키려 했던 인디언들은 탐욕스러운 세력에 의해 정복당했고,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정의와 절제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한국의 정치판을 보면 돌아가신 탱크 선생님이 떠오른다. 같은 잘못을 상대편이 저지르면 정의의 칼날을 들이대고, 똑같은 행동을 자기 편이 하면 한없이 관대해진다. 편이 바뀌면 정의가 바뀐다. 고국의 판사들이 최근 계엄령을 놓고 전직 대통령과 국무총리에게 내린 엇갈린 판결을 보며 어른이 되어 세상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내리는 공적인 판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느낀다. 법과 정의의 이름 앞에서는 자기 편을 잠시 잊어야 한다. 정의는 내 편이나 자신의 소영웅주의를 지키는 일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정의는 내가 속한 편을 넘어서고, 내 인기를 생각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매일 매일의 인간사는 그냥 무조건 내 편인 누군가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고객 중에는 내가 “우리 회사”라는 표현으로 고객의 회사를 불러 주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자기 편이 되어 준다고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어머니는 평생 호텔에서 청소 일을 하시며 다섯 자녀를 키우셨고, 어렵게 평생을 모은 돈으로 경기도 외곽에 작은 아파트를 장만하셨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까지 짐을 들고 올라갈 때면 나는 힘들다고 투덜거렸다. 지금은 돈을 내고 일부러 운동을 하러 다니면서, 그때 무조건 어머니의 편이 되어드리지 못했던 아들이 얼마나 서운하셨을까.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셨다면, 아무리 술을 먹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고 꾸짖으셔도 오늘만은 무조건 그 분의 편이 되어드리고 싶다. (변호사, 공인회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