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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도산 안창호, 한인 교회의 씨를 뿌리다

Los Angeles

2026.03.10 20:17 2026.03.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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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희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조한희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사무총장

3월 10일은 민족의 위대한 스승 도산 안창호 선생의 순국 88주기였다. 그런데 많은 한인이 도산을 조국 독립에 일생을 바친 위대한 애국자이자 민족 지도자로만 기억한다. 하지만 도산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미주 한인교회의 씨를 뿌린 개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도산이 기독교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895년 무렵이었다. 청일전쟁 직후 상경한 그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하고 밀러 선교사(F.S. Miller, 민노아)가 운영하던 구세학당(예수교학당)에 입학하면서 복음을 접했다. 도산은 학교의 접장으로 일하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고, 예수교에 입교한 후 곧바로 기독교 진리를 전도하는 일에 헌신했다. 도산은 신앙을 받아들인 후 고향으로 내려가 21세의 나이에 점진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회를 개척하며 전도에 힘썼다. 특히 서당 훈장이었던 유학자 장인 이석관을 끈질기게 설득해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아내가 될 이혜련이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기독교와 신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이끌었다.
 
1902년 제중원(현 세브란스 병원)에서 밀러 선교사의 주례로 결혼한 도산과 이 여사는 곧장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이 여사 역시 평생을 교회에 헌신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도산이 독립운동을 위해 전 세계를 떠도는 동안, 그녀는 백인 가정에서 가사 도우미와 삯바느질을 하며 5남매를 키우고 한인 부인단체를 조직해 독립자금을 모았다. 부부의 굳건한 신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가시밭길이었다.
 
1902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이국땅에서 인삼 판매 구역을 놓고 상투를 부여잡고 싸우는 동포들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하게 된다. 이에 도산은 동포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1903년 9월 23일, 9명의 한인과 함께 ‘친목회’를 조직하고 가정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미주 본토 최초의 한인 교회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샌프란시스코 한인연합감리교회)’의 기초가 되었다.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는 지금도 도산을 창립자로 기리고 있다. 도산은 스스로 예수교인으로 살고자 노력했을 뿐 아니라, 방황하는 한인들을 신앙으로 다잡으며 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사회를 만들어 나갔다.
 
1904년 로스앤젤레스 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한 후에도 도산의 신앙적 개척은 계속되었다. 그는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을 이끌며 캘버리 장로교회와 협력 한인장로선교회를 설립하고 한인들이 예배와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오렌지 한 개를 정성껏 따는 것도 나라를 위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도산의 철학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골 3:23)는 성경적 직업 소명설의 철저한 실천이었다. 도산의 지도 아래 한인들은 술과 도박을 끊고 주일마다 예배당에 모였으며, 미국인들은 “당신네 나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왔소”라며 놀라워했다. 이를 바탕으로 파차파 캠프의 한인 공동체는 미국 사회로부터 깊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주목해야 할 점은 도산의 신앙이 철저하게 ‘현실 참여적’이었다는 사실이다. 100년 전 일부 선교사들은 “세상일을 멀리하고 오직 예수만 믿어야 천당 간다”며 어려운 국가적 현실을 외면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도산은 이를 비판하며, 기독교의 복음과 사랑이 개인의 구원을 넘어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하는 실천적 힘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가 1913년 창립한 ‘흥사단’의 입단식이나 서약례 등은 모두 기독교의 세례 문답과 의식을 본뜬 것이었으며, 조직 운영 역시 교회의 민주적 원리를 바탕으로 삼았다.
 
100년 전 시인 김동환은 도산을 구약성경 속 눈물의 선지자인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불렀다.  도산은 조국과 동포를 위해 밤을 지새우며 회개하고 기도했던 참된 신앙인이었다. “우리 2000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 가지는 날에 우리 민족의 희망이 있다”고 부르짖었던 그의 외침 속에는, 성경의 윤리와 십자가의 사랑만이 분열된 민족을 치유할 수 있다는 굳건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도산의 순국 88주기를 맞이한 지금, 한인 교회들은 역사적 뿌리를 깊이 되돌아보아야 한다. 오늘날 한인들이 누리는 이민 교회의 따뜻한 교제와 울타리는 결코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시작점에는 동포들의 척박한 삶을 보듬고 예배의 자리로 이끌었던 도산의 눈물 어린 헌신과 기도가 깃들어 있다. 그런데 지금의 한인 교회들은 도산 안창호 선생을 너무 멀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거짓을 버리고 참되기를 힘쓰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 그리고 파벌을 뛰어넘어 서로를 용납하려 했던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인 사회와 모든 한인 교회 위에 온전히 회복되기를 소망한다. 도산 안창호, 그는 진정 미주 한인 교회의 거룩한 씨를 뿌린 위대한 신앙의 선배였다.

조한희 /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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