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잠복기를 거치지 않고 / 감기처럼 다가온 슬픔이 있네 // 나도 가장 먼곳에서 / 눈이 펑펑 내리는 수풀 속에서 / 네게로 가는 길을 찿는 한마리 짐승처럼 / 묵음으로 돌아오는 메아리가 되였네 // 호수의 건너편 그늘아래 / 떨어진 별들이 모여 산다는 / 가난한 마을로 가는 노을은 / 마을의 한자락을 빌려 집을 지었네 // 별의 집은 오각형으로 / 노을의 집은 사각형으로 / 나의 집은 슬픔이 몰래 쉬어가는 곳에 / 눈 뜨면 밀려오는 은빛 비늘을 엮어 / 둥글게 담장을 둘렀네 / 고양이 발톱처럼 살포시 다가온 슬픔이 / 위로가 된 깜깜한 밤이 거기 있었네 / 마지막 기차는 별들의 집으로 떠나가고 / 기차바퀴 소리에 멀어져 가는 슬픔이 / 남겨진 바람의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네 // 주인 없는 들꽃 한다발을 남겨두고 / 떠나간 철길 반대로 긴 발자국만 남겨 두었네 / 둥굴게 울타리를 둘른 집은 멀고 / 오래 잠복기를 거치지 않고 / 감기처럼 다가온 슬픔이 거기 남아 있었네
깊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그 사람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어느 새 내 속마음을 자연스레 표현하게 된다. 사람은 영물이어서 겉치레로 하는 말과 마음에 담은 말의 차이를 인지할 수 있다. 늘 행복한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도 때로는 깊이 숨겨두었던 아픈 이야기도 나누게 된다. 그때 행간의 거리는 좁혀지곤 하였다. 언어의 온도는 몸의 온도를 가늠하게 된다. 아니 마음의 온도라고 말하는 편이 맞을 듯하다. 오래 만나고 계절을 보내고 새봄을 맞이한다 해도 서로에게 울림이 없다면 스쳐가는 지나침이 될 뿐이다. 귓바퀴를 돌고 가는 소리같은, 바람처럼 벌써 흩어져 가는 기러기 울음 같은 공허로 내 것이 아니게 될 뿐이다.
3월의 마지막 토요일 아침이다. 실내에서 입던 옷 그대로 신문을 가지러 밖으로 나왔다. 아직 서늘한 바람이 머리를 맑게 한다. 공기의 무게라할까? 질량이 촘촘한 파란 하늘이 서쪽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겨우내 떨어진 잔가지와 눈에 쌓여 축축해진 나뭇잎들을 주으려 뒤란으로 간다. 수북히 쌓인 솔잎 사이로 아네모네 싹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바닥에 깔린 초록잎들 사이로 두어개 보라색 꽃이 숨어서 피었고 슬픔은 뻐근한 행복 뒤에도 온다. 부끄러운 고백 속에서도 창문을 여는 슬픔이 있다. 숨기려 해도 어느새 드러나는 진실 속에서도 슬픔의 꽃은 자란다. 너무 벅차서 이 작은 우주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한낮의 봄볕은 따뜻하다. 멀리서 하얀 연기를 달고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섰다. 몇 사람은 기차에서 내리고 가방을 들고 짐보따리를 이고 몇사람은 황급히 기차를 탔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간이역 벤치에 나는 앉아 있었다.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며 플렛홈을 빠져 나갔다. 기차의 꼬리 부분이 지평선에서 자취를 감추고서도 멀리서 기적소리는 한동안 귓전을 맴돌았다. 조금 전까지 벤치 모서리에 앉아 짐을 매만지던 아주머니도, 잘 차려 입은 훤칠한 남자도, 가방을 가슴에 품고 고개숙인 볼이 불구스레한 소녀도 기차와 함께 사라졌다. 다시 혼자가 되었다. 슬픔의 그림자가 간이역에 가득했다. 손에 든 시집과 노트를 챙겨 나도 벤치에서 일어났다. 철길 반대로 걷는다. 주인 없는 들꽃이 나를 반긴다. 하염없이 걷는 길 아닌 길을 걷고 있다. 둥굴게 울타리를 두른 집은 여기서 멀고 별을 보러 가자는 위로가 되었던 시간이 거기 있었다. 그는 무릎을 세우고 별의 호흡을 따라 큰 숨을 들이쉬고 누군가는 창문을 열고 붓끝 초록 물감을 하늘에 푼다. 까만 밤 가득히 슬픔이 되어버린 별들이 떨어지고 있다. (시인,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