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더듬는 현대인의 손길은 기도서를 찾는 수도자처럼 경건하면서도 다급하다. 우리의 첫 시선은 하늘이 아니라 화면을 향한다. 밤사이 인공지능은 수억 건의 데이터를 학습했고, 알고리즘은 우리가 오늘 무엇을 보고, 무엇을 사고, 무엇에 분노할지까지 미리 계산해 둔다. 우리는 그것을 편리함이라 부르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계산이 우리의 선택과 욕망의 방향을 조용히 설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세상은 인간의 결정보다 기계의 추천에 더 빠르게 반응하는 ‘기술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성경 창세기 4장에는 기술의 시조라 불리는 두발가인이 등장한다. 그는 가인의 후손으로, 구리와 철로 기구를 만든 인류 최초의 기술자였다(창 4:22). 금속 기술의 등장은 인류 문명의 궤도를 바꾼 혁명이었다. 돌과 나무의 시대를 지나 철의 시대로 진입하며 농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도시는 확장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은 더욱 치명적으로 변했다. 기술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류에게 풍요와 파괴라는 양날의 검을 쥐여주었다.
오늘날 실리콘밸리는 고대의 대장간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철을 녹여 도구를 만들던 두발가인처럼, 현대의 기술자들은 데이터라는 광석을 정제해 알고리즘이라는 도구를 단련한다. 철이 쟁기와 칼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낳았듯, 알고리즘 역시 생명을 살리는 의료 혁신과 사회를 감시하는 시스템 사이에서 양극단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실제로 추천 알고리즘은 개인의 취향을 정교하게 맞추는 동시에, 특정 정보만을 반복적으로 노출해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기도 한다. 또한 일부 인공지능 시스템은 편향된 데이터를 학습하여 채용이나 금융 심사에서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문제를 드러내기도 했다.
기술은 중립적인 도구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색채는 결국 설계한 인간과 사용하는 인간의 의도에 의해 결정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술의 진보가 인간성의 성숙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는 ‘윤리적 지체’의 문제다.
성경은 두발가인이 속한 가인의 계보를 폭력과 교만이 극에 달한 시대로 묘사한다. 그의 아버지 라멕은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라고 노래하며 칼의 힘을 자랑했다(창 4:23).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인간이 더 선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교하게 악을 실행할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늘날에도 익명성 뒤에 숨은 사이버 폭력, 혐오를 증폭시키는 콘텐트, 그리고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시스템은 이 오래된 문제의 현대적 반복일 뿐이다. 기술의 속도는 빛과 같지만, 인간의 내면은 여전히 탐욕과 편견의 그림자에 머물러 있다.
결국 기술은 문명을 가속할 뿐,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두발가인은 철을 제련했지만 인간의 마음까지 제련하지는 못했다. 오늘의 혁신가들 역시 놀라운 알고리즘을 설계하지만, 인간 존재의 의미와 방향까지 제시할 수는 없다. 기술은 삶을 편리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삶의 목적을 대신 정의해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정보 처리 능력이 아니라, 기술의 흐름 속에서도 인간의 자리를 지켜내는 깊은 통찰이다. 알고리즘이 쉼 없이 흘러가는 화면 앞에서, 때로는 멈추어 한 문장을 오래 붙들고 사유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고요한 사유의 공간에서야 비로소 기술의 소음에 묻혀 있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기술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인간의 보폭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비로소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존재로 설 수 있게 된다.
이제 질문은 분명하다.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도구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인가. 도구를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인간을 만드신 분은 따로 계신다. 문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알고리즘이 아니라, 그분 앞에 무릎 꿇는 인간의 영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