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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이야기] 큰 나무, 큰 사람

Los Angeles

2026.04.27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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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언론인

김용현 언론인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을 때다. 어느 해 겨울인가, 딸네 집에 다니러 왔다가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아미쉬 마을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문명을 거부하고 그들이 믿는 종교에만 몰입하며 단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옛날 그들의 조상이 그랬던 것처럼 마차를 타고 검은 옷을 입고 다니며 철저하게 세상과 단절된 생활을 하는 그 공동체를 보고 오는 날, 나는 어렸을 적 불렀던 이원수 선생의 동요 ‘겨울나무’를 부르고 있었다.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쌓인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는 추운 겨울을…’. 노래처럼 고독하고 쓸쓸하게 사는 아미쉬 마을의 사람들이 바로 그 겨울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뉴저지로 옮겨와 봄, 여름, 가을, 겨울 동안 많은 나무와 친구를 하며 살면서 나무를 고립과 은둔의 상징으로만 생각한 것이 잘못인 걸 깨닫는다. 뉴저지는 차를 운전하고 다니거나, 공원과 산책로를 걷거나, 눈에 들어오는 주변 곳곳이 울울창창 나무다.
 
봄은 없이 여름으로, 때론 초겨울 날씨 같은 황당한 기상이변 속에서도 나무들은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처럼 일제히 연초록색 교복으로 갈아입었다. 좀처럼 세상을 따라가지 않던 큰 나무들도 교복에는 동참한다. 이곳 뉴저지 중부지역에는 낙엽 활엽수들이 많은데 뉴저지의 스테이트 트리인 붉은 참나무를 비롯해 소나무, 단풍나무, 밤나무들이 주종을 이루는 가운데 개나리와 벚나무, 매화, 목련 나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꽃 피우기에 한창이었다.
 
주 전체면적의 40%가 산림 지대인 뉴저지는 나무와 숲을 보호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다각적인 산림보호정책을 쓰고 있다. 특히 어느 동네에선 한 집이 3에이커, 5에이커씩 가진 넓은 사유지를 행여 용도 전환 할까 봐 ‘산림 유산 프로그램’을 만들어 교육과 기술, 자금까지도 지원하며 산림을 보존하고 생태계를 보호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나무를 키우고 보호하는 일을 사람을 키우는 일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무가 있어 땅이 살고, 땅이 있어 사람이 사는 공존의 세상이다. 인근의 한 수목원에서는 ‘더 빅 트리 투어(The Big Tree Tour)’ 라는 행사를 하고 있었다. 뉴저지에서 수령이 가장 오래된 나무와 보존 상태가 좋은 나무를 둘러보는 것이다. 특별히 큰 나무가 탄소 저장능력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기후위기에 잘 대응하며 산사태 예방과 다양한 생물의 서식지를 제공하고 그늘을 드리워 도심을 냉각시키는 등, 작은 나무에 비해 역할을 크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한때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큰 나무, 큰 산, 큰 그릇, 큰 인물’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큰 인재를 육성하자는 목표를 내건 적이 있었다. 큰 나무의 생태학적인 장점만이 아니라 그 나무가 가진 공생과 협력의 품성, 그 큰마음이 배울 만하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요 ‘겨울나무’도 2절의 가사가 1절보다 더 뜻이 깊다. ‘평생을 살아봐도 늘 한자리 넓은 세상 얘기도 바람께 듣고 꽃 피던 봄여름 생각하면서 나무는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
 
낯선 길이라 조심스럽다며 3년 동안 운전을 쉬고 있던 아내가 이제 운전대를 잡았다. 모처럼 옆자리에 앉아 나무들이 도열한 산길을 여유롭게 지나다니면서 몇십년, 어쩌면 백 년도 넘는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나무들을 보며 경외심마저 느낀다. 그 큰 나무들은 지금 넓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쟁 얘기를 바람결에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국은 큰 나라다. 2차 대전 이후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 질서를 선도해온 선한 나라였다. 큰 나라의 지도자는 동맹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협량보다는 공공재적 가치와 신의를 지킬 수 있어야 하며 정권의 유지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대륙횡단 할 때 마운트 러시모어에서 보고 온 4명의 큰 바위 얼굴들이 새삼 떠오른다.
 
큰 나무는 바람이 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유연하게 서 있으며,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고 있다. 스스로 큰 나무가 되지 못한 대신 내게는 인생에서 본받고 싶었던 큰 나무 같은 어른이 몇 분 계셨다. 그런데 세월이 무상해 한분 두분 떠나시고 만다. 아, 세월이, 세월이….

김용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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