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저녁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의 다운타운으로 몰려온다. 저녁 7시에는 가족 단위 행사가 열리고, 밤 12시가 되면, 새해맞이 카운트와 함께 도토리 드롭(Acorn Drop) 행사와 불꽃 놀이를 진행하여 도시의 새해를 시작한다.
'참나무의 도시(City of Oaks)'로 불리는 랄리(Raleigh)만의 새해 맞이다. 타임 스퀘어의 규모와 유명세를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자칫 비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작은 도토리 하나에 랄리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다. 이름도 생소한 ‘랄리’는 어떤 매력이 있어 미국에서 살고 싶은 도시로 늘 꼽힐까?
랄리는 16세기 영국 탐험가 월터 랄리 경(Sir Walter Raleigh)에서 이름을 따와 1792년 12월 31일 공식 설립되었다. 재밌는 사실은, 월터 랄리 경은 정작 이 땅을 한 번도 밟아본 적이 없다. 이곳은 처음부터 주도로 계획된 도시로, 다른 도시들은 먼저 생긴 후 주도가 된 것과 달리, 랄리는 시작부터 노스캐롤라이나의 주도였다.
도시 설계도 독특했다. 당시 대부분의 도시들이 자연을 정복하여 발전했지만 랄리는 참나무를 베지 않고 나무들을 중심으로 도로와 광장을 설계했다. 개발이 자연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맞추어 도시가 들어선 것이다. 그 덕에 '참나무의 도시(City of Oaks)'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별명에 맞게 이곳에는 녹지 공간이 많다. 도시 안에만 200개가 넘는 공원이 있고, 그린웨이(Greenway)라는 산책로 네트워크가 100마일 이상 조성되어 있다. ‘자연과의 가까운 거리’, 랄리의 매력 중 하나이다.
먹고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먹고 살려고”라는 변명은 어느 정도 사람들의 눈을 감게 만든다. 자연이 좋아도, 먹고살 것이 있어야 사람들은 그곳에 산다. 랄리에는 ‘일자리’가 있다. 이곳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리서치 트라이앵글(Research Triangle)’이다. 랄리, 더럼(Durham), 채플힐(Chapel Hill) 세 도시를 잇는 이 지역은 기술 기업 4,000개 이상, 생명과학 기업 600개 이상이 밀집한 곳으로, 구글·시스코·오라클·화이자·바이오젠·피델리티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거점을 두고 있다.
이 삼각형의 힘은 세 도시에 자리한 명문 대학에서 나온다. 랄리의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NC State), 더럼의 듀크 대학교, 채플힐의 UNC가 끊임없이 인재를 공급한다. 그리고 이 대학들을 중심으로 ‘리서치 트라이앵글 파크(RTP)’라는 대규모 연구단지가 형성돼 있다. 랄리는 미국 내에서도 고학력 인구 비율이 높은 도시로 꼽히며, 기술·의료·연구 분야 일자리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그 결과 랄리의 실업률은 3.3%로 전국 평균 4.2%를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일자리를 찾아 이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매년 수만 명에 달하니, 이 또한 랄리의 매력이다.
‘살만하다’고 생각하려면 ‘평안’한 집이 있어야 한다. 랄리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집값도 올랐다. 최근 기준 중간 주택 가격은 약 45만 5,000달러로 만만치 않다. 월세는 원룸이 약 1,325달러, 방 1개짜리 아파트는 1,577달러 수준이며, 식료품 물가는 전국 평균보다 8% 낮다. 가구소득은 약 8만 2천 달러 수준으로, 미국 평균보다 높은 편이다. 월평균 주거비는 1,446달러 수준이니, 수입 대비 주거 부담이 같은 조건의 다른 대도시권(샌프란시스코, 오스틴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같은 예산으로 더 넓은 집을 구할 수 있고, 출퇴근 시간도 더 짧다. 바로 ‘가성비 있는 삶’이다. 단순히 싸다는 의미가 아닌, 지불하는 비용에 대비하여 삶의 만족도가 높다. 무리하지 않아도 유지 가능한 삶이다. 랄리의 한 시민이 이런 말을 했다. “여긴 성공을 포기하는 도시가 아니라, 성공 때문에 사람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도시입니다.”
마음 편히 지내려면 ‘안전’해야 한다. 해가 지면 들리는 사이렌 소리, 동네 곳곳에 있는 그래피티(graffiti), 아침 신문에 항상 실려 있는 사고 소식 등. 자연이 있고 일자리도 있고 집이 있어도 안전하지 않다면 살기가 꺼려진다. 더더욱 남부 도시들의 고질적인 문제 중 하나가 치안이다. 2024년 랄리의 폭력 범죄 발생률은 인구 10만 명당 270건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주 평균 410건, 전국 평균 380건을 크게 밑돈다. 2024년 기준 미국 대도시 중 가장 안전한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랄리는 ‘남부의 스미소니언’이라 불릴만큼 무료 박물관과 갤러리가 풍부하다. 노스캐롤라이나 미술관은 옥외 공원과 고대부터 현대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컬렉션을 자랑하며, 노스캐롤라이나 자연과학 박물관과 마블스 어린이 박물관도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매년 열리는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박람회(State Fair)는 100만 명 이상이 찾는 지역 최대 연례 행사다. 거기에 앞서 언급한 도토리 낙하 행사는 이곳만의 소소하고 따뜻한 전통이다. ‘안전’하기에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것 또한 랄리의 매력이다.
랄리에는 연간 약 1,900만 명의 방문객(2023년 기준)이 찾아온다. 와봤더니 마음에 들어 눌러 앉는 사람도 많다. 참나무를 베지 않고 도시를 세운 사람들의 철학이 23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쉬는 도시. 바보 같은 고집이 만들어낸 도시의 멋이 있다. “도토리에서 거목이 자란다(Mighty oaks from little acorns grow)”. 랄리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 문장이, 랄리를 정의하는 가장 정확한 한 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