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과 절벽에 둘러싸여 있던 소년 왕의 눈빛은 외롭고도 선했다. 수양대군은 1453년 계유정란을 일으켜 문종의 유언으로 어린 왕을 보위하던 원로대신들을 제거하고, 이들과 뜻을 같이한 안평대군을 역모로 모함한다. 그는 또 거짓 어명으로 살생부에 적힌 반대파들을 죽이며 실권을 잡는다. 수양대군이 왕이 되자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사육신은 신체를 찢는 거열형 등의 극형을 당했는데, 그들의 통한의 심정은 글로 남아있다.
이개는 ‘저 촛불 날과 같아서 내 속도 타는 줄 모르네/ 뼈마디가 녹아내려 재가 되어 흩어져도/ 임 향한 이 내 마음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네’ 라고 비분강개를 토했고, 성삼문은 낙랑장송으로, 박팽년은 야광명월로 굳은 절의를 보였다. 유응부는 ‘하물며 못다 핀 꽃’으로 단종의 처지를 슬펴하였다.
또한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라는 불후의 작품은 시어마다 애절함을 품고 있다. 이 글은 당시엔 세상에 나올 수 없었지만 영월 사람들이 전하고 외우고 있는 것을 중종 때 김지남이 한문으로 된 단가로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연려실기술, 제4권〉에는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에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라는 기록이 있는데, 아무튼 왕방연이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성종 때 사림파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은 훗날 세조의 공신들이 중심인 훈구파에 의해 피바람을 몰고 온다. 세조의 불의를 중국 초나라 항우에 빗댄 글이라 하여 사림파 선비들은 대거 죽임을 당한다. 세조는 14년 재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공적을 쌓았지만 두 동생에게 사약을 내리고, 조카를 죽였기에 그의 패륜은 심판받아야 했고, 도덕성을 중시하던 사림파는 영월의 노산군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왔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세조실록 1457,10,21〉에는 세조 3년 양녕대군과 정인지가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과오를 지적하고 처형을 상소했을 때 세조는 처음엔 ‘불가하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이를 윤허했다고 되어 있다. 이어 ‘노산군은 이를 듣고 스스로 목메어 졸하니, 예로써 장사 지냈다’ 라고 기록됐다.
또 〈중종 실록 1516,12,10〉에는 ‘…고을 사람들이 군왕의 묘라 부르므로 비록 어린이들이라도 식별할 수 있었고, 사람들 말이 “당초 돌아갔을 때 온 고을이 황급하였는데, 고을 아전 엄흥도란 사람이 찾아가 곡하고 관을 갖추어 장사했다”하며, 고을 사람들이 지금도 애상스럽게 여긴다’다고 신상이 눈물 흘리며 중종께 아뢨다는 내용이 나온다.
단종 사후 60년이 지나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단종의 죽음이 밝혀지면서 엄흥도의 존재가 드러났다. 영조와 정조는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높이 예우했으며, 고종은 시호를 내려서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다.
앞에서 보듯 선비들의 비분강개는 글로 뚜렷하게 남아있지만 글줄과 인연이 먼 민초들의 행적은 허공에 떠돌아 입으로 전해질 뿐이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의 이야기는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의 행적이 어떠했던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데 있다.
마을 사람들의 증언이 역사적 진실을 밝혀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단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픽션으로 희화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향토사학자들의 관점이 궁금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