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에서 막 대학에 입학했을 때 일이다. 선배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같은 대학에 먼저 다니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본능적으로 나갔다. 학교생활뿐 아니라 훗날 직장생활과 사회생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느 날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선배 한 분이 전화를 걸어 대뜸 여의도로 나오라고 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일하던 분이었다. 갔더니 설문지 한 다발을 주며 학교에 가서 학생들에게 설문을 받아 오라고 했다. 선배라는 이유만으로 며칠 동안 학교를 돌아다니며 설문을 받고, 그것을 다시 그분에게 가져다 주었다. 꽤 많은 일을 했지만, 돌아온 것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또 다른 대학 선배는 나에게 소위 '학습'을 시켜 주었다. 그는 당시 총학생회와 전대협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매주 읽을 책을 정해 주고 카페를 옮겨 다니며 김일성의 주체사상과 사회주의를 설명했다. 선배라는 이유로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었지만, 솔직히 나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훗날 그는 이른 바 '중부지역당 사건'에 연루되어 남파 간첩 혐의로 7년간 복역했다. 지금은 프랑스에 살면서 한국의 젊은 학생들이 찾아오면 여전히 '자주'와 '주체사상'을 이야기한다고 들었다.
이 두 사람은 참 극단적이다. 한 사람은 재벌과 기업을 대변하는 경제 단체 간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지금도 사회주의를 믿는 강성 좌파였다. 그들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도움이나 기회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면 생각도 좁아진다. 반대로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면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세상을 입체적으로 다양하게 볼 수 있게 된다.
나는 인맥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인맥에 대한 환상을 믿지는 않는다. 정말 소중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대개 공정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내가 개인적으로 가깝다고 해서 특별히 나를 봐 주지 않는다. 판사라면 나와의 친분 때문에 판결을 바꾸지 않을 것이고, 공무원이라면 아는 사람이라고 해서 규정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무조건 나를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의 대부분은 나에게서 더 큰 도움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거나, 아니면 원칙을 무시할 만큼 부패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인맥 때문에 특별히 유리한 결정을 내려주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을 할 가능성이 높고, 그런 사람은 결국 중요한 자리에 오래 남기 어렵다.
나는 이것을 '인맥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정말 영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은 인맥 때문에 나를 도와줄 수 없고, 인맥 때문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대개 그만큼 훌륭하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인맥을 넓히는 것보다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명함을 수백 장 모으는 것보다, 오랫동안 신뢰할 수 있는 친구 한 명을 곁에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인맥은 성공의 지름길이 아니다.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은 생각의 폭을 넓혀주고, 때로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준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진짜 이유는 그에게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통해 더 넓고 다양한 시각을 배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이익이나 도움을 받기 위한 사람이 인맥이라면, 인맥은 필요 없다. 하지만 다양한 시각을 갖게 하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인연이라면, 인연은 여전히 필요하다. (변호사, 공인회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