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 되면 으레 8.15 광복절 기념행사가 이어진다. 1945년 8월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지만,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이끈 날은 1944년 6월 6일이었다.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이다. 흥미롭게도 LA 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노먼디(Normandie) 애비뉴’가 바로 이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고 있다. 1884년 건설된 이 도로는 원래 ‘로즈데일 애비뉴’로 불렸다가 1898년 ‘노먼디’로 개명되었다. LA에서 토런스에 이르는 22.5마일(약 36.2km)의 긴 도로는 여러 도시를 관통하며 발전했다. 도로명 표기는 영어식 ‘Normandy’가 아닌 프랑스어 ‘Normandie’를 사용하는데, 이는 연합군이 나치 독일로부터 프랑스를 해방시킨 역사적 맥락을 상징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6월 6일,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연합군이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감행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다. 전문가들은 상륙작전이 어려운 지형과 불안정한 날씨 때문에 이 작전을 반대했다. 실제로 작전은 여러 차례 연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고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 상륙작전은 북서 유럽 해방의 서막이자 서부전선 승리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이 있었기에 1945년 8월의 종전이 가능했다. 이 작전은 훗날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토대가 되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상륙이 어려운 인천의 지형 때문에 많은 군사 전문가들이 작전을 반대했으나, 맥아더 사령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사례를 들어 이들을 설득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영화로도 여러편이 만들어졌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등 20여 편이 넘는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 미국내 8개의 노르망디 시(City)가 있다. 미국에 노먼디 공원이나 노먼디 도로도 많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지명들이다. 이렇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사랑받고 화두가 되는 이유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전이자 세계 역사를 바꾼 전쟁이어서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과학과 합리성을 믿었던 현대주의를 몰락시키고 포스트모더니즘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상식, 지성 그리고 과학을 믿고 인간의 합리성을 믿었던 현대주의는 두 전쟁을 거치면서 인간에 대한 처절한 불신을 갖게 된다. 모두가 죽는 전쟁을 일으켜 멀쩡한 이웃을 죽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인류가 절망함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출현했다. 노르망디 작전은 단순히 군사적 성공을 넘어, 기도로 승리한 작전으로도 기억된다. 영국은 6년간의 전쟁 기간 중 7번의 ‘국가 기도의 날’을 선포했는데, 그 마지막 일곱 번째 기도의 날이 바로 노르망디 작전을 위한 것이었다. 작전을 앞두고 장병들 앞에서 행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마지막 연설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장병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이 위대하고 고귀한 작전을 수행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이젠하워는 참모들과 함께 작전 지역을 마지막으로 순시하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신념과 기도가 함께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광복절 애비뉴 노르망디 상륙작전 광복절 기념행사 로즈데일 애비뉴
2025.08.13. 18:43
2023년 4월 10일, 영국에서 도버 해협을 관통하는 기차, 유로스타를 타고 프랑스 북부 릴역에 도착했다. 대형버스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 캐롤은 영국인이었고 나머지 스무 여덟 명은 미국인이었다. 그 중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매년 100만 명이 방문한다는 프랑스 북부 브리타니아, 노르망디가 여행 목적지였다. 프랑스의 전형적인 이 시골 지방은 2차 대전 때 상륙작전이 있었던 격전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내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인천상륙작전이 더 익숙했다. 6.25 전쟁 때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맥아더장군이 떠오른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면 라이언 일병이 떠오르는 걸 보니 나는 미국 시민권자 이지만 이방인임이 분명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공격에 나선 작전이다. D-Day는 1944년 6월6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고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미국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며 이곳을 그들이 많이 찾는 이유라고 한다. 프랑스의 시골은 고적했다. 내게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창밖으로 유채꽃 밭이 서너 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졌다. 이 지방 유채꽃으로 짠 식용유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가이드가 알려 준다. 산등성이까지 펼쳐진 네모난 노란 양탄자들이 끝에 가서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량의 기름이 나올 듯한 유채꽃 밭이다. 구름 사이를 뚫고 간간이 내리쬐는 햇볕까지도 노란색이었다. 노르망디 해변이 가까워 올수록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검은 하늘이 심상찮아 보였다. 나는 패딩 재킷 위에 방수 재킷을 껴입었다. 주차장에 내리자 강한 비바람이 우산을 날려 버렸고 우리를 떠밀어 광활한 해안으로 안내했다. 과연 프랑스 북부의 날씨는 소문대로였다. 나는 그렇게 차가운 비를 처음 만났다. 얼음물이었다. 노르망디 해안의 길이는 약 50마일, 5개의 해변이 연결돼 있었다. 그 중 유타와 오마하 해변이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 보이는 오마하 해변에는 집채만 한 시커먼 시멘트 덩어리가 군데군데 섬처럼 거리를 두고 떠 있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뚫리자 싣고 온 전쟁 물자를 해안으로 운반하기 위해 연합군이 바닷물 위로 만든 도로였다고 한다. 참혹한 전쟁의 잔해가 거친 풍랑으로 오랜 세월 동안 갈라지고 쪼개져 저렇게 조금씩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D-Day, 한국전쟁에 동원되었던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스무 살 가량의 병사들이 배에서 내려 독일군이 퍼부어 대는 총알을 몸으로 막으며 해변을 향해 달려갔다. 해변에는 독일군이 모래에 꽂아 둔 사람 다리길이만한 쇠창들과 지뢰와 철조망들이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옆에서 뛰던 전우가 포화에 쓰러지자 그의 시신을 급하게 모래로 덮고 머리 쪽에 그의 총을 거꾸로 세웠다. 그리고 개머리판에 군모를 씌워 무덤을 표시 한 후 다시 해변을 향해 달렸다. 그날 하루 1만여명의 미군이 이 해변에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모래 위에 세운 총에다 군모를 씌운 사진은 나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사막에 묻힌 어떤 군인의 사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래는 사막의 것이 아니라 여기, 내가 밟고 있는 노르망디해변의 모래였다. 아직도 모래밭에는 피처럼 검붉게 녹슨 쇠창들이 궂은 날씨를 원망하듯 비스듬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노르망디 미군묘지기념관(the Normandy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in France)에 도착했다. 여전히 하늘은 시커먼 구름으로 무겁게 덮여 있다. 다행히 바람이 조금 잦아들어 173에이커의 공원묘지는 정갈하고 평온해 보였다. 검색대를 통과해 기념관 안에 들어섰다. 군복을 입은 채 미소 짓는 수많은 어린 병사들의 흑백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지금과 달리 그들은 징집된 군인들이었다. 낯선 나라 해변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을, 그들의 운명에 가슴이 먹먹해 졌다. 묘지에는 프랑스에서 전사한 9387구의 미군 시신이 안장돼 있다고 했다. 1557명의 실종군인 이름도 한 벽에 빼곡히 쓰여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준 미군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이 묻혀 있는 땅의 명의를 주었다. 이제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처럼. 고향에 묻히지는 못했어도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땅에 묻혀있었다. 오후 4시30분. 공원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국기 게양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트럼펫 연주자도 방문자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시간이 되자 낭랑한 트럼펫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미국 젊은이들이 죽어가며 프랑스 땅까지 갖다 놓은 성조기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죽은 장병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순간 목이 메고 가슴이 미어졌다. 결국 나도 노르망디가 목적지였던 미국인 중 하나였다. 우산 위로 둔탁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느린 트럼펫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애잔하게 퍼져나갔다. 천천히 성조기가 내려오며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오늘 또 하루가 저물고 있다고. 과연 밤이 그들의 젊음을 잠재울 수 있었을까. 젊은 그들이었다. 옆에서 남편이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얼굴을 묻으며 주저앉았다.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세계 곳곳에서 죽어간, 내 조국 인천 앞바다에서도 죽은 젊은 미군들의 영혼을 생각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 한 짐 무거운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노르망디 눈물 노르망디 미군묘지기념관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해변
2025.05.15. 18: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