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마당] 노르망디에서 흘린 눈물
수필
내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인천상륙작전이 더 익숙했다. 6.25 전쟁 때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맥아더장군이 떠오른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면 라이언 일병이 떠오르는 걸 보니 나는 미국 시민권자 이지만 이방인임이 분명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공격에 나선 작전이다. D-Day는 1944년 6월6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고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미국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며 이곳을 그들이 많이 찾는 이유라고 한다.
프랑스의 시골은 고적했다. 내게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창밖으로 유채꽃 밭이 서너 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졌다. 이 지방 유채꽃으로 짠 식용유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가이드가 알려 준다. 산등성이까지 펼쳐진 네모난 노란 양탄자들이 끝에 가서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량의 기름이 나올 듯한 유채꽃 밭이다. 구름 사이를 뚫고 간간이 내리쬐는 햇볕까지도 노란색이었다.
노르망디 해변이 가까워 올수록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검은 하늘이 심상찮아 보였다. 나는 패딩 재킷 위에 방수 재킷을 껴입었다. 주차장에 내리자 강한 비바람이 우산을 날려 버렸고 우리를 떠밀어 광활한 해안으로 안내했다. 과연 프랑스 북부의 날씨는 소문대로였다. 나는 그렇게 차가운 비를 처음 만났다. 얼음물이었다.
노르망디 해안의 길이는 약 50마일, 5개의 해변이 연결돼 있었다. 그 중 유타와 오마하 해변이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 보이는 오마하 해변에는 집채만 한 시커먼 시멘트 덩어리가 군데군데 섬처럼 거리를 두고 떠 있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뚫리자 싣고 온 전쟁 물자를 해안으로 운반하기 위해 연합군이 바닷물 위로 만든 도로였다고 한다. 참혹한 전쟁의 잔해가 거친 풍랑으로 오랜 세월 동안 갈라지고 쪼개져 저렇게 조금씩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D-Day, 한국전쟁에 동원되었던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스무 살 가량의 병사들이 배에서 내려 독일군이 퍼부어 대는 총알을 몸으로 막으며 해변을 향해 달려갔다. 해변에는 독일군이 모래에 꽂아 둔 사람 다리길이만한 쇠창들과 지뢰와 철조망들이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옆에서 뛰던 전우가 포화에 쓰러지자 그의 시신을 급하게 모래로 덮고 머리 쪽에 그의 총을 거꾸로 세웠다. 그리고 개머리판에 군모를 씌워 무덤을 표시 한 후 다시 해변을 향해 달렸다. 그날 하루 1만여명의 미군이 이 해변에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모래 위에 세운 총에다 군모를 씌운 사진은 나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사막에 묻힌 어떤 군인의 사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래는 사막의 것이 아니라 여기, 내가 밟고 있는 노르망디해변의 모래였다. 아직도 모래밭에는 피처럼 검붉게 녹슨 쇠창들이 궂은 날씨를 원망하듯 비스듬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노르망디 미군묘지기념관(the Normandy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in France)에 도착했다. 여전히 하늘은 시커먼 구름으로 무겁게 덮여 있다. 다행히 바람이 조금 잦아들어 173에이커의 공원묘지는 정갈하고 평온해 보였다.
검색대를 통과해 기념관 안에 들어섰다. 군복을 입은 채 미소 짓는 수많은 어린 병사들의 흑백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지금과 달리 그들은 징집된 군인들이었다. 낯선 나라 해변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을, 그들의 운명에 가슴이 먹먹해 졌다.
묘지에는 프랑스에서 전사한 9387구의 미군 시신이 안장돼 있다고 했다. 1557명의 실종군인 이름도 한 벽에 빼곡히 쓰여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준 미군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이 묻혀 있는 땅의 명의를 주었다. 이제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처럼. 고향에 묻히지는 못했어도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땅에 묻혀있었다.
오후 4시30분. 공원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국기 게양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트럼펫 연주자도 방문자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시간이 되자 낭랑한 트럼펫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미국 젊은이들이 죽어가며 프랑스 땅까지 갖다 놓은 성조기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죽은 장병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순간 목이 메고 가슴이 미어졌다. 결국 나도 노르망디가 목적지였던 미국인 중 하나였다.
우산 위로 둔탁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느린 트럼펫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애잔하게 퍼져나갔다. 천천히 성조기가 내려오며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오늘 또 하루가 저물고 있다고.
과연 밤이 그들의 젊음을 잠재울 수 있었을까. 젊은 그들이었다. 옆에서 남편이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얼굴을 묻으며 주저앉았다.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세계 곳곳에서 죽어간, 내 조국 인천 앞바다에서도 죽은 젊은 미군들의 영혼을 생각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 한 짐 무거운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마야 정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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