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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샘이 마를 때까지

젖어 있는 것이 하늘뿐이랴. 슬픈 것들은 젖어 있다. 하늘과 땅이 흐느끼는 동안 나무는 온 몸을 떨며 가지마다 눈물 방울을 매달고 풀잎은 땅 속에 머리 파묻고 눈물로 대지를 적신다. 슬픔을 견딜 수 없을 때는 구름은 천둥 번개로 심장을 찢는다.   혼자일 때는 잘 견디며 버티다가 누가 곁에서 달래면 눈물이 한없이 쏟아진다. 슬픔은 사랑처럼 공유하면 부피가 커진다. 슬픔은 전염병처럼 번져 나간다.   어릴 적 천방지축으로 잘 넘어져 무릎 성할 날이 없었다. 곁에 아무도 없으면 벌떡 일어나 흙을 털고 집으로 갔다. 멀리서 ‘밥 먹어라’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들리면 땅바닥에 코를 박고 아픈 시늉을 했다. 어머니 약손이 긁힌 자국의 흙을 털어내고 호호 불어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이젠 아무도 내 상처에 입김을 불어주지 않는다.   인생은 짧고도 긴 파노라마다. 변화와 굴곡이 많고 감동과 좌절, 반전과 역전이 끝없이 펼쳐진다. 인생의 파노라마는 한 번 지나면 재생이 불가능한 지극히 개인적인 필름이다.   파노라마(Panorama)는 본래 큰 전망이라는 뜻이다. 전체 경치 중에서도 360° 방향의 모든 경치를 담아내는 기법이나 장치, 그렇게 담아 낸 사진이나 그림을 의미한다. 전경(全景)은 180°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를 말하고 환경(環景)은 360°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파노라마는 둥근 모양의 건물 안의 벽에 전방위(全方位)로 풍경화를 그려 넣어 마치 그 건물 안에서 실제 풍경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파노라마로 남는다. 딸 대학 졸업 기념으로 떠난 파리 여행은 추억의 창고에 영원히 살아 숨쉬며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 등을 딸과 손잡고 관람한 아름다운 날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추억의 창고에 보석처럼 빛난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1840-1926) 앞에서 딸은 한동안 망부석처럼 숨도 쉬지 못한 체 서 있었다. 1920년 프랑스 정부는 오랑주리 미술관에 한 쌍의 타원형 전시실을 마련해 모네의 수련 벽화 8점을 상설 전시했다. 전시실은 모네가 죽은 지 몇 달 뒤인 1927년 5월 16일 대중에 처음 공개된다. 1999년에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모네 특별전을 기획하여, 전세계 60여점의 수련 그림이 한 자리에 전시되었다. 지베르니의 모네 생가에 있는 수련 정원을 그린 그림으로 1890년대부터 1920년대 까지 30여년 간 오랜 세월 동안 그린 작품이다.     작품 중 대다수는 모네가 백내장을 앓고 있던 상태에서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내장 수술 후에도 모네는 시력이 감퇴돼 색깔 분별이 어려워지고 두 눈으로 동시에 볼 수 없게 된다. 사물이 왜곡되어 보였지만 모네는 죽는 날까지 빛을 그리는 화가로 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어릴 적 내 별명은 ‘울보’였다. 눈물 샘이 잘 발달된 탓인지 작은 바람, 꽃 향기에도 눈물을 흘렸다. 일 년에 한 두 번 시골 마을의 천막 친 가설 극장에서 흑백영화가 상영되면 동네 어른들 손잡고 공짜로 입장했다. 앞자리에 앉아 ‘유정천리’를 보며 눈물이 뒤범벅이 돼 울고 있으면 “눈꼽만한 것이 뭘 알고 우느냐”며 혀를 끌끌 찼다.   이젠 잘 울지 않는다. 울지 않고 견딘다. 아파도 눈물을 삼키는 법을 터득했다. 나이 들면 눈물샘이 마를 때까지 슬픔은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참고 견디며 눈물샘은 울지 않는다.   인생이란 한 편의 파노라마를 완성하기 위해, 꼬꾸라지면 풀잎이라도 잡고 일어나 슬픔에 길든 눈물 지우고, 그리움이 새겨진 엽서 한 장 그대 창가에 띄운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눈물샘 달래면 눈물 눈물 방울 클로드 모네

2025-04-22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 대신 작은 점 하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 낙엽은 흩날리지만 지축 향해 몸을 의탁한다. 떠나 와 세상 이곳 저곳을 떠돌아도 조국은 영원한 목숨줄이다. 살아있는 동안 외로운 영혼을 가누고 지탱하는 피에로의 안식처다. 피에로(Pierrot)는 다른 광대와는 달리 슬픈 얼굴로 분장을 한다. 얼굴에 분칠을 하며 립스틱 짙게 바르고 원뿔형 모자 쓰고 타국에서 어울려 사는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흘러도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이 거세게 폭풍으로 몰아치고 먹고 사는 게 부대낄 때는 그리움은 둥지를 틀지 못한다. 텅 빈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속으로 흐느끼지만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무시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곡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성공이라 믿었다. 성공의 탑은 높이 쌓을수록 쉽게 허물어진다. 물질과 허영, 교만으로 생을 가득 채울 때는 비어 있는 것들의 평온과 기쁨을 알지 못했다. 가슴 뚫고 지나가는 세월의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어 있는 것들은 산사에 울리는 새벽 종소리로 가슴 저미며 울려 퍼진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작은 신음소리로 비어있는 공간 속으로 번져 나간다.   멀리 떠나와도 조국은 산수화의 여백으로 남는다. 품을 수 없어도 그리움으로 남는다. 비어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가슴으로 만질 수 있다.   동양화의 여백은 그냥 빈 것이 아니라 기(氣)의 표상이고 응축(凝縮)의 미학이다. 화가들은 ‘산수의 기상(山水氣象)’을 묘사하기 위해 여백을 남긴다. 여백은 광(光)과 기를 확대시키고 여운을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필선을 최소화한 감필과 절파화풍으로 표현을 억제하는 여운을 통해 여백은 광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여백의 미’를 창조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아는 것보다 추구하는 삶, 실용적인 것보다 가치있는 것. 여백은 비어 있는 아름다움의 세계로 생의 깊이를 탐구한다.   동양화를 그릴 때는 산수, 사람, 집을 최소한의 형태로 표현해 여백을 남기는데, 광활한 자연의 기운을 담기 위한 장치다. 형상은 사라지지만 내면이 풍성해지는 역설로 ‘비움’은 채워지지 못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영혼의 술래잡기는 없는 것을 찿으려는 구도자의 발걸음마다 새겨진 고뇌다.     ‘전화 걸면 날마다 /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 누구와 있냐고 또 별 일 없냐고 /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 묻고 또 묻는다 /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나태주의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그리움은 공백에서 헤어나오려는 존재의 부대낌이다. 보이지 않는 그대 사랑을 향해 부단히 추구하는 붓놀림이고 멈출수 없는 생의 몸부림이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강물처럼 흐를 때면 그리움은 무시로 떠다닌다. 둥지 튼 여백을 가슴 깊히 간직하면 진눈개비 내리는 날에도 그대 사랑은 따스하다.   죽음과 이별, 고난과 상처의 무게에 짓눌려 못질 하듯 오늘을 살아도 그리움으로 비워둔 화선지에 눈물 대신 작은 점 하나 찍는다.   그대 사랑은 비어 있는 하늘의 끝자락에서 펄럭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 눈물 대신 가슴 저미 새벽 종소리

2024-10-29

[문예 마당] 눈물 젖은 손을 잡고 -양용님 영전에

눈부신 5월의 햇살이     천사의 도시 LA를 비추던 날     우리의 친구, 아름다운 아들은 갔습니다.       어버이날을 누린 그 행복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메아리 되어 남아 있건만.   우리의 아들, 착한 어린이의 가슴을 지닌 양용님은     무참히 갔습니다.       민중의 지팡이, 약한 시민의 등불로     큰소리치던 경찰의 총에 영문도 모른 채     쌍둥이 형, 40년간 보듬어 준 부모 가슴에     한을 남긴 채 우리의 친구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랑스러운 모습     다시는 이 세상에서 듣지 못할 목소리     이제 우리는 함께 일어나 손에 손을 잡고     눈물 젖은 손을 잡고 정의 앞에 용감히 섰습니다.   웨스턴 길이 뻥 뚫리도록 크게 외칩니다.       누가 그 아름다운 청년 가슴에 총을 쐈는지?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     눈물 젖은 손은 함성이 되어     천사의 도시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정의는 이길 것이고 억울함은 밝혀질 것이고 코리안의     행진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양왕, 아름다운 우리의 친구, 코리안 청년 아픔 없는     평화로운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면하소서   눈물 젖은 우리 코리안의 손을 함께 잡고서. 정린다 / 시인문예 마당 눈물 영전 친구 코리안 청년 가슴 부모 가슴

2024-05-30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템즈강에는 별이 뜬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 속엔 별이 뜬다. 세상 어느 곳이든, 멀고 먼 하늘에서도 별이 뜬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뼈마디 저리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이별의 상처로 총 맞은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도 고개를 들면 별은 머리 위에서 반짝인다. 어둠이 먹물처럼 화선지를 적시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별 하나의 사랑을 꿈꾸며 찿아 헤맨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윤동주 ‘서시’중에서.   시인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며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기로 다짐한다.     사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고, 작별이 돌아올 수 없는 절망의 강이라도, 죽어가는 것들 앞에서 생명은 별빛으로 반짝인다.     삼년 반 동안 투병하던 남편을 얼마 전 떠나 보낸 선배는 해 뜨는 날과 캄캄한 밤, 바람 부는 날이면 잎새에 흔들리는 바람에도 운다. 꽃이 피면 꽃이 예뻐서 울고 꽃잎이 떨어지면 이별의 상흔이 아파 눈물 떨군다.     선배는 55년 전 100달러를 들고 사랑하는 사람 손잡고 이국 땅을 밟았다. 아들 딸 잘 키우고 손자 손녀 재롱 보며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었다.     낮에는 별이 안 보인다. 별은 어두울 때 잘 보인다. 내가 별을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땅끝이나 지구의 저 편에서 누군가 별을 바라본다. 사랑이 암호로 가슴 깊이 새겨지는 것처럼 별은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그대 머리 위에 떠 있다.     어깨동무 하고 보았던 고향마을 동산이나, 박넝쿨 흐드러진 담장에 매달린 박꽃들은 별이 뜨면 다문 입술을 벌리고 아침이 오면 고개를 숙인다.   템즈강에도 별이 뜬다.    템즈강(River Thames)은 영국 런던을 지나가는 강이다. 잉글랜드 남부에 있는 강으로 옥스퍼드, 레딩을 거쳐 영국의 수도 런던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가른 후 북해로 흐른다. 세월을 견딘 템즈강가를 거닐어 본적 없지만 어둠이 대지를 덮고 밤하늘에 별빛이 반짝이면 이국의 연인들은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일 것이다. 단 한 번의 눈 길로 운명처럼 사랑에 빠질 것이다.     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곳. 이별과 눈물이 있는 곳에는 어디라도 별이 뜬다. 세느강이든 한강이든 비슬산을 등지고 구비구비 돌던 낙동강에도 별은 뜬다.     별 하나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은 억만리 길, 멀고 먼 타향, 지구의 끝이라 해도, 별 하나의 사랑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이국의 땅에서, 사막이든 오아시스든, 지구의 끝이라 해도 별을 가슴에 품고 산다.   우리는 한갓 이름 없는 별이였을까. 추억 속에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었을까. 첫사랑의 뜨거운 키스가 별똥별로 사라진다 해도 사랑이 지나간 밤 하늘은 수 만개 수 억개의 은하수로 반짝인다.     별똥별은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대기 안으로 들어오면서 꼬리를 불태우며 지구로 떨어진다. 목숨도 사랑도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별똥별처럼 소행성에서 떨어져 지구로 날아온 작은 티끌이었을까.     어머니는 가시가 무성한 고향집 민둥산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 돌아갈 길이 아득해 묘비에 한글 이름 석자 남기고 이역만리 타국에 잠드신 어머니.     디아스포라는 살아있어도 죽어도 영원한 이방인이다. 어머니 젖줄 새긴 별 하나 가슴에 달고 살면 캄캄한 밤 어느 땅 어느 곳에서도 별을 볼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템즈강 목숨도 사랑 타향 지구 이별과 눈물

2024-04-23

[열린광장] 재소자와 함께 흘린 눈물

형님, 아제들이 어디서 닭을 잡아 와 요리를 할 때 나는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 주고 얻어먹곤 했습니다. 좋게 말해 ‘닭서리’를 해 온 것이었습니다. ‘서리’ 중에는 참외서리, 수박서리, 호박서리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시절이 어수선하니 너희들 먼저 고향으로 가라”고 해 경북 문경의 집성촌으로 갔습니다. 그해에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얼마 후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서울, 평양, 심지어 도쿄에서 공부하던 친척들도 그곳으로 모였습니다. 그중에는 징집을 당해 군에 입대한 인척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친척들이 밤엔 서리 판을 벌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런 ‘닭서리’를 하다 잡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즉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경범죄로 처벌을 받았겠지요.     미국에 정착해 아이들 잘 키우며 이런저런 혜택을 받고 살다 보니 많은 것을 빚지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어느 분으로부터 교도소 재소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신원조회 등의 절차를 마치고 1998년 교도소 사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연방 교도소에서 말씀을 전하며 “한국에서 닭과 수박·참외 훔쳐먹고 50여 년 전에 미국으로 도망와 지금 여러분과 이렇게 있다”고 말하자 모두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마음으로,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숨겨진 죄’가 왜 없겠습니까?‘  사법 기관에 적발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여러분은 형기를 마치면 다 죄의 해결함을 받으실 분들입니다. 교도소 형제자매들의 솔직한 간증은  나도 얼마든지 그런 죄와 가까이 있었고, 저지를 기회가 스쳐 지났음을 깨닫게 합니다.”      나는 예배가 끝나면 교도소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오래 교도소 선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한 재소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교도소로 이송됐다 제가 사역을 하는 교도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책에 나를 만났던 날짜와 내 이름을 써 놓고 나를 위해 기도했다며 성경책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교도소에서는 목사라도 재소자들과의 신체 접촉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도 모르게 그 형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슴에서 올라오는 눈물이 빰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도 함께 울었습니다. 물론 교도관이 멀리서 보고 있었지요. 그리고 헤어져 그는 수감자 방으로,  나는 프리웨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나 사이에서 누구이신가요? 변성수 / 교도소 목사열린광장 재소자 눈물 교도소 재소자 교도소 형제자매들 교도소 선교

2024-03-31

[세상만사] ‘눈물 한방울’

고 이어령 교수가 암 선고를 받고 2022년 88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4년간 쓴 글을 모은 문집이 ‘눈물 한 방울’이다. 생전 160권의 저서를 남긴 우리 시대 최고 지성은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문으로 그 책을 정독했었다.   마지막 낙서는 누구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자.    “누구에게나 마지막 남은 말/사랑이라든가 무슨 별 이름이라든가 /혹은 고향 이름이라든가?/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시인들이 만들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이 지상에 없는 말, 흙으로 된 말이 아니라/어느 맑은 영혼이 새벽 잡초에 떨어진 그런 말일 것이다./하지만 그런 말이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내 몸이 바로 흙으로 빚어졌기에 /나는 그 말을 모른다./죽음이 죽는 순간/알게 될 것이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톤으로는 내생을 신에 기탁하며 부탁하는 논조의 말은 없다. 그 대신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기구의 말은 있다. 또 53세의 젊은 나이로 갑상선암과 위암 진단을 받고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딸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다. 그의 딸 이민아씨는 이혼 후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말년에는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어느 세미나에서 이어령 교수는 신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것이 아니라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라고 했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명 간에 공생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랑으로 모든 생명체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대상으로 그 사랑이 중요하고,  또 포토필리아는 장소에 대한 사랑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말하는 것이고, 네오필리아는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탐구하여 서로 공생하는 세상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메멘토모리’, 즉 우리는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운명이기에  늘 숙명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책 서문에 인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다.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다. 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의 희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도 있다.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란 걸 증명해준다. 이제 인간은 박쥐가 걸린 코로나도 닭이 걸린 조류인플루엔자도 걸린다. 그럼 무엇으로 짐승과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 눈물이다. 낙타도 코끼리도 눈물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서적 눈물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다. 로봇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한때 이어령 교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주마간산 격으로 읽고는 책장에 모셔두는 버릇이 있었다. 삼가 그분의 명복을 빈다. 김호길 / 시인세상만사 한방울 눈물 눈물 한방울 정서적 눈물 이어령 교수

2024-02-20

“회개와 용서 구한다… 두번째 삶 감사와 축복”

 30년만의 출소 눈물의 기자회견... “겸손한 자세로 커뮤니티에 봉사”   “오랜 기간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후원해주신 한인 동포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한인 여러분의 기도와 성원 속에 오랜 수감생활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를 잊지 않고 앞으로 겸손한 자세로 조금이나마 사회에 봉사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9세 때인 지난 1993년 9월 시카고서 발생한 비극적 살인사건의 범인이자 피해자인 앤드루 서(50•한국명 서승모)가 2일 오전 9시30분 윌링 그레이스 교회서 기자회견을 갖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 26일 일리노이 서부 키와니교도소서 30여년 만에 출소한 지 1주일 만이다.     이날 그동안 자신을 후원해온 김성민 변호사와 함께 자리한 서 씨는 “열아홉 살 때 저지른 큰 잘못으로 수감 생활을 하면서 깊이 회개해왔다. 과거에 커다란 물의를 일으켜 여러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사망한 오두베인의 가족에게도 “미안하다”고 사과의 마음을 전했다.     서 씨는 이날 기자회견 내내 눈물을 닦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는 “지난 30년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좋은 마음으로 어둠에서 나올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드린다”며 “현재의 삶은 축복이고 감사할 뿐이다. 여전히 얼떨떨하지만 한번의 실수는 끝났고 이제 두번째로 태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19살에 교도소에 가서 50대 아저씨가 돼 나왔다. 인터넷도 모르고 페이스북도 모른다”며 “차차 미래를 계획하겠지만 청소년들을 선도하고 커뮤니티에 봉사하고 싶다”고 밝혔다.     “출소 이후 1주일간 김치도 먹고 감도 먹어보았는데 맛있었다”는 서 씨는 “한인사회가 저를 버리지 않아주셔서 고맙다. 진심으로 감사하다. 한인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하겠다”며 “그레이스교회와 목사님, 선한 사마리아 분들, 아버지 김한철, 김성민 변호사님께 특히 감사하고 직접 교도소를 면회 와준 분들께도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서 씨는 이날 기자회견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했는데 한국어는 충분히 소통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는 “부모님이 어렸을 때 한국말만 하라고 해서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서 씨는 대학 2학년 때 누나 캐서린의 사주를 받고 누나의 동거남 로버트 오두베인(당시 31세)을 총격 살해한 혐의로 1995년 재판에서 징역 100년형을 선고 받았고 이후 항소심에서 80년 형으로 감형됐다.     서 씨는 모범적인 수감 생활과 재활 프로그램을 이수할 경우 감형 특혜를 주는 새로운 일리노이 주 법 덕분에 조기 출소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서씨는 2살 때인 1976년 군 장교 출신 아버지•약사 출신 어머니를 따라 시카고로 이민했다. 그러나 이민 9년 만에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세탁소를 운영하며 남매를 키우던 어머니마저 2년 후 강도에게 살해당한 후 서 씨는 5살 위인 누나 캐서린에 의지해 살았다. 캐서린은 당시 서 씨에게 "오두베인이 엄마를 죽였다. 상속받은 재산을 도박 빚으로 탕진하고 학대한다"며 살인을 사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J 취재팀회개 용서 누나 캐서린 출소 눈물 김성민 변호사

2024-02-02

[수필] 맹 노인의 눈물

‘효도 효(孝)’자는 자식이 부모를 업고 있는 형상이다. 이 ‘효’자를 접할 때마다 이웃집에 살던 맹 노인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진다. 그는 1980년대 초 여동생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을 왔다.그에게는 아들만 삼 형제가 있는데 큰아들이 중학교 2학년, 두 아들은 초등학생 때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의 사업이 번창해 아들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게 되었을 때는 집을 한 채씩 사 줄 능력까지 됐다.       저택에서 이민 오길 잘했다고 만족해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맹 노인은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재산을 상속해 주고 싶어도 못하게 되니 정신이 멀쩡할 때 집을 팔아서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지인들의 그럴듯한 말에 신경이 쓰였다.     어느 날, 그는 아들 삼 형제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이 집을 팔면 250만 달러 정도 받는데 너희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메디칼 혜택을 받기 위해 모아둔 현금도 똑같이 분배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들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효도를 다짐했다. 전 재산을 삼 형제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고 맹 노인 부부는 큰아들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다 아내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맹 노인은 주 정부에서 지원하는 가사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아내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런 생활이 일 년도 지나지 않아 큰아들 집에서 삼 형제가 가족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맹 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게 영어로 진행됐고 점점 고성이 오가더니 급기야는 형제간에 주먹다짐까지 벌어졌다.  맹 노인은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눈치로 알아차렸다. 큰아들은 “나만 아들이냐? 너희들도 이제 부모님을 모시라”고 주장했고 두 동생은 “무슨 말이냐? 당연히 장남이 끝까지 모셔야 한다”고 맞선 것이었다. 그러자 큰며느리가 부모를 택하든, 본인을 택하든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결국, 맹 노인의 아내는 양로병원으로 옮겨졌고 맹 노인은 큰아들, 둘째, 셋째 아들네서 한 달씩 보내는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한숨으로 하소연을 시작해 눈물로 마무리를 지었다. 전 재산을 아들들에게 미리 준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고 하였다.   그 돈만 있으면 부부가 헤어지지 않고 양로호텔(실버타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가 막심하다고 했다. 평소 금실이 좋았던 그는 아내와 떨어져 사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했다. 큰아들 집 앞에 커다란 산이 있는데 그 산이 무너져내려 자신의 가슴을 덮치는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부인이 생선회를 무척 좋아하는데 맹 노인이 문병 갈 때마다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 정부에서 한 달에 약 1000달러 정도 생활보조금을 받는 맹 노인으로서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하러 가는 데 왕복 택시비로 한 달이면 400달러를 써야 하고, 운이 좋아 입주하게 된 노인 아파트 비용을 제하고 나면 그럴만한 여윳돈조차 없었던 것이다.     자식들은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시즌 때 마지못해 어머니를 찾아오는데 빈손으로 왔다 간다고 한다. 내가 친분이 있는 큰아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하면 그는 펄쩍 뛰며 가정사를 남에게 말했다고 자신이 더 큰 곤란을 겪게 된다며 극구 만류했다.   결국, 양로병원에 5년 넘게 입원해 있던 맹 노인의 아내는 펜데믹 기간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번에는 90세가 넘는 맹노인이 삼 형제의 바람대로 양로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라면 자식이  의논해서 올바른 해법을 찾는 것이 타당한 일인데,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하고 ‘나 몰라라 ’ 하는 이기적인 사고가 안타깝기만 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준 것의 10만분의 1만 자식이 부모에게 하면 효자 소리를 듣는다는데…. 어떤 불효자라 하더라도 부모님 사후에는 자신이 했던 행동을 가슴 치며 후회하게 된다고 한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하고,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모부양이 문제가 된 이 시대. 재산을 미리 주지 않았다면 자식들이 그렇게 부모를 대우했을까?   요즈음은 부모세대도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지금 ‘쓰죽회’란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단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고 ‘다 쓰고 죽자’ 라는 모임이다.   노인 문제 전문가들은 재산을 미리 물려주지 않아도 사후에는 자식들이 자동으로 갖게 되니 절대로 미리 물려주지 말고 비 오는 날을 대비하여 우산을 준비해 두라고 조언한다. 이진용 / 수필가수필 노인 눈물 노인 부부 노인 문제 노인 아파트

2023-05-25

[글마당] 죄의 눈물

  잠시 눈을 감으면 멀어진 것들은 더 멀리   그리움으로 쌓인다   미운 것 없이 밀려간 시간들도 잘라내지 못한 미움의 아픔도   온기 솟는 푸른 냄새 사이로 가만가만 또 천 리 길을 간다       갑갑한 기운은 행간마다 미끄러지는   혀의 시간 속으로 떨어지고   용서할 이유를 찾기보다는 미워할 이유를 먼저 찾는   모순투성이의 권한 속에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할 이유조차 놓쳐버린 지금   비정한 그 족보의 얼룩들이 죄악의 한으로 남아   숨을 곳이 없어야 죄가 없어질 거라는 수난의 길을 택한   그때 그 호랑나비의 새끼를 지금 나는 보고 있다       얼룩진 가루를 털어내며 홀로 떨고 있는   아주 작은 날개   폭풍이 몰려오는 바람 속에 먹이 사슬을 끊어내고   외로운 구원의 신비를 찾아 나선 새끼나비의 모진 고독이   피의 존속 앞에 꿇어 엎드린 증언으로 맺힌 고리를 풀어간다       온실 속을 빠져나와 고삐가 풀렸는데 갈 곳은 어디에   밤마다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어 돌다   스스로 몸부림치고 있는 죄의 뿌리에 갇힌 새끼 나비를 보며   억지의 숲속을 더듬게 했던 그때 그 사람들   잘린 숨 잘린 몸 맺힌 설음 어찌 삭아 들까서릿발친다       손 모아 우는 죄의 눈물 그 순환의 연속을 끊어내려   부르르 떠는 날개 만지며   다독이는 사랑을 전하는 장한 시대의 아픔을   지금 나는 보고 있다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눈물 나선 새끼나비 새끼 나비 냄새 사이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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