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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노르망디에서 흘린 눈물

2023년 4월 10일, 영국에서 도버 해협을 관통하는 기차, 유로스타를 타고 프랑스 북부 릴역에 도착했다. 대형버스가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 캐롤은 영국인이었고 나머지 스무 여덟 명은 미국인이었다. 그 중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매년 100만 명이 방문한다는 프랑스 북부 브리타니아, 노르망디가 여행 목적지였다. 프랑스의 전형적인 이 시골 지방은 2차 대전 때 상륙작전이 있었던 격전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내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인천상륙작전이 더 익숙했다. 6.25 전쟁 때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맥아더장군이 떠오른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라면 라이언 일병이 떠오르는 걸 보니 나는 미국 시민권자 이지만 이방인임이 분명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를 탈환하기 위해 연합군이 공격에 나선 작전이다. D-Day는 1944년 6월6일.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상륙작전이었고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미국인들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며 이곳을 그들이 많이 찾는 이유라고 한다.   프랑스의 시골은 고적했다. 내게는 조금 우울해 보였다. 창밖으로 유채꽃 밭이 서너 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졌다. 이 지방 유채꽃으로 짠 식용유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고 가이드가 알려 준다. 산등성이까지 펼쳐진 네모난 노란 양탄자들이 끝에 가서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마어마한 량의 기름이 나올 듯한 유채꽃 밭이다. 구름 사이를 뚫고 간간이 내리쬐는 햇볕까지도 노란색이었다.   노르망디 해변이 가까워 올수록 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검은 하늘이 심상찮아 보였다. 나는 패딩 재킷 위에 방수 재킷을 껴입었다. 주차장에 내리자 강한 비바람이 우산을 날려 버렸고 우리를 떠밀어 광활한 해안으로 안내했다. 과연 프랑스 북부의 날씨는 소문대로였다. 나는 그렇게 차가운 비를 처음 만났다. 얼음물이었다.   노르망디 해안의 길이는 약 50마일, 5개의 해변이 연결돼 있었다. 그 중 유타와 오마하 해변이 격전지로 알려져 있다.   멀리서 보이는 오마하 해변에는 집채만 한 시커먼 시멘트 덩어리가 군데군데 섬처럼 거리를 두고 떠 있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뚫리자 싣고 온 전쟁 물자를 해안으로 운반하기 위해 연합군이 바닷물 위로 만든 도로였다고 한다. 참혹한 전쟁의 잔해가 거친 풍랑으로 오랜 세월 동안 갈라지고 쪼개져 저렇게 조금씩 서로에게서 멀어져 갔다.   D-Day, 한국전쟁에 동원되었던 중공군의 인해전술처럼 스무 살 가량의 병사들이 배에서 내려 독일군이 퍼부어 대는 총알을 몸으로 막으며 해변을 향해 달려갔다. 해변에는 독일군이 모래에 꽂아 둔 사람 다리길이만한 쇠창들과 지뢰와 철조망들이 빽빽하게 깔려 있었다.   그들은 옆에서 뛰던 전우가 포화에 쓰러지자 그의 시신을 급하게 모래로 덮고 머리 쪽에 그의 총을 거꾸로 세웠다. 그리고 개머리판에 군모를 씌워 무덤을 표시 한 후 다시 해변을 향해 달렸다. 그날 하루 1만여명의 미군이 이 해변에서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모래 위에 세운 총에다 군모를 씌운 사진은 나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다. 사막에 묻힌 어떤 군인의 사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모래는 사막의 것이 아니라 여기, 내가 밟고 있는 노르망디해변의 모래였다. 아직도 모래밭에는 피처럼 검붉게 녹슨 쇠창들이 궂은 날씨를 원망하듯 비스듬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 있었다.   노르망디 미군묘지기념관(the Normandy American Cemetery and Memorial in France)에 도착했다. 여전히 하늘은 시커먼 구름으로 무겁게 덮여 있다. 다행히 바람이 조금 잦아들어 173에이커의 공원묘지는 정갈하고 평온해 보였다.   검색대를 통과해 기념관 안에 들어섰다. 군복을 입은 채 미소 짓는 수많은 어린 병사들의 흑백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지금과 달리 그들은 징집된 군인들이었다. 낯선 나라 해변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을, 그들의 운명에 가슴이 먹먹해 졌다.   묘지에는 프랑스에서 전사한 9387구의 미군 시신이 안장돼 있다고 했다. 1557명의 실종군인 이름도 한 벽에 빼곡히 쓰여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을 위해 목숨을 내준 미군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이 묻혀 있는 땅의 명의를 주었다. 이제 아무도 그들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처럼. 고향에 묻히지는 못했어도 그들은 적어도 자신의 땅에 묻혀있었다.   오후 4시30분. 공원을 둘러보던 사람들이 국기 게양대 주위로 몰려들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트럼펫 연주자도 방문자들과 함께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시간이 되자 낭랑한 트럼펫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다. 미국 젊은이들이 죽어가며 프랑스 땅까지 갖다 놓은 성조기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죽은 장병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순간 목이 메고 가슴이 미어졌다. 결국 나도 노르망디가 목적지였던 미국인 중 하나였다.   우산 위로 둔탁하게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느린 트럼펫소리가 빗줄기 사이로 애잔하게 퍼져나갔다. 천천히 성조기가 내려오며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오늘 또 하루가 저물고 있다고.   과연 밤이 그들의 젊음을 잠재울 수 있었을까. 젊은 그들이었다. 옆에서 남편이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는지 얼굴을 묻으며 주저앉았다.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세계 곳곳에서 죽어간, 내 조국 인천 앞바다에서도 죽은 젊은 미군들의 영혼을 생각했다. 그들이 남기고 간 세상은 아직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는 다 한 짐 무거운 빚을 진 사람들이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마야 정 / 수필가문예마당 노르망디 눈물 노르망디 미군묘지기념관 노르망디 상륙작전 노르망디 해변

2025.05.15. 18:51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 대신 작은 점 하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 낙엽은 흩날리지만 지축 향해 몸을 의탁한다. 떠나 와 세상 이곳 저곳을 떠돌아도 조국은 영원한 목숨줄이다. 살아있는 동안 외로운 영혼을 가누고 지탱하는 피에로의 안식처다. 피에로(Pierrot)는 다른 광대와는 달리 슬픈 얼굴로 분장을 한다. 얼굴에 분칠을 하며 립스틱 짙게 바르고 원뿔형 모자 쓰고 타국에서 어울려 사는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다.     시간이 지나도, 세월이 흘러도 그리움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이 거세게 폭풍으로 몰아치고 먹고 사는 게 부대낄 때는 그리움은 둥지를 틀지 못한다. 텅 빈 가슴 속을 뚫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는 속으로 흐느끼지만 소리내어 울지 않는다.   무시 당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며 곡간을 가득 채우는 것이 성공이라 믿었다. 성공의 탑은 높이 쌓을수록 쉽게 허물어진다. 물질과 허영, 교만으로 생을 가득 채울 때는 비어 있는 것들의 평온과 기쁨을 알지 못했다. 가슴 뚫고 지나가는 세월의 바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어 있는 것들은 산사에 울리는 새벽 종소리로 가슴 저미며 울려 퍼진다. 처마 끝에 매달린 풍경은 작은 신음소리로 비어있는 공간 속으로 번져 나간다.   멀리 떠나와도 조국은 산수화의 여백으로 남는다. 품을 수 없어도 그리움으로 남는다. 비어 있는 것은 보이지 않아도 가슴으로 만질 수 있다.   동양화의 여백은 그냥 빈 것이 아니라 기(氣)의 표상이고 응축(凝縮)의 미학이다. 화가들은 ‘산수의 기상(山水氣象)’을 묘사하기 위해 여백을 남긴다. 여백은 광(光)과 기를 확대시키고 여운을 표현하는 훌륭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필선을 최소화한 감필과 절파화풍으로 표현을 억제하는 여운을 통해 여백은 광대한 공간을 암시하는 ‘여백의 미’를 창조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아는 것보다 추구하는 삶, 실용적인 것보다 가치있는 것. 여백은 비어 있는 아름다움의 세계로 생의 깊이를 탐구한다.   동양화를 그릴 때는 산수, 사람, 집을 최소한의 형태로 표현해 여백을 남기는데, 광활한 자연의 기운을 담기 위한 장치다. 형상은 사라지지만 내면이 풍성해지는 역설로 ‘비움’은 채워지지 못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영혼의 술래잡기는 없는 것을 찿으려는 구도자의 발걸음마다 새겨진 고뇌다.     ‘전화 걸면 날마다 / 어디 있냐고 무엇하냐고 / 누구와 있냐고 또 별 일 없냐고 / 밥은 거르지 않았는지 잠은 설치지 않았는지 / 묻고 또 묻는다 / 하기는 아침에 일어나 / 햇빛이 부신 걸로 보아 / 밤사이 별일 없긴 없었는가 보다 /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 이제 지구 전체가 그대 몸이고 맘이다.-나태주의 ‘오늘도 그대는 멀리 있다’   그리움은 공백에서 헤어나오려는 존재의 부대낌이다. 보이지 않는 그대 사랑을 향해 부단히 추구하는 붓놀림이고 멈출수 없는 생의 몸부림이다.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강물처럼 흐를 때면 그리움은 무시로 떠다닌다. 둥지 튼 여백을 가슴 깊히 간직하면 진눈개비 내리는 날에도 그대 사랑은 따스하다.   죽음과 이별, 고난과 상처의 무게에 짓눌려 못질 하듯 오늘을 살아도 그리움으로 비워둔 화선지에 눈물 대신 작은 점 하나 찍는다.   그대 사랑은 비어 있는 하늘의 끝자락에서 펄럭인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눈물 눈물 대신 가슴 저미 새벽 종소리

2024.10.2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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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눈물 젖은 손을 잡고 -양용님 영전에

눈부신 5월의 햇살이     천사의 도시 LA를 비추던 날     우리의 친구, 아름다운 아들은 갔습니다.       어버이날을 누린 그 행복한 웃음소리가     아직도 메아리 되어 남아 있건만.   우리의 아들, 착한 어린이의 가슴을 지닌 양용님은     무참히 갔습니다.       민중의 지팡이, 약한 시민의 등불로     큰소리치던 경찰의 총에 영문도 모른 채     쌍둥이 형, 40년간 보듬어 준 부모 가슴에     한을 남긴 채 우리의 친구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랑스러운 모습     다시는 이 세상에서 듣지 못할 목소리     이제 우리는 함께 일어나 손에 손을 잡고     눈물 젖은 손을 잡고 정의 앞에 용감히 섰습니다.   웨스턴 길이 뻥 뚫리도록 크게 외칩니다.       누가 그 아름다운 청년 가슴에 총을 쐈는지?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     눈물 젖은 손은 함성이 되어     천사의 도시에 울려 퍼질 것입니다.       정의는 이길 것이고 억울함은 밝혀질 것이고 코리안의     행진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양왕, 아름다운 우리의 친구, 코리안 청년 아픔 없는     평화로운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면하소서   눈물 젖은 우리 코리안의 손을 함께 잡고서. 정린다 / 시인문예 마당 눈물 영전 친구 코리안 청년 가슴 부모 가슴

2024.05.30. 19:03

[열린광장] 재소자와 함께 흘린 눈물

형님, 아제들이 어디서 닭을 잡아 와 요리를 할 때 나는 가마솥에 장작불을 때 주고 얻어먹곤 했습니다. 좋게 말해 ‘닭서리’를 해 온 것이었습니다. ‘서리’ 중에는 참외서리, 수박서리, 호박서리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님이 “시절이 어수선하니 너희들 먼저 고향으로 가라”고 해 경북 문경의 집성촌으로 갔습니다. 그해에 아버님은 돌아가시고 얼마 후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서울, 평양, 심지어 도쿄에서 공부하던 친척들도 그곳으로 모였습니다. 그중에는 징집을 당해 군에 입대한 인척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인 친척들이 밤엔 서리 판을 벌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런 ‘닭서리’를 하다 잡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즉시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판을 받고 경범죄로 처벌을 받았겠지요.     미국에 정착해 아이들 잘 키우며 이런저런 혜택을 받고 살다 보니 많은 것을 빚지고 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어느 분으로부터 교도소 재소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신원조회 등의 절차를 마치고 1998년 교도소 사역을 시작해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연방 교도소에서 말씀을 전하며 “한국에서 닭과 수박·참외 훔쳐먹고 50여 년 전에 미국으로 도망와 지금 여러분과 이렇게 있다”고 말하자 모두가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마음으로,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숨겨진 죄’가 왜 없겠습니까?‘  사법 기관에 적발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여러분은 형기를 마치면 다 죄의 해결함을 받으실 분들입니다. 교도소 형제자매들의 솔직한 간증은  나도 얼마든지 그런 죄와 가까이 있었고, 저지를 기회가 스쳐 지났음을 깨닫게 합니다.”      나는 예배가 끝나면 교도소 형제자매들에게 “내가 오래 교도소 선교 사역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한 재소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교도소로 이송됐다 제가 사역을 하는 교도소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는 성경책에 나를 만났던 날짜와 내 이름을 써 놓고 나를 위해 기도했다며 성경책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교도소에서는 목사라도 재소자들과의 신체 접촉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나도 모르게 그 형제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가슴에서 올라오는 눈물이 빰으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도 함께 울었습니다. 물론 교도관이 멀리서 보고 있었지요. 그리고 헤어져 그는 수감자 방으로,  나는 프리웨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나 사이에서 누구이신가요? 변성수 / 교도소 목사열린광장 재소자 눈물 교도소 재소자 교도소 형제자매들 교도소 선교

2024.03.31. 19:00

[세상만사] ‘눈물 한방울’

고 이어령 교수가 암 선고를 받고 2022년 88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4년간 쓴 글을 모은 문집이 ‘눈물 한 방울’이다. 생전 160권의 저서를 남긴 우리 시대 최고 지성은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의문으로 그 책을 정독했었다.   마지막 낙서는 누구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보자.    “누구에게나 마지막 남은 말/사랑이라든가 무슨 별 이름이라든가 /혹은 고향 이름이라든가?/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시인들이 만들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이 지상에 없는 말, 흙으로 된 말이 아니라/어느 맑은 영혼이 새벽 잡초에 떨어진 그런 말일 것이다./하지만 그런 말이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내 몸이 바로 흙으로 빚어졌기에 /나는 그 말을 모른다./죽음이 죽는 순간/알게 될 것이다.”    책에서 전반적으로 흐르는 톤으로는 내생을 신에 기탁하며 부탁하는 논조의 말은 없다. 그 대신 어머님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기구의 말은 있다. 또 53세의 젊은 나이로 갑상선암과 위암 진단을 받고 본인보다 먼저 세상을 등진 딸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다. 그의 딸 이민아씨는 이혼 후 미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다 말년에는 신학교에 입학해 목사가 된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어느 세미나에서 이어령 교수는 신의 사랑은 아가페적인 것이 아니라 우정을 의미하는 ‘필리아’라고 했다. 바이오필리아는 생명 간에 공생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랑으로 모든 생명체는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숙명을 지닌 대상으로 그 사랑이 중요하고,  또 포토필리아는 장소에 대한 사랑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말하는 것이고, 네오필리아는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탐구하여 서로 공생하는 세상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메멘토모리’, 즉 우리는 죽음을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 운명이기에  늘 숙명처럼 죽음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책 서문에 인생에 대해 이렇게 썼다.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간 게 내 인생이다. 물음표가 씨앗이라면 느낌표는 꽃이다. 품었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의 희열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도 있다.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란 걸 증명해준다. 이제 인간은 박쥐가 걸린 코로나도 닭이 걸린 조류인플루엔자도 걸린다. 그럼 무엇으로 짐승과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 눈물이다. 낙타도 코끼리도 눈물을 흘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서적 눈물은 사람만이 흘릴 수 있다. 로봇이 아무리 잘 만들어도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한때 이어령 교수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주마간산 격으로 읽고는 책장에 모셔두는 버릇이 있었다. 삼가 그분의 명복을 빈다. 김호길 / 시인세상만사 한방울 눈물 눈물 한방울 정서적 눈물 이어령 교수

2024.02.20. 19:56

[글마당] 눈물 연기의 달인

배우를 꿈꾸는 사람   언제 어디서도 천의 얼굴로 변하는   사람   슬프지도 않지만 눈물 연기를 잘하는   배우 지망생   눈물 연기는 항상 자신 있다고 말하는   연기 지망생   아무리 연기라도 울고 있는사람 앞에   나도 어쩔줄 모른다   눈물 연기 달인은 한번 흘린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못한다   거짓으로 울 수 있지만 거짓으로   그칠 수 없다고   눈물 연기 달인은 고백했습니다 박도준 / 플러싱글마당 눈물 연기 눈물 연기 연기 지망생 배우 지망생

2023.09.08. 22:08

[글마당] 침묵의 눈물

유난히도 파랗고 밝던   그때의 하늘의 눈과 땅의 눈은 보았을까   흐르는 곳을 숨긴 채 피어오르는 흰 구름은 알고 있었을까   안경 밑으로 눈물 젖은 손수건도 말이 없었다       애써 외면하시던 딸과의 이별   귀여운 외손녀 딸을 앞세운 작별에 당신은     아드님들에 둘러싸여 내게 한마디 말씀도 없었다   그것이 외동딸과의 마지막 시간이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계신 듯       아버지가 가신지 강산이  변해도 여러 번   아버지의 사진은 책꽂이에 앉아 날마다 나를 굽어보신다   돌아가시기 직전 편찮으셨던 어머니는 나에게   “나는 딸을 보고 왔지요” 저승에서 아버지를 만나면   첫마디로 하신다는 말씀         이제사 원망도 그리움으로 변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시간이 지녀야 할 참된 가치를 깨닫기 시작  함인가   세계가 침묵으로 나를 대한다면   나 또한 침묵을 지킬  것이다   백발 아버지의 눈물을 정숙자 / 시인·아스토리아글마당 침묵 눈물 백발 아버지 한마디 말씀 마지막 시간

2023.06.09. 17:47

[수필] 맹 노인의 눈물

‘효도 효(孝)’자는 자식이 부모를 업고 있는 형상이다. 이 ‘효’자를 접할 때마다 이웃집에 살던 맹 노인이 떠올라 가슴이 아파진다. 그는 1980년대 초 여동생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을 왔다.그에게는 아들만 삼 형제가 있는데 큰아들이 중학교 2학년, 두 아들은 초등학생 때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의 사업이 번창해 아들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게 되었을 때는 집을 한 채씩 사 줄 능력까지 됐다.       저택에서 이민 오길 잘했다고 만족해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맹 노인은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재산을 상속해 주고 싶어도 못하게 되니 정신이 멀쩡할 때 집을 팔아서 자식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지인들의 그럴듯한 말에 신경이 쓰였다.     어느 날, 그는 아들 삼 형제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이 집을 팔면 250만 달러 정도 받는데 너희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 정부의 메디칼 혜택을 받기 위해 모아둔 현금도 똑같이 분배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들들은 좋은 생각이라며 효도를 다짐했다. 전 재산을 삼 형제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고 맹 노인 부부는 큰아들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다 아내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맹 노인은 주 정부에서 지원하는 가사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아내의 병간호를 하였다,   그런 생활이 일 년도 지나지 않아 큰아들 집에서 삼 형제가 가족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맹 노인이 알아들을 수 없게 영어로 진행됐고 점점 고성이 오가더니 급기야는 형제간에 주먹다짐까지 벌어졌다.  맹 노인은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눈치로 알아차렸다. 큰아들은 “나만 아들이냐? 너희들도 이제 부모님을 모시라”고 주장했고 두 동생은 “무슨 말이냐? 당연히 장남이 끝까지 모셔야 한다”고 맞선 것이었다. 그러자 큰며느리가 부모를 택하든, 본인을 택하든 둘 중 하나만 택하라고 폭탄선언을 해버렸다.     결국, 맹 노인의 아내는 양로병원으로 옮겨졌고 맹 노인은 큰아들, 둘째, 셋째 아들네서 한 달씩 보내는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한숨으로 하소연을 시작해 눈물로 마무리를 지었다. 전 재산을 아들들에게 미리 준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고 하였다.   그 돈만 있으면 부부가 헤어지지 않고 양로호텔(실버타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후회가 막심하다고 했다. 평소 금실이 좋았던 그는 아내와 떨어져 사는 것을 가장 가슴 아파했다. 큰아들 집 앞에 커다란 산이 있는데 그 산이 무너져내려 자신의 가슴을 덮치는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부인이 생선회를 무척 좋아하는데 맹 노인이 문병 갈 때마다 광어회가 먹고 싶다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 정부에서 한 달에 약 1000달러 정도 생활보조금을 받는 맹 노인으로서는 그 청을 들어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면회하러 가는 데 왕복 택시비로 한 달이면 400달러를 써야 하고, 운이 좋아 입주하게 된 노인 아파트 비용을 제하고 나면 그럴만한 여윳돈조차 없었던 것이다.     자식들은 일 년에 한 번 크리스마스 시즌 때 마지못해 어머니를 찾아오는데 빈손으로 왔다 간다고 한다. 내가 친분이 있는 큰아들을 설득해 보겠다고 하면 그는 펄쩍 뛰며 가정사를 남에게 말했다고 자신이 더 큰 곤란을 겪게 된다며 극구 만류했다.   결국, 양로병원에 5년 넘게 입원해 있던 맹 노인의 아내는 펜데믹 기간에 유명을 달리했다. 이번에는 90세가 넘는 맹노인이 삼 형제의 바람대로 양로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라면 자식이  의논해서 올바른 해법을 찾는 것이 타당한 일인데, 자식 된 도리를 하지 못하고 ‘나 몰라라 ’ 하는 이기적인 사고가 안타깝기만 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 준 것의 10만분의 1만 자식이 부모에게 하면 효자 소리를 듣는다는데…. 어떤 불효자라 하더라도 부모님 사후에는 자신이 했던 행동을 가슴 치며 후회하게 된다고 한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하고,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모부양이 문제가 된 이 시대. 재산을 미리 주지 않았다면 자식들이 그렇게 부모를 대우했을까?   요즈음은 부모세대도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지금 ‘쓰죽회’란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단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고 ‘다 쓰고 죽자’ 라는 모임이다.   노인 문제 전문가들은 재산을 미리 물려주지 않아도 사후에는 자식들이 자동으로 갖게 되니 절대로 미리 물려주지 말고 비 오는 날을 대비하여 우산을 준비해 두라고 조언한다. 이진용 / 수필가수필 노인 눈물 노인 부부 노인 문제 노인 아파트

2023.05.25. 19:17

[글마당] 죄의 눈물

  잠시 눈을 감으면 멀어진 것들은 더 멀리   그리움으로 쌓인다   미운 것 없이 밀려간 시간들도 잘라내지 못한 미움의 아픔도   온기 솟는 푸른 냄새 사이로 가만가만 또 천 리 길을 간다       갑갑한 기운은 행간마다 미끄러지는   혀의 시간 속으로 떨어지고   용서할 이유를 찾기보다는 미워할 이유를 먼저 찾는   모순투성이의 권한 속에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할 이유조차 놓쳐버린 지금   비정한 그 족보의 얼룩들이 죄악의 한으로 남아   숨을 곳이 없어야 죄가 없어질 거라는 수난의 길을 택한   그때 그 호랑나비의 새끼를 지금 나는 보고 있다       얼룩진 가루를 털어내며 홀로 떨고 있는   아주 작은 날개   폭풍이 몰려오는 바람 속에 먹이 사슬을 끊어내고   외로운 구원의 신비를 찾아 나선 새끼나비의 모진 고독이   피의 존속 앞에 꿇어 엎드린 증언으로 맺힌 고리를 풀어간다       온실 속을 빠져나와 고삐가 풀렸는데 갈 곳은 어디에   밤마다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어 돌다   스스로 몸부림치고 있는 죄의 뿌리에 갇힌 새끼 나비를 보며   억지의 숲속을 더듬게 했던 그때 그 사람들   잘린 숨 잘린 몸 맺힌 설음 어찌 삭아 들까서릿발친다       손 모아 우는 죄의 눈물 그 순환의 연속을 끊어내려   부르르 떠는 날개 만지며   다독이는 사랑을 전하는 장한 시대의 아픔을   지금 나는 보고 있다 손정아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눈물 나선 새끼나비 새끼 나비 냄새 사이

2023.04.28. 17:42

“자꾸 눈물이…노래하고 싶었다”

 “여러분 많이 보고 싶었고, 무대가 그리웠고, 노래 부르고 싶었습니다. 10년 만에 ‘불후의 명곡’ 무대에 다시 서니 60여년 전 데뷔했을 때만큼 떨리고 긴장되고 흥분되고 행복합니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KBS공개홀 ‘불후의 명곡’ 무대에 오른 가수 패티김(84)의 목소리는 떨렸다. 10년 만에 방송에서 마이크를 잡고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1983)을 부른 그는 “자꾸 눈물이 나려 한다”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2012년 2월 공식 은퇴를 선언한 그는 이듬해 10월까지 이어진 전국투어 ‘굿바이 패티’를 마지막으로 55년 가수 인생을 정리했던 터였다. 패티김을 ‘불후의 명곡’ 무대로 부른 건 오랜 인연이었다. 당시 JTBC 15부작 ‘패티김 쇼’(2012~2013)를 함께 한 MC 신동엽과 작가 등 제작진이 미국에 살고 있는 패티김이 오랜만에 한국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설득했다. 1958년 미 8군 부대에서 시작해 일찌감치 미국ㆍ일본 등 해외 활동을 펼친 그는 “K팝 가수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왕성하게 활약하고 있어서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며 “10년 전과는 또 다른 후배들이 그 오래된 노래를 어떻게 해석해서 불러줄지 궁금했다”고 출연을 결심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패티김은 이날 무대에서 ‘9월의 노래’ ‘이별’ ‘서울의 찬가’까지 총 4곡을 불렀다. 그는 “10년 동안 깊이 잠들어있는 목소리를 끌어내기가 힘들었다”고 했지만 여전히 무대 위에서 카리스마가 넘쳤다. 패티김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길옥윤이 작사ㆍ작곡한 ‘9월의 노래’를 꼽았다. 두 사람은 1966년 결혼해 73년 이혼했으나 이후에도 음악적 동반자였다. 패티김은 “노랫말이 정말 시적이고 멜로디도 너무 좋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머리 희끗희끗한 할아버지가 자기 음악에 도취해 노래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박형근 PD는 “한국에 오신지 한 달 정도 됐는데 미팅만 3~4번 정도 진행했고, 거의 매일 같이 연습하셨다”고 말했다. 2018년 조용필 편 이후 처음으로 3주에 걸쳐 특별 편성되는 ‘불후의 명곡’이다 보니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 중인 16팀이 무대에 올랐다. 옥주현은 “어릴 적부터 선생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며 “매번 뮤지컬을 할 때마다 캐릭터 디자인을 하는데,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은 선생님의 특징을 담아 노래하면 완벽하겠다 싶어 참고했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박기영ㆍ박민혜(빅마마)ㆍ서제이 등 여성 보컬리스트들은 “언제쯤 무대에서 뵐 수 있을까 싶었는데 선생님 앞에서 노래할 수 있어 너무 영광”이라고 입을 모았다. 패티김이 평소 아끼는 후배인 이선희가 깜짝 등장하기도 했다. 오후 12시 30분부터 시작한 7일 녹화는 자정이 다 돼서야 끝났다. 패티김은 11시간 넘게 이어진 녹화에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도 옛날에는 고음 잘한다고 뽐냈는데 여기선 명함도 못 내밀겠다”며 후배들이 준비한 무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날 녹화장은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팬들이 함께했다. 보통 7~8대 1인 방청 경쟁률이 18대 1로 껑충 뛰었다. “‘이별’은 별거 도중 나와서 이혼송이 됐다” “‘사랑은 영원히’는 이혼식 후에 받았다” 등 패티김이 솔직담백하게 후일담을 털어놓자 젊은 관객 사이에서 ”그 시대에 정말 멋지시다”는 탄성이 쏟아졌다. 패티김 측은 “은퇴를 번복하거나 활동을 재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재회의 가능성을 열어뒀다. 패티김은 녹화를 마치며 “오늘 출연한 모든 팀과 한 번씩 컬래버레이션을 해서 앨범을 내고 싶다”며 “그중에서도 포레스텔라와 함께 하면 별같이 아름다운 화음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가수가 되어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나의 운명이고, 내가 즐기는 노래를 여러분들이 즐기게 하는 것은 나의 숙명”이라며 “또다시 10년 후가 아닌 조금 더 빠른 시간 안에 다시 뵙기를 약속드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이날 녹화분은 26일, 다음달 3일과 10일, 세 차례로 나눠 방송된다. 민경원 기자  눈물 노래 가수 패티김 이날 무대 언제쯤 무대

2022.11.18. 14:47

[시로 읽는 삶] 눈물의 효능

(…)“인간의 얼굴은 감정의 괄약근이다.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주 풀려서 문제”라며 나는 양파를 썰면서, 네가 불편해할까 봐 너스레를 떤다.// (…)정확히 몸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눈물’을 담는 그릇이다.// 세월 따라 주름이 많이 간 그릇이 깨지기 전에 ‘눈물’이 다른 그릇으로 매일 조금씩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잘 옮겨지면 된다./ 휴일 늦은 저녁, 눈물이 듬뿍 들어간 나의 맛없는 요리를 맛있게 떠먹으려 너는 한참 전부터 커다란 숟가락을 들고 오직 사랑의 힘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김중일 시인의 ‘좋은 날을 훔치다-시라는 식당-’ 부분       눈물은 감정의 바로미터다. 눈물은 대체로 슬플 때 많이 나지만 기쁨이나 감동이 지나간 자리에도 눈물이 있다. 눈물이 난다는 건 오감이 자극되어 감정의 파도가 일기 때문일 터이다. 눈물에도 맛이나 밀도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슬플 때 흐르는 눈물과 기쁠 때 흐르는 눈물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눈물의 진정성은 믿을만하다. 눈물의 빵, 눈물의 사죄 등등은 꽤 호소력이 있다. 그래서 읍소는 과오를 용서받을 수 있는 최선책이 되기도 한다. 이별과 눈물은 떼놓을 수 없다. 이별은 눈물을 거느린다. 부모를 떠나보내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슬픔의 극한에 다다르는 눈물이 있다.     눈물의 이야기가 있는 삶은 한 사람의 인생을 구축하는 바탕이 되기도 한다. 크게 성공한 사람 뒤에 눈물의 빵이 있는 것은 소설구성의 3요소 중 ‘배경’처럼 효과적인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즈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가수 임영웅의 눈물로 견뎌내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의 재능까지 더 돋보이게 한다.   눈물은 눈을 보호하기 위해 또는 어떤 외부자극에 의한 최루성으로 흐르지만 신체적 기능이전에 희로애락을 받아내는 감정의 그릇이다. 슬픔이 흘리는 눈물보다 환희가 주는 눈물이 더 뜨거울 때가 있다. 그래서 눈물의 양면성은 어떤 삶도 구차하지만은 않게 해주고 감정을 얽힘을 풀어주는 청량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눈물은 소통을 위한 또 다른 언어다. 아기들은 눈물로 말을 한다. 여자의 눈물은 설득력이 있고 호신술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 한 연구팀에서 연구했다. 20대 남성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은 여자들이 슬퍼서 흘린 눈물을, 다른 한쪽은 일반 식염수를 냄새 맡게 했다. 여자들이 슬퍼서 흘린 눈물을 냄새 맡은 그룹 남자들은 심장박동과 호흡이 안정적이 되고 남성호르몬도 줄어들어 공격성도 낮더라고 한다.     눈물로 지은, 그러나 맛은 없는 밥을 먹겠다고 커다란 숟가락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을 사랑의 힘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시인의 말은 사랑의 근간은 눈물 아니냐는, 눈물 없이 사랑은 꽃피우지 못한다는 의미 리라.     나이가 들수록 눈물이 많아진다고 한다. 드라마를 보며 우는 초로의 남자들이 있다. 세상 사람이 다 불쌍하다며 슬퍼하는 여자도 있다. 울어야 할 일이 많아지는 것은 마음의 굳은살이 점점 물러지고 몸이 울음의 효능을 알게 된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살아온 궤적이 신산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눈물은 슬픔을 풀어주는데 으뜸이다. 마음을 정화하는 치유능력을 지닌 매혹적인 심리 기제이기도 하다. 웃음 못지않게 울음도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켜주는 약이다. 조성자 / 시인시로 읽는 삶 눈물 효능 이별과 눈물 저녁 눈물 그룹 남자들

2022.09.27. 17:20

[글마당] 검은 돌의 눈물

아이슬란드 브랙비치에서 예쁜 조약돌을 가져왔다   화산재로 호수에 검은 재가 쌓여   모래도 검게 되었고 검은 돌이 생겼을 것이다       나를 따라 낯선 미국 땅에 이주한 돌은   손으로 어루만지기만 하면 물기가 번진다   왜 울까   그 구름, 추운 해, 눈이 그리워서일까   돌은 두고 온 고향을 못 잊어 하겠지   추운 데 두면 안 울겠지   냉장고에 잠깐 넣었다 꺼냈다   손으로 주물러 주었더니 다시 눈물을 흘린다       아이슬란드 돌은 왜 따뜻한 곳에서 울고 있을까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는 걸일까   그냥 울고 싶어 우는 것일까   이제  울음을 그쳐다오   검은 눈물은 더욱 슬퍼 최복림 / 시인·롱아일랜드글마당 눈물

2022.09.02. 17:25

[시조가 있는 아침] 눈물이 진주라면 -김삼현(생몰 연대 미상)

눈물이 진주라면   흐르지 않게 싸두었다가 십 년 후 오신 님을   구슬 성에 앉히련만 흔적이 이내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가곡원류 증보본   변하지 않는 사랑의 정서 참으로 아름다운 서정시다. 만일 흘리는 나의 눈물이 진주라면 흐르지 않게 싸서 두리. 님 떠나신 후 10년 동안 흘리는 눈물을 모으면 구슬 성이 되지 않겠는가? 그 아름다운 성에 기다리던 고운 님을 모셔 앉히련만 눈물은 흘리면 이내 흔적 없이 말라 버린다. 그것이 오직 서러울 뿐이다.    옛사람의 정서는 이토록 간절하였다.     이 시조를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김삼현은 조선조 숙종 때에 정삼품 절충장군을 지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장인 주의식과 더불어 자연을 벗 삼고 산수를 즐기면서 시 짓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시조 여섯 수가 전하는데, 그의 시풍은 낙천적이고 명랑하다.   이 작품의 감각은 현대인이 읽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 따라서 작사가 김양화씨가 가요풍으로 가사를 조금 손보고 박춘석씨가 곡을 붙여 이미자씨가 노래했다. 그 노래의 1절은 이러하다.   “눈물이 진주라면 눈물이 진주라면/ 행여나 마를세라 방울방울 엮어서/ 그 님 오실 그날에 진주 방석 만들 것을/ 지금은 눈물도 다 흘려서 흔적만 남아 있네.”   사랑과 이별, 기다림에 대한 고인(古人)의 정서와 현대인의 정서가 흡사하지 않은가?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시조가 있는 아침 김삼현 눈물 진주 방석 연대 미상 구슬 성에

2022.06.29. 18:40

[이 아침에] 진짜 눈물, 가짜 눈물

 요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른다. 안과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했다. 안구건조증이 있다고 한다. 일종의 노화현상이란다. 안구건조증은 증세가 참 이상하다. 눈물이 없어 눈은 건조한데 눈물이 수시로 흘러내린다.   막힌 눈물샘을 녹여줄 온열 찜질 안대와 눈 전용 비누, 인공눈물을 샀다. 눈을 수시로 찜질하고 비누로 닦고 눈물을 넣느라 분주해졌다. 인공눈물은 뺨을 타고 줄줄 흘러 내렸다. 평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는데 이제 눈물을 사서 넣는다.     나는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누군가 목소리만 조금 높여도 눈물부터 났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눈물을 참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눈물이 앞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언젠가 장례식장에서 슬피 운 적이 있다. 돌아가신 분과 그리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딸아이와 같은 반 학부모로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어린 남매가 애처로워 가슴이 저려왔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 때문에 눈물이 났다. 울다 보니 내 설움에 울고 있었다. 가슴속 깊이 숨겨 놓았던 아버지를 잃은 지난 시간의 슬픔이 떠올라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졌다. 망자를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울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메말라 갔다.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다. 허구의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싶지 않아 슬픈 영화를 즐겨 보지도 않는다.     왜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사는 세상은 영화와 같지 않다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인 것 같다. 좋은 사람은 당연히 더 행복하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늘 그런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아마 오랜 시간 내 감정에 충실하지 않고 외면하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가능한 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하며 살아왔다. 좀 더 자신의 감정에 너그러워도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눈물은 인생 길 곳곳에 배어 있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울어야 한다. 삶이 힘들 때는 크게 소리 내어 울어야 그 무게를 덜어 낼 수 있다. 기쁜 순간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춤이라도 춰야 한다.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늘 평온한 것은 아니다. 그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마음은 널뛰 듯 부산스럽다. 그동안 참고 가둬 놓았던 눈물이 쌓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눈물이 부족하다니 좀 억울하다.     하루 일을 끝내고 인공눈물을 넣었다. 진짜 눈물은 말라 버리고 가짜는 넘쳐나게 흐른다. 눈물이 헤프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눈물이 메말라버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글을 쓸 수 있을까. 날마다 가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진짜 눈물을 흘리고 싶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눈물 가짜 평소 눈물 진짜 눈물 전용 비누

2022.03.14. 20:06

눈물의 해단식…李 "여러분은 지지 않았다, 내가 부족해서 패배"

눈물의 해단식…李 "여러분은 지지 않았다, 내가 부족해서 패배"     (서울=연합뉴스) 홍지인 정수연 기자 = 더불어민주당이 10일 대선 패배 후 눈물 속에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을 치렀다. 이날 오후 여의도 당사에 열린 선대위 해단식에 참석한 이 후보는 내내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검은색 정장에 파란색 넥타이 차림의 그는 한 당직자가 꽃다발을 건네주자 어색한 듯 "뭐 진 사람한테 꽃다발입니까"라며 받기도 했다. 이 후보는 자신의 발언 시간이 되자 품에서 원고를 꺼냈으나 거의 보지 않고 참석자들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마지막 인사와 위로를 건넸다. 그는 "우리 선대위 상근자들을 포함해서 자원봉사자 그리고 전국의 지지자 여러분, 우리 이낙연 총괄상임선대위원장을 포함해서 정세균, 추미애, 김두관, 박용진 전 후보님. 그리고 김동연 후보님, 송영길 대표님 우상호 총괄본부장님, 여러 의원님들께 참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린다"며 입을 뗐다. 이 후보는 "이재명이 부족해서 패배한 것이지 우리 선대위, 민주당, 당원, 지지자 여러분, 여러분은 지지 않았다"면서 "선대위 그리고 민주당 당원 지지자 여러분. 이재명의 부족함을 탓하시되 이분들에 대해서는 격려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기 바란다. 제 진심이다"며 거듭 달랬다.   그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지지자 여러분, 당원 여러분, 제가 부족했다. 고맙다"며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이 후보는 이후 송영길 대표와 이낙연 총괄 상임선대위원장, 우상호 총괄선대본부장 등과 차례로 포옹했다. 송 대표와 우 본부장의 눈가는 이미 촉촉해진 상태였다. 안민석 박성준 의원 등도 눈물을 보였다. 서영교 의원은 "5년 짧다"고 외치기도 했다. 일부 당직자들도 이 후보의 마지막 인사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이 후보는 주차장에 모인 지지자 및 자원봉사자들과의 인사를 끝으로 당사를 떠났다. 개중에는 엉엉 울며 "이재명"을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낙연 총괄상임선대위원장은 "참으로 악전고투, 수고가 많았다"면서 "날씨는 오늘로 완연한 봄인데 민주당은 어쩌면 겨울로 들어갈지 모른다는 걱정 어린 직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상호 총괄선대본부장은 "우리는 패배했으나 우리의 꿈과 비전이 패배한 것은 아니다"라며 "마지막 청계광장에서 모인 시민들이 함께 상록수를 부르며 외친 우리의 마음과 열정, 도전 의지를 결코 잊어선 안 된다"고 밝혔다. 이 후보 비서실에서 자원봉사를 한 윤소정 씨는 "어제는 패배했지만, 오늘은 패배를 털고 내일 더 큰 싸움에서 이길 준비를 하겠다. 저희는 드넓은 세상과 많고 많은 시간 가운데 이곳에서 후보님과 함께 같은 꿈을 꾸고 같이 걸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했다.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해단식 눈물 이낙연 총괄상임선대위원장 선대위 해단식 선거대책위원회 해단식

2022.03.10. 21:18

[이 아침에] 진짜 눈물, 가짜 눈물

요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른다. 안과에 가서 몇 가지 검사를 했다. 안구건조증이 있다고 한다. 일종의 노화현상이란다. 안구건조증은 증세가 참 이상하다. 눈물이 없어 눈은 건조한데 눈물이 수시로 흘러내린다.   막힌 눈물샘을 녹여줄 온열 찜질 안대와 눈 전용 비누, 인공눈물을 샀다. 눈을 수시로 찜질하고 비누로 닦고 눈물을 넣느라 분주해졌다. 인공눈물은 뺨을 타고 줄줄 흘러 내렸다. 평소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는데 이제 눈물을 사서 넣는다.     나는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누군가 목소리만 조금 높여도 눈물부터 났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눈물을 참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눈물이 앞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언젠가 장례식장에서 슬피 운 적이 있다. 돌아가신 분과 그리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초등학교 다니던 딸아이와 같은 반 학부모로 몇 번 보았을 뿐이다.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어린 남매가 애처로워 가슴이 저려왔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잃은 아이 때문에 눈물이 났다. 울다 보니 내 설움에 울고 있었다. 가슴속 깊이 숨겨 놓았던 아버지를 잃은 지난 시간의 슬픔이 떠올라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이 터졌다. 망자를 핑계 삼아 자연스럽게 울 수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메말라 갔다.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다. 허구의 이야기를 보면서 울고 싶지 않아 슬픈 영화를 즐겨 보지도 않는다.     왜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되었을까. 내가 사는 세상은 영화와 같지 않다는 경험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인 것 같다. 좋은 사람은 당연히 더 행복하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늘 그런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아마 오랜 시간 내 감정에 충실하지 않고 외면하려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가능한 한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애썼다.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하며 살아왔다. 좀 더 자신의 감정에 너그러워도 되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눈물은 인생 길 곳곳에 배어 있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울어야 한다. 삶이 힘들 때는 크게 소리 내어 울어야 그 무게를 덜어 낼 수 있다. 기쁜 순간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춤이라도 춰야 한다.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늘 평온한 것은 아니다. 그만한 경지에 이르지 못한 마음은 널뛰 듯 부산스럽다. 그동안 참고 가둬 놓았던 눈물이 쌓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눈물이 부족하다니 좀 억울하다.     하루 일을 끝내고 인공눈물을 넣었다. 진짜 눈물은 말라 버리고 가짜는 넘쳐나게 흐른다. 눈물이 헤프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눈물이 메말라버린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글을 쓸 수 있을까. 날마다 가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진짜 눈물을 흘리고 싶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눈물 가짜 평소 눈물 진짜 눈물 전용 비누

2022.03.10. 18:50

[삶의 뜨락에서] 눈물의 빵

내가 사는 동네에 페인트 스토어가 있다. 아침에 지나갈 때면 마스크를 쓰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히스패닉 청년들을 본다. 무심코 지나다가 요즘닉는 날씨도 찬데 일당을 벌어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는 1930년대의 Dust Bowl 이주를 다른 작품, 오클라호마 등의 가난한 소작농들의 캘리포니아 러시를 다루었다. 캘리포니아로 가면 사방에 포도, 오렌지,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고 들었고, 농장에 일할 사람이 모자란다는 전단이 살포되었다. 66번 하이웨이는 서부로 향하는 낡은 차들로 가득했다. 덜덜거리는 차는 그들의 집이었다.     캘리포니아는 그러나 그들이 상상한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영악한 농장주들은 500명 인부가 필요하면 2000명을 불러들여 임금을 착취했다. 이에 난민들이 반발하자 보안관을 풀어 구타하고 심지어는 목숨마저 빼앗았다. 과일이 남아돌면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강물에 던지고 사람들이 먹지 못하게 기름을 뿌렸다. 저자는 연명을 위해  화를 참고 일하는 처참한 노동자들의 심정을 ‘분노의 포도’로 표현했다.     페인트 가게 앞에 죽치고 있는 히스패닉은 어디서 왔을까. 중남미나 멕시코에서 담을 넘어온 사람이 많을 것이다. 좁은 방 한 칸을 빌려 여러 명이 기거하면서 돈을 모아 가족에게 보내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민주당 정부는 이들에게 관대하다. 캘리포니아, 뉴욕 등은 불법체류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고 무료 진료 혜택까지 베푼다. 시민들의 불평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왜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불체자를 먹여주고, 건강 보험을 들어주어야 하나. 잘해 줄수록 더 많은 밀입국자가 몰려와 미국은 재정 파탄에 직면할 것이 아닌가.   ‘분노의 포도’에 나오는 불쌍한 노동자들은 같은 미국인이었다. 그들은 목화밭, 포도밭, 농장에서 동족에게 착취당했다. 캘리포니아는 원래 멕시코 영토였다. 전쟁에서 땅을 빼앗은 미국인들은 광활한 농지에 말뚝만 박고 ‘내 땅’이라고 주장하고 총을 들고 지켰다. 한 사람이 수천 에이커를 소유하고 은행융자를 받아 거대한 농장을 경영했다. 노동자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스타인벡은 이를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했다. 강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지만 사람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먹이가 있는 곳, 돈이 있고, 기회가 있는 것으로 흐른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이주의 원리다. 국경에 높은 장벽을 쌓고, 국경 경비대를 풀어 사람을 잡아가고, 신분을 이유로 노동력을 뜯어먹는 것은 인간적이 못 된다. 그렇다고 마냥 불법 이민자들을 받아주어야 할 것인가.     미국은 이민의 나라이면서도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난민을 거부한 적이 많았다. 2차 대전 독일을 탈출한 유대인 난민선을 받아 주지 않고 유럽으로 돌려보냈다. 아직도 ‘분노의 포도’, ‘눈물의 빵’을 먹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이 세상에 배고픈 것보다 처참한 것은 없다.     분노의 포도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끝난다. 출산을 앞둔 젊은 여인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피해 가족과 함께 고지대 폐가를 찾는다. 여기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한 남자를 만난다. 여인은 가슴을 열고 그 남자에게 젖을 먹인다. 나는, 당신은 굶주리는 이들에게 빵 한 조각을 나누어 줄 수 있는가. 최복림 / 시인삶의 뜨락에서 눈물 캘리포니아 러시 캘리포니아 뉴욕 유대인 난민선

2022.01.14. 17:2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오늘은 그것도 눈물입니다

아직 나무에 매달려있는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더니 이내 아래로 떨어졌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 “생을 마감하셨나요?” 다가가 물었다. 대답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묻고 싶었다. “삶은 어떠셨나요? 견딜만 하셨나요?” 흩어진 나뭇잎 위로 구르며 나뭇잎은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나무 밑에서 나무를 올려다 본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는 움직임이 없다. 다리를 버티고 서서 하늘을 촘촘히 가르고 서있다. 하늘 가른 저 가지 끝 새순이 틀 때까지 숨만 쉴 뿐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휴업이다. 한 계절 떡 버티고 살아갈 나무가 전쟁터에 선 장수처럼 비장하다. 마지막 한 잎까지 떨구어낸 후 차가운 바람, 빽빽히 내려올 눈송이에 그야말로 온몸으로 견뎌낼 자세다. 천박한 호기심이 아닌 그 내면 그 뿌리를 향해 깊어가고 있다.    오늘도 많은 말을 내뱉었다. 때론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위태위태 담아 내기도 했다. 돌아서면 후회할 말들을 썼다 지우고 그렇게 계절이 가고 한 해가 갔다. 매해 쌓여가는 넋두리, 다행한 것은 그 중 가끔은 시가 되고 그림의 소재가 된 것은 위로가 되었다.   나무가 떨군 마지막 잎새. “나무의 마지막 흘린 눈물 아닌가요? 왜 눈물을 꼭 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눈물은 물이 아닐 수도 있어요.” “보세요. 나무는 울지 못하잖아요. 나무가 제 잎사귀를 물들이며 참고 견디다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잖아요.” 나무를 보면서 나무는 진실하고 정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친절함이 그 안에 은근하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시선이 있다. 나무는 늘 그 자리에서 판단의 언어대신 공감과 이해의 언어를 선물한다. 저마다의 역할을 인정해주면서 때로 나를 버릴 줄도, 견뎌낼 줄도 안다. 고마워하지만 요구하지 않는 넓고 따뜻한 품이 있다.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하는 우리들의 조급한 하루와 달리 나무는 아버지 품에 돌아온 후 찾아드는 편안함이 배어있다.   추수감사절 연휴 Wisconsin, Devil’s Lake State Park에 다녀왔다. Lake 를 끼고 긴 시간 긴 길을 걸었다. 길옆엔 바위산이 있고 바위 틈새로 높이 뻗은 소나무, 잎을 떨군 떡갈나무, 단풍나무숲이 아름다웠다. 호수를 가르는 바람은 좀 쌀쌀했지만 몸과 마음을 정화해주었다. 돌산을 오르는 하이킹은 포기했지만 산 허리를 감싸고 뻗은 철도길을 걸으면서 어릴 때 부르던 ‘기차길 옆 오막살이 / 아기 아기 잘도 잔다 / 칙-폭, 칙칙폭폭- 칙칙폭폭- / 기차 소리 요란해도 / 아기 아기 잘도 잔다.’ 침목을 두개씩 건너 뛰며 놀던 기억이 흘러간 긴 시간을 이으며 다가온다. 젊은 날의 열정은 조금씩 사라지지만 휘어지는 철길의 끝 자락, 맞닿은 시선위로 여유롭게 굽어지는 편안함이 다가온다.     바람에 떨어지는 잎새 하나, 하늘을 가르는 나무의 잔 가지, 시선이 멈춘 휘어진 철로 끝 자락, 잔잔하게 번져가는 호수의 얼굴, 동요 한 소절의 정겨움, 돌아설 수 없을 만큼 멀리 온 시간, 모두…… 오늘은 그것도 눈물입니다.   “오래오래 살아도 늙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태어나게 된 신비 앞에서 호기심으로 가득한 아이들처럼 살아가십시요” [아인슈타인 어록에서]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물 떡갈나무 단풍나무숲 나뭇잎 위로 아기 아기

2021.11.2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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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눈물로 양파를 까던 친구

 양파를 고른다. 양파는 작고 단단한 것이 좋다. 큰 것을 다 쓰지 못하고 남겨두게 되면 신선도나 향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둥글고 반질반질한 모양새가 당차다. 양파 안은 나이테처럼 자라난 동그라미로 꽉 차 있다. 가운데 심지를 중심으로 점점 큰 동그라미로 둘러싸여 탄탄하다.     양파를 깐다. 까는 일은 조금 번거롭다. 겉껍질이 단단히 붙어있어 까기가 쉽지 않다. 먼저 양파 밑동과 위를 잘라내고 껍질을 한 겹씩 벗긴다. 하얀 속살이 드러난 양파에서 매운 내가 났다.     그림 그리는 내 친구는 울고 싶은 날 양파를 깐다고 했다. 눈물이 나는 것은 양파 때문이라고 핑계 댈 수 있으니 좋단다.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은 날 양파를 까며 눈물을 흘린다 했다. 그러고 나면 새로 시작할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친구는 오랫동안 눈물의 시간을 보냈다. 타국에서 외로움과 싸워야 했고 공부는 지지부진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세월이 오래 계속되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간다고 무엇이 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작품은 숯과 한지를 수없이 반복해서 덧입혀 질감을 표현한다. 겹겹이 싸인 양파처럼 한지와 숯을 번갈아 덮어 두드린다. 수백 번의 쇠솔질을 하고 나면 숯과 한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재질로 섞이어 또 다른 세계가 된다. 손에 지문이 다 없어질 정도의 노동이다. 몇 십 년의 세월을 견디며 작품을 만들던 친구는 지금 그 분야 최고가 되었다.     나는 이제 양파를 까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참는 것이 아니라 웬일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요즈음 양파는 예전처럼 맵지 않은 것일까. 젊은 날의 양파는 더 맵게 느껴졌던 것일까. 몇 십 년 주부 내공이 눈물 안 흘리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일까. 나이 들며 감정이 무디어진 탓일까. 진짜 인생은 양파 매운맛보다 훨씬 맵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일까.     얇게 자른 양파를 프라이팬에 볶는다. 매운 냄새가 사라지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올라온다. 열을 오래 가할수록 더 달아진다. 하얀 양파가 갈색이 될 때까지 뒤적여 주었다.     볶은 양파를 맛보았다. 달콤하다. 인위적인 단맛이 아니라 볶이고 단련된 다음에야 스며드는 은근한 맛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 뜨거운 불을 인내하고 난 후에야 맛볼 수 있는 단맛이다.     양파를 맛보며 생각했다. 내 젊은 날들은 뜨거운 열에 볶이면서 달콤함이 배어나올 때까지 잘 버텼는가. 눈물 때문에 포기한 적은 없었는가. 어려운 시절을 보낼 때 언젠가 나에게도 달달한 시절이 오리라는 믿음을 가졌던가. 뜨거운 불을 견딘 자는 모두 달콤함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았을까. 모를 일이다.     양파의 달콤함이 은은하게 혀끝에 남아있다. 매운 맛을 보고 난 후 올라오는 단맛의 향긋함이다. 눈물로 양파를 까던 친구 생각이 난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눈물 양파 양파 매운맛 양파 밑동 오랫동안 눈물

2021.11.15. 20:05

[이 아침에] 눈물로 양파를 까던 친구

양파를 고른다. 양파는 작고 단단한 것이 좋다. 큰 것을 다 쓰지 못하고 남겨두게 되면 신선도나 향이 덜해지기 때문이다.         둥글고 반질반질한 모양새가 당차다. 양파 안은 나이테처럼 자라난 동그라미로 꽉 차 있다. 가운데 심지를 중심으로 점점 큰 동그라미로 둘러싸여 탄탄하다.     양파를 깐다. 까는 일은 조금 번거롭다. 겉껍질이 단단히 붙어있어 까기가 쉽지 않다. 먼저 양파 밑동과 위를 잘라내고 껍질을 한 겹씩 벗긴다. 하얀 속살이 드러난 양파에서 매운 내가 났다.     그림 그리는 내 친구는 울고 싶은 날 양파를 깐다고 했다. 눈물이 나는 것은 양파 때문이라고 핑계 댈 수 있으니 좋단다. 너무 힘들어서 울고 싶은 날 양파를 까며 눈물을 흘린다 했다. 그러고 나면 새로 시작할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친구는 오랫동안 눈물의 시간을 보냈다. 타국에서 외로움과 싸워야 했고 공부는 지지부진했다. 부족한 것이 많은 세월이 오래 계속되었다.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시간이 간다고 무엇이 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작품은 숯과 한지를 수없이 반복해서 덧입혀 질감을 표현한다. 겹겹이 싸인 양파처럼 한지와 숯을 번갈아 덮어 두드린다. 수백 번의 쇠솔질을 하고 나면 숯과 한지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재질로 섞이어 또 다른 세계가 된다. 손에 지문이 다 없어질 정도의 노동이다. 몇 십 년의 세월을 견디며 작품을 만들던 친구는 지금 그 분야 최고가 되었다.     나는 이제 양파를 까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을 참는 것이 아니라 웬일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요즈음 양파는 예전처럼 맵지 않은 것일까. 젊은 날의 양파는 더 맵게 느껴졌던 것일까. 몇 십 년 주부 내공이 눈물 안 흘리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일까. 나이 들며 감정이 무디어진 탓일까. 진짜 인생은 양파 매운맛보다 훨씬 맵다는 것을 알게 된 까닭일까.     얇게 자른 양파를 프라이팬에 볶는다. 매운 냄새가 사라지고 달짝지근한 냄새가 올라온다. 열을 오래 가할수록 더 달아진다. 하얀 양파가 갈색이 될 때까지 뒤적여 주었다.     볶은 양파를 맛보았다. 달콤하다. 인위적인 단맛이 아니라 볶이고 단련된 다음에야 스며드는 은근한 맛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 뜨거운 불을 인내하고 난 후에야 맛볼 수 있는 단맛이다.      양파를 맛보며 생각했다. 내 젊은 날들은 뜨거운 열에 볶이면서 달콤함이 배어나올 때까지 잘 버텼는가. 눈물 때문에 포기한 적은 없었는가. 어려운 시절을 보낼 때 언젠가 나에게도 달달한 시절이 오리라는 믿음을 가졌던가. 뜨거운 불을 견딘 자는 모두 달콤함으로 정당한 보상을 받았을까. 모를 일이다.     양파의 달콤함이 은은하게 혀끝에 남아있다. 매운 맛을 보고 난 후 올라오는 단맛의 향긋함이다. 눈물로 양파를 까던 친구 생각이 난다.   박연실 / 수필가이 아침에 눈물 양파 양파 매운맛 양파 밑동 오랫동안 눈물

2021.11.04.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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