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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모 애국지사 유해 한국 봉환…흥사단 등서 독립운동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임창모(사진) 애국지사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된다.   대한인국민회(이사장 클라라 원) 등 항일 유공 단체들에 따르면 잉글우드 묘지에 안장돼 있던 임 애국지사의 유해는 내달 11일 고국으로 돌아간다.     이번 유해 봉환은 3년 전부터 준비됐다. 가족들의 양해와 정부의 최근 수년간의 추모 사업 계획에 따른 것으로, 한국 보훈부에서도 각별한 예우를 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894년 출생한 임 애국지사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며, 1922년 일본과 중국을 거쳐 1926년 도미했다. 그는 도미 후 대한인국민회에서도 활동했다. 시카고와 LA에서 유학을 하며 미주 흥사단 임원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식품 도매업을 하며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임 애국지사는 1967년 7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임 애국지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20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대한인국민회 측은 내달 10일 오후 임 애국지사 고별식과 추모식 등을 계획하고 있다. 최인성 기자애국지사 독립운동 임창모 애국지사 한국 봉환 애국지사 고별식

2025.07.15.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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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론] 고추장, 간장에 담긴 독립운동

1919년 3월 1일 평화 시위는 전 세계에 흩어진 한국인들에게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자주독립을 외치며 일제에 항거했으며 이러한 소식을 전해들은 미주 한인들은 크게 고무되어, 보다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미주 한인들은 어려운 환경 즉 저임금, 열악한 노동 조건, 그리고 인종 차별 등의 악조건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3.1 평화 시위 소식은 미주 한인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특히 3.1 운동은 미주 한인여성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3.1 운동 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이 독립 운동의 보조에서 주체로 적극 참여하게 된 것이다.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장 이대위는 1918년 1월 21일 여성 동포들의 국민회 입회를 허락하는 훈시를 발표하였다.     “남녀 제한 없이 모두 동등한 의무와 권리를 갖는 회원으로 입회하는 것”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여성 동포들의 입회가 허락되자, 각 지방회에서 여성 동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3.1 운동 이후 미주 한인 여성들도 조직을 만들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차만재 교수는 캘리포니아 주 다뉴바 지방의 한인들이 3.1 운동 소식을 접한 후 여성들의 독립 운동 참여가 활발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1) 5월 18일 한인 여성 대표들이 회의를 했다, 2) 전국 한인 애국여성 리그 설립, 3) 대한부인구제회 다뉴바 지방회 설립, 4) 일본 간장 불매 운동, 5) 상해 임시정부를 인정하도록 미 의회에 로비, 6) 한인 학생 회의가 8월 14~16일 개최됐다고 요약하고 있다.   3.1 운동 이후부터 애국 부인단은 외교 활동도 벌였는데 부인 애국단이 미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의 서두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쟁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것을 치하하면서 한인들은 비무장의 혁명을 일으켰을 뿐이라고 했다. 또한 일인들의 만행도 지적했는데, 한국 부녀를 겁탈했고 예수교를 위협한다고 전했다.     ‘무삼 방책으로든지 도와주시기를 꾀하시면 각하께서 능히 오늘 넓은 세계가 다 아는 일본의 큰 죄악을 교정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마지막 발언에 이 글에 핵심이 들어있다. 이 청원서는 은근히 미합중국 대통령을 세계의 리더로 인정하고 있음을 보이며 리더로서 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즉 세계의 악인 일본에 조치를 취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는데 왜적의 장을 먹지 않는다는 취지에서 김자혜, 리신환, 량제현은 고추장과 간장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새크라멘토 지역 부인들은 합자해서 간장회사를 조직하고 일본 간장 불매 운동을 전개했다. 리버사이드 지역의 한인 여성들도 집에서 간장을 직접 만들어 먹고 일본 간장 불매 운동에 동참했다고 신한민보는 보도했다. 이처럼 각 지역의 한인 여성들은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고 간장, 고추장, 토장 등을 직접 만들거나 한인 회사를 설립하여 판매한 것이다.     3.1 운동 직후 미주 한인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첫째,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정식 입회가 1918년부터 허락되었고, 둘째, 부인애국단과 대한부인구제회 등의 여성 단체를 조직하고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셋째, 일본 상품 불매 운동에 앞장섰고, 넷째,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미주 한인 여성들이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차세대들에게 알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에서 2025년 주요 사업의 일환으로 차세대 교육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발표했다. 우리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겠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독립운동 고추장 미주 한인여성 한인 여성들 대한인국민회 북미

2025.02.27.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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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05주년 삼일절] 꽃길에서 만난 자유 뺏긴 두 민족

중가주 프레즈노에는 ‘블로솜 트레일(Blossom Trail)’로 불리는 유명한 꽃길이 있다. 매년 3월이면 이 길을 걷기 위해 많은 이들이 시모니안 농장(Simonian Farms)으로 몰려든다.   아름다운 꽃길 이면에는 아픈 역사가 있다. 미주 한인들의 나라 잃은 슬픔과 일본계 미국인들의 배척당한 이야기가 함께 배어있는 곳이 바로 프레즈노다.   꽃길 너머 시모니안 농장 귀퉁이에는 25피트 높이의 목조탑이 있다. 전면에는 한문으로 ‘위령탑(慰靈塔)’이라고 적혀있다.     탑은 1943년 3월 강제 이주조치로 애리조나 수용소로 보내진 이 지역 일본계 미국인 농부들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5년 세웠다. 탑 안내문에는 시모니안 일가가 이들로부터 농업 기술은 물론이고 근면, 성실의 가치를 배웠다고 쓰여있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계 미국인들은 1900년대 초 가주 채소 생산량의 약 40%에  관여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 농장의 가격은 일반 농장의 거의 7배에 달했을 정도로 그들의 능력과 노력은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1941년 12월7일) 이후 일본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해지자 당시 가주 채소 재배 협회 측은 곧바로 일본계를 서부 지역에서 추방하는 데 앞장선다. 가주의 농업 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일본계 농장주들을 전쟁을 빌미로 배제 또는 도태시키려는 속셈이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수용소로 강제 이주된 일본인들은 전국에서 12만명에 달했다.   시모니안 농장의 위령탑에서 남동쪽으로 불과 20마일 떨어진 리들리 지역에는 미주 지역 한국 독립운동사의 상징이 세워져 있다. 14피트 높이의 독립문이다. 그 옆으로 안창호, 이승만 등 애국지사 10인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 한국 국가보훈부 등이 리들리시와 함께 22만 달러를 들여 세웠다.   1905년부터 한인들이 모여든 리들리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계약 기간이 끝난 상당수의 한인이 본토로 와서 가장 먼저 정착했던 곳이다. 당시 약 500여 명의 한인이 이곳 농장 등에서 일하며 자연스레 한인 사회가 형성됐고, 이후 미주 지역 항일운동의 근원지가 됐다.   삼일 운동 전후 2년 간(1918-1919) 리들리 지역 한인들이 한국으로 보낸 독립운동 자금은 1만3835달러였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0만 달러(연방 노동부 자료 참고)가 넘는 돈이다. 농장 노동자 등으로 힘겹게 일하며 일당을 쪼개고 또 쪼개서 모은 돈임을 감안하면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독립문 인근 다뉴바 한인교회당 터를 가면 당시 독립 자금 기부자 명단이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당시 다뉴바 한인교회 앞은 삼일운동 이듬해인 1920년 3월 1일, 미주 한인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가행진을 펼쳤던 곳이다. 이후 이 교회 앞에서는 매해 삼일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1937년에는 리들리를 비롯한 중가주의 팔리어, 생거, 델라노, 다뉴바 등 5개 지역 한인들이 연합으로 삼일절을 기념하며 시가행진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리들리의 한인과 시모니안 농장 지역 일본인간의 마찰이나 갈등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두 민족 간의 어떠한 교류가 있었는지 역시 알 수 없다.   단, 공통점은 있다. 두 민족 모두 한 맺힌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 일본계 미국인은 전쟁을 일으킨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제로 수용소에 갇혀 배척을 당해야 했다. 결은 다르지만 한인들은 조국을 빼앗겨 애통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LA한인회를 비롯한 한인 단체들은 오늘(1일) 이곳에서 삼일절 기념식을 연다.   매년 봄이면 꽃구경을 하려는 한인들이 프레즈노를 즐겨 찾는다. 요세미티나 세코이아 국립공원 가는 길에 들르는 지역이기도 하다. 꽃길만 걷다오기에는 지난 역사가 아프다. 김인호 여행작가·장열 기자삼일절 105주년 삼일절 3.1절 리들리 한인 로스앤젤레스 LA 미주중앙일보 장열 일본계 시모니안 농장 프레즈노 일본인 수용소 독립운동 다뉴바 LA한인회 블로솜 트레일 김인호 여행작가

2024.02.2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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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허술한 독립운동 서훈 심사

안중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었던 담대하고 흔들림이 없는 청년의 의기는 지금도 퍼렇게 가슴에서 엉긴다. 그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저려오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 하지만 사람들은 뤼순감옥에서 돌아가신 안중근 의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와 함께 거사를 꾀했던 우덕순이 나중에 동족을 팔아먹는 밀정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3·1운동으로 당황했던 일본은 다급하게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방법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위장일 뿐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했다. 일본은 독립운동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많은 조선인을 포섭했다. 일본에 협조한 변절자, 우리는 그들을 ‘밀정’이라고 부른다.   밀정은 독버섯처럼 독립운동의 그늘에 기생하며 자신의 안위를 채우고 부를 축적했다. 그들 중 하나가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도모했던 우덕순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완용도 처음에는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조선의 자주독립을 부르짖었다. 그도 결국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매국의 일에 가담하게 된다.   일본의 회유, 귀순증이 그것이다. 일본군에 귀순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귀순증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밀정의 시작이다. 밀정을 처단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한 독립운동가가 일본군 19사단에 귀순을 하게 된다. 어떤 정보를 제공했는지, 장성순의 귀순으로 그의 조직이 일본경찰에게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귀순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장성순의 가족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귀순증 받았는데 경찰에게 잡혀 죽게 됐노라고.   이해는 한다. 독립의 기미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깜깜했을 테니 조여오는 일본경찰의 감시와 겁박을 견디긴 어려웠으리라.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공적에 대한 서훈심사는 별도의 문제다.   해방이 되고 드러나지 않은 배신의 행적을 감춘 이들이 표면에 나섰다. 자신도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하지만 밀정의 명단은 일본 군 내부기밀보고서에 고스란히 있었다. 그렇게 밝혀진 일본에 협조한 자가 859명이라니. 또한 건국훈장을 받은 자들 가운데 친일행적으로 드러난 사람들이 167명이라고 한다. 오래전 기록이니 지금은 그 명단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건국훈장은 말 그대로 국가의 초석을 세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훈장이다.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나중에 친일을 한 사람은 서훈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다. 훗날 친일의 행적이 드러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하는데 KBS가 최근 방송한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방송에 따르면 2016년의 보훈처 심사위원 23명이 전직 공무원, 법학자, 정치학자 등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역사를 전공한 위원들은 해촉이 되어서 그런가, 흠결이 있는 자가 건국훈장을 받아도 묵인하고 있다.   변절자의 후손이 지조를 지키고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의 명예를 높여주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 행동을 지켜보고도 침묵하는 광복회 회원들은 무엇에 동조하는 침묵인지 묻고 싶다. 권소희 / 소설가발언대 독립운동 서훈 독립운동 서훈 독립운동 조직 회유 귀순증

2022.11.18. 17:36

[발언대] 허술한 독립운동 서훈 심사

안중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겨누었던 담대하고 흔들림이 없는 청년의 의기는 지금도 퍼렇게 가슴에서 엉긴다. 그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저려오는 안중근 의사의 거사. 하지만 사람들은 뤼순감옥에서 돌아가신 안중근 의사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그와 함께 거사를 꾀했던 우덕순이 나중에 동족을 팔아먹는 밀정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3·1운동으로 당황했던 일본은 다급하게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통치방법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그건 표면적인 위장일 뿐이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했다. 일본은 독립운동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많은 조선인을 포섭했다. 일본에 협조한 변절자, 우리는 그들을 ‘밀정’이라고 부른다.   밀정은 독버섯처럼 독립운동의 그늘에 기생하며 자신의 안위를 채우고 부를 축적했다. 그들 중 하나가 안중근과 같이 거사를 도모했던 우덕순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완용도 처음에는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만민공동회를 열어 조선의 자주독립을 부르짖었다. 그도 결국 일본의 회유에 넘어가 조선을 일본에 넘기는 매국의 일에 가담하게 된다.   일본의 회유, 귀순증이 그것이다. 일본군에 귀순하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귀순증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밀정의 시작이다. 밀정을 처단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한 독립운동가가 일본군 19사단에 귀순을 하게 된다. 어떤 정보를 제공했는지, 장성순의 귀순으로 그의 조직이 일본경찰에게 일망타진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귀순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고 말았다. 장성순의 가족들이 나섰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귀순증 받았는데 경찰에게 잡혀 죽게 됐노라고.   이해는 한다. 독립의 기미는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것처럼 깜깜했을 테니 조여오는 일본경찰의 감시와 겁박을 견디긴 어려웠으리라.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공적에 대한 서훈심사는 별도의 문제다.   해방이 되고 드러나지 않은 배신의 행적을 감춘 이들이 표면에 나섰다. 자신도 독립운동을 했노라고. 하지만 밀정의 명단은 일본 군 내부기밀보고서에 고스란히 있었다. 그렇게 밝혀진 일본에 협조한 자가 859명이라니. 또한 건국훈장을 받은 자들 가운데 친일행적으로 드러난 사람들이 167명이라고 한다. 오래전 기록이니 지금은 그 명단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   건국훈장은 말 그대로 국가의 초석을 세운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훈장이다.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나중에 친일을 한 사람은 서훈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원칙이다. 훗날 친일의 행적이 드러날 수 있으므로 신중해야 하는데 KBS가 최근 방송한 임시정부수립 100주년 특집 방송에 따르면 2016년의 보훈처 심사위원 23명이 전직 공무원, 법학자, 정치학자 등으로 채워졌다고 한다. 역사를 전공한 위원들은 해촉이 되어서 그런가, 흠결이 있는 자가 건국훈장을 받아도 묵인하고 있다.   변절자의 후손이 지조를 지키고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의 명예를 높여주겠다고 나서고 있다. 그 행동을 지켜보고도 침묵하는 광복회 회원들은 무엇에 동조하는 침묵인지 묻고 싶다. 권소희 / 소설가발언대 독립운동 서훈 독립운동 서훈 독립운동 조직 회유 귀순증

2022.11.16. 18:59

[발언대] 부끄러운 독립운동

‘가문의 영광’이라는 코믹영화가 있었다. 신현준과 김원희와 더불어 김수미가 등장했던 시리즈는 즐겁게 본 영화다. 조폭 가문에 명문대 출신이 들어오면 집안으로서는 영광이리라. 가문을 지켜주는 것과 달리 가문에 먹칠하는 일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육영수 여사를 보듯 박근혜를 보았고 박정희를 따르듯 그녀를 따랐다. 고속성장을 이끈 지도자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기억은 향수에 더 가깝다. 어찌 됐든 문세광의 저격과 김재규의 총격으로 부모를 잃은 박근혜에 대한 연민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갖가지 불미스런 일들이 드러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탄핵을 받고 교도소 생활까지 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차라리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명예도 지키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는 대통령의 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근에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장성순의 증손녀’라는 기사에서 나는 독립운동과 친일행적의 기록을 함께 가진 ‘장성순’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무슨 연고로 그녀자들은 그와 같이 가슴이 무여지는 듯이 우는가’라고 시작하는 1945년 4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장성순이 만주 화룡현에서 밀정을 색출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수색이 심해지자 중국 땅으로 가서 숨어 지내다 제우교도인 양모가 일본군에 귀화하면 죄를 사해준다는 말을 듣고 그때 마침 만주에 출정했던 일본군 19사단에 가서 귀화하고 귀순증을 받았다. 그런데 며칠 후 집에 있다 회령경찰서에서 나온 경찰 두 명에게 일본경찰의 앞잡이였던 리덕선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체포를 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대해 공소를 제기했다 기각되었다는 내용과 아내, 두 딸에 관해 적혀있었다.   제우교는 천도교 유파이긴 하나 3·1운동 이후에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는 친일색체가 강한 일제 강점기 때의 종교였다. 제우교에는 일진회 인물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일진회는 당시에 대표적인 친일집단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는 모임’이라 해서 일진회(一進會)의 전신은 ‘유신회’다.   사형선고에 대한 공소가 기각되자 장성순의 가족이 다시 일본군 19사단에 찾아가서 울며 애원했던 결과 보증서를 받았다는 기사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증서의 내용을 추리자면 ‘지난날을 뉘우치고 이후에 망동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양심으로 서약하면 상당한 대우를 주고 장차 그 생명을 보증하는 바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장성순의 후손이 광복절 기념식에 대통령 옆자리에 서 있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그분이 일본군 19사단에 귀순했다는 것도 일본군에게 애원해서 보증서를 얻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현세에 만나기를 바라지 않으니…, 신부의 교식에 따라 조용히 현세를 떠나라’라던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와 대조되는 이 씁쓸한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권소희 / 소설가발언대 독립운동 대통령 옆자리 일진회 인물들 광복절 기념식

2022.09.09. 17:28

[발언대] 부끄러운 독립운동

‘가문의 영광’이라는 코믹영화가 있었다. 신현준과 김원희와 더불어 김수미가 등장했던 시리즈는 즐겁게 본 영화다. 조폭 가문에 명문대 출신이 들어오면 집안으로서는 영광이리라. 가문을 지켜주는 것과 달리 가문에 먹칠하는 일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아닌가 싶다.     사람들은 육영수 여사를 보듯 박근혜를 보았고 박정희를 따르듯 그녀를 따랐다.  고속성장을 이끈 지도자와 독재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는 박정희에 대한 국민적 기억은 향수에 더 가깝다. 어찌 됐든 문세광의 저격과 김재규의 총격으로 부모를 잃은 박근혜에 대한 연민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고 갖가지 불미스런 일들이 드러나면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탄핵을 받고 교도소 생활까지 하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차라리 대통령이 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의 명예도 지키고 시민들의 환호를 받는 대통령의 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최근에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장성순의 증손녀’라는 기사에서 나는 독립운동과 친일행적의 기록을 함께 가진 ‘장성순’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무슨 연고로 그녀자들은 그와 같이 가슴이 무여지는 듯이 우는가’라고 시작하는 1945년 4월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인 장성순이 만주 화룡현에서 밀정을 색출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수색이 심해지자 중국 땅으로 가서 숨어 지내다 제우교도인 양모가 일본군에 귀화하면 죄를 사해준다는 말을 듣고 그때 마침 만주에 출정했던 일본군 19사단에 가서 귀화하고 귀순증을 받았다. 그런데 며칠 후 집에 있다 회령경찰서에서 나온 경찰 두 명에게 일본경찰의 앞잡이였던 리덕선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체포를 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에 대해 공소를 제기했다 기각되었다는 내용과 아내, 두 딸에 관해 적혀있었다.   제우교는 천도교 유파이긴 하나 3·1운동 이후에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는 친일색체가 강한 일제 강점기 때의 종교였다. 제우교에는 일진회 인물들이 많이 가담했는데 일진회는 당시에 대표적인 친일집단이었다. ‘조선과 일본이 하나가 되는 모임’이라 해서 일진회(一進會)의 전신은 ‘유신회’다.   사형선고에 대한 공소가 기각되자 장성순의 가족이 다시 일본군 19사단에 찾아가서 울며 애원했던 결과 보증서를 받았다는 기사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증서의 내용을 추리자면 ‘지난날을 뉘우치고 이후에 망동한 행동을 하지 않기를 양심으로 서약하면 상당한 대우를 주고 장차 그 생명을 보증하는 바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장성순의 후손이 광복절 기념식에 대통령 옆자리에 서 있지만 않았더라도 나는 그분이 일본군 19사단에 귀순했다는 것도 일본군에게 애원해서 보증서를 얻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현세에 만나기를 바라지 않으니…, 신부의 교식에 따라 조용히 현세를 떠나라’라던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편지와 대조되는 이 씁쓸한 기분은 무엇 때문일까? 권소희 / 소설가발언대 독립운동 대통령 옆자리 일진회 인물들 광복절 기념식

2022.09.06. 18:58

“이민선조 독립운동 정신 계승”…임시정부 103주년 기념식

“자랑스러운 독립운동 역사를 기억합시다.” “어린이와 젊은이에게 선조들의 활약을 알립시다.” “한국 정부가 재외동포 역사를 기억하고 위상을 지켜줘야 합니다.”   한인단체가 연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11일 USC 인근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이 자리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예배당에는 주최 측 예상보다 많은 160여 명의 한인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수립과 재정지원에 헌신했던 이민선조 활약상과 민족정신을 계승하자고 강조했다.   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은 일제강점기 이민선조의 애국애족 정신을 잊지 말자는 자리였다.   대한인국민회에 따르면 1903~1945년 동안 미주 한인 1만 명은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중심으로 1909년 대한인국민회를 결성, 사실상 첫 해외 임시정부 활동을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이민선조들은 수십 만 달러를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자금을 댔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 청사 렌트비도 미주 한인사회가 보낸 독립자금으로 가능했다.   실제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은 1919년부터 4년 동안 미주 한인사회가 보낸 독립자금이 90만 달러라고 발표한 바 있다.   대한인국민회 윤효신 이사장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민선조들은 어려운 환경에도 기꺼이 독립자금을 마련해 상해로 보냈다. 한인사회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다방면에 기여했다는 역사를 잊지 말자”고 말했다.   제임스 안 LA한인회장은 “일제강점기 미주 한인, 고려인 등은 해외에서 힘들게 살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재외동포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고 그에 걸맞은 위상을 찾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석호 가주 하원의원은 “우리 선조들이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은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였다며 “어린이와 젊은층이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알도록 널리 알리자”고 강조했다.   한편 김영완 LA총영사는 김부겸 총리 기념사를 대독했다. 김 총리는 기념사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한민국은 앞으로 한 분의 독립운동가라도 더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3주년 기념식은 참석자들의 만세삼창으로 마무리됐다. 글·사진=김형재 기자이민선조 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자금 이민선조 독립운동 이날 대한민국임시정부

2022.04.1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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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선조 독립운동 역사 교육”…OC코윈 ‘유스 콘퍼런스’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KOWIN) 미서부 OC지회(이하 OC코윈, 회장 홍영옥)가 오는 20일(월) 개최하는 제9회 연례 유스 콘퍼런스를 통해 차세대에 이민 선조 독립운동 역사를 일깨운다.   OC코윈 측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년 만에 열게 된 유스 콘퍼런스의 성격에 큰 변화를 줬다.   홍영옥 회장은 “지금까진 유스 콘퍼런스에 여학생만 참가했다. 또 토론회 참가 학생 중 장학생을 뽑아 장학금을 줬다. 올해는 이민 선조들의 독립 운동 역사를 남녀 구분 없이 가르쳐 뿌리 의식을 고취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홍 회장은 또 “내년 3월쯤 중가주 리들리의 독립문, 애국 지사 기념비 견학 행사를 열고 9월께 이민 독립 운동사를 주제로 여학생 대상 에세이 대회를 열어 장학생을 뽑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올해 유스 콘퍼런스 참가자들은 20일 오전 10시까지 리버사이드 시의 UC리버사이드 아츠(UCR Arts, 3824 Main St) 앞에 집결해야 한다. 따로 차량이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각자 개별 출발, 귀가해야 한다.   행사는 ▶도산 안창호 동상 견학 ▶전국 최초의 한인촌 ‘파차파 캠프’와 한인들의 초기 정착 당시 모습을 소개하는 사진전 관람 ▶장태한 UC리버사이드 교수의 ‘도산 안창호의 업적과 파차파 캠프’ 강연 순으로 진행된다.   윤지나 사무국장은 “참가 학생에겐 영 김 연방하원의원, 최석호·섀런 쿼크-실바 가주 하원의원 명의의 인증서를 준다”고 설명했다.   참가 대상은 OC의 7~12학년 남녀 학생이다. 16일(목)까지 이름, 학년, 이메일 주소, 전화 번호를 이메일([email protected])로 보내 신청하면 된다. 점심 도시락이 포함된 참가비는 1인당 10달러이며, 현장에서 현금으로 내야 한다.   문의는 전화(310-739-9234)로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독립운동 콘퍼런스 이민 선조들 유스 콘퍼런스 이민 독립

2021.12.1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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