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나 시네마는 전성기보다 위기의 시간이 더 길었다. 김수웅씨와 고 김수명씨 부부가 이 극장을 인수했을 때 동네 영화관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관객은 갈수록 줄었고 건물과 설비는 점점 낙후됐다. 김씨 부부와 딸 주디 김씨는 매표 창구, 매점, 청소, 기계 점검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야 했다. 그들이 지키려 한 것은 단순한 사업장이 아니라 인생의 전부를 걸 수밖에 없는 ‘이민자의 삶’ 그 자체였다. 김씨 가족은 그럴수록 가디나 시네마의 정체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동네 영화관답게 지역 주민들을 위한 극장이 되기로 했다. 가디나는 공장, 창고, 식당, 청소업체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많은 도시였다. 밤이 되면 힘든 노동을 마치고 짧게나마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는 주민들이 극장을 찾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김씨 가족은 그런 이민자 가족들을 위해 스페인어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배급사에서 스페인어 더빙·자막 필름을 구했고 마트와 교회, 라틴 식당 등에 전단을 돌리며 관객을 모았다. 그때부터 이 극장은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테아트로 바리에다데스(Teatro Variedades)’. 스페인어로 ‘버라이어티 극장’이라는 뜻이다. 주말이면 아이 손을 잡은 부모, 작업복 차림의 가장들, 사촌들과 함께 놀러 온 10대들이 줄을 섰다. 영화 대사 한마디에 폭소가 터졌고, 슬픈 장면에서는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티켓 한 장이면 충분했다. 언어가 달라도, 신분이 어떻든 스크린 불빛이 어두워진 관객석을 비출 때마다 장면마다 울고 웃는 주민들의 모습이 가디나 시네마의 존재 이유였다. 이민자 가족이 운영하는 극장이 또 다른 이민자 가정의 쉼터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했다. 1980년대 이후 사우스베이 일대에는 단관 극장 대신 넓은 주차장과 최신 음향 시스템, 더 편한 좌석과 다양한 먹거리를 갖춘 체인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가디나 시네마의 로비는 점점 더 조용해졌다. 주말 저녁마다 이어지던 긴 줄도 서서히 줄었고 주중 상영 스케줄도 조금씩 감소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김씨 가족에게는 또 다른 어려움이 이어졌다. 극장 운영과 별개로 진행하던 사업에서 여러 차례 사기를 당했고 복잡한 법적 분쟁에도 휘말렸다. 결국 집과 차까지 잃게 됐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프로듀서를 꿈꾸던 주디씨가 부모가 운영하던 가디나 시네마로 다시 돌아온 이유도 그때였다. 김씨 가족은 극장 2층의 작은 사무실에서 함께 생활해야 했다. 당시 상영관 스크린에는 디즈니 영화 ‘101 달마시안’이 걸려 있었다. 주디씨는 “그 영화 제목만 들어도 그때 기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가족들은 대부분 칼스주니어의 99센트 햄버거 하나로 끼니를 때웠다. 극장은 그렇게 간신히 돌아가고 있었다. 또 한 번의 큰 위기는 팬데믹 때 찾아왔다. 영화관은 가장 먼저 문을 닫고 가장 늦게 문을 여는 업종이 됐다. 가디나 시네마도 상영을 중단했다. 스크린은 꺼졌고 영사기는 멈췄다. 수입은 없었지만 건물 유지비와 생활비는 계속 필요했다. 팬데믹 기간 곳곳의 동네 극장들은 창고나 사무실로 바뀌기도 했다. 가디나 시네마 역시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었다. 그 무렵 주디씨의 어머니 주명씨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됐다. 암이었다. 주디씨는 극장 운영과 함께 어머니의 간병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다. 극장을 운영하는 가운데 주명씨도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극장의 불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주디씨는 주차장에 임시 스크린을 세워 작은 드라이브인 상영을 시도했다. 차 안에서 영화를 보러 온 주민들이 조용히 스크린을 바라보는 밤이 이어졌다. 그는 “그래도 여기가 영화관이라는 사실만큼은 잊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극장이 위기에 처하자 주민들이 너도나도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나섰다. 자원봉사자들은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제각각이지만 공통된 믿음이 있었다. “이 극장이 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토런스 지역에서 나고 자란 빌 드프란스(40)는 10대 시절 이 극장을 찾았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 그는 LA 일대 단일 스크린 극장을 기록하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다시 가디나 시네마와 연결됐다. 주디씨를 만난 뒤 그는 자원봉사를 자청했다. 지금은 매표소와 박스오피스를 돕고 상영 프로그램까지 함께 논의할 정도다. 드프란스는 “여기는 가족이 운영하는 진짜 동네 영화관”이라며 “이런 곳이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릴 적 그는 천국을 상상할 때마다 끝없이 이어지는 복도와 계단, 그리고 사이사이에 작은 영화관이 하나씩 있는 장면을 떠올렸다고 한다. 드프란스는 “지금 나는 그 꿈속 극장 중 하나 안에 있는 셈”이라며 웃었다. 또 다른 자원봉사자 수지 에번스(72)는 자신을 ‘팝콘 맨’이라고 소개했다. 10대 시절부터 이 극장을 드나들었고 지금은 2년 넘게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날이면 팝콘, 핫도그, 나초를 준비하고 손님들에게 티켓을 발권하고 계산대도 본다. 에번스는 “이곳을 처음 찾는 손님들은 ‘아직도 이런 극장이 남아 있느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가디나 시네마는 동네 영화관이지만 오랜 역사를 품은 극장이다. 수많은 영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들도 이곳을 찾는다. 영화 ‘아노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션 베이커 감독도 종종 이 극장을 방문한다. 무성영화를 상영하는 날에는 지역 오케스트라가 와서 라이브 연주를 하기도 한다. 에번스는 “사람들이 여기 와서 ‘아직 이런 곳이 남아 있구나’라고 느끼는 것, 그게 정말 소중한 감정”이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극장은 계속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2025년 12월 25일 게재된 기사를 한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글=강한길 기자·사진=김상진 기자폐업 위기를 이겨내다(2) 영화관 천국 동네 영화관 버라이어티 극장 체인 극장
2026.03.09. 21:58
지난 2월 전국 최대 스포츠 이벤트 ‘수퍼보울’ 중간 광고(사진)에서 낡은 동네 영화관 한 곳이 등장했다. 〈본지 2월 18일자 A-4면〉 넷플릭스 영화 예고편의 배경으로 사용된 이곳은 가디나 지역의 유일한 단관 극장 ‘가디나 시네마’다. 이 극장은 1946년에 개관했다. 이후 한인 이민자 가족이 인수해 지금까지 한자리를 지켜왔다. 80년 동안 아날로그 방식을 유지해 온 ‘동네 극장’이다. 멀티플렉스 체인과 OTT 플랫폼 확산 속에 동네 극장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가운데 이곳 역시 한때 문을 닫을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폐쇄 위기의 극장을 지켜낸 것은 한인 가족과 지역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함께 마지막으로 남은 단관 극장의 불을 밝히고 있다. 지역 사회의 역사와 주민들의 추억이 배어 있는 가디나 시네마. 미주중앙일보는 사라질 뻔했던 동네 극장을 지킨 한인 이민자 가족의 삶을 영화 필름을 돌리듯 기록했다. 글=강한길 기자·사진=김상진 기자 관련기사 한인 극장, 수퍼보울 광고로 전국에 알려지다 가디나 시네마에는 자동문도, 화려한 로비도 없다. 유리문 옆으로는 작은 매표소가 튀어나와 있다. 관객이 두꺼운 유리창 앞에서 “한 장 주세요”라고 말하면 안쪽에서 종이 티켓 한 장이 쓰윽 밀려 나온다. 얇은 종이 위엔 검은 잉크로 극장 이름과 날짜가 찍혀 있다. 유리문 너머로는 오래된 팝콘 기계와 손때 묻은 매점 카운터가 보인다. 극장에 와서 맨 처음 문을 열고, 마지막에 불을 끈뒤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가는 사람이 있다. 주디 김씨는 이 극장의 주인 겸 매니저, 상영 프로그램 관리자, 동시에 매점 직원이기도 하다. 주디는 상영 일정이 빡빡한 주말이면 아침 일찍부터 극장에 나온다. 포스터를 정리하고 매점 재고를 확인한다. 오래된 카펫의 먼지를 한 번 더 쓸어내고, 객석을 돌며 작은 쓰레기 하나까지 직접 줍는다. 관객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매표창구에 앉아 티켓을 끊어주고 매점에서 팝콘을 튀긴다. 상영이 끝나면 다시 극장을 돌며 객석에 남아 있는 쓰레기를 치운다.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문을 잠그는 사람도 김씨다. 극장의 불은 그렇게 한 사람의 손을 통해 켜지고 꺼진다. 가디나 시네마는 사우스베이 지역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단일 스크린 독립극장이다. 80년간 이 동네에서 변함없이 스크린을 밝혀왔다. 그 시간 속에는 한인 가족의 이민사와 주민들 사이의 추억이 있다. 금요일 밤이 되면 이 작은 극장으로 지금도 주민들이 다시 모인다. 낡은 카펫 위로 발걸음이 이어지고 오래된 영사기를 통해 스크린에 불이 켜진다. 영사기를 통해 돌아가는 필름에는 1세대 한인 이민자 가족의 삶이 함께 녹아 있다. 영화 상영이 없는 날에도 주디는 극장에 나온다. 그의 하루는 상영관이 아닌 극장 밖에서 시작된다. 간판을 다는 작업 때문이다. ━ 눈물 닦으며 공들인 스크린, 이젠 커뮤니티 보물 글자 끼우는 간판, 아날로그 유산 주민 추억 담긴 동네 문화 공간 이웃과 힘 모아 폐쇄 위기 넘겨 주디는 작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플라스틱으로 된 알파벳 글자를 하나씩 빼낸 뒤 다시 끼운다. 주말 상영작 제목을 맞추는 작업이다. 바람이 불면 글자가 흔들리기도 하고 오래된 글자는 종종 금이 가 있다. 깨진 글자는 빼고 창고에서 새 글자를 찾아 끼워 넣는다. 전광판처럼 버튼 하나로 바뀌는 간판이 아니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글자를 일일이 맞춰야 하는 방식이다. 글자를 끼우는 작업이 끝나면 주디는 도로 건너편으로 걸어가 간판을 다시 올려다본다. 글자를 제대로 붙였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상영작 제목이 정확히 맞춰졌는지 확인하는 일은 주민들에게 이 극장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손짓이기도 하다. 가디나 시네마 건물은 1946년에 세워졌다. 당시 이름은 ‘파크 시어터(Park Theatre)’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교외 지역에는 이런 식의 동네 단관 극장이 빠르게 늘어났다. 주민들이 집에서부터 걸어와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네이버후드 시어터(neighborhood theater)’ 시대였다. 아이들은 토요일 아침마다 영화를 보러 줄을 섰고 젊은 연인들은 이곳에서 첫 데이트를 했다. 당시만 해도 동네마다 영화관이 하나씩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한때 전역에는 수천 개의 단일 스크린 극장이 있었다. 하지만 1980년대부터 멀티플렉스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쇼핑몰 안에 여러 개의 상영관을 갖춘 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관객들은 점차 그곳으로 이동했다. 대형 체인 극장이 확산되면서 동네 단관 극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가디나 시네마 역시 그런 변화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1976년부터 이 극장은 새 주인을 맞았다. 주디의 아버지 김수웅(영어 이름 존)씨와 어머니 고 김수명(영어 이름 낸시)씨 부부였다. 김씨 부부는 1971년 미국으로 이민 왔다. 아버지 김씨가 처음 시작한 일은 가발 상점이었다. 이후 다운타운 LA의 한 극장 영사실에서 보조 일을 맡게 됐다. 일과는 화장실 청소로 시작됐다. 객석과 화장실을 치운 뒤에야 영사실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는 영화 필름이 돌아가는 영사기를 가까이에서 보며 극장을 운영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영사기가 돌며 스크린에 빛이 쏟아지는 장면을 매일 지켜보면서 언젠가 자신의 극장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후 작은 마켓을 인수해 장사를 시작했고 돈을 모아 결국 극장을 사게 됐다. 당시 이 극장(당시 파크 시어터)을 운영하던 이탈리아계 이민자가 은퇴를 준비하며 매각에 나섰고 김씨 부부는 힘들게 모은 계약금 5만 달러를 마련해 극장을 인수했다. 그러나 극장을 맡았을 때는 이미 동네 영화관의 전성기가 지나가던 시점이었다. 관객은 서서히 줄었고 시설은 낡아 갔다. 영화 상영이 끝나면 객석에는 종이컵과 팝콘 부스러기가 남았다. 끈적한 탄산음료 자국이 카펫에 남기도 했다. 아버지 김씨는 밤마다 화장실과 객석을 청소했다. 마지막 관객이 떠난 뒤에도 극장의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는 “어느 날 밤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오면서 ‘이게 내가 꿈꾸던 미국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말에는 여러 감정이 섞여 있었다. 극장 사장이 됐지만 여전히 청소와 잡일을 직접 해야 하는 현실, 그럼에도 이곳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교차했다. 극장은 그렇게 한 이민자 가족의 삶과 함께 굴러가기 시작했다. 주디 역시 부모와 함께 어린 시절을 대부분 극장에서 보냈다. 방과 후에는 매점 뒤에서 숙제를 했고 밤에는 영사실 계단에 앉아 영화를 봤다. 2층 객석 뒤쪽에는 작은 유리창이 달린 방이 하나 있다. ‘크라잉 룸(crying room)’이다. 주디가 어린 시절 많은 시간을 보내던 곳이기도 하다. 크라잉 룸은 1940~50년대 영화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공간이다. 어린아이가 울면 부모가 잠시 들어가 아이를 달래며 계속 영화를 볼 수 있도록 만든 방이다. 유리창 너머로 스크린이 보이고 스피커로 소리가 들리도록 설계됐다. 가디나 시네마에도 그 시절의 흔적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객석 뒤편의 작은 방과 낡은 유리창, 오래된 스피커까지 모든게 그때 모습 그대로다. 당시 사용하던 필름 영사기도 아직 그대로 놓여 있다. 지금은 대부분 디지털 상영으로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금속 필름 릴을 돌려 영화를 틀었다. 영화 한 편이 끝나면 필름을 다시 감아 다음 상영을 준비해야 했다. 주디는 “극장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사우스베이에는 한때 이런 동네 극장이 여럿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가디나 시네마는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흔적 중 하나다. 그럼에도 금요일 밤이 되면 여전히 스크린의 불이 환하게 켜진다. 붉은 간판 아래로 사람들이 모이고 낡은 카펫 위로 관객들이 들어온다. 영사기가 돌아가는 순간 이곳은 다시 활기를 띤 동네 극장이 된다. 스크린의 불빛은 수십년 간 꺼지지 않고 이 동네를 여전히 밝히고 있다. [이 기사는 미주중앙일보의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2025년 12월 25일 게재된 기사를 한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글=강한길 기자·사진=김상진 기자극장 동네 동네 극장들 동네 영화관 극장 이름
2026.03.08. 21:04
‘동네 영화관’이 문을 활짝 열고 사연이 담긴 영화들을 스크린에 올린다. 이번 주말 무료 영화 상영회가 열리는 ‘가디나 시네마(Gardena Cinema)’ 이야기다. 부모님(존 김·고 김주명)이 1976년부터 운영했던 영화관을 물려받은 주디 김 씨가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플루토 TV와 함께 지역사회를 위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김씨는 상영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영화관이 계속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영화관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낯선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장면에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것은 영화관에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상영회는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닌 세대 간 기억을 이어주고, 감동을 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총 3편의 상영작에도 각각 의미가 담겨 있다. 먼저 7일(오후 2시 30분·오후 5시)에는 영화 ‘그리스’의 싱어롱 버전이 상영된다. 이어 오후 7시 30분과 10시에는 존 트라볼타 주연의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1977년 작)’를 선보인다. 그리고 8일(오후 2시 30분·오후 5시)에는 고스트버스터즈(Ghostbusters)를 상영한다. 김씨는 “그리스의 경우 상영회에 참석하는 관객들이 다 같이 노래를 부르며 축제 분위기를 즐기길 바라는 마음에서 골랐다”며 “토요일 밤의 열기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영화인데 처음으로 극장에서 상영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이 영화는 상영료가 비싼 탓에 극장에서 상영하지 못하다가 플루토 TV의 후원을 통해 선보일 수 있게 됐다. 김씨는 “고스트버스터즈의 경우 상영 날(6월 8일)이 영화 제작을 기념하기 위해 팬들이 만든 ‘고스트버스터즈의 날’이라 선택했다”고 전했다. 동네 영화관 무료 상영회 이벤트는 아카데미에서 작품, 감독, 각본, 편집상 등을 수상한 션 베이커 감독이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가디나 시네마는 이 프로젝트의 첫 번째 영화관으로 선정돼 무료 상영회를 열게 됐다. 베이커 감독은 “사라져가는 독립 영화관을 지키기 위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가디나 시네마는 그 자체가 역사다. 영화관 구석구석엔 김씨 가족의 손길과 이민자로서 흘려보낸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김씨는 “극장 시설이 고장나면 아버지가 직접 수리했다”며 “약 800석의 영화관 의자 중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은 의자가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가디나 시네마는 1946년에 지어졌다. 80년 가까이 한 자리를 지키며 가디나 지역 동네 영화관의 역사를 품고 있다. 이 극장을 지키기 위해 김씨는 기금 마련 이벤트도 진행 중이다. 1500만 달러의 기금을 마련해 극장을 보수하고 역사 건물로 지정받겠다는 목표도 있다. 김씨는 “이 극장에 추억이 있고, 이곳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많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며 “특히 영화 담당 기자들로부터 홍보 굿즈를 기부받아 경매를 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이 공간을 지역 사회의 의미 있는 장소로 남게 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가디나 시네마는 지난 1월, LA 인근 대형 산불로 관객의 발길이 끊기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극장 문을 닫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작은 즐거움이라도 선물하고자 지난 1월 10일에는 5시간 동안 코미디 영화를 무료로 상영했다. 김씨는 “어떤 관객이 산불에 집이 다 타서 며칠 동안 계속 우울했는데, 코미디 영화를 보고 처음 웃었다고 하더라”며 “그때 너무나 뿌듯하고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가디나 시네마’에는 이민자 가족의 세월이 스며 있다. 이웃의 웃음과 눈물도 녹아있다. 친근한 동네 영화관의 문은 이번 주말에도 활짝 열린다. 송영채 기자 [email protected]영화관 시네마 동네 영화관 영화관 의자 영화관 구석구석
2025.06.05. 2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