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는 인생의 끝이 아니다. 수십 년간 쉼없이 달려온 ‘일에 얽매인 삶’의 마침표가 아니라, 평생 쌓아온 지혜와 경험을 자양분 삼아 새로운 기회를 창조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출발점이다. 미국 은퇴자 협회(AARP)의 전 CEO 조앤 젠킨스는 저서 『나이 듦을 파괴하라 (Disrupt Aging)』에서 “모든 연령대에서 최고의 삶을 살기 위한 담대한 길”을 제시한다. 그는 나이라는 숫자에 갇혀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는 낡은 사고방식을 부수라고 역설한다. 여성운동가 베티 프리던의 일갈은 이를 뒷받침한다. “노화는 ‘잃어버린 젊음’이 아니라, 기회와 강인함으로 가득 찬 새로운 무대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 역시 “우리는 세월과 함께 늙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워진다(We turn not older with years, but newer every day)”라고 노래했다. 두 거장의 말처럼, 은퇴 후의 시간은 소멸하는 과정이 아닌, 경륜과 지혜가 더해져 더욱 단단하고 새로워지는 시기다. 유독 나이에 집착하는 한인 커뮤니티의 분위기는 안타깝다. 사회가 만들어낸 고정관념의 틀을 과감히 깨고, 끊임없이 건강을 관리하며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은퇴 후의 하루하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충만함과 의미로 채울 수 있는 귀한 선물이다. LA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스티브 로페즈는 그의 저서 『독립기념일: 내가 은퇴에 대해 배운 것들 (Independence Day: What I Learned About Retirement)』에서 은퇴 후에도 여전히 뜨거운 삶을 사는 이들을 조명한다. 저널리스트 크리스 패럴 또한 『언리타이어먼트 (Unretirement)』를 통해 “은퇴란 일의 중단이 아니라, 새로운 목적의식과 사회적 연결을 찾아 나서는 여정”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이미 1967년에 제정된 ‘고용상 연령차별 금지법(ADEA)’을 상기시키며, 나이가 결코 능력의 척도가 될 수 없음을 환기시킨다. 결국, 모든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행복하고, 자유롭고, 거침없이 은퇴하는 법 (How to Retire Happy, Wild, and Free)』의 저자 어니 젤린스키의 말처럼, 이제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계속 배우고 성장하며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실천할 때다. “나이는 마음에 달렸다”는 외침처럼, 나 역시 23년간의 교장 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뒤 오히려 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여러 북클럽에서 회원들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교육과 리더십에 관한 강연 요청에 기꺼이 응하며, 꾸준한 운동으로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남은 인생을 우리 생애 최고의 시간으로 만들자. 건강, 자신감, 재정, 인간관계 그리고 내면의 평화를 세심하게 관리하며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삶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자. ▶교육 상담: [email protected] 수지 오 / 교육학박사·교육전문가오픈업 나이 파괴 은퇴자 협회 여성운동가 베티 건강 자신감
2025.08.14. 19:58
화창한 뉴욕의 번화가, 딸의 생일 케이크를 사러 빵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문득 눈길이 닿은 도로 바닥에 구리빛 페니(1센트 동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요즘 세상에 길에 떨어진 동전은 그저 하찮거나 더럽게 여겨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왠지 모를 호기심에 나는 그 페니를 주워 들었다. 놀랍게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페니가 반짝였고, 그 옆에는 오래되어 검게 변한 페니도 보였다. 그렇게 하나둘 줍다 보니 어느새 손 안에는 총 일곱 개의 페니가 들려 있었다. 말 그대로 ‘럭키 세븐’이 아닌가! 나는 직감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설렜다. 인간은 감성적이고 감정이 풍부한 존재다. 그래서 때로는, 아니 자주, ‘소소한 행복’이 필요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연히 찾아오는 작은 행운들이 모여 큰 기쁨을 선사하기도 한다. 나는 그 순간 ‘자기 충족적 예언’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아마도 내게 좋은 일들이 생길 거야!” 자기 충족적 예언이란 간단히 말해 “긍정적인 기대가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심리 작용을 의미한다. 이 개념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비롯되었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자신이 빚은 조각상을 진정으로 사랑하자,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물론 우리가 바라고 기도하는 모든 것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희망과 꾸준한 노력이 삶에 보람과 가치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듯하다. 뜻밖의 행운은 그렇게 찾아왔다. 어느 날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타임스스퀘어 근처 브로드웨이 극장가를 걷고 있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전광판들을 올려다보며 잠시 멈춰 섰을 때, 옆에 서 있던 한 여성과 우연히 몇 마디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갑자기 내게 뮤지컬 표를 살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얼떨결에 “그렇다”고 답하자, 그녀는 자신에게 남는 표가 있다며 한 장을 건네주었다. 대학교수인 그녀가 학생들과 함께 보려고 여러 장의 표를 구입했는데, 갑자기 오지 못하게 된 학생이 있어 표가 남았다는 것이다.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공짜 표’를 받았고, 그날 기대치 않았던 뮤지컬 ‘아웃사이더(The Outsiders)’를 감동적이고 흐뭇한 마음으로 관람했다. 참으로 감사하고 행운이 넘친 하루였다. 또 다른 날, 뉴욕의 한 공원 근처 편안한 카페에서는 감기 기운이 있던 내게 웨이터가 요청하지도 않은 따뜻한 레몬차에 레몬을 듬뿍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유명 백화점 향수 코너에서는 직원이 향수를 사지도 않은 내게 뉴욕시 내 가볼 만한 쇼핑몰들의 위치와 주소까지 상세히 알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처럼 나의 뉴욕 여행은 공짜 뮤지컬 티켓을 비롯해 뉴욕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려 깊은 친절 덕분에 더욱 풍성하고 즐거웠다. 어쩌면 길에서 주운 ‘일곱 개의 페니’와 그 순간 스스로에게 했던 ‘자기 충족적 예언’이 아주 조금이라도 효과를 발휘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뉴욕에서 짧은 여행 중 경험했던 몇 가지 행운들을 요약해 보았다. 나는 자기 충족적 예언이 ‘항상’ 효과를 발휘한다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주의 깊게 찾아보면 이 세상에는 작지만 즐거운 일들이 의외로 많고, 그것들이 때로는 우리에게 크나큰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는 바로 우리 주변에서 소리 없이 다가오는 소소한 행복들이다. 그러니 오늘도 즐겁게, 미소 지으며, 우리 모두 긍정적인 자기 충족적 예언을 발휘해보는 것은 어떨까. 손원임 /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오픈업 충족 예언 자기 충족적 뉴욕 여행 공짜 뮤지컬
2025.07.17. 20:33
북클럽에 소속되어 동료들과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은 필자의 오랜 습관이자 즐거움이다. 독서는 분주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삶의 깊이를 성찰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때로는 지적인 자극을 통해 사고의 지평을 넓히고, 때로는 복잡한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건강한 도피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최근 필자의 이러한 생각에 확신을 더해준 책 한 권을 만났다. 바로 구글의 저명한 AI 연구원이자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이 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특이점이 온다, 더 가까이(The Singularity is Nearer)’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공지능(AI)이 인간의 경쟁자가 아닌, 인간의 능력을 확장하는 동반자가 될 것이라 역설한다. 즉, 인간 고유의 감성(High Touch)과 AI의 기술(High Tech)이 결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공존을 이룰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렇다면 AI가 기술적 영역을 담당하게 될 미래에 인간이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은 무엇일까. 바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능력들이다. 커즈와일의 통찰은 우리에게 몇가지 역량들을 연마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먼저 상대를 헤아리는 힘인 ‘공감’과 ‘연민’이다. 또 협상 능력과 복합적 문제 해결 능력, 인간관계 및 관리 기술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비판적 사고력과 창의력과 판단 및 의사결정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역량들은 결코 단기간에 길러지지 않는다. 깊이 있는 독서와 치열한 토론을 통해 오랜 시간 숙성시켜야 하는 지혜에 가깝다. 이제 아이들에게만 “책 좀 읽으라”고 할 때가 아니다. 가정과 직장, 그리고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서 어른들이 먼저 책을 들고 ‘함께 읽기’를 시작해야 한다. “배우면 배울수록 얼마나 모르는지를 깨닫고, 배우지 않으면 않을수록 스스로가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격언을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필자가 교육 현장에서 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함께 읽기’의 힘은 실로 막강하다.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한 달에 한 번씩 동료 교장들과 북클럽을 통해 꾸준히 책을 읽었다. 교육 현안과 리더십에 대한 책의 시사점을 나누는 과정에서 학교를 이끄는 혜안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긍정적 경험을 바탕으로 학교 내 교사 북클럽 활동을 지원했고, 이는 자발적인 학부모 북클럽 결성으로까지 이어졌다. 학부모들에게 자녀 양육 관련 서적을 추천하며 함께 성장하는 교육 공동체를 만들었던 경험은 지금도 큰 보람으로 남아있다. 자녀는 어른의 거울이다. 읽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는 자연스럽게 책을 손에 잡는다. 가정에서부터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온 가족이 둘러앉아 20분간 각자 책을 읽는 ‘가족 독서의 날’을 제안한다. 독서 후에 자신이 읽은 내용과 느낀 점, 배운 점을 서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이들은 읽은 내용을 말로 표현하고, 글로 요약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게 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독후 활동을 이어갈 수 있다. 이처럼 읽고(Read), 대화하고(Talk), 쓰고(Write), 그리는(Draw) 과정 속에서 가족 간의 유대는 깊어지고, AI 시대에 필요한 인간적 역량은 자연스럽게 성장할 것이다. ▶교육상담: [email protected] 수지 오 / 교육학박사·교육전문가오픈업 지혜 학부모 북클럽 가족 독서 의사결정 능력
2025.07.03. 18:41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서거한 지 6개월이 되어간다. 그녀는 여왕으로만 71년을 살았다. 정치적 결정권은 없었지만 한 나라의 수장으로 세계의 관심과 존경을 받았던 분이다. 여왕도 지구촌 일반 시민들처럼 시대적 변화를 겪었다. 국제 정세에 따라 영국의 지배 영역이 축소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대영제국에 속했던 56개 국가가 하나씩 독립하고 이들과 연방(Commonwealth) 관계를 맺어야 했던 결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대영제국의 위치를 여왕 시대에 포기해야 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옆에는 항상 부군인 필립 공이 있었다. 둘은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로 친척 간이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필립 공은 그리스, 덴마크, 프로이센,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족과 피가 섞인 사람이다. 젊은 시절의 여왕 부부는 싱그러운 모습으로 세상의 관심을 끌었다. 신경질적이거나 권위의식을 갖고 군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맑고 간사함이나 비겁함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또 단정하고, 선하고, 가식이 없고 진실했다. 10대 공주 시절, 결혼식 당시, 그리고 왕관을 썼던 25세 때 등 여왕의 모든 모습에 세계가 환호하고 좋아했다. 그녀가 여왕의 자리를 잘 지키도록, 영국은 그녀를 사랑하고 보호하였다고 할까? 여왕 관련 기사를 읽으면서 “필립 공은 참 대단해. 앞장설 수는 없었던 입장이라 해도, 여왕인 부인 옆에서 함께 하는 모습이 뒷전으로 밀려 보이지 않고, 멋있어!”라고 말하자, 남편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면서 “아키(aqui)!”라고 말해 웃었다. 아키란 스페인어로 ‘여기’ ‘이곳’, ‘저’라는 뜻이다. 나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한다면 ‘나’라는 의미도 있다. 남편은 ‘나 같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그런 것이다. 그러고 보니, 세상엔 훌륭한 필립 공들이 많다. 남편은 외부 일, 아내는 집안 살림이라는 오래된 고정관념이 바뀌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됐다. 지금 한국과 해외 한인 가정들에서도 남녀의 역할이 바뀐 가정이 꽤 많을 것이다. 엄밀히 따져 보면, 역할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경계가 없어지고 부부나 동거인들이 가사를 함께 해결하는 모습이다. 나는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의예과 때 ‘기독교 문학’이라는 과목이 필수였다. 중장년 연령의 목사님이 강의를 맡았다. 첫 강의가 있던 날, 그 목사님은 여자들이 집안 살림, 남편 보조, 육아 등을 하지 않고 의사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 의사는 새벽에 일어나 모든 가사 관련 일을 한 후에야 자기 일을 하러 출근한다는 예를 들었다. 가사 관련 일이란 혹시 늦게 귀가할 경우를 대비해 식사 준비까지 해 놓는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또 한국 최초의 여자 변호사는 퇴근길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입었던 외출복을 벗어 가면서 귀가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부엌으로 향한다는 것이었다. 반세기 전의 일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국은 물론 세계의 노동시장은 꾸준히 변하고 있다. 미국의사협의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에 따르면 2018년에는 의과대학 지원자의 남녀 비율이 비슷했던 것이 2019~2020년에는 여성 비율이 53.5%로 더 많았다. 그러나 실제 의료인 가운데 여성 비율은 36.3%에 지나지 않는다. 의과대학 입학부터, 의료인으로 활동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여 보면 이해가 된다. 한국 국가통계국(KOSIS)은 2023년 한국의 전업주부 남성이 21만 명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또 육아, 가사 부담이 큰 경우, 남편과 아내 두 사람 중 수입이 적은 쪽이 직장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남성이 포기하는 현상이 늘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 ‘필립 공’들이 많아졌다는 뜻이겠다. 한국인 ‘필립 공’‘들에게 힘내시라 하고 싶다. 내 아버지 세대에는 ’필립 공‘들보다 ’신 사임당‘들이 더 많았다. 딴 세상에 가 계신 내 아버지는 여러 모자를 바꿔 써 가면서 사는 나를 보고 무어라 하실지 궁금하다. 모니카 류 / 종양방사선 전문의·한국어진흥재단 이사장오픈업 한국 필립 여왕 엘리자베스 여왕도 지구촌 필립 공들
2023.03.06. 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