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을 향긋하게 맴도는 커피 잔 들고 줄지어 선 나목을 바라보는 시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올 해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이른 새벽부터 목화꽃처럼 사뿐히 내려 앉는 눈은 뒷마당에 줄지은 나무들을 감싸며 어머니 소복처럼 애잔하다. 서로 부딪히며 엉기지 않고 질척거리지도 않고 지축을 향해 조용히 쌓인다. 멀리 하늘 끝에서 하얀 망또 입은 천사가 보내는 축복을 혼자 맞는 것처럼 마음이 평화롭다. 누군가의 방해도 받지 않고 서두르지 않고, 홀로 맞는 이 달콤한 자유를 얻기까지 얼마나 부대끼며 종종거리고 살았던가. 사업하며 집안 식구와 자식들 챙기고, 일상의 짐에 파묻혀 허덕이며, 인연의 끈에 달려 한치도 뒤돌아볼 틈 없이 달려온 시간들! 사라지고 떠나 간 세월의 끝자락 붙잡고 외로움과 쓸쓸함을 추스리는 일은 어쩌면 복에 겨운 칭얼거림이다.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끝없이 펼쳐지는 눈 밭에 장미꽃 한송이 그려넣는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 가야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첫 문장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시마무라는 부모가 남겨 준 재산으로 무위도식 하며 여행을 다니는 한량이다. 애처롭게 시마무라를 사랑하는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게이샤 고마코, 사랑에 온 몸을 불사르는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 요코. 시마무라는 고마코에게 이끌려 온천장을 찿아가지만 그녀의 정열적인 애정을 ‘헛일’이라고 외면한다. ‘설국’은 눈 덮인 풍경을 감각적인 문체로 섬세하게 그려 유한한 인간 존재를 주인공의 내밀한 의식의 목소리로 형상화시켜 허무의 세계 속에 빠져들게 한다. 사는 것이 허망한 날개짓처럼 처량하고,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서서 기댈 곳 없어 흐느낀 적이 한 두 번이랴. 무기력과 쓸쓸함, 외로움과 고독은 해 질녁 황혼의 끝자락에 스며드는 땅거미처럼 발목을 잡는다. ‘고독’은 세상에 나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외롭고 쓸쓸하게 가슴을 파고든다. 누구도 나의 슬픔을 달래 줄 수 없다. 스스로 극복하고 견뎌내야 살아남는다. 속도는 줄었지만 깊이 있는 삶, 용량은 줄었지만 무게 있는 몸짓,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 용기로 벼랑 끝에서 당당해지는 사람은 위대하다. 불세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고독은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위해 필요한 활동을 창조하게 만드는 힘을 준다”고 했다. 유명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은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페르소나를 벗고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화가가 되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마음의 평온과 영혼의 피로를 씻어 줄 수 있는 어떤 작은 몸짓도 소중하다. 보여주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데로 살면 두려워할 것도 더할 것도 없다. 외로움이나 고독에 익숙해졌을 때 진정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군중 속에서 자신을 잃는 대신 혼자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면 눈이 펑펑 쏱아지는 창밖을 바라보아도 마음이 포근하고 따스해진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두 손 모으고 하얀 눈더미 속에 작은 불씨 하나 태운다. 여태 향긋하고 따스한 커피가 반쯤 남아있어 인생은 외롭지만 달콤하다. (Q7 Editions 대표) 이기희이기희 외로움 성냥팔이 소녀 소녀 요코 editions 대표
2025.02.18. 13:42
지난해 6월 LA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김정아(40대) 씨는 현재 평택 미군기지에서 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다. 김씨가 15년 만에 한국행을 결심한 이유는 연로한 아버지와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과 LA의 높은 물가 때문이었다. 그는 “렌트비 등 물가가 너무 비싸졌고 외로움도 컸다”며 “지인을 통해 미군기지에서 시민권자가 일할 수 있는 정보를 알게 됐다. 월급은 달러로 받고, 높은 환율 덕분에 한국 생활비 부담도 덜 된다”고 말했다. 1990년 미국의 한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던 김태유(63) 씨는 3년 전 아내의 고향인 전북 고창으로 역이민했다. 지난 30년 동안 김씨는 볼티모어, 애너하임, 시애틀 등지에서 생선 가게, 델리, 얼음 공장, 페인트 회사, 식당 직원으로 일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 은퇴 후 역이민한 김씨는 “오랜 타지 생활 동안 스트레스와 슬픔이 많았고, 항상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다”고 말했다. LA타임스는 여러 한인이 저마다 이유로 미국을 떠나 모국인 한국에 정착하고 있다고 17일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최근 10년 사이 한국으로 역이민한 한인이 급증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1세대는 향수와 안락함을 위해, 2세대는 소수계로서 느낀 소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국행을 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특히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왔던 1세대 한인 중 은퇴 후 역이민을 택한 이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방사회보장국(SSA) 통계에 따르면 2023년 한국에서 소셜 시큐리티 연금을 수령한 한인은 9379명으로, 2013년(3709명)보다 2.5배나 증가했다. 한국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 거주하는 한인 시민권자는 현재 4만7406명으로 2010년 3만5501명보다 1.3배 늘었다. 또한 2023년 한국 국적을 회복한 4203명 중 60% 이상이 한인으로 집계됐다. 신문은 은퇴한 한인 1세대의 역이민 주요 이유로, 이민 생활의 고단함을 떨쳐내고 모국에서 안락함 속에 여생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마음을 꼽았다. 역이민을 선택한 한인들의 주된 정착지는 고향이다. 김태유 씨도 아내의 고향인 고창의 은퇴자 마을로 이사했다. 이 마을의 800명 중 3분의 1이 비슷한 이유로 이주한 한인 1세대다. 역이민한 한인들은 한국에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다양한 여가 생활을 즐기고 있다. 1960년 한국을 떠나 테메큘라에서 간호사로 은퇴한 차덕희(80) 씨는 대전으로 역이민했다. 차 씨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더불어 여러 이점을 고려해 역이민을 결정했다. 차씨는 “미국에서는 골프 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며 “대전은 생기가 넘치고 안전하다. 대중교통도 무료고,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하면 병원 진료비도 저렴하다”고 말했다. 또한 신문은 한인 2세들이 한국 재외동포 비자(F4) 등을 통해 현지 기업체, 대학 등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정체성을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한국 생활을 통해 소수계라는 부담에서 벗어나고 있다. 2016년 앨라배마주에서 서울로 이주한 크리스탈 김(38) 씨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사람들이 나를 특정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한국 생활의 편안함을 설명했다. 반면, 역이민 생활에 장단점이 공존하는 현실도 전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한인들은 때로는 나이가 들어 한국 정부 혜택만 누리려 한다는 일부 선입견을 감수해야 한다. 한인 2세가 재외국민 특례 입학을 통해 상위권 대학에 쉽게 들어간다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으며, 미국 출신 한인을 기회주의자로 여기는 분위기도 남아 있다. 또한 한인들은 역이민 후 겪는 가치관과 문화 차이를 무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김태유 씨는 “미국의 자연스러운 친근감, 넓은 공간, 여유로운 삶의 자세 등이 그립다”고 말했다. 한인 2세들은 한국에서 영어 교사로 일자리를 찾을 때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역차별을 당하거나, “우리와는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말을 들을 때 정체성 혼란을 겪는다고 전했다. 김형재 기자 [email protected]외로움 역이민 한국 생활비 한국 재외동포 한국 법무부
2024.10.17. 21:42
추모식에 다녀왔습니다. 저보다는 훨씬 선배이고 조신하셔서 그분 앞에선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저는 몇 분 나이가 비슷한 친구들과 함께 앉아 이런저런 환담으로 깔깔대며 누가 흉을 보든 말든 개의치 않고 조잘대는 배짱 좋은 한 무리의 ‘갱’들로 불렸습니다. 허나, 우리와는 아주 다른 선배님께는 어려워서 그저 인사만 깍듯이 하곤 했습니다. 이 형님께선 그토록 정이 두터웠다던 남편을 먼저 떠나 보냈다 합니다. 이곳 시니어 센터에는 초창기부터 시작하셨고 내외분께선 춤을 가장 예쁘고 멋있게 추셨던 인기 최고의 부부셨다고도 합니다. 추모식에는 조촐한 가족, 두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들과 형제분이 있으셨습니다. 추모객이 많았습니다. 단 위에는 하얀 단지에 유해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고 분위기는 제법 화기애애했습니다. 자식이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한국식 장례 분위기와는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억에 이렇게 남게 되었나 봅니다. 시신 앞에 가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자리에 돌아와 앉아 있는 동안 저의 이상한 버릇이 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토록 다정하셨다는 선배님께선 분명 남편이 돌아가신 후 짝을 잃은 외기러기로 지내시기가 무척 힘이 드셨던가? 확실한 노환도 아니고 단지 외로움 속에 치매증세가 그렇게 빨리 악화하셨다는 점에 오늘 제 마음이 쓰였습니다. 사람이란 근본이 외로운 존재라고 곱씹곤 하지요! 그러나 노인들의 외로움이란 늙어 보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느낄 수가 없겠지요? 저의 생각은 불현듯, 아, 이 형님은 아들만 두셨던가? 요즘 마구 돌아다니는 우스갯말에 딸자식이 있으면 신나게 여행 다니다가 길에서 죽고, 아들자식 경우는 부엌에서 일만 하다 죽는다는 악담 아닌 우스갯말들이 떠돌아다니는 이 시대에 그보다도 더 무서운 외로움을 달래기 힘들어 더 빨리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이고 아들이고는 내 마음대로가 아니지 않습니까? 새끼를 낳아 죽을 힘 다해 키웠고 때가 되면 날려 보낼 줄도 알았고 내리사랑도 배웁니다만 어미들의 깊은 사랑의 미련이 단호하지 못한 우리 엄마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가 책임지고 끝까지 끌고 가야 함이 그 무서운 외로움을 이겨내는 지혜요 길이였던가?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요즘 사회에 돌고 있는 ‘삶의 질(Quality of Life)’ 말입니다. 노년에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삶의 질을 생각하며 우리는 살고 있는지요? 가장 무서운 것이 외로움을 이겨내야 건강을 유지하는 첫 번째 수단이라 하니 즐거운 웃음 그 분위기가 가장 으뜸가는 위로인 지금의 우리인 듯합니다. 가끔 우스갯소리를 하면 환하게 웃으시던 선배님 모습을 기억합니다. 두 아들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옛이야기를 들으며 또 놀랐습니다. 그렇게 조신하신 모습 뒤에 미니스커트의 초창기 여성이셨고, 젊은 시절 빨간 자동차를 선호하며 신나게 달리셨고, 삶에 열정이 대단한 직장인이셨다는 최첨단 모던 여성을 상상하며 사람을 단면만으로 판단할 일이 아니었다고 느꼈습니다. 말없이 남편을 그리워하며 그 외로움을 홀로 달래셨던 것 같은 모습을 떠올리니 몹시 서글펐습니다. 앞뒤로 우리도 언제고는 이별을 맞겠지요? 먹을 것이 풍부하고, 의학이 최고로 발달한 현대를 잘 이용하고 익혀간다면 우리 노년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져서 저 하얗게 정장을 하고 살금살금 따라오는 외로움이라는 자를 마주하며 같이 놀아주든지 아니면 이겨낼 지혜를 열심히 익혀야겠다는 단호한 자만심이 스멀거리는 나 자신을 자제했습니다. 센터에서 잘 놀 줄도 알고, 총명하고, 정의롭다고 인기를 끌었던 우리 한국인 몇 명 갱들의 주책이 과연 우리 삶의 질이었던가? 둘러앉아 큰형님의 명복을 빌며 선배님의 경쾌한 웃음만을 기억하자며 가신 분의 마지막 삶을 더듬어보는 환담을 하였습니다. 남순자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외로움 아들 내외 선배님 모습 한국식 장례
2021.10.27.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