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종합대학이자 기독교계열 대학교인 숭실대학교가 1938년 3월4일 문을 닫았다. 일제의 억압적 통치와 강제적 신사참배에 반대해 자진 폐교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학교는 1897년 10월10일 평양시 신양동에서 미국인 베어드에 의해 숭실학당으로 개교했다. 당시 학생 13명으로 출발한 숭실학당은 1900년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1905년 대학부 설치로 한반도에서 최초의 고등교육을 실시했다.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종합대학이다. 1912년 조선총동부가 대학을 허락했으나 1925년 대조선 교육방침으로 숭실대학교를 전문학교로 격을 낮추었다. 식민지 아래 학교로의 억압이 계속됐지만 숭실대학에서는 손정도 김창준 박희도 조만식 등 수많은 독립운동의 주역들을 배출했다. 을사보호조약 반대운동 3.1 운동 105인 사건 광주 학생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또 한반도 교회를 만드는 전도대를 조직해 활동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숭실의 재건이 이뤄지지 못하다가 한국전쟁 직후에서야 다시 논의가 시작됐다. 영락교회가 숭실대학재단이사회를 조직 설립인가를 요청했고 1954년 허가를 받으면서 폐교 16년만에 다시 문을 열었다. 숭실대학은 영락교회의 임시건물을 임시 캠퍼스로 사용하다가 1957년에 완성한 상도캠퍼스로 이전했다. 1967년 한국기독교박물관을 개관하고 1969년 국내 최초로 컴퓨터 대학교육을 실시했다.
2011.03.01. 15:15
210년전인 1801년 2월26일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자 이승훈 정약종 등 천주교 지도자 6명이 신유박해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됐다. 1784년 청나라에서 한국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은 이듬해 최초의 천주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했다. 출생지도 반석골(현재 중구 중림동)이고 세례명도 반석(베드로)이었다. 탄압이 거세질 때마다 배교로 위험을 피해갔지만 그의 운명은 한국 천주교의 '반석'이 되는 것이었다. 1866년 아들 신규와 손자 재의가 1871년에는 증손 연구와 균구가 순규해 4대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됐다. 천주교 전래후 첫 대규모 박해로 기록된 신유박해는 천주신앙을 중심으로 신서파와 공서파가 대립하던 민감한 시기에 정약종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 등을 옮기다 발각된 것이 발단이 됐다.
2011.02.22. 18:42
한국 종교계의 큰 별인 김수환 추기경(사진)이 한국시간으로 2009년 2월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했다. 폐렴에 따른 급성 호흡 부전으로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1922년 5월 대구에서 태어난 김 추기경은 1951년 사제품을 받고 1966년 초대 마산교구장을 지낸 후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해 서울대교구장이 되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인 최초 추기경으로 서임됐으며 19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김 추기경은 생전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국민과 함께하면서 정의와 평화에 대한 신념을 지켜 천주교계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선종하면서는 생전 서약대로 안구를 기증해 침체했던 장기 기증 문화를 활성화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자신을 '바보'라고 칭하고 '남에게 밥이 되라'고 한 사랑과 나눔정신은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명동성당 앞 추모 행렬에 타종교.비종교인을 가리지 않고 수십만 명이 동참하는 화합과 화해의 추모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2011.02.15. 14:05
73년전 한국 기독교계의 자존심이 일본에 무릎을 꿇었다. 1938년 2월9일 조선 개신교단 중 가장 교세가 강한 평북노회가 일본의 강압에 못이겨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신사는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의 사원이다. 일본은 조선강점기에 '천황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 위해 신사에 강제로 참배하게 한 정책을 말한다. 특히 1930년 중국 대륙침략을 위해 조선의 사상통제 필요성이 제기되자 이를 지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정책이었다. 일본은 중일전쟁 후 학교의 신사참배화에 성공하자 그 목표를 교회로 돌렸다. 1930년 중반부터 기독교계 지도대책을 수립해 지역 경찰력을 동원해 교회는 물론 노회.총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36년 5월 천주교가 신사참배를 용인했고 같은 해 안식교도 시작했다. 뒤이어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까지 신사참배를 결정했다. 외로이 저항하던 장로교 평북노회도 1938년 2월9일 결국 굴복했다. 이를 시작으로 같은 해 9월 총회까지 장로교단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에 동의했다.
2011.02.08. 14:40
36년전 한국에서 또 한 명의 사이비 교주가 구속됐다. 1975년 2월 사이비종교 일제단속에서 일명 '새마을전도회'라고 불린 천국복음전도회의 창시자인 구인회(1941년생)가 붙잡혔다. 그는 거액의 돈을 받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천국행 차표'를 판매하는 등 사기행각을 통해 신도들의 금품을 갈취한 혐의다. 구인회는 1972년 서울 양재동의 말죽거리에 '초막절'(새마을전도회)이라는 이름의 교단을 세우고 부산 진주 전주 대전 광주 등지에 지회를 조직하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그는 태극기를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며 1973년 음력 11월10일 오전 9시에 4만5000도의 뜨거운 유황불이 지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종말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심판 당일은 뜨거운 불 대신 영하 10도의 혹한을 기록했다. 불심판이 불발로 끝나자 천국복음전도회로 이름을 바꾸고 대구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75년 사이비종교 단속에서 구속됐고 1년 뒤인 1976년 2월29일 서대문교도소에서 사망했다.
2011.02.01. 14:31
368년전 1월8일은 교회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사망한 날이다. '현대 과학의 아버지' 갈릴레오 갈릴레이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망원경으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확인했고 물체의 운동에 대한 새로운 주장으로 고전 역학의 틀을 마련한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는 교회에서 인정받기보다 배척당했던 인물이다. 천체의 움직임을 분석한 '대화'가 종교재판에서 성경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이단으로 심히 의심을 받아 그후 200년간 금서 목록에 오르게 됐다. 10명의 재판관중 7명이 서명했던 교회의 역사적 오류는 360년이 흐른 지난 1993년에야 교황 바오로 2세가 '비극적인 상호 몰이해'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함으로서 마침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사교술이 뛰어났던 그는 궁정학자로 오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끝에 1610년 마침내 '수석 수학자 및 철학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지동설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버리지 못했다. 교회와의 충돌만은 피해보려 노력했지만 성경의 독선적 해석에 집착했던 신부들의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교회의 눈을 피해 이주한 네덜란드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2011.01.04. 13:19
예수의 탄생은 기독교 교인들 뿐 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이다. 기원전.후가 그의 출생을 기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크리스마스의 어원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비롯됐다. 그리스도(Christ)와 미사(Mass)가 합쳐진 말로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이다. 예수의 출생일과 관련된 정확한 날짜는 전해지지 않는다. 개신교의 일부 성서학자들은 누가복음 2장8절의 목자들이 양떼에게 풀을 먹였다는 구절을 바탕으로 10월말이나 11월초쯤으로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12월25일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다. 현대와 같은 날에 성탄절을 지켜오기 시작한 때는 354년경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 절충안으로 성탄절을 12월25일로 공인했다는 학설이 중론이다. 당시 기독교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기독교를 공인하는 대신 로마인들이 섬기던 태양신의 축제일인 12월25일을 예수의 탄생일로 정했다는 이야기다. 즉 기독교인이든 태양신교든 같이 축제를 즐기고 양쪽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책략이라는 것이다. 대영백과사전은 "로마력 설날(1월1일)에 사람들은 자기 집을 푸른 나무와 등불로 장식했고 자녀들과 가난한 사람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그 시초를 전하고 있다.
2010.12.21. 14:49
82년전 오늘 한국 명동 한복판에서는 부엌에서만 쓰던 냄비가 다른 용도로 내걸렸다. 한국 최초의 구세군 자선냄비다. 구세군에 따르면 1928년 12월15일 당시 한국 구세군 사령관이던 박준섭(조셉 바아)사관이 명동 거리에서 처음으로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자선 모금을 시작했다. 자선냄비는 명동을 비롯해 충정로와 종로 등 20개소에 놓였다. 대부분의 국민이 밥 한끼가 아쉽던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첫 자선냄비는 펄펄 끓었다. 16일간 총 850원이 모였다. 당시 쌀 한 가마니 평균 가격은 5원이다. 보름 여 만에 170가마니 분량이 냄비에 쌓였다. 세계 최초 구세군 자선냄비는 한국보다 67년 앞선다. 1891년 샌프란시스코 해안에 좌초한 난파선의 난민과 지역 빈민을 돕기 위해 구세군이 거리에 큰 솥을 걸고 "이 솥을 끓게 합시다"라고 호소한 이후 전세계로 전파됐다. 개신교 교파인 구세군은 1865년 영국 런던에서 창시됐다.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와 부인 캐서린 부스가 '마음은 하나님께 손길은 이웃에게'라는 슬로건을 걸고 창립했다. 초기에는 '그리스도교 전도회(Christian Mission)'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 다니며 전도했다. 한국에서는 1908년 영국에서 파견된 로버트 호가트 정령이 이끄는 10여 명의 사관이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2010.12.14. 16:34
1984년 11월27일 연방수사국(FBI)의 공식발표가 한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이날 FBI는 2개월전 9월23일 뉴욕 그랜드하이야트 호텔에서 6명의 한국인들이 통일교 제 2인자 박보희(당시 54세)씨를 납치했으며 100만달러의 몸값을 요구하다가 이틀 뒤 체포됐다고 밝혔다. 붙잡힌 납치범들 중에는 예비역해병준장 남상휘(59)도 포함돼 당시 신문 등 언론들은 '예비역장성 등 조직 범행'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FBI에 따르면 이날 범인 6명중 한명인 서영수는 평소 안면이 있던 박씨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면서 차에 태우면서 권총으로 협박해 '스레이트 힐'의 작은 집으로 끌고가 감금했다. 서씨 등은 그곳에서 이틀간 박씨를 전기고문하고 통일교 자금 100만달러를 스위스 은행 비밀구좌에 송금할 것을 협박했다고 FBI는 전했다. 박씨는 자신이 직접 워싱턴으로 가야 송금할 수 있다고 범인들을 설득 9월25일 이들과 함께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미 박씨의 실종신고를 접수한 FBI측은 박씨가 현금 인출을 위해 은행에서 목격됐다는 제보를 받고 출동해 박씨를 구출했다. 당시 박씨는 FBI에 "납치범들이 '기관으로부터 당신을 죽이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말해 공산계열의 테러로 판단했다"고 진술했다.
2010.11.23. 18:01
32년전인 1978년 11월18일 남미 가이아나의 밀림에서 세계 최대 집단 자살극이 발생했다. 사이비종교 ‘인민사원(People’s Temple)‘의 교주인 리버랜드 짐 존스(당시 47세) 목사를 비롯, 광신도 914명이 독극물을 마시고 죽은 사건이다. 애초 존스 목사는 사회개혁에 앞장섰던 존경받는 미국 목회자였다. 1950년대말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에 처음 교회를 세운 뒤 1965년 샌프란시스코와 LA로 옮겨온 그는 탁아소와 무료 급식소를 운영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신도들은 재산을 아낌없이 헌납했고 존스의 열광적인 지지자가 됐다. 교인수가 2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자 존스 목사는 타락으로 치닫게 된다. 그는 교회 이름을 ‘인민의 사원’이라 부르며 개인 왕국으로 바꿔나갔다. 1977년 불법 돈세탁 의혹이 제기되자 그는 조사를 피해 신도 1000여명을 데리고 남미 가이아나로 이주한다. 하지만 이듬해 중앙정보국(CIA)의 조사로 벼랑 끝까지 몰리자 전후무후한 참극을 계획했다. 성인 신도들에게는 독약이 든 오렌지주스를 마시게 했고 어린이들과 애완견에게는 주사로 독약을 주입했다. 현장에서는 사건 진상 조사단으로 파견된 레오 라이언 하원의원과 NBC방송 기자 등 5명도 총격 피살된 채 발견됐다. 당시 이 사건은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민들이 사이비 교주를 추종해 외국으로 이주하고 저항 없이 ‘집단 자살 의식’에까지 동참했다는 사실로 인해 전세계에 충격을 줬다.
2010.11.16. 16:02
107년 전 오늘 미주 한인 교계를 태동케 한 획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1903년 11월 10일 하와이 오하우섬에서 미국 최초의 한인이민교회가 탄생했다. 현재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효시인 한인감리교선교회(사진)가 이날 첫 주일 예배를 드렸다. 교회 설립은 안정수 윤병구씨 등 항일운동의 구심점인 '신민회' 설립자들이 주도했다. 하와이 감리교회 선교부 조지 피어슨 목사도 선교회 조직에 힘을 보탰다.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처음 미국령을 밟은 사탕수수 한인 이민자들이다. 1903년 1월12일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102명의 초기 사탕수수 이민자 중 절반 이상이 첫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하와이에만 한인교회가 14개나 생겨났다. 당시 한인 교인 수는 402명. 그로부터 10년 후인 1914년에는 하와이 교회 수가 39개로 늘었고 교인 수는 2800명에 이르렀다. 하와이에서 첫 주일 예배가 열린 지 꼭 4개월만인 1904년 3월 11일 미국 본토에 최초의 한인교회가 세워진다. 그 다음 해인 190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상항 한국인연합감리교회'가 설립됐고 1906년에는 제퍼슨장로교회로 불리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1914년에는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 1919년 시카고한인감리교회 1921년 뉴욕감리교회 순으로 세워졌다.
2010.11.09. 16:11
1992년 10월28일 밤 한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다. 이날 전국 155개 교회에는 흰옷을 입은 신도 8200여명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모두 자정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하늘로 날아올라 예수님과 상봉한다고 믿었던 '약속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운집한 신도들은 모두 "할렐루야"를 외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자정을 불과 10분 앞둔 11시50분이 되자 신도들은 모두 일어나 울부짖고 온몸을 흔들며 "주여 나를 데려가소서"하고 부르짖었다. 마침내 자정. 하지만 대한민국 상공에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취재 언론들에 따르면 신봉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이맘때만 되면 한국교계에서 되새김질되는 그 유명한 다미선교회 이장림 목사의 '휴거설' 결말이다. 결과적으로 사기극에 불과했지만 그전까지 심각한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 왔다. 세상이 끝난다고 믿었던 신도들은 재산을 버리고 가정도 버렸다.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했고 임신부는 낙태까지 했다. 휴거 당일 서울 마포 다미선교회 본부에는 한국 방송 3사 사상 최초로 종교단체를 상대로 자정까지 생중계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구속됐던 이 목사는 1년 뒤 출소 후 설교에서 "시한부 종말론은 영혼에 대한 마약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2010.10.26.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