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전체

최신기사

"16년 넘게 함께 뛰는 건 하늘의 축복"…류재춘·경희씨의 ‘부창부수’

한인 부부가 16년 넘게 함께 달리며 세계 6대 마라톤도 동반 완주해 화제다.   주인공은 풀러턴에 사는 동갑내기 류재춘·경희씨다. 류씨 부부는 지난달 2일 열린 도쿄 마라톤에서 결승점을 나란히 통과, 대회 참가자와 관계자들로부터 박수와 축하를 받았다.   올해 66세인 류재춘씨는 50세가 되는 2009년 1월 1일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 하루 전 연말 회식 후 체중을 재고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평소 185파운드였던 몸무게가 201파운드로 늘었던 것. 함께 뛰자는 류씨의 제의에 경희씨는 “당신이 일주일 동안 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나도 함께 뛰겠다”고 답했고 이를 실행했다. 이렇게 시작된 류씨 부부의 부창부수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류씨 부부는 16년 3개월 동안 훈련도, 대회 출전도 함께했다. 6대 마라톤 동반 완주는 2022년 보스턴 대회를 시작으로 약 3년 동안 베를린, 런던, 시카고, 뉴욕을 거쳐 도쿄에서 마무리됐다.   류씨 부부는 8월 말 시드니 마라톤 대회에 출전해 7대 마라톤 완주에 도전한다. 그 뒤엔 상하이, 케이프타운 마라톤에도 출전할 예정이다. 류씨와 경희씨의 풀코스 기록은 각각 3시간 40분, 3시간 50분이다.   류씨는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건강도 좋아지고 부부애도 두터워졌다. 16년 동안 함께 뛸 수 있다는 건 하늘이 내린 축복이다”라고 말했다. 부에나파크의 식당 용품 공급업체 ‘에이스 5000 서플라이’를 운영하는 류씨는 회사에서도 경희씨와 함께 일한다.   류씨는 달리기 예찬론자다. 달리면 몸의 형태가 달라지고 건강해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류씨의 현재 체중은 161파운드다. 류씨는 “대학교 1학년 때와 같은 몸무게다. 목 둘레는 1인치, 허리둘레는 4~5인치 줄었다. 팔자걸음, 오(O)자 걸음을 곧은 걸음으로 바꾸면 무릎과 골반이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류씨는 달리기 동호회 해피러너스에선 회원으로, TT러너스에선 팀장 겸 코치로 활동한다. TT러너스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오전 6시에 부에나파크의 랄프 B. 클라크 공원, 토요일 오전 6시엔 풀러턴 팍스 중학교, 일요일 오전 6시엔 세리토스 리저널 공원에 모여 연습한다. 문의는 전화(562-412-8807)로 하면 된다.   류씨는 “이른 아침 숲에서 발산하는 피톤치드를 마시며 걷기와 달리기를 하고 싶은 이는 언제나 환영한다”고 말했다. 임상환 기자하늘 축복 류씨 부부 마라톤 완주 도쿄 마라톤

2025.04.15. 20:00

썸네일

“32년간 축복으로 인도해 준 하나님께 감사”

      페어팩스 한인교회(동사목사 양광호,최일승) 헌당 감사예배가 지난19일 열렸다.    이날 예배는 최일승 목사 집례로 김영기 장로가 기도, 양광호 목사가 마태복음16:18절 말씀을 인용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의 제목으로 설교를 전했다.   양 목사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감사하고, 간증할 수 있어 감사하며, 믿고 함께 해 주신 성도들께 감사하다”며 “모기지를 전부 페이오프하고 헌당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32년간 축복으로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린다”고 말했다.   이후 박소연 사모가 특송을, 양광호 목사가 건축경위를 소개했으며 심미아 사모가 교회열쇠봉헌, 목관 5중주의 특별 무대가 펼쳐졌다. 이어 최윤환 목사와 김치환 장로가 축사를, 남성중창단이 특송을 했으며 최한용 목사가 축도하며 예배를 마쳤다.   최윤환 목사는 축사에서 “은빛 십자가가 우리의 열쇠다”라며 “어떤 문제든지 십자가라는 열쇠로 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김치환 장로는 “입당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많지만 헌당예배를 드리는 교회는 많지 않다”면서 “앞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가 되기 바란다”며 축하를 전했다.   한편 페어팩스 한인교회는 1994년6월20일 성전부지(약3에이커) 매입 후, 1998년10월4일 착공예배를 시작으로 3차 입당 예배를 거쳐 이날 헌당 예배를 드리게 됐다.  페어팩스한인교회는 350석 예배실과 친교실, 소예배실, EM예배실, 도서실, 소친교실, 7개 교실과 홀을 포함, 약 22000 스퀘어피트 규모이다.   양광호 목사는 올해 8월부터 일년간 안식년을 가진 후, 내년 8월 원로목사로 추대되며 현재 동사목사로 시무중인 최일승 목사가 담임목사로 사역을 계승하게 된다. 김윤미 기자 [email protected]하나님 축복 헌당 감사예배 동사목사 양광호최일승 페어팩스 한인교회

2024.06.18. 14:11

썸네일

[김형석의 100년 산책] 120세도 바라보는 시대, 장수가 축복이 되려면…

100세가 넘으면서 가장 많이 받는 인사가 있다. “120세까지 사시라”는 축하 말이다. 나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고맙다는 표정으로 대신한다. 그런데 내 가족 안에서는 그런 인사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104세인 지금도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여론조사 통계를 본 적이 있다. ‘100세까지 살고 싶으냐’는 물음에 한국 사람은 51%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일본인은 22%만이 그때까지 살고 싶다고 했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장수인구가 많은 나라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100세 이상 인구는 9만 명이다. 우리보다 10배가 높은 셈이다.   한국과 일본, 100세를 보는 다른 눈     그런데 왜 일본인들은 78%가 100세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100세 이상의 장수를 행복한 삶이라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왜 120세까지 살라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고마운 마음을 못 가졌을까.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셔 주세요”라는 인사라면 머리를 숙이면서 “감사합니다”라며 답례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 첫째 원인은 100 이상의 삶은 신체적 부담과 고통이 동반하기 때문이다.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는 어려움이 있다. 나도 95세 이후부터는 내 정신건강이 신체적으로 노쇠한 육신을 업고 다니는 부담을 느낀다. 저녁 10시가 되어 잠드는 시간에는 편안한 안식을 느낀다. 하루의 짐을 풀어놓는 가벼운 자세다. 반대로 아침 기상 시간이 되면 일어나는 것이 싫어진다. 내 몸이 천근만근 같아지면서 “30분만 더 자면 안 되나”라며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심정이다. 기상 자체가 주어진 부담이다.   이런 상황을 직접, 간접으로 경험해 보는 사람들은 “100세라는 산(山)을 넘어서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100세 이상 사는 가족이나 친지를 보는 사람은 그런 상태 이전까지의 인생을 원하게 된다. 정신이 신체의 노예가 되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100세 이상까지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가. 통계에 따르면 가장 많은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긴 인생을 즐기고 싶다는 소원이다. 오랜 기간의 행복이 인생의 목표다. 그보다 낮은 수이기는 하나 두 번째가 가족들의 성공과 행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다. 그것이 인간적 본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보고 싶다는 기대도 있었다. 죽기 싫어서 산다는 대답도 있으나 20% 정도뿐이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 마음으로 살아     100세까지 살기 싫은 이유는 무엇인가는 물음에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가장 많았다. 그에 뒤따르는 것이 신체의 노쇠현상에서 오는 걱정, 경제적 불안감, 더 좋은 삶이 불가능하다는 예측, 평균수명이면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는가’라는 물음에는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돌연사가 으뜸이다. 죽음에 따르는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는 죽음의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다. 같은 희망의 반쯤은 가족들의 돌봄 속에서 조용히 가고 싶다는 기대였다. 평상시와 같이 잠들었다가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도 모르게 깨어나지 않는 죽음은 복을 받은 편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어떠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90까지는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되었다. 그런 희망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막상 90이 되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하지”라고 스스로 반문했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는데 100세까지 연장되었다. 지금은 더 갈 수 있고 가야 할 인생의 길을 스스로 포기할 수가 없어 계속하고 있다. 평균수명과 건강나이가 10년은 더 연장된 세상이니까. 그러니까 100까지는 누구나 도전해도 좋을 것이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하는가. 행복과 보람을 유지할 수만 있으면 누구나 의욕과 희망을 품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100세가 되었다고 스스로 인생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앞으로는 120세까지도 연장되는 세상이 올지 모른다. 구한 말에는 왕실에서 80세 장수한 노인을 찾아 지팡이를 선물했다. 20년이 연장되어 나는 100세에 청와대에서 주는 지팡이를 받았다. 지금 20~30대의 젊은이들은 20년쯤 더 연장될 수 있을지 모른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사명감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은 아니다. 자연인의 한계를 넘어 삶의 정신적 가치와 의미를 창조해 가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전이다. 자연의 한계를 넘어 정신적 문화에 동참하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니까. 인간은 시간 안에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사회와 더불어 창조해 가게 되어 있다.   역사를 누가 이끌어 왔는가. 삶의 가치와 의미를 위해 최선의 삶을 영위해 준 사람들이다. 이에 뒤따르는 또 하나의 삶의 창조적 영역이 있다. 내가 사는 공동체 의무를 사명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나와 더불어 가족을, 우리와 함께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 삶이 본연의 책임이다.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노력과 공동체의 기본이 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주어지는 일과 사명 의식을 갖추고 산다면 100세라는 시간적 한계는 사라지게 된다. 나이란 숫자일 뿐이라는 말이 진실이 된다. 나 같은 늙은이도 주어진 일이 있는 동안은 책임져야 한다는 의지로 삶을 계속하고 있다.  김형석 / 연세대 명예교수김형석의 100년 산책 장수 축복 정신적 가치 시간적 한계 여론조사 통계

2023.09.01. 18:59

[발언대] 축복을 망각한 백성은 망한다

초등학생 손주들과 함께  2주간의 어려운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서부와 중부 14개 주에 있는 20개의 공원을 돌아보는 여행이었는데 85세의 나이에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게 귀중한 교육여행의 기회가 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여행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인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미국이라는 나라가 축복받은 곳임을 새삼 느꼈다. 아름다운 경치뿐만 아니라 차로 종일 달리고 또 달려도 끝도 없이 펼쳐진 기름지고 광활한 빈 땅, 물도 많고 기후도 좋아 씨앗만 뿌리면 농장이 되고 가축만 풀어 놓으면 목장이 될 것 같았다. 이렇게 축복받은 미국을 보면서 문득 의문이 떠올랐다. 1776년 미국이 탄생하기 전 이 땅에도 나라가 있었던가?  전세계 모든 땅은 주인이 바뀌기는 했지만 수 천 년 전부터 나라들이 존재했는데 이 아름다운 땅에는 왜 나라가 없었던가?     1492년 콜럼버스가 이 대륙을 발견했지만 미국 건국의 본격적인 시발점은 1620년 청교도의 이주였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성경을 통한 참 복음을 깨달았다는 이유로 같은 기독교 조직의 박해를 받다 이를 피해 온 사람들로 인해 세워진 국가라는 의미다. 그러기에 미국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을 위해 준비해 두셨던 ‘축복의 땅’이라고 생각한다.     김인수 전 장로교 신학교 총장은 매일 ‘오늘의 묵상’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김 전 총장은 지금의 미국과 같은 역할을 했던 유럽의 기독교가 성경에서 떠나 변질의 길을 간 결과 오늘날에는 거의 몰락한 것처럼 미국 교회도 제2의 종교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그 전철을 밟게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의 의견에 동의한다.     미국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대조되는 것이 도심 노숙자들의 모습이다. 도심에는 눈길 닿는 곳 어디에나 십자가가 달린 화려한 교회당이 있고, 예배를 드린다며 들락거리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밖에는 많은 노숙자가 있다.       성경적 기독교의 임무와 목적은 ‘생명 구출’ 이지 교회라는 건물에 들어앉아 ‘종교의식’을 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문제는 정부의 책임 이전에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본분인데 만약 무관심하게 계속 이대로 간다면 미국도 교회도 언젠가는 유럽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노숙자 문제는 기독교라 이름하는 모든 곳이 함께 나서서 힘을 합하기만 한다면 어렵지 않게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미국의 교회 수는 38만 개, 홈리스 숫자는 55만명이라고 한다. 교회 한 곳이 홈리스 1.5명씩만 담당하면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돈이 아닌 관심의 문제인 셈이다.     만약 교회들이 공짜로 받은 이 축복을 망각하고 모른 척 방관만 한다면 머지않아 유럽 교회들이 먼저 보여준 것처럼 내리막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게 이번 여행에서 얻은 결론이다.   그런데 만약 이 일을 한인 교회들이 먼저 나서 모범을 보인다면 미국에 엄청난 ‘코리아(Korea)’의 바람을 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홍식발언대 축복 망각 유럽 교회들 한인 교회들 성경적 기독교

2022.09.09. 18:58

[살며 생각하며] 잊어버린다는 것은 축복이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이사 온 집, 뒤뜰 모퉁이의 모양새 없는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눈에 거슬려 없앨 기회를 엿보던 중 마침 아내가 교회 행사로 집을 비운다는 낭보(?)를 접했다. 떠밀다시피 버스 정류장까지 모셔다드리는 친절을 과시한 뒤 곧장 홈디포에 들러 전기톱을 빌렸다.   어디를 어떻게 톱질할까 생각하다 그루터기는 너무 굵어 힘에 부칠 것 같아 가슴높이 부분을 자르기로 하고 무섭게 회전하는 톱날을 갖다 대자 사방이 휘날리는 톱밥으로 정신이 없다. 잘린 나무는 톱날 방향으로 넘어지기 마련이다. 먼저 넘어질 방향으로 톱질하다 적당한 순간 반대편을 가격하면 원했던 방향으로 넘어질 것이라고 계산하니 희열이 넘쳤다. 그런데 인간의 계산은 항상 오류가 동반하기 마련인가 보다. 이날이 그랬다. 한참 톱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큰 나무가 위아래로 죽 갈라지며 몸통 전체가 반대방향으로 밀리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의 아찔함 가운데도 얼굴 부분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부터 깊이 숙인 채 한쪽 어깨를 나무쪽으로 뒤 밀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어깨를 움직여본다. 아프지 않다. 분명 어깨로 넘어지는 나무둥치를 막았는데 하며 손을 보니 여전히 톱을 움켜쥐고 있다. 대신 톱날 부분은 나무둥치에 깔려 처참하다. 이날 이후 눈만 감으면 가상상황 즉, 단 몇 센티만 내 어깨가 나무쪽으로 다가갔었다면 단 몇 인치만 톱을 쥔 내 손이… 하며 끔찍했던 순간의 파편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밤잠을 괴롭혔다.   사실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그때의 상황을 묘사함은 시간이라는 치료제 덕택이다. 시간은 놀랍게도 뇌의 신경 수준에 영향을 끼치며 몸과 마음에 남겼던 흔적들을 조금씩 지워 없애는 모양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당시의 위험을 거울삼아 나무 한 그루를 자르는데 1시간을 예상한다면 2~3시간 이상의 안전조치를 강구하며 도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신이 사람에게 준 선물 중 특별한 것은 ‘잊혀짐’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과 같은 악몽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만이 갖는 축복일 것이다. 물론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과잉 기억 증후군’ 환자로 전 세계에 80여 명이란다. 이분들은 지나간 일들이 마치 녹화영상처럼 생생하게 살아 기억케 함에 더해 기쁨, 슬픔, 위험, 우울한 감정까지라니 안타깝다.   ‘신은 죽었다. (Gottisttot.)’ 라는 독설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은 본성상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망각은 단순한 타성력이나이성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삶을 기능하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자 적극적인 장치다’라면서 ‘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며 잊어버림이 있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 행복할 수 있다’는 멋진 해설까지 곁들였다.   성경 인물 가운데 ‘므낫세’라는 사람이 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으나 대기만성하여 제국의 총리가 된 요셉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이다. 이름의 뜻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잊어버리게 하셨다’이다. 자신을 흙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다 종으로 팔아넘긴 이복형들의 범행을 생각하면 치를 떨었지만, 므낫세를 얻은 뒤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한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축복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톱날 방향 본성상 망각

2022.08.19. 17:52

[살며 생각하며] 잊어버린다는 것은 축복이다

십여 년 전 일이다. 이사 온 집, 뒤뜰 모퉁이의 모양새 없는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눈에 거슬려 없앨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마침 아내가 교회 행사로 집을 비운다는 낭보(?)를 접했다. 떠밀다시피 버스 정류장까지 모셔다드리는 친절을 과시한 뒤 곧장 홈디포에 들러 전기톱을 빌렸다.   어디를 어떻게 톱질할까 생각하다 그루터기는 너무 굵어 힘에 부칠 것 같아 가슴높이 부분을 자르기로 하고 무섭게 회전하는 톱날을 갖다 대자 사방이 휘날리는 톱밥으로 정신이 없다. 잘린 나무는 톱날 방향으로 넘어지기 마련이다. 먼저 넘어질 방향으로 톱질하다 적당한 순간 반대편을 가격하면 원했던 방향으로 넘어질 것이라고 계산하니 희열이 넘쳤다. 그런데 인간의 계산은 항상 오류가 동반하기 마련인가 보다. 이날이 그랬다. 한참 톱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큰 나무가 위아래로 죽 갈라지며 몸통 전체가 반대방향으로 밀리며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순간의 아찔함 가운데도 얼굴 부분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부터 깊이 숙인 채 한쪽 어깨를 나무쪽으로 뒤 밀었다.   그리고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조용히 어깨를 움직여본다. 아프지 않다. 분명 어깨로 넘어지는 나무둥치를 막았는데 하며 손을 보니 여전히 톱을 움켜쥐고 있다. 대신 톱날 부분은 나무둥치에 깔려 처참하다. 이날 이후 눈만 감으면 가상상황 즉, 단 몇 센티만 내 어깨가 나무쪽으로 다가갔었다면 단 몇 인치만 톱을 쥔 내 손이… 하며 끔찍했던 순간의 파편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밤잠을 괴롭혔다.   사실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그때의 상황을 묘사함은 시간이라는 치료제 덕택이다. 시간은 놀랍게도 뇌의 신경 수준에 영향을 끼치며 몸과 마음에 남겼던 흔적들을 조금씩 지워 없애는 모양이다. 그렇다 보니 지금은 당시의 위험을 거울삼아 나무 한 그루를 자르는데 1시간을 예상한다면 2~3시간 이상의 안전조치를 강구하며 도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신이 사람에게 준 선물 중 특별한 것은 ‘잊혀짐’이 아닐까? 세월호 사건과 같은 악몽도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만이 갖는 축복일 것이다. 물론 기억을 떨치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분들이 있다고 한다. 이름하여 ‘과잉 기억 증후군’ 환자로 전 세계에 80여 명이란다. 이분들은 지나간 일들이 마치 녹화영상처럼 생생하게 살아 기억케 함에 더해 기쁨, 슬픔, 위험, 우울한 감정까지라니 안타깝다.   ‘신은 죽었다. (Gottisttot.)’ 라는 독설로 유명한 독일의 철학자 프레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도덕의 계보’에서 ‘인간은 본성상 망각의 동물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는 ‘망각은 단순한 타성력이 나이성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삶을 기능하게 하는 하나의 동력이자 적극적인 장치다’라면서 ‘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을 수 있으며 잊어버림이 있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러 행복할 수 있다’는 멋진 해설까지 곁들였다.   성경 인물 가운데 ‘므낫세’라는 사람이 있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왔으나 대기만성하여 제국의 총리가 된 요셉의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이다. 이름의 뜻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잊어버리게 하셨다’이다. 자신을 흙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다 종으로 팔아넘긴 이복형들의 범행을 생각하면 치를 떨었지만, 므낫세를 얻은 뒤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잊어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 아닐까 한다. 김도수 / 자유기고가살며 생각하며 축복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톱날 방향 본성상 망각

2022.08.05. 17:29

[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난은 축복의 통로

나는 당신께 파란하늘을 원했지만 / 당신은 나를 먹구름 아래 있게 하셨다 / 나는 이 땅의 낙원을 꿈꿨지만 / 당신은 길고 깊은 가시밭 길을 걷게 하셨다 / 그 고난의 끝에서 나는 당신을 만났다 / 손을 내민 그의 손에 못자국은 / 흔들리는 영혼의 깊은 위로가 되었다 / 당신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마다 / 내속의 불순물은 강렬히 타 올랐다 / 비극도 아닌, 그렇다고 희극도 아닌 / 고통 후 찾아드는 평안함 / 당신을 향한 소망이 자라나 / 살아도 죽고, 죽어도 사는 / 샘 할 수 없는 영원을 찾게 하셨다     천장이 높은 교회의 성가대석에서 헨델의 ‘메시아’를 노래했다. 모든 교인들이 일어나 마지막 곡인 ‘할렐루야’를 경청했다. 지휘자의 인사에 이어 성가대가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솔리스트 몇명과 오케스트라의 소개가 끝난 후 박수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앉았다. 참았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나는 교인이 다 빠져나간 텅 빈 교회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눈물을 훔친 두 손이 젖을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20대의 청년이었고 시카고행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그때 나를 만지셨던 못자국 난 당신의 손을 잊을 수 없다. 그 때 내 속에 머물렀던 따뜻한 감격은 매년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펜더믹 상황으로 오랫동안 대면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올해 초부터 다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영원의 위로’ 덕분이었다. ‘인생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과 약간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 그리고 인간은 그야말로 원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만큼 지극히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내면에 소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주로 외부세계에 관심을 갖다 보니 이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고난이 닥쳐왔을 때 비로소 나를 돌아볼 기회가 찾아온다. 주어진 고통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덕분에 깊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다. 이처럼 고난은 영원 가까이에 잠들고 있는 내면을 깨워준다. 결과적으로 우리를 소망에 보다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 준다. 그렇다고 고난이 소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고난이 소망을 주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고난이 내 안에 감추어진 소망을 구해온다는 표현이 맞을 듯하다. 그 섬세한 과정은 마치 금이 풀무불을 통해 불순물이 제거되어 순도가 높아지듯, 외부의 잡음을 제거해 우리의 영혼을 보다 청결하게 소망에 가까이 드러나도록 만들어 준다.   고난이 기쁨이 되는 이유에 대한 사유는 우리의 삶을 곧게 할 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를 이끌어 오기도 한다. 고난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는 것, 더 나아가 고난을 소망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은 내 안의 하나님이 강하실 때에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러니까 나와 전혀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 자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중요한 존재로 바꿔주셨다는 것을 인정할 때 고난은 더 이상 고난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에게 다가온 고난은 오히려 길을 만들어 이 땅에서도 천국의 소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올해도 당신의 부활을 노래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신 주님을 소리 높여, 목놓아 찬양할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고난 축복 이상 고난 박수 소리 오랫동안 대면예배

2022.04.18. 13:47

썸네일

[이 아침에] 감사가 가져다 주는 축복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 흙 한 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유럽 땅도 그만큼 줄어들지니 (중략) 누구의 죽음이든 그것은 나를 줄어들게 하는 것 (중략)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마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존 던 묵상록 17 중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존 던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 20세기 영미권 문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시인이다. 런던 세인트 폴 대성당 수석사제였던 존 던(1572~1631)은 런던에 페스트가 유행할 당시 이 구절이 들어간 기도문을 썼다. 그는 자신에게 병증이 발견되자 병의 진행 과정과 내면 세계를 반영한 글을 기록한다.     페스트의 공포 속에서 살던 사람들은 ‘왜 우리에게 이런 고난이 닥쳤는지’를 알기 위해 사제인 그에게 몰려 왔다. 전염병을 피하는 대신 교구민 곁을 지키기로 한 던은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오후 10시까지 성경을 연구하며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그런 그에게 페스트의 징표인 반점이 생긴다.     “양떼가 저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지금 왜 저를 쓰러뜨립니까.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인간을 지켜보는 일을 즐깁니까.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입니까.” 던이 하나님께 묻던 말이다. 당시 런던은 페스트가 휩쓸어 인구 3분의 1이 죽고, 3분의 1은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가족과 친구, 직장을 잃고 사업이 파탄 난 사람들이 지금 던지는 질문이다. 무엇에 감사하며 무엇을 향해 누구를 위해 나의 종은 울리는가.     예전에 종소리는 하루의 시작과 마침, 마을의 대소사를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밀레의 ‘만종’ 은 황혼 녘 전원에서 종소리 들으며 삼종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그렸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절 사람이 죽으면 종을 쳤다. 존 딘이 언급한 종은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다. 산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종소리다. 어떤 자의 죽음이라도 내가 슬퍼해야 할 만큼 인류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어떤 혹독한 고난도 죽음의 경계 허물며 생명을 갈구한다. 중환자 병동에 가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안다. 목숨줄 붙어있다는 단순한 현실이 희망이고 기쁨이다.     바람의 얼굴을 보라. 형체도 없이 그대 곁을 스쳐간다. 한때는 비상하는 꿈이었고 불타는 만남이고 비장한 슬픔이었던 어제가 바람 속에 나부낀다. 이름도 얼굴도 희미해진 사랑처럼 바람에 실려 가느다란 종소리로 사라진다. 바람은 울지 않는다. 지나간 시간에 기웃거리며 멈추지 않고 슬퍼도 애걸하며 어제에 매달리지 않는다. 바람은 눈물 닦아 줄 사람은 오직 자신 뿐이란 걸 안다.     추수감사절은 살아있는 자들이 벌이는 축제다. 남은 자들이 올리는 기도다. 마지막 종이 울릴 때까지 쓰러지지 말고 살라고 다짐하는 언약의 종소리다. 참고 견디며 살다보면 작은 것에 감사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기뻐하며 낮아지고 작아지면 쨍하고 해뜰 날 오지 않아도 생이 충만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바람 속에 실려오는 종소리가 죽음을 알리는 타종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축복 되기를 간구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생명의 종소리로 감사의 계절을 맞는다.  이기희 / Q7 파인아트 대표이 아침에 감사 축복 축복 되기 고난도 죽음 런던 세인트

2021.11.25. 18:00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