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온 손님들이 모두 떠나고 / 덩그렇게 손잡은 당신과 나만 남았습니다 / 마른 달처럼 가늘어진 손을 쓰다듬으며 / 당신은 아무 말 안 하시지만 / 나는 당신을 귀담아듣고 있습니다 / 아마도 지나온 시간을 헤아리나 봅니다 / 코스모스 같은 여린 미소를 지으시며 // 나는 낯선 방 한가운데서 눈을 뜹니다 / 밤을 넘어선 문들은 출렁이는 호수에서 / 문을 열고 거울 속으로 새벽을 부릅니다 / 거울을 보면 당신이 보입니다 / 나는 갓 피어난 당신의 봄날 하루를 빌려 / 오늘도 알뜰한 아침을 지어 삽니다 // 안으면 부서질 것 같은 그러나 / 온 힘을 다해 밀려 올 당신으로부터 / 코스모스 향이 노을로 젖어가는 하루의 끝까지 / 나는 봄바람에 눕고 다시 일어납니다 / 당신이라고 부르다 호수에 잠기고 / 그립다 말하려다 말문이 막힙니다 / 가라앉는 나는, 발끝을 세우는 당신은 / 들꽃을 한 아름 안고 걸어오는 거울입니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난 지도 13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그만큼 늙었고, 당신의 묘엔 나지막한 도장 나무 두 그루가 새봄에 내밀 초록 잎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당신이 보고 싶어 하던 친구들도 세상을 떠나 당신의 나라로 갔습니다. 겨울이 한 걸음 물러나고 이곳엔 비가 촉촉이 내렸습니다. 그곳은 어떠신지요? 어찌 사나 궁금해 가끔 하늘 창문을 열고 내려다보시는지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은 어떤가요. 혹여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네요. 호수가 보이는 곳에 있어요. 지난밤 찬비가 내렸고 그 때문에 안개가 자욱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지요. 새소리가 가득한 덱의 문을 엽니다. 차고 청명한 아침 공기를 큰 호흡으로 마시고 있습니다. 호수엔 물새 떼가 유유히 흐르고 덱 주변 나무에는 새들의 수다가 한창입니다. 이런 아침 소리와 풍경이 움츠렸던 마음을 깨어나게 합니다. 가지고 온 시집을 펼쳐 나지막이 소리 내 읽어봅니다. 시를 읽다 보면 나 또한 살아있다는 행복감을 불러옵니다. 매일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다른 현실에 부딪히며 살아갑니다. 내 기억의 거울 속에서 나의 하루는 당신과 시작하고 하루를 마감합니다. 만날 수 없는 당신을 거울 속으로 부르고 그곳이 현실인 양 당신의 여윈 손을 가만히 잡아봅니다. 언제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 주셨던 따듯한 마음이 그리워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매일 맞이하는 하루는 높은 계단을 오르듯 거친 숨을 쉬어야 하지요. 당신도 떠나고 우리 생애에 초대받은 많은 사람이 떠나갔습니다. 이제 우리 앞엔 가파른 계단 대신 곡선의 여유로운 언덕과 호수가 남아 있습니다. 나뭇가지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고 하늘 아래 파도가 출렁이는 그곳에 당신의 거울이 있습니다. 거울 속엔 당신이 숨 쉬고 유년의 나도 살고 있습니다. 호수에 노을이 지면 중절모를 쓰고 허리가 약간 굽은 미래의 내 모습도 보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거울을 가지고 삽니다. 그 거울 속에는 나의 살아온 길이 보입니다. 소중했던 순간도, 절망했던 시간도, 보고 싶은 얼굴도 모두 그곳에 있습니다. 거울 속엔 당신도 있고 나도 살고 있습니다. 그 거울을 잃어버리게 될 날은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바라보는 경계가 없는 하늘과 호수처럼 나도 그곳에 살고 있고 당신도 그곳에 나와 함께 있을 테니까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모두 거울 언덕과 호수 하늘 창문
2026.03.09. 13:40
빈들의 하루 어디로부터 왔는지 왜 당신 앞에 서 있는지 아마 모르시겠죠 긴 세월, 먼 길을 돌아 당신 등에 기대어 있는지 잊으셨나요 어제의 어깨 위로 지나가는 바람결 따라 당신의 마음을 훔치고 어느 세월 여기에 왔어요 잠들은 태고적 고요, 공룡의 실루엣 처럼 정지된 하늘과 땅 사이 발끝 닿지 않은 심층까지 미지의 세상에 뿌리 내려 순백의 빛으로 오는 아빠 어깨같이 듬직한 당신 내 말만 쏟고 돌아 갑니다 둥굴고 넓은 당신 품 심장 소리에 살아납니다 나무는 하늘을 받들고 하늘은 나무를 안고 하루가 지고 있다. 너른 들녘엔 반딧불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찬바람에 푸릇푸릇 들불의 흔들림이 마치 온 들이 손을 잡고 왈츠를 추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어둠은 점점 내려앉아 하늘과 나무의 경계는 사라지고 창밖은 검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고요한 정적이 내리고 있다. 하루가 저물듯 하루가 온다. 어제의 나무가 새날을 맞이하고 어제의 새들이 보금자리에서 깨어나 아침을 노래한다. 하늘은 구름과 어제와 다른 바람을 품고 밝아오고 있다. 나무의 끝까지 들은 손을 뻗어 하늘을 부르고 하늘은 아침을 바람에 실어 나무의 가지를 흔들어 놓는다. 헨델의 파사칼리아의 선율이 피아노 건반을 미끄러지듯 타고 잠든 세상을 깨운다. 52개의 하얀 건반과 36개의 검은 건반을 고르며 가늘고 긴 섬세한 손이 밝아오는 길로 마중 나간다. 모든 생명체의 탄생이 그러하듯이 시계의 초침같이 세미한 걸음으로 새날이 내 앞에 선다. 나무의 그림자처럼 시간은 흐르고 있다. 라벤더 보라 꽃봉오리가 아침햇살에 굽어진 허리를 편다. 비가 잠깐 뿌렸는데 들과 나무숲과 하늘이 깨끗해졌다. 공기 속 먼지들을 흡수하고 숨이 깊어졌다. 하나님이 하늘 창문을 열고 아래 숲속을 바라보시다 잠깐 비를 뿌렸더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뿐이 아니다. 나무도 숨을 고르고 숲속 작은 벌레들도 꿈꾸듯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열심히 기어다닌다. 나도 그 미지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한낮의 황홀 속에서 마음을 파고드는 이쪽저쪽에서 생명의 환호성을 듣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게 주어진 24시간이 사라지기 전에 오늘은 생각만 하는 꿈처럼 살지 말자. 꿈을 현실처럼 살자. 작은 씨앗 속에 푸른 하늘과 바람과 초록의 싱그러움을 담아 마침내 피워낼 한 송이 꽃처럼. 내 안의 정원에서 피어나는 무수한 단어들, 문장들을 꺼내어 한 편의 시를 노래해 보자. 어디선가 날아와 발길을 인도해 주는 나비의 날갯짓 따라 나도 춤추듯 간다. 꿈꾸었지만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감추어진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철마다 다른 얼굴을 내미는 들꽃의 속삭임에 취해 나만의 비밀의 정원을 걷고 있다.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너를 만나고 또 나를 만나고 싶다. 문득 호수가 보고 싶다. 밀려오는 파도의 하얀 부서짐이 내 귀에 들려온다. 기진했던 심장의 박동이 힘차게 살아나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하늘 창문 실어 나무 피아노 건반
2025.07.14. 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