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부터 왔는지
왜 당신 앞에 서 있는지
아마 모르시겠죠
긴 세월, 먼 길을 돌아
당신 등에 기대어 있는지
잊으셨나요
어제의 어깨 위로
지나가는 바람결 따라
당신의 마음을 훔치고
어느 세월 여기에 왔어요
잠들은 태고적 고요,
공룡의 실루엣 처럼
정지된 하늘과 땅 사이
발끝 닿지 않은 심층까지
미지의 세상에 뿌리 내려
순백의 빛으로 오는
아빠 어깨같이 듬직한 당신
내 말만 쏟고 돌아 갑니다
둥굴고 넓은 당신 품
심장 소리에 살아납니다
[신호철]
나무는 하늘을 받들고 하늘은 나무를 안고 하루가 지고 있다. 너른 들녘엔 반딧불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찬바람에 푸릇푸릇 들불의 흔들림이 마치 온 들이 손을 잡고 왈츠를 추고 있는 듯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어둠은 점점 내려앉아 하늘과 나무의 경계는 사라지고 창밖은 검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고요한 정적이 내리고 있다.
하루가 저물듯 하루가 온다. 어제의 나무가 새날을 맞이하고 어제의 새들이 보금자리에서 깨어나 아침을 노래한다. 하늘은 구름과 어제와 다른 바람을 품고 밝아오고 있다. 나무의 끝까지 들은 손을 뻗어 하늘을 부르고 하늘은 아침을 바람에 실어 나무의 가지를 흔들어 놓는다. 헨델의 파사칼리아의 선율이 피아노 건반을 미끄러지듯 타고 잠든 세상을 깨운다. 52개의 하얀 건반과 36개의 검은 건반을 고르며 가늘고 긴 섬세한 손이 밝아오는 길로 마중 나간다. 모든 생명체의 탄생이 그러하듯이 시계의 초침같이 세미한 걸음으로 새날이 내 앞에 선다. 나무의 그림자처럼 시간은 흐르고 있다. 라벤더 보라 꽃봉오리가 아침햇살에 굽어진 허리를 편다.
비가 잠깐 뿌렸는데 들과 나무숲과 하늘이 깨끗해졌다. 공기 속 먼지들을 흡수하고 숨이 깊어졌다. 하나님이 하늘 창문을 열고 아래 숲속을 바라보시다 잠깐 비를 뿌렸더니 모든 것이 달라졌다. 나뿐이 아니다. 나무도 숨을 고르고 숲속 작은 벌레들도 꿈꾸듯 밖으로 나와 어디론가 열심히 기어다닌다. 나도 그 미지의 세상으로 들어간다. 한낮의 황홀 속에서 마음을 파고드는 이쪽저쪽에서 생명의 환호성을 듣는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게 주어진 24시간이 사라지기 전에 오늘은 생각만 하는 꿈처럼 살지 말자. 꿈을 현실처럼 살자. 작은 씨앗 속에 푸른 하늘과 바람과 초록의 싱그러움을 담아 마침내 피워낼 한 송이 꽃처럼. 내 안의 정원에서 피어나는 무수한 단어들, 문장들을 꺼내어 한 편의 시를 노래해 보자. 어디선가 날아와 발길을 인도해 주는 나비의 날갯짓 따라 나도 춤추듯 간다. 꿈꾸었지만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감추어진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철마다 다른 얼굴을 내미는 들꽃의 속삭임에 취해 나만의 비밀의 정원을 걷고 있다. 꿈이 아닌 현실 속에서 너를 만나고 또 나를 만나고 싶다. 문득 호수가 보고 싶다. 밀려오는 파도의 하얀 부서짐이 내 귀에 들려온다. 기진했던 심장의 박동이 힘차게 살아나고 있다. (시인,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