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에 떨어진 작은 씨앗이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바람아 나를 날려 저 언덕 너머로 옮겨줄 수 있겠니? 그곳은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 비옥한 땅이거든. 나도 그곳에서 꽃피우고 싶어." 바람은 씨앗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래 남풍이 불 때 너를 안아 저 언덕 너머로 옮겨줄게." 며칠이 지나자, 남풍이 불어왔습니다. 씨앗은 그동안 허기와 추위로 부쩍 야위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안간힘을 쓰며 견디었는데 드디어 남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어깨를 펴고 다리를 한데 모으고 비상할 준비를 마쳤는데 바람은 씨앗을 언덕 너머로 옮겨주지 않았습니다. 밤이 다시 찾아왔고 설상가상으로 하늘에 온통 먹구름이 끼더니 굵은 빗방울이 밤새 쏟아졌습니다. 기진맥진 아침이 되어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엔 울퉁불퉁한 돌멩이들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리 받히고 저리 받히며 온몸엔 멍이 들어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넋을 놓고 큰 돌멩이에 기대어 있는데 바람이 지나가며 말했습니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너를 찾을 수가 없었잖아." “나는 너만 기다렸는데 밤새 쏟아진 비에 잠깐 정신을 잃었나 봐.” 미안함에 상처 난 얼굴을 붉히며 씨앗은 얼굴을 들었읍니다.
오늘도 씨앗의 꿈은 여전합니다. 언젠가 손바닥만 한 양지에서 꽃 한 송이 피워내기를 바랐습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끝까지 견디어내면 꼭 좋은 일이 자신에게 올 거라는 희망을 저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눈앞엔 어른거리는 따뜻한 양지가 포근하게 그려질 뿐입니다. 저녁노을 진 풍경이 눈에 비치고 들녘의 숨소리가 깊어질 때였습니다. 바람은 남풍을 몰고 와 나를 번쩍 안아 하늘로 나르더니 모두 깊이 잠든 언덕 너머로 나를 옮겨 주었습니다. 삐죽삐죽 올라온 들풀들 사이로 발을 뻗었습니다. 밀려오는 나른함과 행복감에 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적막과 고요함 속에 길들어 있던 씨앗은 마음 속에 들려오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세미한 음성의 주인은 햇빛이었습니다. “이제 꽃을 피울 수 있겠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찾아온 감사와 행복의 시간이 몰려왔습니다. 조금은 서툴어도 그 은혜의 시간에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행위보다는 내가 먼저 죽는 씨앗이 되기 위해 마지막 남은 내 양분을 뿌리로 뿌리로 내렸습니다.
진짜 행복은 지금부터입니다. 산산이 부서졌던 곳으로부터 작은 씨앗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어제와 다른 새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들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그 하루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우리는 누구입니까? 자신을 버려 싹을 내는 작은 씨앗 한 톨보다 못 한 인생이라면 우리의 모난 모서리는 얼마나 더 깎여야 하나요." 귀를 쫑긋 세우고 귀 기울여봅니다. 영혼의 봄날을 기다리는 당신에게 봄은 향기로운 몸짓으로 다가와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줄 것입니다. 그리고 불편했던 서로의 거리를 좁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작은 씨앗도, 부서지기 쉬운 우리도,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봄날도 정겹습니다. 이제 막 터질 듯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루가 모두에게 기적처럼 펼쳐진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모두에게 가슴 저미며 맞이해야 할 사실 아닌가요? (시인,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