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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메인 앵커 주주 장, 아시안 주도 영어 미디어 플랫폼 절실

  미국의 하루는 한인 앵커에 의해 마무리된다. ABC 나이트라인의 기자이자 공동 메인 앵커로 14년째 뉴스를 전달하는 주주 장(한글명 현주·사진) 앵커는 자신을 ‘스토리텔러’라고 했다. 지난 3일까지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열린 ‘2025 아시아계미국인언론인협회(AAJA) 연례 컨벤션’에서 만난 장 앵커는 뉴스 전달을 ‘성스러운 책임’으로 여긴다고 했다. 38년째 방송 저널리즘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 그는 방송계에서 신뢰의 상징으로 통한다. 장 앵커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언론인이 된 이유와 뉴스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앵커의 길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원래 엔지니어가 될 줄 알았다. 실리콘밸리의 서니베일에서 자라 스탠퍼드대에 입학했는데, 이공계 수업 성적이 엉망이었다. 반면 정치학 수업에서는 A+를 받고 우수상까지 받았다.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중, 당시 유명 앵커였던 중국계 코니 정에게 영감을 받아 언론인의 길을 결심했다. 학보사 활동과 지역 방송국 인턴을 거쳐, 대학 졸업 10일 만에 ABC에 입사했다. 그렇게 38년이 흘렀다.”     ‘한인’이라는 정체성이 활동에 미치는 영향은. “초반에는 아시아계나 여성으로 분류되는 게 싫어 일부러 남자 기자들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여성, 워킹맘, 한인이라는 내 정체성이 오히려 보도에 깊이를 더해준다는 걸 깨달았다. 특히 내가 설립에 참여했던 한인커뮤니티재단(KACF)을 통해 한인 사회의 현실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예를 들어 뉴저지 북부 지역 한인 시니어들은 보험이 없거나, 언어 장벽, 빈곤 문제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이런 경험은 언론인으로서 우리 커뮤니티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사명을 일깨웠다.”   유리천장이나 차별은 없었나. “누군가 대놓고 ‘넌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계 여성으로서 늘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은 분명히 있었다. 특히 방송계에서 아시아계 임원이 부족한 건 구조적인 문제다. 의사결정권을 가진 자리에 아시아계는 여전히 너무 적다. 그래서 나는 ABC에서 후배 아시아계 기자들을 멘토링 하며, 그들이 ‘이 공간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것이 내가 유리천장을 깨는 방식이다.”     앵커로서 한인임을 깊이 느꼈던 순간은. “유엔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방탄소년단(BTS)을 인터뷰했을 때, 한국이 ‘소프트 파워’를 통해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생생히 느꼈다. BTS가 유엔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춤을 춘 장면은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었다. 유엔 웹사이트가 다운될 정도였다. 그 순간, 한국 문화의 위상을 직접 체감하며 한인으로서 깊은 자부심을 느꼈다.”   주류 언론에 한인 언론인들은 충분한가.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LA처럼 아시아계 인구 비율이 높은 지역조차, 지역 방송국에 한인 기자는커녕 아시아계조차 없는 경우가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왜 아시안이 운영하는 영어 미디어가 아직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지 고민해야 한다. 아시안이 주도하는 영어 미디어 플랫폼이 절실하다. 미주중앙일보가 그 좋은 예시다.”     주류 언론에 한인이 필요한 이유는.  “대표성은 우리가 이 사회의 ‘당연한 구성원’임을 보여주는 데 있어 핵심 요소다. 우리는 ‘영원한 외국인(perpetual foreigner)’이 아니다. 나는 미국인인데도 ‘영어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인식은 우리가 주류 미디어 속에서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이야기와 얼굴을 통해 한인의 입체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곧 편견을 깨는 힘이다.”     기억에 남는 보도는.  “하나만 꼽긴 어렵다. 50개 주는 물론, 케냐 기린 보호 구역부터 과테말라 난민 문제까지 세계 곳곳을 다녔다. 그래도 한국 관련 보도 중 인상 깊었던 건, 최근 오징어 게임 출연진과 감독 인터뷰, K-뷰티 트렌드 취재가 있다. 또 지난 5월 한국에서 한인 셰프 오스틴 강과 함께 광장시장을 돌고, 유명 댄스 아카데미인 ‘원밀리언 댄스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이런 한국 문화 콘텐츠 취재는 내 정체성과 맞닿아 있고, 한국의 글로벌 영향력을 보여줄 수 있어 특별하게 느껴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는.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오프라 윈프리 등 많은 유명 인물을 인터뷰했지만, 내게 진짜 의미 있는 인터뷰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만난 일반인들과의 대화다. 아카데미상을 받은 기쁨의 순간이든, 총기 사고로 아이를 잃은 비극의 한가운데든, 약물 중독으로 병원에 있는 순간이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존엄을 담아 전달하는 것이 내가 이 일을 하는 진짜 이유다.”     어떤 앵커로 남고 싶나.  “나는 모든 사람을, 모든 이야기를 진심으로 존중했던 기자로 기억되고 싶다. 나와 생각이나 배경이 다르더라도, 그들의 인간적인 면을 귀하게 대하려 노력해왔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왜곡 없이 전달하는 걸 ‘성스러운 책임’으로 여긴다. 그런 태도를 끝까지 지키는 앵커로 남고 싶다.”   ━       ☞주주 장은   현재 ABC 뉴스 나이트라인 공동 앵커로 지난 2014년부터 11째 진행을 맡고 있다. 그는 굿모닝 아메리카, 20/20, 월드 뉴스 투나잇, 나이트라인 등 주요 프로그램을 이끌며 에미상 등 권위 있는 언론상을 다수 수상해 이제는 미국 방송계에서 신뢰의 상징으로 통한다. 장씨는 지난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4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이민 왔다. 스탠퍼드대에서 정치학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고, 대학 졸업 10일 만에 ABC에 입사했다. 그는 지난 1995년 공영방송 PBS의 지역 방송국 WNET 대표 닐 샤피로와 결혼해 슬하에 아들 셋을 두고 있다.  시애틀=김경준 기자이야기 존중 한인 앵커 한인 정체성 한인 사회

2025.08.0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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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마당] 80대 친구들의 인생 이야기

세상 사람 사는 모습은 각양각색 천태만상이다. 최근 86세 동갑내기 두 명과 84세, 81세 독거 노인 친구들의 집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깜짝 놀랐다.   첫 번째 동갑내기 친구는 부산의 큰 섬유회사를 경영하는 부모 밑에서 부유하게 잘 살아서인지 집안이 깔끔하게 잘 정리가 되어있었다. 가구도 아주 비싼 건 아니지만 품격이 있었다. 부친이 물려준 큰 사업체를 경영하던 친구인데 불행하게도 아내의 외도로 이혼하고 사업도 실패해 미국에 혼자 왔다. 예전에 카지노에서 한번 수십만 불을 땄던 기억 때문인지 요즘에도 가끔 카지노를 찾는 게 취미다.     정반대로 어렵게 부산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두 번째 동갑내기 친구는 두뇌는 명석한데 집안은 온갖 고물로 가득한 엉망친장이었다.   젊어서 입던 옷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죽 허리띠도 끊어지면 스테이플러나 테이프로 이어서 쓴다. 속옷 역시 해지고 걸레가 될 때까지 입는다. 다행히 연방공무원으로 20년 근무해 연금이 나와 생활에는 지장이 없다. 생활비를 아껴서 저축한 돈으로 해외여행 가는 게 취미다. 글 친구로 만나서 가끔 이 친구가 챙겨온 럼주도 한잔 같이 마신다.   세 번째 친구는 나처럼 무역업을 대구에서 크게 하던 친구인데 지금도 사업 재기를 꿈꾸고 있어 그 용기가 가상하다. 이 친구는 외출시 항상 정장을 입고 집안 정리가 깔끔하게 잘 되어있어 놀랐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네 번째 친구는 사실 내 동생과 동갑인 다섯 살 아래이지만 ‘객지 벗 10년’이라는 말처럼 허물없이 지낸다. 우체국에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정년퇴직 해서 연금으로 산다.   서울에서도 구청 공무원이었다고 하는데 아내와 이혼하고 이곳에 와서 혼자 산다. 한때 술을 즐겼는데 지금은 당뇨가 심해서 술을 입에도 못 댄다고 한다. 이 친구가 최근에 15년 만에 새 TV를 샀는데 조작법을 몰라 도움을 요청해 집에 가봤더니 집안이 어지럽다. 어쩔 수 없이 내친김에 아내와 함께 집 정리를 도와주었다.   사람 사는 모습은 실로 천태만상이다.  김영훈 / LA독자 마당 이야기 친구 동갑내기 친구 인생 이야기 입고 집안

2025.08.04. 19:08

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밀물과 썰물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천체는 달이다. 달은 지구의 위성이기는 하지만 그 크기가 마치 지구의 형제 행성처럼 크다. 달이 지구에 이바지한 것은 많지만 그중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 존속에도 큰일을 담당하고 있다. 달은 지구에서 아주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데 앞으로 수십 억 년 후에는 지구를 영원히 떠날 것으로 추측한다.   달이 지구에 미치는 인력 때문에 밀물과 썰물이 생긴다는 사실은 이제는 초등학생도 다 아는 상식이 되었다. 지구를 붙잡고 있는 태양도 지구에 인력을 행사하지만, 워낙 멀리 있다 보니 달의 절반도 채 안 된다. 비록 달은 태양에 비해 엄청나게 작아도 지구와 아주 가깝게 있어서 달의 인력이 유체인 바닷물을 움직인다. 그것이 바로 밀물과 썰물이다. 그런 바닷물의 움직임이 지구 자전에 영향을 주어 아주 미미하지만,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늦어지게 되고 그 결과 달은 지구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지구가 달을 잃는다고 해도 걱정하지 마시라. 인류의 문명이 아무리 오래간다고 하더라도 그때까지 유지될 수는 없을 정도의 먼 훗날의 얘기니까.   달은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데 지구와 달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부분은 당연히 두 천체의 인력이 가장 세게 작용할 것이다. 만약 달에도 물이 있다면 지구의 인력이 그 물을 끌어당기겠지만 달에는 바다가 없다. 대신 지구 바닷물은 달의 인력이 잡아당겨서 움직이는데, 해안가를 기준으로 달의 인력에 의해서 바닷물이 끌려나가 해수면이 낮아지는 경우를 썰물이라고 하고, 반대로 끌려나갔던 바닷물이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밀물이라고 한다.   그런 달의 움직임 때문에 밀물과 썰물 현상이 생기는데 지구상 위치에 따라 그 차이가 크게 나타나기도 하고 작은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이를 조석현상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서해안은 밀물, 썰물 때 해수면 차이가 상당히 큰 곳으로 유명하다. 특히 아산만은 그 차이가 8m가 넘는다고 하니 조심해야 한다. 이로 인해서 바닷물의 이동이 심한 곳이 있는데 이순신 장군께서 해전에서 대승하셨던 이유도 조류의 움직임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밀물 때 바닷물이 들어와서 해수면이 가장 높아진 상태를 만조(滿潮)라고 하고, 반대로 썰물 때 해수면이 가장 낮아지면 간조(干潮)라고 하며 그 두 해수면의 차이를 조차(潮差)라고 한다. 태양-달-지구가 일직선 위에 위치할 때, 그러니까 삭(朔)이나 망(望)일 때는 그 인력이 가장 커서 조차도 가장 커지는데 이때를 특히 사리라고 하며, 반대로 태양과 달의 인력이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을 때, 다시 말해서 인력이 가장 약해져서 조수 간만의 차이가 가장 작을 때를 조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조수간만의 차이를 일으키는 힘을 기조력(起潮力)이라고 한다.   달 쪽을 향하고 있는 지구는 달의 인력이 지구의 바닷물을 잡아당기기 때문에 밀물 현상이 나타난다. 그런데 지구의 정 반대쪽은 지구가 공전하는 원심력 때문에 역시 지구 중심의 바깥쪽으로 바닷물이 쏠리게 되어 밀물 현상이 생긴다. 그러므로 밀물이 생기는 이유는 달의 인력이기도 하고 지구의 공전 원심력 때문이기도 하다. 밀물과 썰물은 하루에 두 번 생기는데 한 번은 달의 인력에 의해서,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지구 공전의 원심력 때문이다. 조수간만의 차이는 해안선의 모양이나 수중 지형, 그리고 지구의 기상 요인에도 영향을 받는다. 지중해처럼 사방이 막힌 바다는 조수간만의 차이가 작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밀물 썰물 밀물 현상 썰물 현상

2025.08.01.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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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시간이란?

우리의 경험에 의하면 태양은 매일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사실 태양은 가만히 있는데 지구가 돌고 있어서 우리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처럼, 시간 역시 변하는 현상을 보고 편의상 만들어 놓은 것이지 실제로는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존재한다는데 3차원에 사는 우리에게는 마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라고 한다.   눈앞의 물체에서 반사된 빛이 수정체를 통과해서 망막에 상이 맺히면 우리는 본다고 한다. 사진기는 사람의 눈을 모방해서 만든 기구인데 사진을 찍을 때 사진기에는 사람이 거꾸로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직진하는 빛이 마치 알파벳 X자처럼 작은 렌즈 구멍을 통과하기 때문에 사람의 머리 부분은 사진기 아래에, 다리 부분은 위쪽에 상이 맺혀서 그렇다. 사람의 망막에도 사진기처럼 위 아래가 뒤집혀서 상이 맺힌다. 그러나 시신경이 정보를 뇌로 보낼 때 그런 뒤집힘 현상을 바로잡아서 우리는 물체의 위 아래가 바로 돼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     우주에서 단 한 가지 불변인 것은 빛의 속도다. 공중전에서 전방의 적기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면 미사일은 자기 속도에 비행기의 속도를 합한 속도로 날아간다. 그런데 지구로부터 멀어지는 보이저호에 무전을 보내면 보이저호의 속력과 관계없이 전파는 빛의 속도로 날아서 도착한다. 빛(전파)은 어떤 경우에도 그 속도가 일정해서 그렇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애틀랜타까지 시속 50마일로 달리는 자동차로 10시간 걸린다면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500마일이다. 이처럼 속도란 두 곳 사이의 거리를 걸리는 시간으로 나눈 것이다. 만약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면, 그 대신 걸리는 시간이 변하면 공식은 유지되므로 광속 불변의 우주에서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그동안 시간은 어디서나 일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빛도 더 빠르거나 더 느리게 관측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주의 작동원리는 우리의 직관과는 달랐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는 세상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과거와 현재가 있고 앞으로 미래도 있는 시간의 세상이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 전까지 인류는 우주 전체에서 시간은 일정하게 흐른다는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시간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물체의 움직임에 따라 변한다는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쉬운 예를 들면, 빨리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은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의 시간에 비해서 늦게 흐른다는 말이다. 모든 것을 종합하자면 빛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같은 속도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고 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시간은 물체의 움직임과도 관계가 있지만, 중력도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다. 중력이 큰 곳에서는 시간도 천천히 흐른다. 그래서 블랙홀처럼 극한의 중력을 가진 곳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따라서 아주, 아주 정말로 미세한 차이여서 느끼지 못할 뿐 아파트 20층에 사는 사람보다 지상에 가까운 곳, 그러니까 중력이 조금이라도 큰 곳에 사는 사람의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그러니 땅 집에서 사는 것이 고층 아파트에서 사는 것보다 낫고,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일리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아주 정밀한 기구로 측정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그동안 시간 과학 이야기 자기 속도

2025.07.18.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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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진공

우리는 무엇이 없을 때 '텅 비었다'라고 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사실 산소, 질소, 아르곤, 그리고 미량의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많은 것들로 꽉 차 있다. 아무것도 없는 진짜 공간은 진공(眞空∙vacuum)이라고 하는데 실험실에서 그 비슷한 상태를 만들 수 있지만, 100% 진공은 불가능하다. 은하 깊숙한 곳, 별과 별의 사이인 성간은 거의 완벽한 진공 상태라고 하는데 가로, 세로, 높이가 각 1m씩 되는 정육면체 모양의 공간에 수소 원자 몇 개 정도 들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 완벽에 가까운 진공은 지구상에서는 존재 불가능하다.   수학에서는 0이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무(無)라고 하는데 과학적 용어로는 진공이다. 진공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진공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음극선 실험을 하면서부터다. 공기 중에서는 음극선이 흐르지 않았다. 음극선의 흐름이란 다시 말해서 전자의 이동인데, 공기 속의 여러 입자가 전자의 이동을 방해했다. 그래서 공기가 희박할수록, 그러니까 진공에 가까운 상태일수록 음극선의 흐름이 더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실생활에서 진공은 아주 중요하다. 빛을 내는 전구는 속의 공기를 없애서 필라멘트가 산화되지 않아야 오래 사용할 수 있고,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진공청소기가 있고, 진공포장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곳에 쓰이고 있다. 의미를 혼동하는 일이 많은데 어떤 용기 속에 공기를 뺐다고 진공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모든 물질, 즉 원자까지 모두 없어야 제대로 된 진공이다. 그래서 실험실에서 진짜 진공을 만드는 일은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고전역학에서는 진공은 텅 빈 곳이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진공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아니라 진공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좀 어려운 말 같지만, 진공 속에서 입자와 반입자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그럴 때 에너지와 빛이 나온다. 만약 진공 에너지를 활용할 수 있다면 에너지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직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이 그 단계는 아니다.   지구와 달, 태양계, 은하 등 우주를 우주답게 유지해 주는 것이 바로 중력이다. 중력은 미시세계에서는 약한 힘이기는 하지만 은하나 우주의 규모에서는 가장 강한 힘이다. 중력 때문에 우리가 지구에 붙어서 살 수 있고, 여덟 행성이 태양이란 별을 공전하면서 태양계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 은하인 은하수의 크기는 그 지름이 약 10만 광년이나 되는 거대한 덩치지만 중력으로 말미암아 모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수조 개나 되는 은하가 모인 우리 우주도 중력에 의해서 서로 흩어지지 않고 우주의 모습을 지탱한다.   그런데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주는 가속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은하와 은하 사이가 점점 빨리 멀어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좀 이상하다. 중력 때문에 서로 잡아당긴다면 당연히 은하와 은하 사이도 점점 가까워져야 할 텐데 멀어진다니 뭔가 비밀이 있는 모양이다. 과학자들은 중력을 이기는 어떤 힘, 즉 척력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고 그 알 수 없는 힘을 밝히려고 했으나 아직 성과가 없다. 어쨌든 우리는 그 모르는 힘에 암흑에너지란 이름을 붙였고 우주는 암흑에너지가 중력보다 커서 점점 빠르게 팽창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혹시 암흑에너지가 바로 진공 에너지가 아닌가 의심한다. 그런 과학적 추측이 과학 기술이 향상되면서 실험적, 관찰적 증거가 발견되는 것이 물리학의 발달 과정이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진공 에너지 진공 vacuum 과학 이야기

2025.07.11.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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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화성

화성은 태양의 여덟 행성 중 지구 다음 궤도를 도는 네 번째 행성이다. 태양계의 생명체 거주가능 영역의 바깥쪽에 걸쳐 있어서 지금부터 15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성에 우리 지구처럼 지적 생명체가 사는지 모른다는 추측을 했다.     19세기가 거의 저물 무렵 영국의 공상과학 소설가 H. G. 웰스는 〈The War of the Worlds〉라는 소설을 발표했는데 우리보다 문명이 발달한 화성인이 지구를 침공한다는 줄거리다. 결국, 지구 세균에 저항력이 없던 화성인이 온갖 병에 걸려 스스로 궤멸하는 바람에 지구는 위기를 넘겼고 패퇴한 화성인은 지구를 포기하고 금성으로 목표를 바꿨다는 이야기다. 〈타임머신〉과 〈투명인간〉으로 유명한 작가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지구에서 약 5천 6백만Km 떨어진 화성까지 로켓으로 가는 데만 7달 정도 걸린다. 일주일 걸린다면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사람이 좁은 우주선 안에서 수개월을 버틴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숙식이 해결된다고 해도 갇힌 공간에서 그렇게 오래 생활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화성은 인류가 이주할 수 있는 지구 밖 식민지 0순위에 올라 있다. 그나마 화성이 거리상 시간상으로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그렇다.   지금 화성에는 로버라고 불리는 무인 탐사 차량이 다니고 한때는 드론이 날기도 했다. 비록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었지만 무인 우주선에 의한 화성 탐사는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소련은 마스 1호를 화성 궤도에 진입시켰고 2년 후 후발 주자가 된 미국의 매리너 4호도 화성 궤도에 안착했다. 구소련은 마스 2호와 3호를 화성 표면에 착륙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미국의 바이킹 1호와 2호가 1976년 연달아 화성 착륙에 성공했다.     그동안 소저너, 오퍼튜니티, 스피릿 등의 탐사 로버가 성공적으로 화성 표면을 달렸고 지금은 큐리오시티와 퍼서비어런스, 중국의 주룽이 운행 중이다. 또 인제뉴어티란 이름의 드론이 대기가 옅은 화성을 날면서 각종 자료를 수집해서 보내기도 했다.     태양을 공전하는 여덟 개의 행성은 타원 궤도를 돌기 때문에 서로 떨어진 거리도 들쑥날쑥하다. 궤도 순으로 수성, 금성, 지구 순이어서 지구에서 보면 당연히 금성이 더 가까워야겠지만 실제로는 수성이 금성보다 지구에 더 가까울 때가 많다. 화성을 향하는 로켓도 아무 때나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자기의 공전 궤도를 돌다가 우연히 지구와 화성이 가까워질 때 발사해야 최단 거리를 날아서 도착한다. 지구에서 화성까지 두 행성이 가장 가깝게 위치할 때는 지구를 떠난 빛이 화성에 도착하는데 편도 당 3분 정도 걸리지만,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14분 정도 걸리는 큰 차이를 보인다.     화성의 중력은 지구의 약 ⅓ 정도 되므로 지구에서 몸무게가 75kg인 사람은 화성에서는 25kg 정도 나간다. 화성에는 옅은 대기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숨 쉴 수 있는 정도는 아니다. 화성 표면의 온도는 영하 140°C에서 20°C의 분포를 보여서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추운 곳이다. 화성 지각 깊숙한 곳에 대량의 물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너무 깊이 있어서 활용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전술한 모든 조건을 만족시킬 만한 시설을 갖춘다고 해도 화성에는 자기장이 없어서 태양에서 오는 해로운 방사선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화성 궤도 화성 표면 화성 탐사

2025.06.20.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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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씨앗 이야기

길가에 떨어진 작은 씨앗이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바람아 나를 날려 저 언덕 너머로 옮겨줄 수 있겠니? 그곳은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 비옥한 땅이거든. 나도 그곳에서 꽃피우고 싶어." 바람은 씨앗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래 남풍이 불 때 너를 안아 저 언덕 너머로 옮겨줄게." 며칠이 지나자, 남풍이 불어왔습니다. 씨앗은 그동안 허기와 추위로 부쩍 야위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안간힘을 쓰며 견디었는데 드디어 남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어깨를 펴고 다리를 한데 모으고 비상할 준비를 마쳤는데 바람은 씨앗을 언덕 너머로 옮겨주지 않았습니다. 밤이 다시 찾아왔고 설상가상으로 하늘에 온통 먹구름이 끼더니 굵은 빗방울이 밤새 쏟아졌습니다. 기진맥진 아침이 되어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엔 울퉁불퉁한 돌멩이들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리 받히고 저리 받히며 온몸엔 멍이 들어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넋을 놓고 큰 돌멩이에 기대어 있는데 바람이 지나가며 말했습니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너를 찾을 수가 없었잖아." “나는 너만 기다렸는데 밤새 쏟아진 비에 잠깐 정신을 잃었나 봐.” 미안함에 상처 난 얼굴을 붉히며 씨앗은 얼굴을 들었읍니다.   오늘도 씨앗의 꿈은 여전합니다. 언젠가 손바닥만 한 양지에서 꽃 한 송이 피워내기를 바랐습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끝까지 견디어내면 꼭 좋은 일이 자신에게 올 거라는 희망을 저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눈앞엔 어른거리는 따뜻한 양지가 포근하게 그려질 뿐입니다. 저녁노을 진 풍경이 눈에 비치고 들녘의 숨소리가 깊어질 때였습니다. 바람은 남풍을 몰고 와 나를 번쩍 안아 하늘로 나르더니 모두 깊이 잠든 언덕 너머로 나를 옮겨 주었습니다. 삐죽삐죽 올라온 들풀들 사이로 발을 뻗었습니다. 밀려오는 나른함과 행복감에 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적막과 고요함 속에 길들어 있던 씨앗은 마음 속에 들려오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세미한 음성의 주인은 햇빛이었습니다. “이제 꽃을 피울 수 있겠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찾아온 감사와 행복의 시간이 몰려왔습니다. 조금은 서툴어도 그 은혜의 시간에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행위보다는 내가 먼저 죽는 씨앗이 되기 위해 마지막 남은 내 양분을 뿌리로 뿌리로 내렸습니다.   진짜 행복은 지금부터입니다. 산산이 부서졌던 곳으로부터 작은 씨앗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어제와 다른 새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들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그 하루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우리는 누구입니까? 자신을 버려 싹을 내는 작은 씨앗 한 톨보다 못 한 인생이라면 우리의 모난 모서리는 얼마나 더 깎여야 하나요." 귀를 쫑긋 세우고 귀 기울여봅니다. 영혼의 봄날을 기다리는 당신에게 봄은 향기로운 몸짓으로 다가와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줄 것입니다. 그리고 불편했던 서로의 거리를 좁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작은 씨앗도, 부서지기 쉬운 우리도,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봄날도 정겹습니다. 이제 막 터질 듯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루가 모두에게 기적처럼 펼쳐진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모두에게 가슴 저미며 맞이해야 할 사실 아닌가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이야기 씨앗 이야기 적막과 고요함 시인 화가

2025.06.1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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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별자리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강아지 모양도 있고 토끼 모습도 보인다. 밤이 되면 셀 수 없이 많은 별이 반짝이는데 우리 조상은 마치 낮에 보이는 구름에 이름을 짓듯 밤하늘의 별끼리 연결해서 동물이나 신화 속 인물의 이름을 붙였다. 그렇게 전해져 내려온 별자리가 1928년 세계 각국에서 모인 천문학자들에 의해서 통일된 88개의 별자리로 정해졌다.   별자리(Constellation)는 한자로 성좌(星座)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카시오페이아는 그런 별자리 중 하나지만, 북두칠성은 별자리가 아니라 성군(星群)이다. 성군은 공식적인 별자리라기보다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별의 집단을 뜻한다.   북두칠성(Dipper)은 일곱 개의 별이 마치 국자 모양처럼 생겨서 이름 지어진 성군인데, 별자리란 북두칠성처럼 별과 별을 이어서 만든 사물의 모양이라기보다 그 천체가 위치한 지역을 의미한다. 네덜란드 레이던에서 열린 국제천문연맹 제3차 총회에서 지구 위에 펼쳐진 하늘을 동그란 구로 보고, 그 천구를 88조각 내어 각 부분에 이름을 붙여서 별자리로 확정했다. 한국에는 수많은 도시가 있는데 행정구역상 몇 개의 도로 나눴다. 경기도에는 수원, 광주 등 도시가 있다. '경기도 광주' 하면 쉽게 그 위치가 머릿속에 떠오르듯, '거문고자리 베가'라고 하면 천구의 어디쯤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베가는 우리말로 직녀성이라고 하는데 거문고자리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   별자리의 기원은 지금부터 약 5천 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추측한다. 2세기경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가 정한 48개의 별자리를 기본으로 시작하여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늘다가 20세기 초반에 국제천문연맹에서 88개를 정해서 국제적으로 사용한다.   지금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 사람들은 별의 움직임을 인간의 운명에 연관시켰던 까닭에 몇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천문학과 점성술은 크게 다르지 않은 학문이었다. 점성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별자리를 Zodiac Sign이라고도 한다.   별자리는 총 88개지만 지구상의 위치나 계절 때문에 한 곳에서 모든 별자리를 볼 수는 없다. 한국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별자리는 물뱀자리를 포함해서 11개이고, 일 년 내내 아무 문제 없이 볼 수 있는 별자리는 카시오페이아자리를 포함해서 6개다.   아주 옛날부터 별자리가 중요했던 이유는 항해 때문이었다. 변변한 과학 기재가 없던 옛날, 육지와는 달리 사방이 물인 바다 한복판에서 방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늘의 별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별자리 이름에는 나침반자리, 육분의자리 등 유독 항해 도구의 이름이 많이 차용되었다.   별자리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기 때문이다. 지구가 자전하는 까닭에 사실 가만히 있는 별들이 일주운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까닭에 별자리는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별이나 별자리도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면 그 위치가 변하지만, 사람의 시간 기준으로 볼 때는 고정되어 있다고 해도 큰 차이가 없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며 움직이기 때문에 별이 일주운동을 하고 별자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마치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별자리 이름 과학 이야기 과학 기재

2025.06.1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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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타운 클럽 전성시대, 그 뒷 이야기

이번 칼럼은 번외편이다. LA한인타운의 맛 대신 ‘흥’을 다뤄볼까 한다. 뜨거웠던 그 시절, LA 나이트클럽의 역사를 시간여행 하듯 함께 따라가 본다. 지금은 아련한 추억이 된 그곳들의 이야기다.   미국서 학교에 다닌 60대 한인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전설의 클럽은 1980년대 마리나 델 레이 바닷가에 위치한 ‘캡틴스 월프’다. 주말이면 한인을 비롯해 동양계 대학생들의 열정이 폭발하는 클럽이었다. 당시만 해도 각 대학 학생회에서 교내 식당을 빌려 하우스파티를 여는 곳이 고작이었던 터라 한인 젊은이들이 춤추고 놀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디스코 열풍이 지나고 춤에 목말라 있던 시대였기에, 그 열기는 말 그대로 상상을 초월했다.   비슷한 시기 타운 클럽을 이끌던 업소는 베벌리길의 ‘투모로우’였다. 밴드와 라이브 공연이 중심이었던 이 클럽은 ‘백바지’, ‘백구두’의 젊은 오빠들이 즐겨 찾았다. 현재는 윌셔길에 있던 ‘익스프레스 나이트클럽’이 이곳으로 이전해 ‘엑스프레스 가라오케’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1980년대 후반, 6가와 맨해튼 인근 지금의 ‘대도식당’ 자리에 유학생 선배들이 ‘탱고’라는 클럽을 열었고, 한참 후에 한국의 유명 무기상이 된 따님을 두신 사장님이 인수하여 ‘플라밍고’로 이름을 바꾼다. 이 따님은 2대 사장으로, 뉴욕에서 건너온 디자이너와 함께 파격적인 인테리어로 클럽을 대성공시킨다. 이 디자이너가 후에 전설적인 요구르트샾 ‘핑크베리’를 만든 고(故) 영 리씨다.   1990년대 타운은 바야흐로 나이트클럽 전성기를 맞았다. 선셋길에 한인 유흥업계를 대표하는 새로운 클럽 ‘아마존’의 등장이 그 시초를 알렸다. 이전까지의 한인 클럽들은 밴드와 가수가 있는 포맷이었지만, 아마존은 한국의 이태원 트렌드를 따라 DJ 중심의 클럽 문화를 도입하며 한인 DJ 나이트의 출발점이 됐다.   이후 한 투자가들이 윌셔길의 ‘록앤로빈’이라는 일본계 클럽을 인수해 플라밍고를 디자인한 영 리를 고용해서 ‘스팍스’라는 초대형 클럽으로 재탄생시킨다. 이후 이 클럽은 ‘벨벳룸’, ‘페리아’ 등으로 이름을 바꾸며 한인타운 최고의 클럽 자리를 이어갔다.   영 리가 디자인한 또 다른 클럽으로는 웨스턴길에 ‘르 프리베’가 있었다. 시연부페 자리로 2층 단독건물에 넓은 주차장까지 갖추고 이층에는 일층 댄스홀을 내려다볼 수 있는 VIP룸까지 갖춘 타운 최대의 시설이었다. 지금은 건물이 헐리고 대형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여피스’는 윌셔 선상에 있던 작고 어두웠던 흑인 클럽을 인수 후 대형 나이트로 확장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인테리어가 바뀔 때마다 여러 번 이름이 바뀌었지만 한참 동안 ‘카낙’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다가 건물 주와의 문제로 지금은 문을 닫았다.   ‘사가’는 여피스의 성공을 따라 윌셔와 옥스퍼드 길 코너에 오픈했다. 이후 ‘밸파레’라는 이름으로 리뉴얼되며 2층 천장 높은 공간과 입구의 기도(도어맨), ‘물갈이’ 시스템으로 최고의 클럽으로 등극했다.   2000년대 초반 선셋과 바인이 만나는 타워 20층에는 탁 트인 전망을 자랑하는 한인이 운영하는 ‘클럽 360’이 있었다. 이곳은 미국 유명 연예인들이 자주 드나들던 명소로, ‘클럽 란저리’를 포함해 LA 클럽계를 장악했던 이씨 형제가 운영했던 곳이다. 이들은 지금도 성업중인 타운 레스토랑 ‘황태자’를 일군 이들이다.   당시 타운 클럽 문화는 주류 신문에까지 등장했다. LA타임스는 2002년 7월25일자에 타운 클럽들을 소개하면서 웨이터가 여성손님을 끌어서 남성손님의 테이블에 앉히는 ‘부킹(Booking)’문화에 대해서 보도했다.   웨스턴길의 ‘카페 모네’는 카페에서 클럽으로 변신하며 ‘콤마 나이트클럽’이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로젠 브루어리’로 전환된다.   한편, 알바라도 인근 파크 뷰 호텔 안에 잠깐 등장한 ‘XOXO’는 짧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남겼다. 업계를 평정하자, 기존 클럽 업주들이 단합해 시의원과 로비를 벌여 결국 문을 닫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당 시의원은 이후 다른 비위로 구속됐다. 이 클럽은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영화 바디가드 속 아카데미 시상식장 촬영지로도 유명한 장소였다.   요즘 한인타운내 가장 핫하다는 ‘마마라이언’은 6가와 웨스턴 코너에 위치해 있다. 이름은 80년대 같은 자리에 있던 전설적인 클럽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과거 ‘식스애비뉴’, ‘줄리아나’, 그리고 ‘지직스’라는 이름으로 여러 클럽들이 영업했는데, 특히 지직스에서는 영화배우 니콜라스 케이지가 한인 웨이트리스를 만나 결혼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탄생하기도 했다.   현재 타운에서 유일하게 공연형 클럽 분위기를 유지하는 ‘테라코타’는, 원래는 윌턴 시어터 뒤풀이 장소로 유명했던 ‘클럽 아틀라스’였다. 한동안 문을 닫았다가 한인 운영의 레스토랑 ‘오퍼스’로 재오픈했고, 지금은 주말 중심의 베뉴형 클럽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다운타운의 히스패닉 베뉴인 ‘마얀스’ 옆에 생긴 한인 운영 클럽 ‘벨라스코’는 한때 최고의 공연장이었으며, 클럽 ‘익스체인지 LA’와 함께 동양인들의 성지로 떠올랐다. 팬데믹 직전, 글로벌 공연 기업 ‘라이브 네이션’이 인수하며 위기를 피해갔지만, 정작 라이브 네이션은 팬데믹으로 큰 타격을 입고 사우디 국부펀드의 구제 없이는 파산 직전까지 갔던 아이러니를 남겼다.   1990년대 정점을 찍고 서서히 쇠퇴했던 타운의 클럽 문화가 30여 년 만에 조금씩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문 닫혀 있던 클럽 자리에 대한 문의가 여기저기서 오고 있다. 타운의 ‘흥’은 부활할 수 있을까.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전성시대 이야기 익스프레스 나이트클럽 나이트클럽 전성기 한인 클럽들

2025.06.0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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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시공간 도표와 세계선

물리학에 세계선이란 말이 있다. 세계선이란 우리 개개인이 겪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한 선이라고 한다. 물리학 도표 중에 공간 좌표의 중심을 기준으로 위로 열린 원뿔과 아래로 열린 원뿔 모양의 그래프가 있는데 바로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도표이고 그 두 원뿔 안을 지나는 선이 바로 세계선이다. 헤르만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도표는 복잡하고 어려운 수식으로 이루어진 상대성이론의 설명을 돕는 데 유익하게 쓰인다.     러시아 태생 독일의 수학자였던 그는 유대인 혈통으로 스위스 취리히 연방 공과 대학교의 전신인 스위스 연방 폴리테크닉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어느 날 그의 강의실에 문제아가 한 명 들어왔는데 그와 같은 유대인이었다. 동병상련하는 유대인이란 신분 때문에 그 학생에게 잘 해주려고 했지만, 그 문제 학생은 아예 수업을 밥 먹듯 빠졌으며 시험은 홍일점이던 같은 과 여학생 노트를 빌려서대충 때웠다. 그는 자기가 좋아하는 물리학만 열심히 공부했고 수학 같은 기타 과목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학 담당 교수였던 민코프스키는 그 막돼 먹은 학생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러다 응징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 불량 학생은 졸업 후 취직에 필요하다며 몇 번 교수 추천서를 원했고, 민코프스키 교수는 그런 학생에게 추천서를 좋게 써 줄 수 없었다. 담당 교수 눈 밖에 난 그 졸업생은 취직을 못 한 채 학교를 마치고도 거의 2년 동안 빈둥거리며 놀자, 이를 보다 못한 한 친구가 자기 아버지를 졸라서 특허청에 심사관으로 낙하산 취직을 시켜주었다. 별 볼 일 없는 한직이어서 여유 시간이 많이 생기자 자기 연구에 열중할 수 있었다.     뒷문으로 들어온 직장에서 이 특허청 심사관은 틈틈이 개인적으로 연구했던 '운동하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논문을 본 민코프스키 교수는 몹시 놀랐다. 그 논문의 저자는 자기가 가르친 적이 있던 그 문제 학생이었고, 추천서를 나쁘게 써 줘서 취직을 못 했던 그 애송이의 논문은 자기도 평생 걸려 연구했던 똑같은 주제를 다룬 글이었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모르는 채 같은 것을 연구했다. 민코프스키 교수는 이미 자신의 논문을 완성해 놓고도 명색이 수학자여서 그랬는지 수식을 조금 더 다듬어서 발표하려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덜컥 제자에게 추월당했다.   하지만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우선권이나 자기 몫을 주장한다거나 어떤 속상한 감정도 접어두고 제자의 논문을 축하해 주었다. 그 후에도 그는 학회에서 자기 논문의 주제인 '상대성 원리'에 관한 강연을 했고, '공간과 시간'이란 주제의 글을 학회지에 발표하기도 했는데, 정작 논문을 먼저 발표했던 제자는 그 후 3년이 지날 때까지도 논문 제목에는 상대성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논문 제목에 상대성이란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는 조언을 했지만, 정작 본인은 상대성이란 말 이면에는 절대적이 아닐 수 있다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므로 상대성이란 표현을 사용하기 꺼렸다고 한다. 하지만 논문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의 첫 번째 논문은 특수상대성이론, 두 번째 논문은 일반상대성이론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고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인슈타인도 두 번째로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자신의 수학적 이론을 기하학적으로 도식화하여 어려운 이론을 이해하기 쉽게 도움이 된 은사 민코프스키의 시공간 도표에 찬사와 함께 깊은 감사를 표했다고 한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시공간 도표 민코프스키 교수 물리학 도표

2025.06.0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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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별이 될 뻔했던 목성

지나버린 일에 만약이란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지만, 그래도 만약에 목성이 훨씬 더 크고 무거웠더라면 수소 핵융합을 하는 별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목성은 태양계의 여덟 행성 중 가장 크고 무거운 천체로 밤하늘에서 달, 금성 다음으로 밝게 빛난다. 덩치가 큰 목성은 태양과의 무게 중심이 태양 내부에 있지 않고 태양 표면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엄밀히 따지면 목성은 태양을 직접 공전한다기보다 두 천체가 서로의 무게 중심을 기준으로 돈다는 편이 옳다.     태양계의 행성 중 수성, 금성, 지구, 화성이 암석 행성이라면 목성과 토성은 기체 행성이고 천왕성과 해왕성은 얼음 행성으로 분류한다. 목성의 대기는 대부분이 수소이고 나머지는 헬륨, 그리고 극소량의 다른 기체로 이루어져 있다. 목성에서 지금까지 95개의 위성이 발견되었는데 처음 4개는 갈릴레이가 자신이 개량한 망원경으로 발견했기 때문에 갈릴레이 위성이라고 부른다.     갈릴레이는 1610년 목성 근처를 맴도는 덩치 큰 4개의 위성을 발견했는데 이오,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다. 그 중 가니메데는 목성의 형제 행성인 수성보다 더 크다. 목성의 위성 발견은 당시 막 태동한 지동설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무렵 유럽은 하나님이 만든 우주의 중심은 우리가 사는 지구이고, 해와 달을 비롯한 모든 별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는데 목성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천체의 발견은 그런 전통적인 천동설에 어울리지 않았다.     삼라만상은 별이 생을 마감할 때 폭발하면서 우주 구석구석으로 흩뿌린 92개의 기본 원소로 만들어진다. 사람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런 원소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살다가, 죽으면 다시 기본 원소로 환원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태곳적부터 우리가 하늘을 동경했던 이유는 본향으로의 귀소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 기술이 어느 수준에 오르며 우리는 지구 밖 천체인 달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이제는 화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조만간 화성에 지구 식민지를 건설할 예정이고, 우리의 별인 태양 밖의 다른 항성계까지 넘보고 있다. 빛조차 4년 넘게 가야 하는 알파 센타우리 항성계는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어서 그나마 시도를 해볼 만하다.   우리의 과학 기술 수준으로 현재 태양계를 빠져나가는데 반백 년이 걸린다. 그래서 우선 태양계 안을 샅샅이 뒤져서 지적 생명체를 찾으려고 했지만, 지금까지 내린 결론은 태양계 안에는 우리 말고 다른 지적 생명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균이나 미생물이라도 좋으니 생명체가 있기는 한지 궁금했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다. 약 5AU, 그러니까 지구에서 태양까지 거리의 다섯 배나 되는 목성까지 약 6년을 날아갈 탐사선 클리퍼를 발사했다. 유로파는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 밖에 있으므로 얼음으로 뒤덮인 위성이다.    그런데 얼마 전 얼음 표면 아래 바다가 있을 것이란 연구 결과가 나왔다. 목성을 공전하는 갈릴레이 위성들의 섭동 작용 때문에 생긴 마찰열 때문에 얼음층 아래에 액체 상태의 바다가 있다. 게다가 얼음 표면을 뚫고 간헐천처럼 솟구치는 물줄기를 분석했더니 염분도 있다고 하니 지구의 바다와 비슷할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물고기는 없더라도 미생물이나 플랑크톤 정도는 서식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찬 생각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 바다에서 지구 밖 생명체와 처음으로 만날지도 모르는 순간에 와 있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목성과 토성 목성 근처 현재 태양계

2025.05.30.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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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역설적 이야기

텃밭에 심은 복초이가 배추만큼 커졌다. 올해는 왜 이토록 실하게 자라냐고 남편에게 물었더니, 이른 봄에 닭똥과 소똥을 주었다고 한다. 매일 아침 나오는 계란 껍질과 커피 찌꺼기도 썩혀서 같이 주었다고 하니, 역설적이지만, 배설물과 썩은 물질에서 생명이 쑥쑥 자란다는 말이 된다.     ‘오물에서 생명이 자란다.’ 그런데 이 모순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인간의 배설물에서 인간이 자란다는 블랙 코메디를 쓴 작가가 있다. 정보라 작가의 『머리』라는 제목의 단편이다. 친구는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다. 요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반박했다. “소재가 신선하잖아. 본업은 작가고 취미가 시위하러 가는 거래.” “그래서 글이 그 모양이구나.” 친구의 혹평은 끝이 없었다. 작가는 시간 강사로 십 년을 일했던 자신의 모교를 고소했다. 이유는 부당 노동 착취다. 약자가 당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오랜 법적 투쟁을벌여서 승소했다.     지금 친구와 논쟁하고 있는 이야기는 나도 처음 읽고 나서 말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내용인즉슨, 변기에서 매일 버린 오물에서 생명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어느 날, 젊은 여자가 변기에서 자라는 머리 비슷한 오물을 보고 기겁한다. 그 머리처럼 생긴 것은 가끔 변기 속에 나타나더니, 몇십 년 동안 자라서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 다 자란 오물은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른다. 여자는 질색한다. “내가 왜 너의 어머니냐? 나는 너 같은 것을 낳은 적이 없다.” “아닙니다. 저는 어머니 몸에서 나온 것을 매일 먹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저의 어머니입니다.” 형상을 갖춘 오물이 어느 날 변기에서 걸어 나왔다. 자세히 보니, 여자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여자의 몸은 이미 늙어 있었다. 가늘어진 머리칼과 거칠어진 피부를 보며 늙음을 한탄하는데,  자신의 젊은 모습이 변기 속에서 나왔다. 여자가 매일 내놓은 오물을 먹고 자란 여자는 아름답다. ‘젊은 여자’는 발버둥 치는 늙은 여자를 변기에 밀어 놓고, 변기 물을 내리고 뚜껑을 닫는다. 늙은 여자의 옷을 대신 입고 화장실을 빠져나간다.     정보라 작가가 대학에 다닐 1990년대 한국 사회는 괴담이 많이 떠돌았다. 어느 백화점 지하 화장실에 가면 여자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는 귀신은 마당 구석에 있는 변소에서 나온다고 했다. 밤에 화장실 가려고 시커먼 마당을 가로질러 변소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머리털이 곤두서곤 했었다. 그때는 변소 밑에서 손이 나타나서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한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집에 출몰하던 여자 귀신이 현대 사회로 진화한 다음에는 공공장소인 백화점으로 옮겨갔나 보다. 한국인의 무속 및 민담은 시대가 지나도 본질은 여전히 같다는 점이다. 작가의 ‘저주토끼’라는 단편집은 2022년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2023년에는 전미도서상을 수상했다. 외국에서 먼저 알려져서 국내에서 뒤늦게 인정을 받은 경우다.     우리는 젊음에서 늙음으로 가는 몇십 년 동안 먹고 처리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연인들은 분위기 좋은 식당을 찾고, 자식은 고심하여 선택한 식당에서 부모님을 대접한다. 일상과 경사의 중심에는 음식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맛있게 먹었던 음식은 어디로 가는가. 다음 날 아무도 모르게 화장실에서 혼자 처리한다. 축제의 중심에 있었던 음식의 후처리 과정에서 간혹 눈살을 찌푸리기도 한다. 단편에 등장하는 여자는 젊은 시절을 대충 살고 나서는 순식간에 젊음이 사라졌다고 허무해 한다. 그녀의 젊음은 어디로 갔는가? 빠져나간 오물 사이로 소비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나타난 생명을 적대시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봄에는 유달리 비가 많았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고 불평하면 남편은 반대로 말한다. “올해는 대박 날거야.” 하면서 비를 귀한 손님처럼 반긴다. 비가 닭똥과 소똥을 땅속으로 깊이 넣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텃밭의 복초이는 배설물과 썩은 것을 먹고 오늘도 쑥쑥 자란다. 김미연 / 수필가이 아침에 이야기 역설 역설적 이야기 여자 귀신 가면 여자

2025.05.29. 17:39

‘이유없는 반항’, 문제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

‘이유 없는 반항’(A Rebel Without a Cause, 1995)은 전후 미국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그에 따른 사회 전반의 불안함, 그리고 미국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세대 갈등과 청소년들의 정체성 혼란 등을 섬세하게 담아낸 심리극이다.     제임스 딘의 대표작이자 청춘 영화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이 영화는 단순한 10대들의 이야기가 아닌, 1950년대 당시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젊음의 불안과 고뇌를 강렬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평가된다.     ‘이유 없는 반항’은 제임스 딘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세련된 연출이 어우러져 시대를 초월한 감동을 전하는 작품으로 영화사에 남아 있다. 영화는 중심 인물인 짐 스타크(제임스 딘)를 통해 부모 세대와의 단절, 소속감의 부재, 남성성의 혼란 등 1950년대 청소년들의 고뇌, 어린 정서를 대변하면서 무의미한 경쟁 사회 속에서 젊은 세대가 느끼는 절망감을 잘 포착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얼핏 보면 문제 청소년들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은 문제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다. 자녀들에 대한 무관심, 이기심, 독단, 요란스러움, 권위 등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가정 내에서 힘겹게 자신을 지키고 살아가야 하는 가엾은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영화 제목과는 다르게 영화에 등장하는 청소년들은 모두 이유 있는 반항을 하고 있다. 부모들의 사랑 결핍, 사회의 부조리 등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이유 없는’ 반항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영화가 단순히 젊은이들의 일탈을 그린 것이 아니라, 기성세대의 책임과 사회 구조적인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청소년들의 방황은 언제나 대화와 소통이 막혀 있는 부모의 무관심에서 기인한다. 들여다보면 부모들의 문제인데 마치 아이들의 문제인 양 비추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유 없는 반항’은 70년이 지난 오늘의 부모 세대들에게도 일침을 가한다.     짐(제임스 딘)이 어느 날 술에 만취해서 경찰서에 끌려온다. 그곳에서 존(살 미네오)과 주디(나탈리 우드)를 만난다. 동시에 경찰서로 연행된 이 세 청소년에게 과연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짐은 사고를 자주 쳐서 그때마다 짐의 부모는 이사한다. 이사 첫날 경찰서에 끌려온 짐은 다음 날 첫 등교에서 전날 경찰서에서 본 주디가 이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알아차리고 다가오는 짐에게 주디는 쌀쌀맞다. 이를 멀리고 지켜보고 있는 학교의 불량배들.     짐은 플라톤이라는 별명의 존과도 재회하고 존이 왕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친해지는 짐과 존, 깊어가는 그들의 우정!     패거리의 두목 버즈가 짐에게 시비를 건다. 짐은 버즈에게 용감하게 맞서며 버즈에게 굴욕감을 안겨준다. 결국 둘은 절벽으로 차를 몰고 돌진하다가 차에서 먼저 뛰어내리는 자가 패자가 되는 ‘치킨 런’ 게임에 돌입한다. 이 순간 짐에게 오히려 호감을 느끼는 버즈, 하지만 옷이 걸려 차에서 뛰어 내리지 못하고 추락사를 당하고 만다.     죄책감에 경찰서로 가지만 짐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경찰관. 버즈와 친하게 지내던 주디 또한 충격을 받지만 짐의 진심을 알게 되면서 그에게 마음이 끌린다. 둘은 존이 알려준 빈집으로 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존은 버즈의 패거리들이 짐에게 복수할 것을 알고 그걸 막기 위해서 총을 들고 집을 나선다. 천문대에서의 존과 경찰의 대치, 그리고 안타까운 결말.     단 하루 동안 일어나는 짧은 시간의 긴 이야기에 영화를 본 어른들은 하루 동안 그렇게 많은 사건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했다. 만약 버즈의 죽음 이후 짐이 경찰서를 찾아갔을 때 담당 형사가 약속한 대로 짐의 고민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면 존의 죽음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대중들 사이에서 많이 회자했다.     제임스 딘은 짐 스타크라는 캐릭터를 통해 부모와의 갈등, 학교에서의 외로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 등 문제 청소년이 지닌 다양한 감정과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딘은 이 영화 이후 반항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의 불안하고 고독한 눈빛, 거칠면서도 여린 내면 연기는 당시 젊은 관객들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짐은 부유한 가정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술과 칼싸움에 몰두해 있다. 나약한 아버지에 대한 실망, 심술궂은 어머니에 대한 반항 등 그 나름의 ‘이유 있는’ 반항이었다. 그런 짐의 모습은 청년기의 단순한 방황이 아닌 자신의 존재 확인에 대한 강렬한 몸부림의 표현으로 대중들에게 전달됐다. 부모와 단절된 삶을 사는 존과 주디도 마찬가지다. 존은 부모로 인하여 정신질환 증세마저 보인다. 아버지의 무관심에 주디는 가출을 해버린다.     비교적 작은 키의 제임스 딘은 이 영화 한편으로 ‘삐딱한 청년’역에 죄적화된 배우로 각인된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죽음이 그를 더욱 신화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강렬한 색감의 활용, 불안정한 카메라 움직임, 그리고 상징적인 미장센 등으로 젊은이들의 불안한 심리를 적절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치킨런 자동차 경주 장면과 영화의 장면과 실제 장소, 자연경관이 지금도 거의 동일한 그리피스 천문대에서의 대치 장면은 아직도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레이 감독은 50년대 이전 영화가 외면했던 10대들을 드라마 중심에 등장시켜 대성공을 거두며 주목받았지만 ‘왕중왕’, ‘북경의 55일’ 등 이후 연출한 대작들은 대부분 실패에 그쳤다.     옆집에 사는 가출 소녀 주디 역의 나탈리 우드와 짐을 향한 희생적 우정으로 깊은 감동을 준 ‘버림받은 소년’ 존 역의 살 미네오는 각기 아카데미상 조연상 후보로 올랐고,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각본상을 받았다.     일부 평론가들은 영화의 극단적인 상황 설정이나 다소 작위적인 결말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보였다. 또한,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내용과 연출 스타일 때문에 대중적인 호응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의 진가가 재평가되었고, 오늘날까지 청춘 영화의 대명사격으로 그 위상을 지키고 있다.   이 작품이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회자하는 이유는 반항 자체를 낭만화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그 근원적 정서를 이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짐과 친구들의 탈선을 사랑받고 이해받기를 원하는 그들의 절박한 절규로 그렸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이야기 반항 문제 청소년들 부모 세대들 청춘 영화

2025.05.2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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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타운 맛따라기] LA 곱창 이야기

곱창은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소의 내장을 버리지 않고 활용했던 지혜로운 음식이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귀중한 재산이자 노동력이었기에, 소 한 마리를 잡으면 살코기는 물론 내장까지 버릴 것 없이 모두 요리에 활용했다. 특히 곱창은 소의 부산물 중에서도 맛과 영양이 뛰어나 서민들의 귀한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도 곱창을 이용한 요리를 즐겼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탕이나 전골, 구이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곱창의 특징이자 호불호가 갈리게 하는 원인 중 하나가 곱창 속에 차 있는 쫀득쫀득한 액체다. 그 정체는 소장 안에 남아있는 수분, 지방과 소화액의 덩어리다. 신선한 곱창은 소의 종류나 품질에 상관없이 곱이 두툼하게 차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도축 후 시간이 오래 지났거나 냉동한 곱창은 곱이 잘 차오르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곱의 양이 곱창의 품질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소의 장은 부위별로 이름과 식감이 다르다. 곱창은 소의 소장으로, 안에 들어있는 ‘곱’이 고소하고 진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대창은 소의 대장으로 지방이 많아 부드럽고 기름진 맛이 일품이다. 막창은 소의 네 번째 위로 다른 내장 부위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 쫄깃쫄깃한 식감이 매력이다. 특양은 소의 첫 번째 위 중 살이 붙은 양질의 부위를 말한다. 쫄깃함과 은은한 고소함으로 미식가들에게 사랑받는다. 이처럼 곱창은 다양한 부위의 매력을 한 번에 즐길 수 있어 술안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LA 한인 이민사에서 곱창집 역시 한인들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얼큰한 곱창전골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타지에서의 어려움을 잊고, 고향의 맛과 분위기를 느끼며 위로를 얻는 곳이다. 특히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곱창집은 낯선 땅에서 삶의 활력을 되찾는 안식처 역할을 했다.   한때 LA 곱창집은 ‘양마니’, ‘별곱창’, ‘아가씨곱창’의 3파전이 치열했다. 올림픽길에 위치했던 양마니는 한국 유명 곱창 브랜드의 직영점으로 시작하여 한인 사장 인수 후에도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4가와 웨스턴, 옛 ‘풍무’ 자리에 확장 이전하여 성업 중이며, 롤랜드하이츠 지점 또한 운영되고 있다.   한때 6가 일대를 장악했던 곱창 브랜드는 별곱창과 ‘별대포’였다. 특히 드럼통 테이블이 놓인 대폿집 스타일의 별대포는 주당들의 아지트로 불렸으나, 건물 재개발로 문을 닫았다. 현재는 별곱창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아가씨곱창은 원래 강호동 백정의 서브 브랜드로 출발했으나, 한국 본사와의 계약 종료 후 독자적인 브랜드로 운영되고 있다.   여기에 올림픽길의 ‘연발탄’, 8가의 ‘마장동곱창’까지 가세하며 곱창 전성시대를 이뤘다. 하지만 현재는 상당수 가게가 문을 닫고, 양마니, 별곱창, 왕창, 아가씨곱창 네 곳이 LA 곱창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송학’ 또한 한때 LA 전역을 휩쓸었던 곱창 브랜드다. ‘학산’으로 시작하여 아티시아, 어바인, LA 웨스턴길, 샌디에이고까지 확장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상호를 변경했으며, 송학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곳은 샌디에이고 지점뿐이다. 송학 사장은 이후 ‘X-Fish’라는 무제한 스시집과 ‘강남스테이션’ 무제한 바비규로 브랜드를 전환하며 외식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고 있다.   LA 6가에 자리했던 학산은 현재 다른 고깃집인 ‘대성로’로 바뀌었으며, 학산 본점은 토런스에 한 곳 남아 있다. ‘왕창’은 학산 출신으로, 현재 부에나파크와 LA 6가에서 성업 중이다. 이들 곱창집의 원조 격인 학산은 아가씨곱창 주방장 출신 사장이 개척한 브랜드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곱창의 역사는 지금도 LA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라이언 오 / CBC 윌셔프로퍼티 대표K타운 맛따라기 이야기 곱창 곱창 브랜드 곱창 전성시대 la 곱창

2025.05.26.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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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오월이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

“파-란 하늘 아래 언덕에서 우리들이 즐겁게 노래부르면 하늘을 포르르 날아가는 종달새들도 좋아라 노래부른다.”   어린 시절 입가에 맴돌던 이 동요 가락이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문득 귓가에 생생하게 다가온다. 5월의 푸른 하늘 아래, 언덕 위에서 뛰놀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이 맑은 노랫소리는 울긋불긋 만개한 온갖 꽃들과 힘차게 비상하는 바다새들처럼 아름답고 활기찬 삶에 대한 갈망을 일깨운다. 비록 작금의 국정 혼란으로 마음 한편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찬란하게 도래한 이 아름다운 5월을 외면하고 침묵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이 계절의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복잡한 현실을 잠시 잊고 희망을 노래할 힘을 얻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느덧 하얀 은방울꽃이 소담스럽게 피어나는 5월이 우리 곁에 다가왔다. 한 해의 다섯 번째 달인 5월(May)의 어원은 ‘인생의 봄’ 또는 ‘봄꽃을 따다’라는 뜻을 지녔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 5월은 그 자체로 봄날의 절정이며 아름다움의 상징이니, 어찌 이를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5월은 푸름의 계절이다. 눈 시리도록 맑은 하늘도, 생명력 가득한 땅도, 넘실거리는 바다도 온통 푸른빛이다. 이 생동하는 푸른 5월은 새싹처럼 피어나는 어린이들의 세상인 동시에, 넉넉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사랑을 기리는 달이다.   5월의 아름다움은 시각뿐 아니라 청각으로도 다가온다. 청아하게 지저귀는 새소리, 만개한 꽃들의 향연, 그리고 화사하게 단장한 이들의 모습까지. 이 아름다운 계절에 문득 잊히지 않는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바로 ‘메이플라워(Mayflower)’이다. 5월에 피는 꽃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향했던 이들의 배 이름으로 더욱 친숙하다. 이 배에 올랐던 신앙 선조들이 먼 훗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뿌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메이플라워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아름답고 의미 깊은 5월에는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나고, 굵직한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에서 5월은 어떤 발자취를 새겼을까. 한국 최초의 아동문학가이자 ‘어린이‘라는 존칭을 처음 사용한 방정환 선생은 1922년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며 이 땅의 아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선물했다. 그의 뜻을 기리며 이때부터 매년 5월 5일은 온 국민이 어린이를 기념하는 날이 됐다. 또한 한국 최초의 예술가곡으로 평가받는 ‘봉숭아’를 작곡한 홍난파 선생은 이 곡을 발표한 지 4년 뒤인 1924년 5월, 중앙기독교회관에서 직접 바이올린 연주로 대중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선보였다.   5월의 정취는 예술을 통해서도 깊어진다. 문득 요하네스 브람스의 자장가 선율이 귓가에 맴돌았다. “잘 자라 내 아기 내 귀여운 아기, 아름다운 장미꽃 너를 둘러 피었네. 잘 자라 내 아기 밤새 편히 쉬고, 아침에 창 앞에 찾아올 때까지.”   5월에 태어난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떠올려본다. 서양 음악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의 이름은 물론, 그들보다 후대에 활동한 독일의 요하네스 브람스가 1833년 5월 7일에 태어났고, 놀랍게도 러시아 음악의 위대한 별 피터 차이콥스키 역시 1840년 같은 날에 세상의 빛을 봤다. 이 외에도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만든 어빙 벌린(1888년 5월 11일, 미국) 등 5월은 음악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이름들을 많이 품고 있다. 윤경중 / 연세목회자회 증경회장열린광장 이야기 요하네스 브람스 서양 음악사 이름 하나

2025.05.12.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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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중성자

물질의 가장 최소 단위는 원자라고 배웠다. 지금은 과학이 더 발달해서 원자보다 더 작은 입자를 다루는 입자물리학 시대다. 물질을 계속 쪼개면 궁극에는 입자 직전의 원자 상태가 된다고 한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 톰슨이란 과학자가 전자를 발견했다. 고전역학적인 관점에서 전자는 입자처럼 취급되지만, 양자역학적으로 보면 전자는 부피가 없다. 그런 전자는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갖는 것처럼 행동한다.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톰슨의 제자였던 러더포드는 실험을 통해 원자 속에 아주 단단한 양전하를 띠는 것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는 원자의 모습이 스승이 발견했던 전자(음전하)가 양전하를 갖는 원자핵의 주위를 마치 지구 같은 행성이 태양을 공전하는 것과 같은 구조일 것으로 생각했다.   19세기에 여러 원소가 발견되었고 러시아의 멘델레예프는 그들 사이에 어떤 규칙이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원소주기율표를 만들었는데 그 때문에 나중에 한국의 수험생들이 입시 준비를 하려고 주기율표를 외우느라 엄청 애를 먹었다.     처음에는 원소의 질량에 따라 그 화학적 성질이 달라지는 데 착안하여 주기율표의 새 원소 자리를 채워나갔지만, 곧 원자 속에 들어있는 양성자의 수에 의해서 다른 성질의 원소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양성자가 두 개인 헬륨 원자핵의 질량이 양성자가 한 개인 수소 원자핵 질량의 4배나 된 것이다. 핵 주위를 공전하는 전자는 양성자 질량의 2천 분의 1 정도여서 무시해도 됐는데 헬륨의 질량이 수소의 2배가 아니라 실제로는 4배나 되었기 때문에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원자핵 속에 양성자와 무게가 거의 같고 전하가 없는 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바로 중성자였고 중성자의 발견은 핵에너지 시대를 열었다. 중성자가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러더포드의 제자였던 체드윅은 1932년에 드디어 전하는 없지만, 양성자와 질량이 거의 비슷한 중성자를 발견했다. 중성자는 항상 양성자와 짝이 되어 행동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중성자는 원자핵 속에 있을 때는 양성자와의 핵력에 의해서 안정되지만, 핵 바깥에 있는 자유 중성자는 곧 깨져버린다. 이를 '베타 붕괴'라고 하는데 중성자는 깨지면서 양성자, 전자, 그리고 중성미자가 되고 그렇게 생긴 양성자와 전자가 결합하여 수소 원자가 된다. 이로써 최초의 물질인 수소 원소가 등장했다. 물론 핵 속에 중성자가 없는 것은 경수소인데 우주에 흔한 수소 대부분이 경수소다.   입자물리학에서 보면 중성자는 위(up) 쿼크 한 개와 아래(down) 쿼크 두 개로 되어 있지만, 양성자는 두 개의 위 쿼크와 한 개의 아래 쿼크로 되어 있으므로 핵을 이루는 양성자와 중성자는 각각 세 개의 쿼크 입자 조합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은 쿼크와 그리고 핵 주위를 공전하는 전자라는 입자로 되어 있는 셈이다.     동위원소란 원자핵 속의 양성자와 핵 주위의 전자는 같은 개수인데 핵 속의 중성자 수가 달라서 그 원소와 화학적 성질은 같지만, 질량이 다른 원소를 말한다. 그중 방사성을 띠는 탄소동위원소의 질량이 반으로 줄어드는 시간, 즉 반감기를 이용하여 사물의 나이를 측정할 수 있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중성자가 연쇄 자유 중성자 양성자 전자

2025.05.0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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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지구 탈출

세상의 모든 것은 돈과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3차원이라는 물질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우스운 얘기지만 돈이 없으면 함부로 죽지도 못하는 세상이다. 돈 들어가는 일 중 우주 탐사만큼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은 또 없다. 그런 우주 탐사 비용 중에서도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은 지구 탈출에 드는 돈이다.     지구 중력이 없다면 사람을 포함해서 지상의 모든 물체는 공중으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지구 중심에서 잡아당기는 중력 때문에 산, 바다, 자동차, 사람, 심지어는 연필 한 자루까지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게 고마운 힘이기는 하지만 우주로 향하는 로켓이 지구 중력권을 벗어나려면 중력을 이기는 더 큰 힘을 내야 하는데 만만찮다. 로켓이 무거울수록 당연히 더 많은 연료를 소비해야 지구의 중력을 거스를 수 있다. 지금까지는 그런 발사체를 한 번 쓰고 버렸지만, 꾸준히 연구하고 개발하여 앞으로는 몇 번 더 쓸 수 있게 되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떠있는 하늘을 보면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거칠 것 없이 날아가서 금방 달에 도착할 것 같은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엄청난 연료를 태워서 일단 하늘 높이 오른 우주선은 인공위성처럼 지구 궤도를 따라 몇 바퀴 돌면서 나중에 찌그러진 타원 궤도를 만들어 도는 척하다가 힘을 받아 지구의 중력을 벗어난다. 그렇게 하면 여행 시간은 조금 더 걸리더라도 연료를 아껴 훨씬 적은 비용으로 지구를 떠날 수 있다. 달에 도착해서는 그 반대로 달 궤도를 따라 돌며 속력을 줄이다가 어느 순간 달의 중력을 이기며 착륙한다.   과학자들은 지구 탈출을 쉽고 싸게 하려고 추진 로켓을 재사용하는 연구를 진행하면서 동시에 다른 기상천외한 방법도 고려 중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 보면 지상에서 지구의 정지 궤도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나온다. 영화니까 그렇지 지상에서 8만km나 되는 높이까지 엘리베이터를 운용한다는 것은 사실 현대 과학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얼마나 먼 거리냐면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약 230배나 되는 거리, 아니 높이다. 그나마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땅에 구조물을 설치하므로 가능할지 모를지만 그냥 공중으로 엘리베이터를 올려보내는 것은 암만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이 조금 더 발달하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런 얼토당토 않은 계획을 계속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지구 탈출 비용면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상상 속 이론적인 단계에 지나지 않지만, 기술적인 문제만 해결한다고 시작할 수도 없다. 테러나 태풍에 의한 손상이나 그 결과 야기되는 위험도 그냥 지나칠 수 없고,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쓰레기와 충돌할 수도 있어서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자본이 있다고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무중력 상태에서 중력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고 반대로 UFO처럼 중력을 상쇄하는 장치를 만들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한다. 벼락이 치면 하나님이 노해서 그런 줄 알던 우리는 지금 전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백 년 전에 비록 소설이지만 대포알을 타고 달나라에 가던 상상을 하던 우리였지만 벌써 달에 발을 디뎠다. 유전자를 조작하여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세상에 할 수 없는 것이 과연 있을까?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지구 중력권 지구 탈출 지구 궤도

2025.05.0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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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탐사선 클리퍼

우리가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성에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금성은 미국의 플로리다주 정도의 기온일 것이라는 추측을 할 정도였다.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의 순진한 기대는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금성의 표면은 고온과 고압, 그리고 엄청난 이산화탄소 때문에 지옥과 같은 환경이고 화성에는 우리 탐사 로버가 굴러다니기 시작하자 화성인들이 꼭꼭 숨어버렸는지 아직 아무런 생명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태양계 안에서 그나마 지구와 가장 가까운 두 행성이 이 정도니 더 멀리 떨어진 행성에 생명체의 존재는 기대할 수도 없다. 1977년에 지구를 떠난 보이저 1호는 47년을 쉬지 않고 날아서 막 태양계를 빠져나갔다. 그 상태로 약 7만 년을 더 날아야 우리로부터 가장 가까운 항성계에 도착한다니 태양계 바깥을 넘보기는 당장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태양 주위에는 지구를 포함해서 총 8개의 행성이 있지만, 지구 말고는 그 어느 행성에서도 생명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양계 밖에 눈을 돌릴 형편이 안 되자 과학자들은 태양계 행성을 공전하는 위성으로 관심을 돌렸다. 처음에는 토성의 위성인 엔켈라두스에 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시작했으나 거리상으로 토성보다 가까운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를 먼저 뒤지기로 했다. 유로파는 태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표면이 두꺼운 얼음층인데 그 틈에서 수증기가 솟구친다. 유로파의 크기는 지구의 달보다 조금 작지만, 지구 위에 있는 물의 양보다 거의 두 배 정도나 되는 물을 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구는 표면의 7할 이상이 물이기는 하지만 지각 위에 얕게 깔려 있으므로 물의 총량에서는 유로파가 훨씬 많다. 물에 염분이 포함된 사실도 알아서 해양 생명체의 존재가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2024년 10월에 발사된 유로파 탐사선 클리퍼는 5년여 비행 후에 목성 궤도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번에는 유로파에 착륙하지 않고 그 대신 25km 근처까지 가깝게 접근하여 비행하면서 유로파를 관찰할 예정이다. 무엇보다도 간헐천처럼 수증기를 내뿜는 곳을 지나며 샘플을 확보한 후 탑재된 장비로 분석하여 결과를 지구로 보낼 것이다. 클리퍼 탐사선의 가장 주된 임무는 유로파 표면의 두꺼운 얼음층 아래에 존재하는 바다에 생명체가 존재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태양계의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 밖에 있어서 물이 있다고 해도 얼음 상태로 존재할 줄 알았는데 거대한 목성의 중력으로 생긴 조석 마찰력으로 내부의 얼음은 녹아서 액체 상태 바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과학자들은 태양 빛이 닿지 않는 지구의 해저 깊은 곳에서 열수구라는 곳을 발견했고 그 주위에 태양에서 나오는 에너지와 관계없는 생명체가 있으며, 심지어는 먹이사슬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에너지의 원천은 오직 태양인 줄 알았는데 심해 바닥에 지열을 이용한 생명체가 발견된 후로 우주 생명체 탐사의 범위가 넓어졌다.   유로파 탐사선 클리퍼는 계획된 4년 임무를 끝내면 혹시나 유로파에 있을지도 모르는 생태계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목성의 다른 위성인 가니메데나 칼리스토에 충돌시켜 임무를 마칠 예정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구 밖 생명체와 대면할 전야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탐사선 클리퍼 클리퍼 탐사선 유로파 탐사선

2025.04.2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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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의 과학 이야기- 태양의 이웃 별

밤하늘에 반짝이는 모든 별은 우리 은하인 은하수 안에 있는 별이다. 다른 은하까지는 너무 멀어서 가장 가깝다는 안드로메다은하도 비록 그 크기가 은하수의 두 배 정도 된다지만 우리 눈에는 별 하나 반짝이는 정도로 보일 뿐이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는 맨눈에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의 태양도 은하수에 산재한 그런 별 중 하나인데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별은 삼중성계인 알파 센타우리에 있는 프록시마 센타우리라는 별이다. 여기서 삼중성계라고 하는 말은 별 세 개가 서로의 중력에 끌려 마치 중심에 별 하나 있는 것처럼 서로 모여서 운행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우리 태양은 홑별이다.     알파 센타우리 삼중성계는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프록시마 센타우리와 더불어 센타우리 A별과 센타우리 B별 등 세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센타우리 A와 B별은 서로 가깝게 있어서 지구에서는 마치 하나의 별처럼 밝게 보인다. 반면에 프록시마 센타우리 별은 망원경으로도 쉽게 보기 힘든 어두운 별이지만 태양과는 가장 가깝다. 태양을 떠난 빛이 4년 3개월 정도 걸려 도착한다고 한다.     1977년에 지구를 출발한 보이저 1호는 47년을 쉬지 않고 날아서 태양계를 빠져나갔는데 그 속도로 7만 년을 더 가야 센타우리 프록시마 별에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태양이란 별에서 가장 가까운 별까지 그렇게 오래 걸린다니 상상조차 안 되는 곳이 바로 은하인데 우리 은하에는 그런 별들이 약 4천억 개나 있다고 하며 그렇게 이루어진 은하가 다시 조 단위가 모여서 우주가 된다고 하니 그저 놀랄 뿐이다.   그 다음으로 가까운 별은 태양 빛이 약 6년 정도 가야 도착하는 바나드 별이다.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태양처럼 홑별인데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대로 2018년에 우리 지구의 약 세 배 크기의 행성이 발견되었지만,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 밖에 있다. 그나마 태양에서 가까운 별이기 때문에 항성 간 여행 후보지에 올라 있지만, 다른 별은 고사하고 우리 별조차 빠져나가는데 반세기나 걸리는 현재 우리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요원한 얘기다.   다음은 태양에서 약 8광년 떨어져 있는 볼프 359라고 이름 지어진 별이다. 바너드 별이 우주의 나이와 거의 같은 데 비해 이 별의 나이는 약 10억 년 정도 되는 어린 별이다. 아주 어두운 별이어서 배율이 높은 망원경으로나 관찰된다고 한다. 볼프 359도 홑별이어서 동반성은 없고 2019년에 행성 두 개가 발견되었다. 태양계로 비유하면 중심성 태양과 그 주위를 공전하는 수성과 금성 등 두 개의 행성으로 이루어진 항성계란 말이다. 그 다음은 태양에서 약 8.3광년 떨어진 랄랑드 21185 별인데 이 별도 홑별이며 맨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생명체 거주 가능 영역 밖에 행성 하나가 있다고 추측한다.   태양에서 약 8.6광년 떨어진 큰개자리에 시리우스라는 별이 있는데 밤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 우리 눈에는 하나로 보이지만 사실은 별 두 개가 마치 하나의 밝은 별처럼 보이는 2중성계다. 19세기 중엽 동반성에 관한 추측을 했고 1862년 망원경으로 백색왜성인 짝별을 찾았다. 시리우스는 태양보다 25배나 밝은 별이지만 너무 멀리 있어서 우리 밤하늘에서 달이나 금성보다도 덜 밝게 빛난다. (작가)     박종진박종진 이야기 프록시마 센타우리 센타우리 프록시마 별이지만 태양

2025.04.1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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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결혼, 진짜 가족 이야기로 선입견 벽 넘어

원작이 걸작인데 리메이크도 걸작이다. 아시안들의 성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 그 중심에 한인들이 있고 영화를 만든 감독은 코리언 아메리칸이다.     아이덴티티의 세대 간 갈등을 주로 이야기하던 이전 한인 2세 감독들의 영화들과 사뭇 다르다. ‘웨딩 뱅큇(The Wedding Banquet)’은 성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퀴어들의 이야기다. 이제 한인들의 가정에도 성 정체성의 문제가 도래한 걸까.     2020년 ‘미나리’의 아이작 정 감독, 2023년 ‘패스트 라이브즈’의 셀렌 송 감독에 이어 앤드류 안 감독이 메인스트림을 두드린다.     타이완 출신의 거장 앙 리 감독의 1993년 원작을 바탕으로, 두 LGBTQ 커플의 관계를 그린 영화 ‘웨딩 뱅큇’은 철저하게 즐거운 드라마 코미디다.     2005년 ‘브로우크백 마운틴’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던 앙 리 감독의 초기작 ‘웨딩 뱅큇’이 원작이다. 앙 리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최초의 아시안 감독으로 일찌감치 할리우드에 눈도장을 찍었고 이후 ‘와호장룡’(2000), ‘색, 계’(2007)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1993년 앙 리의 원작 ‘웨딩 뱅큇’이 개봉되었을 때는 동성애자들 사이에 유행했던 에이즈(AIDS)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퀴어에 관한 표현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미국은 동성간의 결혼을 허용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앤드류 안은 앙 리의 원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중국인들의 이야기를 아시안의 이야기로 확장하고 장소도 뉴욕에서 시애틀로 옮겨온다. 그는 원작의 냉소주의를 즐겁고 유쾌한 코미디로 진화시켰다. 예측불허의 코미디, 그러나 진한 감동이 있다. 빠른 진행, 현란한 익살에도 가볍지 않다.   영화는 ‘동성결혼이 가능한 시대에 왜 주인공들은 가짜로 이성 결혼을 해야 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유학생 민(한기찬)은 숨어 있는 게이다. 대기업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상속자다. 민은 동성애자 연인 크리스(보웬 양)와 동거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집에는 또 다른 동성애 커플 안젤라(켈리 매리 트란)와 리(릴리 글래드스톤)가 룸메이트로 함께 살고 있다.     민의 엄격한 할머니(윤여정)는 민과의 화상 통화를 통해 민이 이제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와 가업을 이어가라고 종용한다. 민의 학생 비자가 곧 만료된다. 크리스와 헤어지길 원치 않는 민은 고민에 차 있다.     민은 5년 차 보이프렌드 크리스에게 청혼한다. 할아버지가 알게 되면 모든 재정적 지원을 끊어버릴 게 뻔하지만, 체류 문제를 해결하고 할머니가 자신의 귀국을 포기하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그러나 크리스는 민의 청혼을 거부한다. 예술가 크리스는 민을 사랑하지만, 결혼이란 ‘제도’를 본질에서 거부한다. 그는 관계에 얽매이기를 원치 않는다. 사랑에서도 자유를 지향하는 그에게 결혼은 공포다.     레즈비언 커플 리와 안젤라는 아기를 원한다. 여러 번 인공 수정에 실패해 실의에 차 있는 이들은 체외수정을 시도하고 싶지만 엄청난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크리스가 그의 청혼을 거부하자 민은 절박한 상황에서 두 커플, 네 사람이 모두 윈윈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고안해낸다. 민과 안젤라의 가짜 결혼! 민의 체류 문제를 해결하고 대신 민은 안젤라와 리의 체외수정 비용을 제공하기로 한다. 네 사람은 ‘거래’를 결정한다. 당장 미국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기쁜 마음에 민은 할머니에게 애인이 생겼다며 약혼하겠다고 통보한다.   어느 날 갑자기 민의 여자친구를 보기 위해 시애틀에 도착한 할머니. 이에 당황한 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1시간. 그들은 부리나케 서로의 방을 바꾸고 집안 내 게이와 레즈비언의 흔적을 치워야 한다.     할머니는 민의 ‘약혼녀’ 안젤라를 만나고 결혼식을 계획한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민의 계획을 알 리 없는 할머니는 성대한 결혼식, 그것도 한국 전통혼례식으로 치를 것을 고집한다. 민의 가짜 결혼 계획은 이제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린다.     안젤라와 크리스는 대학 시절부터 친구, 모든 걸 다 터놓는 사이다. 두 사람이 함께 마신 데킬라 만큼이나 우정이 두텁다. 서로에게 베스트 프렌드인 이 둘은 성 정체성의 반대 지점에 있다. 두 친구는 서로의 고민에 데킬라 샷을 마구 들이키고 만취 상태에서 그날 밤을 한 침대에서 보낸다.  아침에 눈을 뜨고 알몸으로 있는 서로의 모습에 놀란 두 사람이 황급히 옷을 주워 입는다. 코믹의 최고점, 폭소의 하이라이트인 장면이다.     영화를 끌고 나가는 주동력은 두 배우의 연기다. ‘위키드’의 스타 보웬 양이 전체를 이끌고 커리어 최고의 연기를 보이는 트란이 깊이를 더한다. ‘킬러스 오브 더 플라워 문’으로 2023년 오스카 여우조연상을 받은 릴리 글래드스톤의 연기 역량이 십분발휘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베테랑 조앤 첸과 윤여정이 각기 안젤라의 어머니와 민의 할머니로 출연한다. 이들은 진보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인 듯 보이지만, 실은 고정 관념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그러나 영화는 고정관념의 범위를 좀 더 넓혀 간다.     4명의 동성애 주인공들 사이에도 고정관념이 존재함을 드러낸다. 나와 다른 그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 인종적, 민족적, 문화적 배경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바로 고정관념의 영역임을 감독은 성 정체성의 문제를 대입해 표현해간다.     사회적 규범은 늘 강압적이다. 주변의 편견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가한다. 연인 간, 부모와 자식 간에 성 정체성의 문제가 들어서며 세대 간, 이성간, 동성 간의 갈등이 제각기 다르게 작동한다.     스토리는 일단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거짓말로 얽힌 두 커플과 그들 가족 간의 복잡한 스토리가 어떻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을까.     결혼은 어느 한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가족은 모든 것을 수용한다. 영화는 젊은 세대 동성애 문화의 한 단면을 통해 그들이 겪고 있는 갈등의 내면을 보게 한다. 그리고 이제 우리 사회가 동성 간의 결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의 성 정체성의 문제를 그들의 언어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웨딩 뱅큇’은 이 시대에 ‘퀴어란 누구인가’라는 이슈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다. 서로의 숨기려는 부분을 숨겨주려는 따듯한 배려가 느껴지는 영화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선입견 이야기 가짜 결혼 아카데미 감독상 결혼식 그것

2025.04.0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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