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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꿈에서 만난 바다

부질없이 하루가 가네 / 어디쯤엔가 멈춰 설 초침처럼 / 길 아닌 길을 만들며 가지 / 안간힘의 별빛은 견디어내다 /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네 // 어찌할지 모르는 발걸음 / 다정한 풍경과 감싸오는 바람 / 왼쪽 가슴을 누르며 가네 / 파도가 밀려오고 모래는 쓸리고 / 말 못 한 수천 마디 대답이 / 밤하늘 별처럼 가슴에 박혀오네 // 바다가 보고 싶어 / 밀려오는 파도가 벌써 그리워지네 / 모래 위 물새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 양팔을 벌리고 다가오는 숨결 / 눈을 감고 허우적대는 나는 어느 말로도 부끄러워 뜬 밤을 새우네 // 눈을 감으면 어느새 앞서 보이고 / 바다로 가는 언덕길은 저만치 서 있네 / 끝없이 펼쳐질 바다, 파도 소리, 짠 내음 / 길섶에 흔들리는 갈대를 가르며 가네 / 옆으로 누운 베개 밑으로 물살이 잠겨오네 썰물처럼 깊은 바닷속에 잠기네     무엇엔가 몰두하려고 애를 쓰네. 괜스레 호미를 들고 구석에 흙을 고르고 있네. 가을이 나뭇가지에 앉아 부질없는 내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네. 주말엔 행사도 있고 작은 모임도 있지만 내키지 않아 하늘에 떠가는 구름만 보내. 있어야 할 사람이 그곳에 없을 때, 보여야 할 풍경이 희미해질 때, 들려야 할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길 아닌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당혹감이 엄습해 오네. 모든 일들이 부질없어 손에서 떠나가네. 내가 있는 곳에서 당신의 곳까지, 그리고 내가 보았던 굳이 기쁨이라 표현할 수 있는 비밀의 정원에서부터 모래언덕으로 이어지는 바다로 가는 둔덕까지, 가꾸지 않아도 때와 시간을 맞춰 피어나는 들꽃들의 청초한 모습이, 보내주었던 견딜 수 없는 경이로움이 마음을 채우고 있네. 나비도 지쳐 날지 못해 거친 숨 내쉴 때 작은 들꽃처럼 나에게 왔지. 첫 발자국부터 마지막 걸음의 거리를 남겨두고라도 길을 잃은 적이 없네. 머릿속 각인된 길을 실제의 희미한 길보다 더 당당히 걸었지. 그곳을 걷다 보면 마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 했지. 들꽃 하나 지면 다른 꽃 하나 피어났지.     설레임으로 시작된 그대와의 만남 하늘가로 뻗은 가지 끝 가을이 가까이 와 묻었네     그대를 그리워함으로 산이 되어 숲을 품고 굽은 언덕의 긴 등성을 사랑하게 되었지     쓸어주고 어루만지는 바람으로 살기 위해 흐르는 별자리 그리다 길을 찾기도 하였네     고추잠자리 몸을 세워 바람에 날개를 맡기듯 내 한 몸 붉게 태워도 좋으리 눈가에 물들어 오는 가을로 살아도 좋으리     물방울 출렁이네 이리저리 부서져도 소멸되지 않는 기억 그대 세상에 단 한 사람 썰물처럼 바라만 보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들꽃 하나 왼쪽 가슴 시인 화가

2025.09.15.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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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부셨던 봄빛도 스러집니다

바람 불면 풀잎도 눕겠지요 / 눈부셨던 봄빛도 스러집니다 / 쑥부쟁이 하얀 꽃 밀랍 되어 / 가벼워진 황홀로 맺혀 있을 겁니다 / 꺼져가는 당신을 안았지요 / 기댄 얼굴이 깃털 같아서 / 들썩이는 심장 소리에 날아갈까 숨도 쉬지 못했어요 // 마를 게 없는 남루한 등뼈를 손바닥에 각인시키며 / 빈 껍질로 지나가 버릴 것을 알면서도 / 사랑한다는 말을 못 했지요 / 마른 가지의 잎이 덧없음을 알았을까요 // 한 가닥 감정이 붉어져 / 귓가에 흰 눈이 소복하게 앉았던 날 / 힘없는 눈빛이 다녀오라는 말 대신 / 진통의 시간을 침묵으로 쏟으셨지요 / 천근의 눈꺼풀을 감지 못하셨지요 / 열 갈래 흐트러진 소음으로 감아 내렸지요 // 의연하지 못한 슬픔이 연극처럼 막을 내리고 / 철없던 시절은 돌아올 수 없는 계절을 보내고 / 회한의 모퉁이마다 덧없음이 바람으로 섞여 왔다가 / 바람처럼 지나간다는 걸 // 그 아득함으로 그때가 되면 / 나도 바람 따라가겠지요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마지막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와서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 없이 늦게 와도 먼저 떠날 수 있습니다. 어떤 생명은 모질게 긴 세월을 이 땅에 뿌리 내리며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 같이 우리를 지으신 이 앞에 서게 될 날이 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나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조차도 예외 없이 돌아가는 길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선물이라는 책을 만든 저자 세 명이 Ross Hill 묘지를 찾아갑니다.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지만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찾아갑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따뜻한 손 잡음을 경험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또 당신은 나에게 무언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나눕니다. 우리는 한낮의 오후에 세 그루 나무처럼 서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묘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침묵은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언제 어디서인가 맞닿은 풍경이 우리의 머릿속을 영화의 장면처럼 지나갑니다.     우리는 언제 무엇이 되어 어떻게 만날 것인가의 질문 앞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한낮은 더위도 우리의 발걸음을 떼어 놓지 못합니다. 한동안 먼저 가신 당신들과 아직 살아서 종착지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대화는 끝이 없습니다. 마치 작은 간이역을 통과하는 열차 속 사람들처럼 다음 역을 기대하며 높은 등받이에 몸을 기댑니다. 차창 밖으로 내려놓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동에서 서로 넘어가는 태양을 한동안 붙들어 놉니다. 점점 길어지는 그림자를 밟으며 우리는 돌아옵니다. 끝도 없이 우리는 작은 묘비에 써있는 이름들을 불러주며 지나갑니다. 어딘가에 세워질 내 묘비 하나씩을 떠 올리며 묘지와 세워질 묘지의 긴 강을 건너갑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그 길을 갑니다.   눈부셨던 봄빛도 스러집니다. 찬란한 윤슬의 반짝임도 멀어져 갑니다. 겨울의 찬바람도 윙윙 귓가를 지나갑니다. 슬픔도 사라지고, 웃음도 저 언덕을 넘어 숲으로 감추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하고 당신을 보냈습니다. 회한의 모퉁이마다 덧없음이 바람으로 섞여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는 걸. 아득한 그때가 되면 우리 모두도 바람 따라간다는 걸. 연극은 막을 내리고 텅 빈 무대엔 남겨진 말들이 살아나 가벼워진 황홀로 맺혀 있을 겁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묘비 하나씩 심장 소리 시인 화가

2025.08.1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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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당신 앞에서

나의 하루는 / 색으로 피어납니다 // 어제는 파란색 / 푸른 하늘 / 연 꼬리 길게 늘어뜨린 / 흰 바람이었습니다 / 밤새 별들이 울다 간 / 꽃잎 흩어진 아침 / 전혀 회색입니다 / 오늘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 침묵입니다 / 혹 내일은 / 색깔을 되찾고 싶습니다만 / 초록으로 돌아갈 겁니다 / 숨이 트이는 곳 / 꽃봉오리 터지는 곳에 / 귀 기울이겠습니다 // 나의 하루는 / 색으로 칠해집니다 // 빌딩의 숲속에서 / 꺼지지 못하는 / 당신의 창을 찾아 / 초록이 자랄 수 있게 / 숲의 향기 스밀 수 있게 / 잠 못 이루는 창 / 닦아드리겠습니다 / 칠하고 덧칠함으로 / 껴지고 꺼짐을 반복하면서 / 당신과의 거리 좁혀가면서 /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 붉은 노을로 지겠습니다 / 나를 다 드려도 / 샘이 되지 않는 당신 앞에 / 뜨겁게 물들어 가겠습니다     하루가 색으로 피어난다? 색으로 칠해진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그러다 혼자 피식 웃었어요. 허리를 구부렸다가 펄쩍 뛰어보기도 하였죠. 혹 지나가던 사람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혀를 차며 바라보았겠죠. 멀쩡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참 안됐다고요. 그럼에도 그건 가능한 일이지요. 우리 눈에 비친 어떤 풍경도 색을 띠지 않는 사물과 사람을 담고 있지 않거든요. 그러니 그 이야기는 현실이 될 수 있지요. 세상의 모든 화가의 눈엔 평범한 사람들 눈에 스치는, 사라지는 색 그 이상의 강렬한 색들이 보이겠지요. 그저 평면적인 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색에 감정이 섞여 버무려진 움직이는, 살아나는 색들이 쿵 하고 가슴에 와닿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하얀 바탕을 색으로 칠하고 이야기를 그리고 그 안에 사유를 담으니, 말이에요.   우리는 너무나 바쁘게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다 보면 내 안엔 온통 일, 일, 일의 중독이 돼요.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 하루가 다 가도록 고개 들어 그 아름다운 하늘 한 번 쳐다보지 않고 살아갈 때가 많아요. 빈들 가득히 바람에 일렁이는 들풀의 유희도,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며 피어나는 야생화의 신비로움도, 쉼도 없이 밀려오는 광활한 미시간 호수의 파도도 그것을 자라게 하신 그분 손끝의 사랑 때문이지요. 우리 이제 그 손끝을 따라 하루를 시작해요. 우린 썩어갈 것들을 쫓아 발끝만 바라보고 많은 날을 살았어요. 우리에게 늦은 시간이란 없어요. 이제 하늘을 보며 살아요. 지난날들을 뒤돌아보면 나무에 새순이 언제 피었는지, 그 색이 연두였는지 핑크였는지 도무지 기억나질 않아요. 앙상한 가지에 어느새 잎들이 수북이 가지를 덮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요. 고개 들어 나무를 바라본 기억이 없으니까요. 하늘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적이 없으니까요.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관찰한 적이 있나요. 얼마나 작은 꽃봉오리가 꽃잎을 서로 붙들고 땀 흘리며 견디어 냈는지 기억하시나요? 스쳐 간 기억조차 아물거리니 생각이 남아 있을 리 없지요. 오늘은 우리가 바라보는, 만지고 느끼는 모든 것들의 색들을 기억하기로 해요. 그 색들 앞에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따뜻한 언어로 담아주면 어떨까요. 적어도 창조주의 손길을 다만 작은 부분이라도 공유하며 사는 것이 그분에 대한 바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어요.   시를 쓴다고 이름 석 자에 시인이란 호칭을 불러주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어요. 아니라고 나는 아직 시인이 될 자격이 없다고요. 뒤돌아 오면서 나에게 물어봤어요. 당신은 시인입니까?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순수와 열정을 회복해야겠어요. 하루가 어둠의 색으로부터 찬란한 빛의 색으로 피어나는 언덕에 다시 서겠어요. 당신의 손끝이 잠들은 씨앗들을 깨운 빈들의 기적 한가운데서, 당신의 긴 호흡을 느끼겠어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시인 화가 미시간 호수 그분 손끝

2025.08.0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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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너의 서 있는 자리

누구나 서있는 자리가 있지 / 서로를 바라보다 떠나는 자리일 수도 있지만 / 찬찬히 너의 자리로 걸어오는 저녁 / 깃털의 날림같이 공기를 밟고 있었네 // 잎사귀 위로 물방울 궅러 내리고 / 잔 가지마다 가득히 써 내려간 손 편지 / 서둘러 모아지는 빈자리마다 / 서둘러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지 // 너의 호흡은 향기가 되어 머물고 / 따뜻한 한낮의 햇살이 되어 녹아져 / 싸리문 사이로 스며드는 아픈 소리가 되었지 / 감추어진 곳까지 속절없이 부딪혀오는 // 너의 손을 스치는 들풀의 누음도 / 너의 앞을 쉬지 않고 흐르던 강물도 / 먼 길 돌아 다시 만난다 해도 / 너의 깊은숨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 너의 서 있던 빈자리 / 떠나간 엄마의 뒷모습 같아 / 서산에 걸친 노을처럼 / 비껴간 너의 그림자를 뒤쫓아 가네     나의 자리가 있고 너의 자리가 있다. 누군가의 자리에는 누군가의 자리에 어울리는 저만의 자리가 있다. 나무의 자리에는 나무가 있고 꽃의 자리에는 꽃이 있다. 넓은 들에는 들풀의 자리가 있고 흐르는 강에는 물결의 자리가 있다. 넓은 바다에는 밀려오는 파도의 자리가 있고 밤하늘에는 별들의 자리가 있다. 깊은 숲에는 새들의 자리가 있고 그 아래 덤불에는 들짐승들의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땀을 흘리기도 하고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기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걸으며 넓은 세상을 마주하면서 위로받기도 하고 무상으로 내리는 선물 같은 햇살과 마주하며 치유되기도 한다.     너의 서 있는 자리에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나의 자리에 눈이 펑펑 내리기도 한다. 우리는 움직이면서 그 자리를 지켜낸다. 다른 풍경을 마주하면서 생각하고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고 걸음이 느려지면서 나의 자리를 뒤돌아보게 되지만 이때 또한 내가 서있는 자리가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어떠한가. 나무는 나무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보이는 줄기와 잔가지만큼 보이지 않는 땅속으로 뿌리를 뻗는다. 그 뿌리가 너무 얕으면 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쓰러지고 만다. 나무는 움직이지 못하는 반면 치열하게 땅속으로 뿌리를 내려서 있는 자리를 견고히 한다. 꽃들의 자리를 오래 버텨주기 위해,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식물은 꽃을 바치는 꽃대궁을 다른 줄기에 비해 단단히 자라게 한다. 그래야 무거운 꽃들을 꺾이지 않고 오래 지탱하게 된다. 사람은 사람대로 동식물은 그것들대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버티고 살아간다.   너의 서 있는 자리는 그만큼 중요하다 / 너의 버텨내는 아픈 소리가 들려올 때 / 나는 잠들었던 세포들을 깨운다 / 조금만 더 버티어보라고 / 마지막 힘을 모아보라고 / 저무는 노을을 향해 소리쳐본다 / 너의 서 있는 빈자리 / 비껴간 너의 그림자는 / 떠나간 엄마의 뒷모습만큼 / 속절없이 부딪혀 온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잎사귀 위로 시인 화가 싸리문 사이

2025.07.0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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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씨앗 이야기

길가에 떨어진 작은 씨앗이 바람에게 말했습니다. "바람아 나를 날려 저 언덕 너머로 옮겨줄 수 있겠니? 그곳은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 비옥한 땅이거든. 나도 그곳에서 꽃피우고 싶어." 바람은 씨앗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래 남풍이 불 때 너를 안아 저 언덕 너머로 옮겨줄게." 며칠이 지나자, 남풍이 불어왔습니다. 씨앗은 그동안 허기와 추위로 부쩍 야위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안간힘을 쓰며 견디었는데 드디어 남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어깨를 펴고 다리를 한데 모으고 비상할 준비를 마쳤는데 바람은 씨앗을 언덕 너머로 옮겨주지 않았습니다. 밤이 다시 찾아왔고 설상가상으로 하늘에 온통 먹구름이 끼더니 굵은 빗방울이 밤새 쏟아졌습니다. 기진맥진 아침이 되어 정신을 차려보니 주위엔 울퉁불퉁한 돌멩이들이 가득하였습니다. 이리 받히고 저리 받히며 온몸엔 멍이 들어 일어설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넋을 놓고 큰 돌멩이에 기대어 있는데 바람이 지나가며 말했습니다. "어디에 있었던 거야? 너를 찾을 수가 없었잖아." “나는 너만 기다렸는데 밤새 쏟아진 비에 잠깐 정신을 잃었나 봐.” 미안함에 상처 난 얼굴을 붉히며 씨앗은 얼굴을 들었읍니다.   오늘도 씨앗의 꿈은 여전합니다. 언젠가 손바닥만 한 양지에서 꽃 한 송이 피워내기를 바랐습니다. 입술을 꼭 다물고 끝까지 견디어내면 꼭 좋은 일이 자신에게 올 거라는 희망을 저버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눈앞엔 어른거리는 따뜻한 양지가 포근하게 그려질 뿐입니다. 저녁노을 진 풍경이 눈에 비치고 들녘의 숨소리가 깊어질 때였습니다. 바람은 남풍을 몰고 와 나를 번쩍 안아 하늘로 나르더니 모두 깊이 잠든 언덕 너머로 나를 옮겨 주었습니다. 삐죽삐죽 올라온 들풀들 사이로 발을 뻗었습니다. 밀려오는 나른함과 행복감에 절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적막과 고요함 속에 길들어 있던 씨앗은 마음 속에 들려오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세미한 음성의 주인은 햇빛이었습니다. “이제 꽃을 피울 수 있겠지?” 그 음성을 듣는 순간 찾아온 감사와 행복의 시간이 몰려왔습니다. 조금은 서툴어도 그 은혜의 시간에 뿌리를 내리려 합니다. 누군가를 살리는 행위보다는 내가 먼저 죽는 씨앗이 되기 위해 마지막 남은 내 양분을 뿌리로 뿌리로 내렸습니다.   진짜 행복은 지금부터입니다. 산산이 부서졌던 곳으로부터 작은 씨앗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어제와 다른 새날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들을 선물로 받았음에도 그 하루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던 "우리는 누구입니까? 자신을 버려 싹을 내는 작은 씨앗 한 톨보다 못 한 인생이라면 우리의 모난 모서리는 얼마나 더 깎여야 하나요." 귀를 쫑긋 세우고 귀 기울여봅니다. 영혼의 봄날을 기다리는 당신에게 봄은 향기로운 몸짓으로 다가와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줄 것입니다. 그리고 불편했던 서로의 거리를 좁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작은 씨앗도, 부서지기 쉬운 우리도,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봄날도 정겹습니다. 이제 막 터질 듯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어제와 다른 오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루가 모두에게 기적처럼 펼쳐진다는 것은 생명이 있는 모두에게 가슴 저미며 맞이해야 할 사실 아닌가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이야기 씨앗 이야기 적막과 고요함 시인 화가

2025.06.16.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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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선물

눈을 뜨니 새벽 4시. 아직 밖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는데. SNS에선 반가운 소식들이 태평양을 건넌다. 마른 땅에 빗물이 고이듯 오랫동안 담겨 있던, 내 속에 메어 있어 주변을 떠나지 못했던, 내 것이 아닌 양 툭 맡겨져 있던 일들이 한꺼번에 풀어져 내린다.   2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아직 검푸른 하늘을 본다. 커피를 내리고 눈을 비비고 앉아 〈선물〉이란 시화집과 마주하고 있다. 아직 손에 쥐어지지 않았지만 오랜 기간 책장을 넘기며 시를 담고, 그림과 사진을 간간이 포개어가며 시작과 끝까지 우리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시화집. 잔잔한 숨결과 마음의 따뜻한 시간들이, 다른 배경과 환경 속에서 자란 목소리들을 조율하여 만든 삼인 삼색의 시화집, 푸른 마음들에 인생의 희로애락의 갖은 양념을 버무려 국 끓이듯 오래 달구어낸 선물 같은 〈선물〉. 더운 심장 소리가 들리고, 느껴진다.     오랜 시간 함께 달려오면서 거침없이 가까워졌던 그 순간들이 사랑스럽다.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던 빈들에 들꽃이 소리 없이 피어나듯이. 작은 실개천이 모아져 조용히 강물을 이루고 마침내 너른 바다에서 만나게 되듯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담겨 있는 놓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시로 모아서.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 마음을 흔들어 놓았던 사진들의 사유들을 모아서, 푸른 하늘이 붉은 노을로 바뀔 때까지 움직일 수 없었던 자연이 던지는 묵직한 물음에 대답으로 표현된 그림일기 같은 그림들을 모아서 시화집 〈선물〉이 태어나게 되었다.   내게는 세 번째 시집이 된 셈이다. 이 세 번째 시집 〈선물〉이 특별했던 이유는 개인 시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세 명의 시인이 각자 다른 배경과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목소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하모니를 만들어 나갈 수 있겠는가였다. 그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집을 준비하는 서로의 마음가짐이 중요하였다. 지난해 가을부터 시집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면서 놓지 않았던 한가지 “시 앞에서 부끄럽지 말아야지.” 느슨해지고 편해지려는 생각의 패러다임을 조율하여 우리의 소리를 내고 싶었다.    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수록 우리는 독특한 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각과 결이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통하는 점이 많았다. 시를 대하는 태도나 앞으로 시인이 걸어가야 할 방향과 지향점이 같았다. 결국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매일 시인의 삶을 살아야 함에 겸허하고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3인이 시카고와 서울의 가교를 이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책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선물의 의미는 대가 없이 그냥 주는 것이다. 무엇을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값없이 주는 것이다. 그 대상의 폭도 더 가깝게 내가 나에게 잘 살았다고 주는 선물, 그리고 당신에게 잘 견뎌냈다고 주는 선물, 삶의 무게로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들꽃 한 아름 건네주며 뜨겁게 안아주는 선물이 되었으면 한다.   올 7월 중순 시카고 시 창작 아카데미를 위해 시카고에 오실 중얼거리는 양반(이창봉 교수, 시인)과, 날개 달린 별똥별(지향 디자이너, 시인)과, 구름 모자 쓴 황소(신호철 화가, 시인)의 3인 3색의 콜라보 시화집 〈선물〉. 사랑과 위로가 담긴 시집 〈선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내라고 보내는 사랑의 편지 〈선물〉. 말로 전하는 포옹, 귀로 전하는 〈선물〉. 선물 같은 〈선물〉 많이 사랑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시인 화가 중순 시카고 숨결과 마음

2025.05.12.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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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 천둥지기 길

내 안에서 좁아지는 길을 본다 / 길이라는 원형의 두 축 / 사랑과 쉼이면 더 바랄 것 없다 / 바람이 실어다 주는 진심은 / 지워도 지워지지 않아, / 닦아도 닦아지지 않아서   돌담을 쌓고 길을 내는 오늘도 / 한 걸음 두 걸음 거친 숨 몰아쉰다 / 온기로 점점 채워지는 몸 / 소실점으로부터 점점 다가오는 길   속마음 모른 척 외면하여도 / 길의 반대편은 바라보지 않기로 한다 / 마음에 짚이는 순서대로 양지에 심고 / 그 밑에 산처럼 누워보기로 한다 / 어디선가 까막까치 날아오르고, / 노란 생강나무 꽃 아련히 피어나는데 / 시간에 감겨 태엽처럼 구부러지는 길   빠르게 흐르는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 / 발끝으로 시간을 길게 펴 *적바림하고 / 긴 호흡으로 숲의 위까지 사랑해 본다 / 하루가 아니라 겁으로 이어지는, / 사람의 시작과 끝으로 이어지는 / 사람의 걸음이 되고야 마는, / 결국 한 사람의 삶이 새겨지고야 마는 / 내 안에 점점 좁아지는    *천둥지기 길, *적바림: 짧게 요지를 적음, *천둥지기: 외딴곳   살이 오르는 나무숲을 지나 낮게 드리운 풀섭을 끼고 걷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갔을 이 길 위에 나의 발자국을 얹어 더 선명하게 길을 다지며 간다. 온갖 초록들이 대지로부터 허리를 펴고 일어나는 새삼 신기할 것도 없는 풍경이 오늘은 따스한 햇살과 더불어 새롭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말소리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작은 짐승들이 몸을 피하기 위해 구석진 곳을 찾아다니며 애태웠던, 맵새가 날개를 접고 머물렀을 상수리나무 깊은 가지 안에, 보금자리마저 감출 곳이 없이 드러나는 푸른 빛으로 다가오고 있다. 봄날의 숲정이길을, 하얀 날개를 펴고 접으며 가쁘게 오르는 흰나비의 길을, 봄을 마시며 걷는다.   일생을 걸어도 다시 눈앞에 펼쳐지는 길. 그 길 위에서 생각한다. 내가 길을 선택하는 것인지 길이 걷고 있는 나를 손짓하는 것인지. 두 길이 만나 한 길이 되기도 하고 한 길이 갈라져 두 길이 되기도 한다. 내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의 가는 길과 다르다고 해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길을 걷고 있기에 어느 누구도 그 길을 평가해서도, 판단해서도 안 된다. 길이란 다만 걷는 것이 아니라 걸으면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지 못하는 길은 길이 아니다. 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 말자. 어쩌면 그 길이 바로 당신이 지금까지 찾고자 했던 것을 만나게 해줄 유일한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우리의 인생길을 꽃길만 걸으라 말할 수 있는가. 어찌 봄날같이 평탄하고 기쁜 날만 걸으라고 말하겠는가. 때로는 가시밭길을 걸을 때도 있고, 걷기 힘든 진흙탕 길을 걸으며 온몸이 더럽혀질 때도 있다.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려고 애쓰기도 하고, 길 같지 않은 길을 걸으며 온몸에 상처를 입기도 하지 않았던가. 길을 걷다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기도 하고 서로의 길을 위해 떠나는 그를 위해 축복의 손을 들기도 한다. 나의 욕심과 자랑을 내려놓고 새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그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지기도 한다.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것이 없음에도, 크고 작은 불편함이 있음에도 우리는 오늘도 나만의 길을 걷고 있다. 많이 휘어져 길의 끝을 내 눈으로 확인 할 수 없어도 결국 사람의 걸음이 되어야 하는, 한 사람의 인생이 되어야 하는 그 길 위에서 후회 없는 길을 걸었다고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그래서 나를 지으신 이의 부름에 뒤돌아보지 않는 후회 없는 발걸음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시인, 화가)     신호철천둥지기 신호철 시인 화가 이의 부름

2025.05.05.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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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리 살다 보면

그래 그래야지 그리 살다 보면 슬픔도 견디는 아름드리나무 되겠지 외로움도 손 젓는 다소곳한 들꽃 되겠지 내 자리인 양 푸른 싹 보듬는 구름 한 점 되겠지   그래 그래야지 그리 살다 보면 오라 손짓하는 그대 앞에 서겠지 옷가지 매만지며 뒤돌아보겠지 굽이굽이 걸어온 길 손잡고 함께 걷는 꽃길 보이겠지   그래 그래야지 그리 살다 보면   문학 단체 카톡방엔 하루에도 상당한 양의 글들이 올라온다. 글 하나 하나 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글들이다. 무엇 하나 가볍게 지나칠 글은 하나도 없지만 며칠 전 올라온 소식이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 삶과 죽음 사이로 흐르는 강은 그리 깊지 않을 거야. 그래서 누구도 어렵지 않게, 슬프지 않게 건너갈 수 있겠다고 생각할거야. 그러나 사실 그 문턱에 한발을 디디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늪으로 빠져드는 쓸쓸함도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 두려움 없이 강물을 건널 수 있겠단 생각. 죽음을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내게 그런 절실한 상황이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을 피부로 껴안고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득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은 어떤 것일지 생각했다. 준비된 삶을 살고 있다면 눈을 떠 맞이하는 하루의 삶은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다가올 것이다.   입안이 헐어서 며칠을 고생했다. 혀가 상처에 닿아 분명히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작은 상처가 이렇게 온 몸을 찌푸리게 할 줄 몰랐다. 이 상황만 지나면 무엇이든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는 동안 깊이 잠들지 못했다.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안됐다며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그 말에 시원하게 대답도 못 하고 씩 웃고 말었다. 당신도 한번 아파보라 하며 속으로 혼자 대답하고 말았다. 고작 혓바닥에 불거진 좁쌀만 한 상처 때문에.   평소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의 부인께서 세상을 달리하셨다. 오랜 시간 동안 병원을 오가며 투병하셨기에 마음이 더 더욱 아프다. 아직도 앞길이 길게 펼쳐져 있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셨다. 아픔을 당한 가족들에게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극정성으로 병상의 아내를 간호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늘 입가에 웃음을 잃지 않았던 친구가 늘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이토록 투명할까? 서로에게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현이 이리도 덤덤하고 아름다울지 생각했다. 함께 생각하고 함께 걸어가는 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이다. 어떤 상황이든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 가난하든 혹 부유하든, 건강하든 혹 병상에 누워있든, 서로에게 힘이 되고 언덕이 되어준다면 긴 삶이든, 짧은 삶이든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죽음은 언제일지 몰라도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다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내 마음가짐의 문제일 것이다.   거울 앞에 서서 내 모습을 보고 싶었다. 부끄러워 한참 만에 고개를 들고 나를 보았다. 입안에 난 작은 상처로 일주일 내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창피스러웠는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에게 물었다. 내게 남겨진 소중한 날들을 따뜻하게 안아 내 체온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전해주는 삶을 살고 있는지. 나는 진정 죽음을 준비하고 살고 있는가?라고.   잎눈에 맺힌 이슬방울 속에도 본향으로 돌아가는 숨 가쁜 걸음 위에도 막 피어난 목련의 눈부심 속에도 당신은 그곳에 있네요 노을 속 빛의 섞임같이 어우러져 살고 싶어요 죽음이 나를 건드려도 오늘 내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당신은 용기를 주네요 하루가 지는 고요 속에 내 한 몸 누울 수 있을까요 덤덤히 맞아들여야 할 죽음이라는 유혹마저 소중히 꽃피우고 싶어요 내일 깨어날 기대는 하지 않아요 그저 함께할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누군가의 손길이 나를 흔들고 있어요 깨어나 봄날 새벽을 맞이해야 하겠지요 주섬주섬 옷 챙겨 입고 오늘 가야 할 길 떠나야겠어요 한껏 사랑하지 못한 부끄러운 봇짐 챙겨 새싹 보리 나가야겠어요 저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인생의 날들이 보여요 봄날처럼 아름다워요 그날이 오면 이곳에 머물고 싶어요 당신 품에 안겨서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상처 때문 봄날 새벽 시인 화가

2025.03.3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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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힌 문을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을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       삶에 대하여     너무 촘촘히 그리지 말자   삶은 캔버스 위 붓질과 같은 것   말이 뭉뚱그려질 때   희미해져 읽을 수 없을 때   원초적 색깔을 사용해 보라   빛과 그림자가 분명해질 것이다     살아가는 일이 고단해지면   울음을 참고 다시 떠나보라   참아내는 사람이 나뿐이더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참고 살아가나니   두려움은 밤낮으로 찾아오겠지만   견디지 않으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숲정이 처럼 함께 어우러지자   한 나무가 아니라 여러 나무가 모여   서로의 향기를 뿜어 사랑하듯이   삶의 시간은 숲의 시간처럼 한 색이 아니라   형형색색의 날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평안, 평안과 기쁨은   스스로 찾아드는 선물 같은 것이다     견뎌내는 이가 나뿐이더냐   우리는 모두 하나같이 깊은 슬픔 속에 묻히다가도   어느새 밝은 햇살 앞에 앉아 있지 않터냐   너무 촘촘히 삶을 채우지 말자   해가 지면 별이 뜨고 별빛이 지면   먼동이 하늘에 가득할지니   밝은 대낮에도 이운 낮달처럼   내려다보고, 또 올려다보며   이우는 부분마저 그리워하자     주위를 돌아보면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들을 기회가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일을 놓지 못하고 살다가 이제 삶을 즐길 만한 시간이 찾아왔는데 홀연히 죽음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안타까워하는 이야기를 듣는다. 하루가 저무는 창가에 앉아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무엇으로 나의 빈 마음을 채우고 있는가? 나에게 묻고 또 묻는다. 아니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묻는다.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계시는가?라고.     행여 슬픔으로 가득한 시간으로 하루를 보냈다면 밤하늘 별빛으로 그 마음을 지울 수는 없는가. 수천 광년의 빛으로 이제야 나의 눈에 비쳐오는 기적 같은 이 순간에도 괴로워하겠는가? 눈물마저 말라버린 한낮을 걷다가 빛을 잃어가는 낮달의 선물 같은 반가운 손짓을 외면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내가 걷는 이 길이 선물이 아니라면 바람에 눕는 갈대가 눈에 뜨일 리 없을 터이고, 미시간 호수의 밀려오는 파도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찌 내 귀에 들려오겠는가. 말라 부석이며 부서지는 들풀의 긴 대궁에 맺힌 검은 씨앗 속에 감춘 연둣빛 새싹이 어찌 보이겠는가.     우리가 추구하고 은근히 자랑했던 부와 권력 속에서는 시인은 태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눈으로 시인은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존재이지 않더냐. 아무도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사랑을 이야기하고, 슬픔으로 눈물짓기도 하는, 잃어버릴 수 있는 험한 길을 대책 없이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귀하고 사랑스럽다. 온밤을 지새워도 지치지 않는 연약하지만 내면으론 솔처럼 외롭고 높고 곧게 시인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아름답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미시간 호수 밤하늘 별빛 시인 화가

2025.03.03.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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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춤추는 나무

언덕에 바람이 불어올 때면 / 주체할 겨를도 없이 하늘로 흩어지는 낙엽 / 그곳엔 나무 한 그루 춤추고 있었다 / 감춘 것들을 드러냈다가도 / 이내 다 덮어 버리기도 하면서 / 돌아오는 길에 지워지지 않는 / 더 잊어야 할 것들은 없는지 / 그렇게 물어보며 집으로 왔다 // 너무 느리거나 서두르면 / 서로에게 부딪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 평면보단 입체로 봐야 더 이해할 수 있듯이 / 같은 곳에 있어도 다르게 보일 수 있듯이 / 밤하늘 가득한 별빛의 머물 곳을 / 이젠 지켜주어야 할 시간이 왔다 // 눈을 감고 바라보고 있어도 / 더 선명하게 그려지는 사람들 사이로 / 말하고 싶지 않았기보다 말할 수 없었던 / 낯선 세상이 아닌, 마음으로 꿈꾸던/ 보지 못한 세상을 느끼고 싶은 건/ 두 손으로 모으며 드린 기도 / 나무의 뿌리 깊은 소원이었다 // 아름다운 세상이 보고 싶어서 / 사막에 날리던 모래바람보다 / 풀들이 춤추고 꽃이 노래하는 / 다른 세상을 매일 맞이하고 싶어서 / 먼 나라의 동화처럼 들릴지라도 / 흥에 겨워 바람에 춤추는 언덕 나무처럼 / 팔을 뻗어 너를 힘껏 안아 주면 되는 것을 / 너를 붙잡고 함께 춤추면 되는 것을     문 하나가 닫히면 문 하나가 열린다. 해가 지면 잠깐의 시간을 두고 다시 해가 뜨고, 별이 지고 나면 하루가 지나고 다시 별이 뜬다. 그는 무릎을 살짝 구부려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도 쓰고 있던 모자를 허리 아래로 내리며 답례했다. 그렇게 우리는 작은 언덕 구릉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 나는 언덕을 내려오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이별을 아쉬워했고, 그는 바람에 잔가지를 흔들며 나에게 다음 약속을 기약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가 춤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장 남지 않은 잎사귀를 안은 채로, 좌우로 가지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가 춤추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눈 내리던 어느 날에는 눈꽃을 피우며 둥글게 움직이고 있었다. 온종일 피운 눈꽃은 아름답다 못해 눈이 부셨다. 평면으로 내린 눈을 입체로 꽃피우는 나무는 신기하리만큼 깊이가 있었다. 펼쳐 보이기도 하고 담아 내기도 하는 언덕 위 나무는 해마다 키가 자랐고 이제는 내 키를 훨씬 넘어서 그의 끝까지가 하늘에 닿았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춤추고 있다. 호수의 파도도 춤추고 있고 하늘에 구름도 춤추고 있다. 꽃이 피어나는 것도, 나뭇잎이 움트는 것도, 비가 내리는 것도 춤추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들길을 걷다가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있다. 신기하게도 세찬 바람에 꺾이지 않는 갈대를 보다 결론지은 것은 ‘갈대는 춤추고 있다’였다. 왜 우리는 춤추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반응하지 못하는가? 봄이 온다고 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무수한 봄이 지나가도 내 안에 봄은 꽃 피지 않을 것이다.     흥에 겨워 바람에 춤추는 언덕 나무처럼, 바람에 눕는 갈대의 춤사위처럼 우리도 춤추면 된다. 나무의 밑동을 껴안고 같이 흔들리면 된다. 너와 나 부둥켜안고 춤추면 된다. 춤추며 밀려오는 파도 앞에서 모래를 휘저으며 덩실덩실 춤추면 된다. 그러면 동화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니까.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언덕 나무 언덕 구릉 시인 화가

2025.01.2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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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 꽃눈

하얗게 덮인 눈 속에서도 움을 트려고 / 몸을 뒤척이는 나목이 되자 / 새로운 봄날을 맞이하기 위해 / 죽은 자 같지만 살아있는 자 /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 같이 보이지만 / 모든 꿈을 다 가진 한 그루 나목처럼 살아가자 / 버리면 얻게 되고, 낮아지면 높아지는 빈들 / 겨울나무가 속으로 속으로 뿌리내리며 / 찬바람에 울었던 것처럼 / 속으로 속으로 우리도 울자   눈 덮인 창가에 앉아 편지를 쓴다 / 썼다 지워버린 편지를 다시 쓴다 /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가슴으로 쓰고 있다 / 눈이 녹고 봄이 오면 / 그때도 편지를 쓸 수 있을까 / 연두의 잎눈이 보석처럼 어리울 때 / 목련이 긴 목을 내리고 / 슬피 나를 바라볼 때도 나 그대 앞에 / 엎드려 목 놓아 울 수 있을까 / 호흡으로 겨울 숲은 잠드는데      새해를 맞은 지 두 주가 지나가고 있다. 이렇게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면 내게 허락된 삶의 마지막이 코앞에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멍해졌다. 창밖엔 가는 눈이 벌써 몇 시간째 내리고 있다. 나무의 잔가지를 채우고 차가운 땅을 부드러운 손길로 덮어 주고 있다. 저기 먼 하늘도 건너편 집 지붕도 멀리 보이는 숲도 언덕으로 오르는 좁은 길도 하나같이 하얀 풍경 속에 잠겨 있다. 사람의 마음속보다 더 깨끗하고 환한 눈이 내리고 있다. 무엇을 덮으려 하는 것일까? 상처 나고 주름진 깊은 골을 천천히 어머니의 손길처럼 쓸어내리고 있다.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삶 속에는 작고 큰 상처들로 인해 깊은 흔적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 상처는 때로 나를 혼돈과 방황 속으로 몰아넣기도 하고 때로는 그 고난을 극복하고 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초석이 되기도 한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성경 갈라디아 6:17에 단 1번 나오는 단어이다 ”흔적“으로 번역되어 나오지만 ”낙인“이란 말로도 옮겨져 있다. 흔적이나 낙인이라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바울이 그 스티그마란 말을 통해 자신이 예수의 종이요. 예수가 그의 주님임을 생생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에게 닥친 견딜 수 없는 고난 그 자체가 바로 스티그마라는 단어이고 그리스도의 흔적이 고난이라는 삶의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도 깊은 골로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바로 그 고난은 오히려 축복이 되어 견디어내고 마침내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있게 됨을 말하고 있다. 여전히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세상은 온갖 아픔과 고통의 깊은 골을 하얀 눈에 맡기고 있다. 내 안에 새겨진 스티그마, 그리스도의 흔적 같이.     지쳐 잠드는 것이고   흔들려 깨어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다   짜맞추는 게 아니라   가슴을 치는 일을   받아 적는 일이다   깨달음을 위해 애쓰기보다   길을 걷다 눈에 띈 들꽃을   노래하고 그리는 것이다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쓰이는 것이다   지나온 걸음 속에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속에 흐르는 노래를   그저 부르는 것이다   사랑과 그리움, 절망을   아파하고 안아주는 일이고   널 보내지 못한 나를   꾸짖는 일이다   세상을 향한 날 선 독백마저   오늘 부딪치며 살아가는   나에게 보내는 편지요   당신께 드리는 용서인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풍경 성경 갈라디아 시인 화가 보호 아래

2025.01.13.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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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림자

가만히 나를 들여다 보네 / 들여다보는 내 모습이 거기 보이네 / 그리움을 하나씩 숨기고 있네 // 그림자 속에는 // 흔들리는 들꽃의 반가움도 있고 / 나비의 날갯짓도 노을 속에 사라지네 / 들길을 걷는 한 사람의 발걸음도 / 창가에 앉은 그의 심장 뛰는 소리도 들리네 // 그림자 속에는 없는 것이 없어서 / 그림자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 그 몸에 그림자를 달고 다니게 되네 / 자동차 바퀴는 그림자로 달리고 / 구름도 땅 위에 그림자를 그리고 있네 / 나무는 그림자 밑으로 뿌리 내리고 / 꼬리 흔드는 강아지는 흔들리는 그림자를 물고 가네 // 그림자는 시작도 되지만 끝도 되어 / 점 아래로 모이는 정오엔 사라지기도 하네 /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은 순식간이어서 / 한 번도 그 순간을 바라본 사람은 없네 / 그 순간 그림자는 제 몸으로 돌아가 제 몸이 되네 // 숨바꼭질 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 제 발밑의 그늘을 찾지 못하네 / 빛이 있어야 그림자로 살아나고 / 내 생각이 네 생각과 다를 때에는 / 서로의 자리를 바꿔 나타나기도 하네 / 그림자 속에 있지 않은 것은 없기에 / 붉은 해 수평선으로 기울고 긴 여운을 만드네 / 사람들도 그림자로 살아가네 / 온종일 그림자로 살다가 어둠이 오면 / 그림자를 어둠에 숨기기도 하네 // 이제 너는 내 그림자로, 나는 네 그림자로 살기로 하네       빛이 있고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은 그림자를 만듭니다. 그 빛이 눈부신 햇빛이 될 수 있고, 달빛이나 별빛이 될 수도 있습니다. 희미한 초롱불이나 촛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미미한 빛만 있으면 그림자는 어느새 생겨납니다. 어쩌면 사물속에 저마다의 그림자를 품고 사는 것이 아닌 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신기한 것은 그 사물이 흔들리면 그림자도 같이 흔들리고 사물이 뛰기 시작하면 그림자도 같이 뛴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본체보다 몇 배나 크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로데스크한 모습으로, 본체를 삼켜버릴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림자를 보면 사물의 모습이나 상태가 그대로 투영된다는 말이 됩니다.     사물과 그림자는 한 뿌리에서 나온 한 몸입니다. 사람도, 동물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도,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미한 생물체 모두 다 그림자를 가집니다. 하늘의 구름도, 낙하하는 낙엽도, 달리는 자동차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림자는 사물의 배경으로 살아가는 듯 보여집니다. 철저히 사물의 움직임대로 가고 순순히 사물이 가고자 하는 의지대로 함께 따라갑니다. 그림자는 처음부터 자기를 내려놓아 사물의 배경으로 만족합니다.     누군가의 배경으로 살아간다는 것. 말이 쉽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 사는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림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방향대로 걸어갈 뿐입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막무가내의 삶 모두는 자기 뜻과 성취를 위할 뿐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배경이 되려 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림자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살아가는 지혜를 배웁니다. 배경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조화롭게 살아가는 삶이요, 자기를 내려놓는 삶이기도 합니다.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어두운 새벽이었는데 어느새 안개가 자욱한 초겨울 아침이 왔습니다. 햇빛이 없어 그림자가 없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비추면 그림자와 함께 모두 행복하시길요. 커피 조금 더 내려야겠습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림자 순간 그림자 자동차 바퀴 시인 화가

2024.12.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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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기대어 살아야 하지

새벽이 깨어날 때면 / 꽃 한 송이 피어나듯 / 어둠의 뒤로 아침이 오네 // 힘들 때마다 우리 기억해야 하지 / 소리 없이 들길을 걸었던 일 / 바람이 우리를 마구 흔들었던 기억 / 내어준 팔의 따뜻함에 꿈꾸었던 시간 / 기억해야 하지 사는 게 쓸쓸해지면 / 마주 보며 웃음을 되찾았던 일을 // 다시 태어난다면 / 이 땅에 다시 태어난다면 // 들꽃 만개한 일몰의 언덕에서 손잡고 / 붉은 노을로 스러지는 밤하늘 가득 / 서로를 지키는 별빛이 되어야하지 / 살아있는 날 동안 눈동자같이 바라보며 / 기대어 설 서로의 든든한 등이 되어 / 기쁘거나, 슬프거나, 외롭더라도 / 새벽이 깨어나듯, 꽃 한 송이 피어나듯 / 그렇게 우리 기대어 살아야 하지 // 야윈 팔소매 걷으며 웃어줄 당신이기에       기대어 산다는 것은 서로의 등을 내어 준다는 말이다. 등을 내어 준다는 것은 나를 지탱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준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연약한 한 사람의 등이 다른 사람의 등에 기대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스스로 서서 버틸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의 온몸을 의지하여 맏길 수 있는 어느 한 사람을 만났다면 그는 인생을 잘 산 사람이다. 어떤 사람의 입은 마음에 있어 생각을 마음에 담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은 입에 있어 생각을 무심코 내뱉기도 한다. 확인 되지 않은 말 확신이 없는 말들이 홍수처럼 범람하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해서 좋았던 기억 보다 단 한 번의 서운함으로 오해하고 실망하여 멀어지기도 한다. 서운함보다 함께 한 좋은 기억을 떠올려 먼저 고마웠다고, 미안하다고, 손 내밀 수 있다면 세상은 아름답게 바뀌어 질 것이다.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기대어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진정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언제인가 산행 중에 지쳐 있는 몸을 큰 나무 등에 기대어 본 적이 있다. 편안함과 안락함이 내 등을 통해 따뜻하게 전해 왔었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다시 힘을 얻고 정상을 향해 걸었었다.     우리는 매일 매일 땅을 딛고 살고 있다. 내 발을 지탱해주는 것은 우리가 인식 하든, 인식하지 못 하든 우리가 눈을 뜨면 걷는 이 땅이 자기의 등을 내어 준 것이다. 바람이 더위와 땀을 식혀주는 것도 바람이 자기에 등을 내어 준 것이다. 나무도 서로의 등을 기대고 의지하여 든든히 가지를 뻗는다. 뿌리는 가지에게, 가지는 뿌리에게 든든한 등이 되어준다.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서로의 등을 내어 주고 서로의 약함을 보듬어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상대방의 버팀목이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이 나의 든든한 등이 되어 주기도 한다.   슬플 때도, 외로울 때에도, 한없이 깊은 수렁 속에서도 지친 어깨를 안아주며, 눈동자같이 지켜 주자. 어둠의 뒤로 아침이 오듯이 서로의 손을 끌어 빛나는 아침을로 이끌어주자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어둠은 사라지고 한송이 꽃이 피어나듯 우리의 마음 속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날 것이다.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삶은 사는 게 아니라 살아진다는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청춘은 너무도 짧고 아름다웠다.“라고 박경리 작가는 말했다. 그렇다. 버리고 갈 것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것들은 서로의 등이 되어 주자. 넘치면 넘치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감사하며 서로에게 기쁨이 되어주자. 서로의 마음 속에 꽃 한송이 피워 보자.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동안 눈동자 시인 화가 박경리 작가

2024.12.0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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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나에게 거는 최면

가을을 반납했다는 G 작가의 글을 접하고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시간과 계절을 내려놓았을까? 암 투병과 함께 지긋지긋한 통증에 약효가 점점 짧아지고 있지만 조금이라도 통증이 가시면 글을 쓰고 있다는 G 작가를 마음으로나마 응원하고 있다. 가을을 반납하고서라도 써야 할 그 무엇에 박수를 보낸다. 아무쪼록 그 글의 완성이 책으로 엮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이 온다   우수수 낙엽이 날려도 먼동이 트고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햇살이 눕는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누군가는 짙은 커피 향에 취해   떠나는 계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그리울 때 갈대는 땅으로 눕는다       새벽 언덕에 아침이 온다   꿈과 현실의 갈래길에서 한길을 택해   언덕을 내려오다 쓰러진 나무를 보았다   거기 나는 속이 텅 빈 나무처럼 땅으로 눕는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 꿈은 꿈 자체로 아름답다. 기쁨과 슬픔의 조건조차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 내면의 의식에서 빚어진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상의 결과가 그 가치를 판단하는 바로미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함부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한다거나 스스로의 삶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다고 본다. 늘 사람을 대할 때 수직적인 관계보다는 수평적인 사고로 대하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망이 아닐까 한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스스로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아직 이 지구상에 존재하므로 세상은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울 수 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의 ‘흰’을 읽고 있다. 소설이라기보다 짧은 수필의 연결 같기도 하고 자세히 읽다 보면 깊은 시 같기도 했다. 흰 것들에 대한 기억과 사유들을 덤덤히 적어 간 그의 글 속에서 인간의 진진한 삶의 고뇌와 덤으로 살고있는 아픔과 고마움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는 속도보다는 방향의 진의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빨리 결론지으려는 조급함이 때론 방향감을 상실한 채 표류하기도 하기에 우리는 자연의 변화처럼 천천히, 바른 방향으로 그렇게 물들어 가야 한다. 글을 읽는 내내 차분하지만, 영감이 자유로운 그의 내면을 송두리째 접할 수 있었다. ‘흰’의 마지막 소제목 ‘모든 흰’의 내용은 이러했다.     당신의 눈으로 흰 배춧속 가장 깊고 환한 곳. 가장 귀하게 숨겨진 어린 잎사귀를 볼 것이다. 낮에 뜬 반달의 서늘함을 볼 것이다. 언젠가 빙하를 볼 것이다. 각진 굴곡마다 푸르스름한 그늘이 진 거대한 얼음을, 생명이었던 적이 없어 더 신선한 생명처럼 느껴지는 그것을 올려다볼 것이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최면 새벽 언덕 노벨 문학상 시인 화가

2024.11.04.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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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홀로서기

홀로 피었다   바람에 흔들려 구겨진 얼굴을 내밀었다   누구도 예상 못 했지만 현실이었다   구겨진 얼굴 피기가 쉬웠겠는가   흔들리는 갈대가 하얗게 울음을 터뜨렸다   비바람 앞에, 천근의 무게를 지고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설 때   정면으로 부딪칠 때 그때 비로소   홀로서기는 시작되었다   홀로 핀 당신만 보인다   쏟아 내지 않고 별빛 하나로 모이는   그곳에 서 있어 보면 알 수 있었다.   같은 생각, 같은 걸음을 옮길 때   외로움은 멀어졌다   결국 그 힘은 뿌리에 있는 것이다   당신 앞에 날마다 서는 그 힘은   홀로 견디는 그 뿌리로 시작되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라. 홀로 핀 것들이 너만이더냐. 시름시름 꽃대를 세우더니 백일홍도 홀로 피었고, 씨 뿌리지 않은 과꽃도 여린 꽃망울 홀로 맺었고, 망초도 담장 구석에 기대 안개 같은 하얀 꽃으로 홀로 활짝 웃었다. 그뿐이더냐. 수백 광년을 지나 발밑 아래 홀로 부서지는 별빛은 그냥 서서 맞이하기엔 얼마나 눈물겨운가.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햇살은 또 얼마나 포근하고 따사로워 온몸을 녹이지 않던가.    여름내 울어대던 매미가 홀로 제 몸을 벗었고, 딱새도 홀로 밤낮으로 알을 품더니 올망졸망 제 식구를 데리고 춤추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자세히 보면 모두가 홀로 견디는 것이다.   나도 어릴 때 어렴풋이 홀로 사는 법을 배웠다. 어머니가 홀로 되신 후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디어 내는가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지만 결국 어머니는 홀로 견디고 홀로 사셨다. 그리고 홀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초에 불을 댕기면 심지가 타면서 불꽃이 보인다. 심지가 곧게 깊이 박혀 있으면 불꽃은 오랫동안 그 빛을 잃지 않는다.     나무도 그 뿌리가 깊게 뻗어있지 못하면 비바람, 눈보라에 쓰러지게 된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제 몸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홀로 서려면 그 뿌리가 깊어야 한다. 홀로서는 힘은 보이지 않는 그 심지에서, 그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해도 아무리 무성해도 홀로 서는 힘은 보이지 않는 다른 곳에 있다.     나무가 눈을 뜨는 시간에 나도 눈을 떴다. 나무는 자신이 심어져 자란 곳을 불평하지 않는다. 오늘도 바람이 부는 곳으로 가지를 휘며 살아감의 유연함을 보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뿌리는 깊은 땅을 향해 뻗어 가고 있겠지. 서 있다는 것은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온 힘을 다해 버티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도 그랬다. 하루를 그냥 맞은 게 아니다.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두렵고 떨리는 하루를 그림자처럼 지내셨다. 노을마저 져버린 서쪽 창가에 어둠이 찾아오면 지친 어깨를 들썩이며 가슴을 저몄을 것이다. 잠든 네 자녀의 이마를 쓸어주며 기도 반, 눈물 반으로 지샜을 것이다. 나는 안다. 그 먹먹했을 하루하루의 시간을. 그 고통스런 날들을 견디며 고개 숙이지 않은 것들에겐 향기가 난다. 그래서 난 홀로인 것들이 좋다. 더 마음에 와닿는다. 홀로 견디어낸 시간이 자랑스럽다. 홀로여서 외롭다고 생각지 마라. 사람도 홀로 있을 때 가장 사랑스럽지 않더냐.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비바람 눈보라 얼굴 피기 시인 화가

2024.08.1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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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당신은 내 집입니다

당신은 내 집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 지어진   당신은 내 집입니다 누군가 불러주지 않아도 걷다 보면 머물러지는 곳 봄의 향기가 떠나지 않고 오월의 초록이 가득 담긴 당신은 내 집입니다 다시 불러봅니다 마지막 날처럼 안타깝고 경이로운 시간 당신은 여전히 내 집이어서 눈을 감으면 더 가까이   선명한 핏줄같이 만져지는 사랑스러운 내 집이어서 마음에 담기로 합니다 원뿔 같은 모난 세상 모난 뿔로 피어나기 싫어 몸 아래로 아래로 꽃 피우는 비밀의 정원, 나의 쿼렌시아 먹여주고, 재워주고 사랑해 주는 당신은 같은 곳, 같은 시선으로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내 집입니다     한낮, 찌는듯한 더위에 몸을 잠시 피했다. 창가에서 바라보니 테크 주변에 나무가 만들어 놓은 두 평 남짓 그늘이 보였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어나 데크로 나가 의자를 그늘 밑으로 옮겼다. 작은 테이블을 옮기고 나니 유리컵에 들꽃이라도 담아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손을 뻗어 수수꽃다리 탐스러운 꽃송이를 가졌는데 그 향기가 바람에 실려 산들 내 앞으로 불어왔다. 더위는 간 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늘 위에는 쉼과 새소리와 함께 수수꽃다리 향기가 온몸에 가득했다.     집이란 장소에 대해서 또 이 집에 살고 있는 자신은 과연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가? 늘 궁금했다. 집이란 의미가 그냥 사람이 거주 하는 생활 공간 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쩌면 집이란 의미는, 나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편안하게 지켜 주는 것 이외의 것들을 잊거나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아갈 때가 많았다. 당연히 그러려니. 맞아 그게 다야. 그 이외에 다른 건 없지. 더 바라면 욕심이지. 주변을 둘러봐도 다 그렇게 살고 있어. 잘 길든 애완견처럼 때로 사랑도 받고, treat도 받아먹으면서.      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바로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두 평 남짓 그늘 밑 같은, 그저 햇빛을 막아준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해지는, 따져보면 가진 것도 없는데 한없이 누리는 알 수 없는 포만감. 그런 사소한 관심과 작은 행복의 연유가 아닐까? 잘 꾸며놓은 집에 갇힐 수도 있겠다 생각되었다. 문득 집은 지친 나를 반가이 맞아 주는 곳. 상처받은 마음을 싸매고 치유해 주는 곳. 마음이 헛헛해 그리운 마음을 열면 꽃처럼 환하게 반겨 주는 곳. 마주 보고 있어도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정다움이 포말처럼 가득해지는 곳. 한없이 피로가 몰려와도 엄마 품 같이 포근하고 따뜻해 이내 잠들 수 있는 곳.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곧은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가슴 설레는 곳이어서. 상처와 아픔의 처진 어깨가 위로 받고 보듬어져 어느새 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어야 한다는, 다름 아닌 그늘 같은 퀘렌시아가 집이 되어야 한다는.   마치 투우장의 성난 소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 바로 그것이 진정한 집의 개념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루의 피곤이 사라져 버리고 새 날, 새 아침이 기적같이 펼쳐지는 곳이야말로 나의 집, 나의 쿼렌시아, 나의 천국이라 말할 수 있다.   늦은 오후, 나무 밑 두 평의 그늘. 넘어가는 햇살에 나의 쿼렌시아는 누워도 될 만큼 더 넓고 쾌적한 면적으로 확장되었다. 긴 하루가 그 축을 당기며 하루의 펼쳐진 휘장을 서서히 닫고 있다. 조용한 침묵을 깨고 오후의 끝자락을 잡아줄 심금의 첼로 선율이 들리는 늦은 오후. 그런 집을 찾습니다. 그런 당신은 나의 집입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수수꽃다리 향기 첼로 선율 시인 화가

2024.05.2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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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1   늘 놓아두었던 자리   그 물건이 없으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그 장소, 그 시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기적 같은 행복이 아닐까 싶다   다만 새벽만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2 깊은 어둠으로부터 깨어나는 새벽 알지 못하는 이야기로 새벽은 깨어나고 마른 가지에 살이 붇고 먼동은 새벽을 당겨 온다     동트기 전 새벽은 깊은 물 속과 같아서 물속 떠오는 비늘 같아서 가득한 물고기 집 같아서 새벽하늘에 빠져 깊이 잠기다 보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잠기다 보면 어둠 속 보이지 않던 것들에게 찾지 않아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흔들 수 없는 어둠 속엔 단단한 껍질을 벗는 하루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깨어난 생명이 내쉬는 숨 허리를 세운 직립의 나무   흔들 수 없는 어둠이 옷을 벗고 하늘의 밑동을 채우는 허락된 하루의 축복이 온다     버려야 할 것이 있고, 담아야 할 일이 있기에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주워야 할 이삭이 있기에 나만을 위한 하루가 아니기에 기대가 된다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서 깨어나는 새벽 내 안에서 매일 눈을 뜨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3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릴 때 시를 쓰는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언제부터인가 멀어졌던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잃어버린 마음을 찾고 싶었다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빌듯 새벽 커피를 내리고 마음을 다잡을 때처럼 맨발로 꽃피는 뒤란을 걸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다 가진 자의 행복이 부럽지 않다 그 자리에 그가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 시간에 그 풍경이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듯 시를 쓸 수 있을까? 물음 후엔 늘 치열한 삶에서 피하려는 비겁한 내가 보이기에 충분히 사랑받았다는 의미가 새롭다 처음 그가 내밀었던 따뜻한 손의 체온이 그립다 내 옆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4 그의 시간은 나의 시간이기도 했다 같은 하늘, 같은 계절을 보내었기에 시간 속에 녹아든 그만의 일상을 추정해 볼 때 그의 일상 안으로 나의 시간이 저물기도 했다 그 자리에 있었단 해프닝만으로 그 자리를 채웠던 사람들 사이엔 먼 나라로부터 밀려왔다던 이방인의 숨 먼 곳으로부터 내게로 오는 별빛이 그렇고 쉼 없이 밀려왔다 되돌아가는 파도가 그랬다 그리고 그가 내게로 온 것이 그랬다 다른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가 내 곁에 내어준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새벽 커피 시인 화가 자의 행복

2024.03.1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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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친구의 강

1 : 70년의 강물이 흘렀다 / 70년의 해가 뜨고 / 70년의 밤이 지나갔다 / 어제도 걸었고 오늘도 걷고 있고, 내일도 걸어야 할 길 / 7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걸었던 길이 있었다 // 깃털이 비슷한 새가 모여 살 듯 / 멀리 시카고까지 날아와 같은 둥지를 틀었다 / “잘 지냈어?” “응 늘 그렇지 뭐” / 여전한 대답에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고 믿었다 /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고 /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었다 / 돌짝 밭을 힘겹게 걸을 때도 있었고 / 양팔을 펼치고 하늘을 나는 듯 세상을 다 가질 때도 있었다 // “뭐 사는 게 별거 있냐? 근대 요즘 좀 힘이 빠진다” / 가을엔 가까운 곳에 몇 일 여행 가자던 친구 / Emergency로 실려간 그가 위암 4기란다 / 치료를 안 하면 한달, 안 받으면 1년이란다 / 날은 어두워지고 머리 속은 온통 까만 카오스 // 70년의 강물이 흐르고 / 70년의 해가 뜨고 / 70년의 밤이 지나가는데 / 친구야, 병상의 하루를 잘라 나누어 살자 / 먼저이고 나중인 듯 함께 기대어 걷자 / 시카고 가을 들녘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며 / 널 위해 걸음 걸음 환한 꽃등 밝혀 놓으마     2: 단풍이 아름다운 숲길을 친구와 걷고 있다 / 바람이 불고 낙엽이 구른다 / 저 산도 옷을 벗는다 / 그저 풍경 일 뿐이다 / 나의 풍경은 사람 이었으면 한다 / 그 마음 이었으면 한다 / 알 것 같은 마음이 내 안에 담겨지는 /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이 되고 / 지는 노을에 눈시울 붉힐 줄 아는 / 별빛처럼 오랜 기다림의 이야기들이 낯설지 않은 / 한 사람 이었으면 좋겠다 / 한 방울의 피도, 살도 섞이지 않아도 / 내가 너 이고 / 네가 나 이듯 / 절절한 풍경이고 싶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불행합니까? 곳곳에 피어나는 들꽃. 부드러운 들판의 축제가 가슴에 사무치게 아름답습니다. 마침표를 찍은 풍경이 아니라 지어져가는 풍경입니다. 내내 곱게 내려 앉는 사랑입니다. 이어져가는 생명입니다. 꽃처럼 환한 미소입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자유입니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길을 걸으며 저 마다 허락된 시간 속에 살아갑니다. 결국 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어 가는 일입니다.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지어져 가는 사람입니다. 나무의 모양만으로는 나무를 알 길이 없습니다. 열매로 나무를 압니다. 열매가 나무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나무의 결국은 열매입니다. 결국 사람입니다. 사람이 되는 일입니다. 삶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사람의 무기는 근본이 되어질 때 비로소 힘이 납니다. 오늘 그대의 나라가 깊은 평안 속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상이 사라진다 하여도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꿀어 나머지 시간들을 가꾸기를 바랍니다. 친구의 강은 오늘 아침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흐른 만큼 짧아지기는 했어도 의연하게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은 먼동처럼 황홀하고 노을처럼 아름답습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B에게 〉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친구 시카고 가을 걸음 걸음 시인 화가

2023.10.3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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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10년 뒤가 궁금해졌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때쯤 내 모습이 궁금해졌지요. 아직은 쓸만한데 10년 뒤엔 볼 품 없겠죠? 배도 나오고 이마엔 주름이 깊게 파였을 게고 허리도 굽고 걸음도 느릿해지겠죠? 지금도 책읽기가 불편한데 눈도 시원찮아져 책과 담을 싸지나 않을까 걱정이네요. 친구들은 또 어찌 되었을까요. 몇몇은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다른 몇몇은 병마와 투병 중에 있을 수도 있구요. 누구는 집을 정리하고 노인 아파트로 갔고 누구는 따뜻한 곳을 찿아 저 남쪽 Florida로 이사 갈 수도 있겠죠. 좋은 친구와 헤어지기도 하고 멀리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보내기도 하겠죠.앞으로도 쭈욱 오늘같이 살리란 보장은 없지요. 갑자기 서글퍼 지네요. 살다 보니 사람들을 믿다가 큰 코 다치는 경우도 많이 봤어요. 그렇다고 나는 믿을 수 있냐는 물음엔 노에요. 나도 믿고 너도 믿었는데 너도 변하고 나도 변하더라구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주 작은 차이로 멀어지더라구요. 말투가 달라지고 행동이 어색해진 너에게 서운해져 괜히 나에게 화를 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내게 화를 내는 건 아주 잘 하는 거에요. 상황을 자세히 보면 내게 화낼 수도 있어요. 내게 물어봐야 했어요. 무엇 때문이었냐는 화살은 내게 향했어야 했어요. 이전도 그랬거니와 앞으로의 삶도 서로에게 진실이 아니라면 아무 의미 없어요. 진실이어야 해요. 무엇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한다든지, 내키지 않은 일을 마지못해 하는 것은 거짓이지요. 관계는 서로에게 진실일 때 지속되겠지요. 행여 이 편지를 10년 뒤 읽으신다면 그때 그 마음이 진실이었다고 말해준다면 참 좋겠네요.   오래 정말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 급기야 뒤란을 걸으며 달빛에 취하기도 했어요. 어슴푸레 깨어나는 하루를 맞으며 나를 달래야 했어요. 우리 이제 그만해요. 누가 내 마음을 알겠어요. 이게 뭐지? 더 알려고 하지 않으려 해요. 다만 달빛 내리는 뒤란에서 나의 모습, 또 너의 모습을 찿을 거예요.     높고 외롭게 살아요       가을잎처럼 우리 물들어 가는 건 어때요 //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 그냥 꼭 안아줘도 괜찮겠지요 / 고마웠고, 미안했고, 오래 잊지 않겠다는 약속과 함께요 /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늘을 나는 샤갈의 우체부 기분이었다구요 / 난 알아요 / 지금 내 일을 꾀나 잘 계획하고 분주히 해나가는 나를 보면 /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 한편으론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부인할 수 없어요 / 이렇게 세월이 흐르다 서로에게 잊혀지기도 하겠죠 / 젊은날 아픔이 사라진 것 같이 / 강물 흐르듯 떠밀려 멀어지기도 하겠죠 // 아무튼 좋아요 / 우리 이렇게 살면 어때요 / 꽃이 피면 봄이 왔다고 너무 소란 피우지 말고 / 비가 오면 젖는다고 피하지 말고 촉촉히 젖으며 살아요 / 한더위에 숨을 고르며 살다 / 노을처럼 붉어지는 가을잎처럼 물들어 함께 익어가기로 해요 / 하얀 눈밭에 눈사람처럼 얼어도 / 더운 숨 내쉬며 서로에게 뜨거운 사람이 되어 살아요 / 등불이 되어 어둔 밤 비춰 주며 / 어깨에 쌓인 눈 털어 주며 / 솔처럼 높고 외롭게 살아요 / 밤하늘 별을 올려다보며 / 이 별은 너의 별 저 별은 나의 별 하며 살아요 // 너의 소리를 나만 들을 수 있고 / 나의 소리를 너만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 허락한 시간 만큼 숨죽이고 살아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남쪽 florida 노인 아파트 시인 화가

2023.09.1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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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별을 세고 난 뒤에

한밤 중 전화를 받았다. 의식도 없이 계단을 내려와 덱크로 향한 문을 열었다. 밤 하늘 수놓은 별을 올려 보다 그만 눈물을 훔치고 말았다. 왜 우냐고 물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파란 하늘에 붉은 볼을 두 손에 묻고 덱크의 끝 계단에 주저 앉았다. 여전히 밤이었지만 푸른 불빛이 내 안에 반딧불처럼 떠 다니고 있었다. 칠흙 같은 어둠이었지만 빛나고 아름다운 밤이었다.     수선화 가득한 봄날은 가고 / 햇볕 따가운 날들도 지나고 / 당신 미소 같은 가을이 올 것임에 틀림 없다 / 손을 펼쳐 눈을 받고 / 하얀 입김을 쏟아내며 언덕을 오르고 있을 두 다리 / 14시간 앞선 걸음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알기에 / 그 이름 눈 속에 묻기로 한다 // 밟혀도 밟혀도 봄처럼 살아날 이름이여 / 이곳보다 무성한 잎들이 자라고 / 아픈 바람이 불고 / 가로수 길엔 안타까움이 물들고 있는데 / 줄 지은 그리움에 기대어 / 기쁜 눈물을 흘리면 어떠랴     살아있는 사람은 이별하지 않는다. 잠시 자기 별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다만 계절의 온도와 색깔이 내게 다가와 절규가 될 때 다른 시간이었던 날들은 견뎌야 했다. 함께 바라보지 못한 것들은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뿐 스치는 다른 풍경이 겹쳐올 때 시간의 강물은 거슬러 오를 것이다. 장편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처럼 남겼던 말이 기억난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삶의 근간이 된 흙으로 남겨질 때 인생에 대한 물음에 푸르를 수 있다면, 그때 그때 벗어놓은 옷 같은 시간이 내 삶이고 내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기쁜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근데 슬퍼지기도 하는 역설의 문장이 아닌가.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의 뜻은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이다. 이 말은 성경 요한복음 십 삼장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 예수께서는 “로마로-”라는 짧은 대답을 하신다. 네가 두려워 도망 가고 있는 바로 그곳 로마로 간다는 뜻이다. 그 후 베드로는 빠져 나온 로마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박해 받는 그리스도인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남은 삶을 불태운다. 마침내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을 당한다. 무엇이 그에게 이처럼 담대한 용기를 주었을까? 버려도 좋을 것들을 위하여 살던 나에게서 꼭 지키고 가져야 할 것들을 위해 기꺼이 남은 삶을 내어 놓고 죽음을 맞이 한다. 로마로 가는 길은 죽으러 가는 길이다. 넓고 편안한 길을 버리고 좁고 험난한 길을 택한 베드로의 길을 통해 오늘 나의 발걸음을 돌아 보는 시간을 가진다. 꽃이 피고 죽어야 열매가 자라고, 윗 잎이 자신의 위치를 내려 놓을 때 새 잎이 그 위로 자란다.     이런 역설의 삶에서 기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나의 삶이 나만의 삶이 아니고, 너의 삶이 너만의 삶이 아니기에, 서로에게 별이 되는 그런 삶은 향기를 풍기게 된다.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이 향기는 멀리 퍼져 나간다. 시간과 환경을 뛰어넘어 향기 나는 삶이 되어진다는 것은 죽음도 막을 수 없다. 죽음을 맞이한 그 곳에 설명하기 힘든 기쁨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산 위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만이 산 아래에서 변화된 삶을 증거할 증인이 될 수 있다.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로마로-” 베드로와 주님의 짧은 대화가 마음을 두드리는 밤이 오고 있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그곳 로마 성경 요한복음 시인 화가

2023.08.28.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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