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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너의 서 있는 자리

Chicago

2025.07.0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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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서있는 자리가 있지 / 서로를 바라보다 떠나는 자리일 수도 있지만 / 찬찬히 너의 자리로 걸어오는 저녁 / 깃털의 날림같이 공기를 밟고 있었네 // 잎사귀 위로 물방울 궅러 내리고 / 잔 가지마다 가득히 써 내려간 손 편지 / 서둘러 모아지는 빈자리마다 / 서둘러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지 // 너의 호흡은 향기가 되어 머물고 / 따뜻한 한낮의 햇살이 되어 녹아져 / 싸리문 사이로 스며드는 아픈 소리가 되었지 / 감추어진 곳까지 속절없이 부딪혀오는 // 너의 손을 스치는 들풀의 누음도 / 너의 앞을 쉬지 않고 흐르던 강물도 / 먼 길 돌아 다시 만난다 해도 / 너의 깊은숨을 알아차릴 수 있을까 // 너의 서 있던 빈자리 / 떠나간 엄마의 뒷모습 같아 / 서산에 걸친 노을처럼 / 비껴간 너의 그림자를 뒤쫓아 가네  
 
[신호철]

[신호철]

나의 자리가 있고 너의 자리가 있다. 누군가의 자리에는 누군가의 자리에 어울리는 저만의 자리가 있다. 나무의 자리에는 나무가 있고 꽃의 자리에는 꽃이 있다. 넓은 들에는 들풀의 자리가 있고 흐르는 강에는 물결의 자리가 있다. 넓은 바다에는 밀려오는 파도의 자리가 있고 밤하늘에는 별들의 자리가 있다. 깊은 숲에는 새들의 자리가 있고 그 아래 덤불에는 들짐승들의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땀을 흘리기도 하고 허리를 펴고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기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한없이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걸으며 넓은 세상을 마주하면서 위로받기도 하고 무상으로 내리는 선물 같은 햇살과 마주하며 치유되기도 한다.  
 
너의 서 있는 자리에 비가 쏟아지기도 하고 나의 자리에 눈이 펑펑 내리기도 한다. 우리는 움직이면서 그 자리를 지켜낸다. 다른 풍경을 마주하면서 생각하고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고 걸음이 느려지면서 나의 자리를 뒤돌아보게 되지만 이때 또한 내가 서있는 자리가 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어떠한가. 나무는 나무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보이는 줄기와 잔가지만큼 보이지 않는 땅속으로 뿌리를 뻗는다. 그 뿌리가 너무 얕으면 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마침내 쓰러지고 만다. 나무는 움직이지 못하는 반면 치열하게 땅속으로 뿌리를 내려서 있는 자리를 견고히 한다. 꽃들의 자리를 오래 버텨주기 위해,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게 식물은 꽃을 바치는 꽃대궁을 다른 줄기에 비해 단단히 자라게 한다. 그래야 무거운 꽃들을 꺾이지 않고 오래 지탱하게 된다. 사람은 사람대로 동식물은 그것들대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일생을 버티고 살아간다.
 
너의 서 있는 자리는 그만큼 중요하다 / 너의 버텨내는 아픈 소리가 들려올 때 / 나는 잠들었던 세포들을 깨운다 / 조금만 더 버티어보라고 / 마지막 힘을 모아보라고 / 저무는 노을을 향해 소리쳐본다 / 너의 서 있는 빈자리 / 비껴간 너의 그림자는 / 떠나간 엄마의 뒷모습만큼 / 속절없이 부딪혀 온다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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