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밀집 거주 지역인 풀러턴의 한 공원에서 한국전쟁 75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번 행사는 LA총영사관 주최로 진행되었으며, 참전 미군 용사 수 명과 해외 거주 한국군 참전 노병 10여 명이 참석하여 의미를 더했다.
행사가 열린 공원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용사 3만 6000여 명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 속에서 고귀한 희생과 자유를 위한 연대를 상기시키는 영원한 표상이자 증거가 되고 있다. 특히 이 기념비는 미주 한인 사회가 정성을 모아 건립한 자랑스러운 한국전쟁 기념물로, 많은 이들이 찾아 애국심을 고취하고 있다.
이 기념비를 볼때마다 우리 참전 노병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한 가지 아쉬움이 남아있다. 조국의 위기에 목숨을 바친 13만 8000여 명의 한국군 전사자들의 넋, 그들의 헌신과 희생은 그 어디에도 새겨져 있다. 그들의 영혼을 기리는 작은 비석 하나조차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송구스러움이 노병들의 가슴에 응어리져 있다.
90대에 이른 참전 노병들은 살아남은 자로서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죽은 전우들의 이름이 땅에 남은 마지막 참전용사들의 눈빛 속에, 감사와 평화를 비추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이름이 아닌 숫자로만 기억되는 이들의 희생을, 이제는 이름과 사연이 있는 영혼들로 되돌려야 한다는 바람이다.
그 처절했던 전투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이들은 전사한 전우들에게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 김일성 고지, 스탈린 고지, 백마고지, 수도고지, 피의 능선, 철의 삼각지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투에서 아침에 고지에 올라간 신임 소대장이 저녁에 시체로 내려오는 광경을 목격하거나 상상만 해도 가슴이 찢어진다고 토로한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죽겠노라”는 노래처럼 죽음으로 나라를 지켰다는 자부심은 점차 시들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현재 잘사는 대한민국의 과거에는 절대 공짜가 아닌 피와 땀이 스며있음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름들을 지역사회가 세대를 이어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영혼이 담긴 ‘충혼비’, 이 작은 비석은 단지 돌덩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억이고, 정체성이며,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역사다. 미주 한인 사회가 다시 한번 뜻을 모은다면, 이 소망은 현실이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희생에 감사하며, 자유를 위해 싸운 우방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 미군 용사들의 헌신을 잊지 않고 매년 추모식을 거행하는 것은 당연하고 고귀한 일이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우리 형제와 전우의 희생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는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뜻을 함께하여 동참하는 손길은 결코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는다. 이 땅에 남은 마지막 참전용사들의 가슴속에, 감사와 평화를 심는 그날까지 우리 동포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성원을 부탁하고 싶다.
이제 기약 없는 여생을 보내는 참전 노병들은 간절히 말한다. “전우들의 이름 앞에서 경례 드리고 싶다”고. 젊음의 꽃은 지고 부흥의 꽃을 피운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전쟁 영웅들의 얼을 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작고 소박한 소망, 한국군 전사자 충혼비 하나를 세울 수 있다면 그것은 단지 돌비석이 아닌 우리 민족의 기억과 존엄,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