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법체류자 부모들 사이에서 자녀 보호권 위임장을 작성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추방에 대비해 미국 시민권자인 친척이나 지인에게 자녀 보호 권한을 넘기는 법적 절차다. 시민권자인 자녀가 미국에 남아 아메리칸 드림을 이어가길 바라는 부모들의 절박한 선택이다. 이들은 법률단체의 도움을 받아 학교 등록, 의료 동의 등을 위임하는 ‘보호자 권한 진술서’를 준비하고 있다.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불체 부모 밑에서 자라는 시민권자 아동은 약 562만 명에 달하며, 그 중 약 200만 명은 6세 이하다. 절반 이상은 부모 모두가 불체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그의 저서 '불구가 된 미국: 어떻게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인가(Crippled America: How to Make America Great Again)(2015년)'에서 이런 아동들을 '앵커 베이비(anchor baby)'라고 불렀다. 출생시민권 덕분에 부모가 불법체류자라도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을 얻은 자녀들이 부모의 영주권 신청에 도움을 주고 다른 친척들을 미국으로 초청하는 거점(anchor.닻)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출생시민권은 1868년 제정된 수정헌법 제14조에 근거한다. ‘미국에서 출생하거나 귀화하고, 그 관할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은 미국 시민이다(All persons born or naturalized in the United States and subject to the jurisdiction thereof are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and of the State wherein they reside)’는 조항이 1898년 ‘왕김악(Wong Kim Ark) 사건’을 통해 출생시민권으로 확립됐다. 미국에서 태어난 외국인 부모의 자녀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였다. 오늘날까지 속지주의 국적 원칙의 근거가 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 1월20일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불법 이민을 부추기는 출생시민권을 제한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불법체류자나 임시 체류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기에게는 미국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정헌법 14조는 흑인을 미국 시민이 아니라고 판결한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Dred Scott v. Sandford) 사건(1857)’의 오류를 시정하기 위해 제정됐다고 주장한다. 즉 미국에서 태어난 흑인을 미국 시민으로 인정하기 위한 법일 뿐,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아기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은 수정헌법 14조를 잘못 해석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민주당 주지사가 이끄는 캘리포니아 등 22개 주와 워싱턴 DC는 행정명령이 위헌이라며 소송을 제기했고, 일부 하급심은 행정명령의 효력을 일시 중단했다. 그러나 연방 대법원은 지난 6월 27일, 하급심의 결정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은 주에까지 전국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결과, 텍사스·플로리다·조지아 등 28개 공화당 주에서는 한 달간의 유예기간 후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이 시행될 전망이다.
이번 판결은 한인 사회에도 큰 파장을 주고 있다. 캘리포니아나 뉴욕처럼 한인 밀집 주는 이번 조치에서 제외됐지만, 비영주권 체류자, 학생·취업비자 소지자들의 자녀들은 미국에서 태어나도 시민권을 자동으로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 한인들은 출산을 위해 출생시민권이 유지되는 캘리포니아 등으로 ‘원정 출산’을 고민하고 있다.
현재 연방 대법원은 보수 성향 6명, 진보 성향 3명으로 구성되어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우호적인 판결을 이어가고 있다. 출생시민권 제한 행정명령의 위헌 여부는 오는 10월 판결이 내려질 예정이다. 이 결과에 따라 수백만 명의 이민자 가족들의 운명이 좌우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