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은 다양한 것이 특징이자 매력이다. 성공하겠다는 꿈의 크기도 다르고, 국가에 대한 애정과 헌신의 깊이도 차이가 있다. 이민자들은 특히 큰 바람을 갖는다. 돈도 많이 벌면 좋겠고, 아이들이 좋은 교육을 받아 성공하며, 모든 것이 풍요롭길 기대하는 것이다. 이민자들의 꿈은 어떻게 진화해왔을까. 세대와 미국 사회가 달라지고 있으니 아메리칸 드림의 개념도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다. 사실 70~90년대 한인들이 미국에 도착하면 일상에서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생존’이 아니었을까. 남의 나라, 다른 언어와 문화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다. 이런 질긴 버팀이 성공의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도 같은 생각일까? 지금 젊은 세대는 생존을 넘어 ‘안정’을 중요한 목표로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으로 ‘화려한 성공’을 위한 무리한 투자보다는 꾸준하고 편안한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사바나 예술대학(SCAD)이 내놓은 연구 결과에 따르면 Z세대(1996~2012년생)와 밀레니얼 세대(1981~1995년생)는 아메리칸 드림을 주택 마련, 안정적인 직업, 의료 접근성, 교육 기회 등 기본적인 삶의 안정을 이루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이 오히려 과거보다 훨씬 힘들고 불안정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아메리칸 드림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멀게 느껴진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보고서는 특히 ‘재정적 안정’이 젊은 세대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고 강조했다. 연구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과거에는 영화배우가 되거나 저택에 사는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었지만, 지금 젊은 세대는 그런 수준의 꿈을 꾸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세대가 느끼는 가장 큰 장애물은 주거비와 의료비다. 조사에 따르면 69%의 젊은 응답자가 주택 소유를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 요소로 꼽았지만, 동시에 가장 큰 장벽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첫 주택 구매자의 평균 연령은 현재 40세로 높아졌으며, 많은 젊은 층이 주택 구매 자체를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엔 “꼭 무리해서라도 집을 살 필요가 있느냐”는 반문도 들어있다. 주택 구매를 목표로 허리띠를 졸라매던 부모 이민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또한 젊은 응답자의 69%가 ‘의료 접근성 확보’가 중요하다고 답해 전체 성인 평균(43%)보다 훨씬 높은 비율을 보였다. 이런 인식에는 달라진 경제 환경이 큰 몫을 했다. 일단 취업 시장 위축, 고물가, AI(인공지능)로 인한 일자리 경쟁, 정치·지정학적 불안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특히 젊은 응답자 100%가 학자금 대출을 주요 장애물로 꼽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은퇴 후 소셜연금에서도 삭감할 정도로 학자금 융자는 실제 평생 족쇄가 되기도 한다. 한 분석에 따르면 현재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은 평생 약 50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물가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편안한 삶’의 기준이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자동차, 양질의 의료 서비스, 자녀 교육, 보육 비용, 은퇴 준비 등이 모두 필수 요소로 인식되면서 기본적인 안정에 필요한 비용이 점점 더 비싸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가 야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바뀐 것이라고 본다. 성공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먼저 월 페이먼트와 의료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메리칸 드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의미가 변한 것이다. 청년들은 부모세대와 달리 성공을 안정적인 삶, 공동체 소속감, 개인의 행복 추구 등 다양한 형태로 재정의하고 있다. 이런 청년들의 꿈을 한인 어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최인성 / 경제부 국장중앙칼럼 젊은이 성공 아메리칸 드림 현재 아메리칸 주택 구매자
2026.03.17. 20:02
자동차 구매에 나선 소비자들이 가장 먼저 참고하는 매체 중 하나가 바로 비영리 소비자 단체가 발행하는 컨수머리포트다. 소비자들에게 컨수머리포트의 ‘추천’ 마크는 구매 여부를 결정짓는 가장 신뢰도 높은 지표로 통하기 때문이다. 컨수머리포트는 광고를 받지 않고 제조사 협찬 차량 대신 직접 구매한 차량으로 테스트한다. 또한 수십만 명의 실제 차주 데이터를 기반으로 신뢰성을 평가해 일종의 품질 성적표로 통한다. 컨수머리포트의 평가 결과는 판매 실적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지난 2018년 제동 거리가 대형 픽업트럭 수준으로 길게 측정됐다며 테슬라 모델 3를 ‘추천’에서 제외하자 일론 머스크가 즉각 조사에 착수해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로 대응한 것은 이 매체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그런 점에서 최근 몇 년간 컨수머리포트 평가에서 나타난 변화는 한국차에 경고음이 되고 있다. 최근 발표된 2026년 최고의 신차(Top Picks) 톱10 가운데 일본차들이 신뢰성과 소비자 만족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절반 이상을 차지한 반면 한국차는 단 한 대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한국차가 마지막으로 이 리스트에 포함된 것은 지난 2023년 기아 텔루라이드와 현대 싼타페 하이브리드였다. 이후 최근 3년 동안 한국차는 추천 모델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유는 단순히 성능 때문만은 아니다. 컨수머리포트는 도로 테스트뿐 아니라 예상 신뢰성, 안전성, 소유자 만족도를 종합해 평가한다. 최근 조사에서 현대와 기아 전기차 소유주의 2~10%가 충전 불능이나 주행 중 동력 상실과 같은 문제를 경험했다고 응답했는데, 이는 일반 전기차 평균 문제 발생률이 1% 이하라는 점과 비교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는 부품이 바로 ICCU(통합충전제어유닛)로 고장이 발생할 경우 전기 시스템이 멈추거나 차량이 주행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 문제는 이 부품이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를 사용하는 여러 모델에 공통으로 장착된다는 점이다. 효율성과 원가 절감을 위해 플랫폼을 공유하는 전략은 생산 측면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특정 부품에 문제가 발생하면 동시에 여러 브랜드와 차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구조적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실제로 현대차 아이오닉 5·아이오닉 6, 기아 EV6·EV9, 제네시스 GV60 등 일부 전기차에서 비슷한 사례가 보고되면서 리콜과 레몬법 소송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판매 성적만 보면 한국차의 전기차 전략은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미국 내 전기차 시장에서 테슬라에 이어 판매량 2위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디자인과 충전 속도, 가격 경쟁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줬다. 그러나 기술 선점이 소비자 신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동시에 드러났다. 어떤 제품이든 “기술력은 앞서지만, 품질이 불안하다”는 인식이 퍼질 경우, 신뢰도는 빠르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보조금 정책 폐지로 전기차 수요 성장세가 일시적으로 둔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조지아주의 메타플랜트에서 전기차뿐 아니라 하이브리드 모델을 함께 생산하는 투트랙 전략으로 방향을 수정한 것도 이런 현실을 반영한 조치로 알려졌다. 따라서 한국차가 직면한 선결 과제는 단순히 판매 확대가 아니라 완성도와 품질 안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신뢰성 회복이 아닐까 싶다. 기술력은 따라잡을 수 있지만, 신뢰는 한 번 흔들리면 회복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컨수머리포트의 평가는 소비자들에게 구매 기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 성적표에서의 부진은 단순한 이미지 문제가 아니라 시장 경쟁력과 직결된다. 결국, 한국차가 다시 컨수머리포트 추천 리스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지는 소비자의 신뢰를 얼마나 빠르게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다. 박낙희 국장/경제부중앙칼럼 기아차 추천 추천 모델 테슬라 모델 소비자 만족도
2026.03.12. 20:25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이라는 표현은 1931년 역사학자 제임스 트러슬로 애덤스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저서 ‘미국의 서사(The Epic of America)’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부와 권력의 꿈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능력과 성취에 따라 더 나은 삶을 살 기회가 있는 나라에 대한 꿈”이라고 설명했다. 출신, 배경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는 사회, 그것이 미국이 세계에 약속했던 이상이었다. 20세기 동안 이 개념은 하나의 사회적 상징이 됐다.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미국으로 몰려든 이유도 바로 이 기회의 약속 때문이었다. 집을 사고, 자녀를 교육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단순한 경제적 성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가능성 자체를 의미했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나타나는 변화는 이 오래된 서사를 흔들고 있다. 이제는 미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보다 미국을 떠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대공황 이후 처음으로 순이주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미국 시민들이 유럽과 멕시코, 캐나다,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동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을 떠나는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 현상을 일시적 유행으로 보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미국 사회 내부의 구조적 문제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지만 동시에 생활비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주거비와 의료비, 교육비는 중산층에게도 큰 부담이 됐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뿐 아니라 중소 도시에서도 집값과 렌트비는 계속 상승하고 있다. 반면 세계화와 디지털 기술은 삶의 공간을 바꿔 놓았다. 원격 근무의 확산으로 일터와 거주지가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 기업에서 일하면서 유럽이나 동남아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높은 미국 임금과 상대적으로 낮은 해외 생활비가 결합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중산층이 등장했다. 삶의 질에 대한 인식 변화도 중요한 요인이다. 유럽의 많은 도시는 보행 중심의 도시 구조와 공공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치안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총기 사건과 정치적 갈등이 반복되는 미국 사회와 비교하면 일상적 안정감이 더 크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이러한 요소는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미국 시민이 해외로 이동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미국 경제의 힘 덕분이라는 사실이다. 실리콘밸리와 금융 산업이 만들어낸 고임금과 원격 근무 환경 때문에 많은 미국인이 해외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할 수 있다. 미국 경제의 호조가 역설적으로 미국을 떠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든 셈이다. 그렇다면 진짜 아메리칸 드림은 무엇일까. 애덤스가 말했던 아메리칸 드림은 부자가 되는 꿈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였다. 노력한 만큼 기회를 얻고 가족과 공동체 속에서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 사회였다. 지금 미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바로 그 기본적인 약속이 흔들리고 있다는 데 있다. 결국 삶의 비용과 사회적 안정이라는 두 가지 문제로 압축된다. 미국이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나라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기회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있다. 아메리칸 드림은 미래를 믿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그 핵심이다. 미국이 다시 매력적인 삶의 공간으로 남기 위해서는 경제적 기회뿐 아니라 삶의 질과 사회적 안정성을 동시에 회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오래된 이야기의 방향은 앞으로도 계속 바뀌어 갈 가능성이 크다. 이은영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아메리칸 드림 아메리칸 드림 사회적 상징 사회 내부
2026.03.10. 20:19
추방은 삶의 궤적에 주홍글씨가 새겨지는 아픔이다. 추방자라는 낙인이 찍힌채 자신이 나고 자란 한국으로 쫓겨난 이들은 이질감 속에 평생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전역에서는 불법 체류자 단속이 강화되고 있다.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추방 정책은 법적으로는 ‘이민법 집행’이라는 분명한 명분을 갖는다. 그러나 법과 제도가 모든 현실을 포괄할 수는 없다. 정책 이면에는 분명 그늘이 존재한다. 본지가 최근 보도한 한인 추방자 기획 기사는 바로 그 지점을 조명하는 데서 출발했다. 법적 판단이나 제도적 결과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각지대를 기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지난해 말 본지 영어 매체 코리아데일리US(www.koreadailyus.com)에 게재된 영문 기사를 한국어권 독자를 위해 한글로 재구성해 다섯 차례에 걸쳐 소개했던 이유다. 추방자들의 사연은 기구하다. 미국에서는 신분 때문에 늘 숨어 살아야 했고, 단속과 추방의 공포 속에서 일상을 이어가야 했다. 결국 강제 추방을 당하거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해 자진 출국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났다는 상실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겪게 된다. 그들에게 한국은 법적으로는 ‘모국’일지 몰라도 언어, 문화, 사회적으로는 낯선 땅이다. 한국에 연고가 없거나 생활 기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또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여기에 추방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부정적 시선과 선입견에 시달릴 수 있다는 두려움도 따른다. 대부분 자신의 과거와 처지에 대해 공개하기를 꺼리는 이유다. 그동안 언론의 수많은 보도는 대부분 추방을 둘러싼 법적 절차나 정책 논쟁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추방 이후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히 조명하지 않았다. 이번 기획 취재는 추방이라는 결과 이후에도 이어지는 현실, 낯선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고충, 그리고 누적된 삶의 상처를 기록하려 했다. 물론 다른 시각도 있다. 불법 체류 자체가 위법이고, 추방자 가운데에는 중범죄 전력이 있는 사례도 적지 않은데 왜 그들의 어려움에 사회적 관심을 기울여야 하느냐는 시선이다. 그러나 이번 보도의 목적은 불법 체류라는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특정 입장을 옹호하는 데 있지 않다. 법적 또는 정치적 판단을 대신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제도적 결정에 따른 결과 이후에 처한 인간의 삶과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고 판단했다. 범죄 전력이나 불법 체류자라는 사실과 별개로 그들 역시 기본적인 존엄과 권리를 가진 존재다. 만약 사회가 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공적 담론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 자체가 또 다른 형태의 배제와 침묵을 낳을 수 있다. 특히 당사자들조차 감추고 싶어 하는 사연과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이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공론의 장으로 옮기는 증언자의 역할도 언론의 몫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인 추방자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나고 자란 땅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들의 존재와 현실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추방보다 더 슬픈 건 철저히 외면받는 삶일지도 모른다. 이번 보도가 추방이라는 사건을 단편적으로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이후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추방 이후 그들이 어떤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잠시나마 살펴보고, 공공의 관심을 환기하는 출발점이 됐으면 한다. 장열 / 사회부장중앙칼럼 추방 외면 한인 추방자 추방 정책 강제 추방
2026.03.08. 17:19
최근 어바인 한인 사회에서 가장 화제가 된 뉴스 중 하나는 강석희 전 시장의 정계 복귀 선언이다. 강 전 시장은 최근 11월 열릴 어바인 시의회 1지구 의원 선거에 출마한다고 밝혔다. 비교적 최근 어바인에 둥지를 튼 한인은 그에 대해 잘 모를 수 있겠지만, 오랜 기간 어바인에 산 이들 중 그를 모르는 이는 매우 드물다. 강 전 시장은 지난 2004년 최석호 현 가주 상원의원과 나란히 당선돼 한인으로선 처음으로 어바인 시의회에 입성했다. 한인 동반 당선이란 낭보는 어바인은 물론 전국의 한인 사회, 한국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강 당시 시의원은 2008년에는 시장 선거에 출마, 전국 최초의 한인 직선 시장 당선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2010년 재선에 성공한 그는 2012년 임기 제한 규정에 따라 시의회를 떠났다. 강 전 시장의 뒤를 이은 이는 최 의원이다. 최 의원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시장을 지냈다. 강, 최 전 시장이 시의원과 시장을 지낸 기간 어바인은 많은 발전을 이뤘고, 한인 사회도 크게 성장했다. 한인 시의원이 없던 시절, 한인들은 시의회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대변해줄 이가 없다는 것을 많이 아쉬워했다. 한인 사회의 대표성을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어바인은 오렌지카운티에서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다. 그런데도 2007년까지 어바인 시내엔 한인 마켓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2003년 문을 연 프레시아마켓이 ‘어바인 첫 한인 마켓’을 표방했지만, 실제 이 마켓은 터스틴에 있었다. 당시 한인 마켓 업계 관계자들은 어바인에 한인 마켓을 내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푸념했다. 한인 시의원 2명이 배출된 지 3년 뒤인 2007년 11월 마침내 시온마켓이 어바인에 문을 열었다. 이후 H마트를 비롯한 한인 마켓이 잇따라 시내에 매장을 마련했다. 마켓과 함께 다른 한인 업소들도 앞다퉈 어바인에 진출했고, 이와 함께 한인 인구도 늘며 어바인 한인 사회도 팽창했다. 어바인 시가 한국의 서초구와 자매 도시, 노원구와 우정의 도시 결연을 한 것도 강, 최 전 시장 재임 시절의 성과다. 당시엔 한국 지방자치단체 관계자들의 시청 방문도 잦았고 어바인 한국문화축제도 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오렌지카운티의 한인 정치사를 논할 때 강, 최 전 시장을 빼놓을 수 없다. 카운티 최초의 한인 시의원은 1992년 당선된 고 정호영 전 가든그로브 부시장이다. 지난 2000년 정 부시장이 퇴임한 뒤 4년 만에 등장한 강, 최 전 시장 이후 한인 사회는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됐다. 2010년 이후 라팔마, 부에나파크, 풀러턴, 라구나우즈에서 한인 시의원이 잇따라 당선된 배경엔 강, 최 전 시장 이후 한인 후보에게 몰표를 주면 한인이 시의원에 당선되고, 한인 사회도 한층 발전할 수 있다는 유권자들의 믿음과 결집이 있었다. 강, 최 전 시장이 시의회를 떠난 후 단절됐던 어바인의 ‘한인 대표성’은 2020년 태미 김씨가 한인 여성 최초로 시의원에 당선되면서 다시 이어졌다. 김 시의원은 동료 시의원들의 투표로 부시장도 지냈지만, 2024년 시장 선거에서 낙선했다. 강 전 시장은 끊어진 한인 시의원 명맥을 2년 만에 다시 잇겠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어바인의 현직 타인종 시의원이 한인 사회를 외면 또는 홀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인 사회의 사정은 한인 시의원이 가장 잘 알게 마련이다. 게다가 강 전 시장은 어바인 시 사정에 밝아 시의회 내 복잡한 역학관계를 풀어낼 적임자로 꼽힌다. 시의회를 떠난 지 14년 만에 다시 시의원 선거에 출마한 강 전 시장이 22년 전의 승리를 재현하려면 1지구 한인 유권자의 결집이 필요하다. 강 전 시장과 어바인 한인들이 ‘어게인 2004’를 이뤄내길 바란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강석희 어게인 어바인 한인 한인 시의원 어바인 시의회
2026.03.03. 20:16
#1 숏츠 동영상들을 보다 보면 제법 많은 광고를 접하게 된다. 온갖 제품과 서비스들이 홍보되는데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이 AI(인공지능) 언어학습 앱들이다. 학습된 AI 선생과 대화를 통해 영어를 배우면 3주 만에 ‘원어민처럼’ 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세상에나. 게다가 예쁘장하고 발음도 또렷한 AI 로봇은 매우 친절하게 모든 것을 책임지고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90년대에 언어습득 이론을 전공한 필자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언어 습득과 학습 이론이 가장 번창했던 2000년대 전후에 쌓인 모든 학자의 업적이 도서관 지하 창고에 영원히 수장되는 느낌이랄까. 정말 우리가 연구하고 이룩한 과학적 성과는 무한 훈련과 재생, 복제로 대체될 수 있을까. 수십 년 쌓아온 노력이 실용을 잃어버린 추억이 되고 있다고 느꼈다면 과한 것일까. #2 챗지피티(ChatGPT)를 쓰다가 우연히 ‘신은 존재하는 것이냐’고 대뜸 물었다. 10초 정도 지나 데이터센터가 보내온 답은 흥미로웠다. 자신의 소신에 찬 확답보다는 기존 학자들이 고민한 내용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있다는 백과사전식의 답변이 이어졌다. 맨 마지막 문장이 백미였다. “그런데 이용자님, 철학적 물리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물으시나요? 아니면 요즘 좀 사는 게 힘들어서 그러신가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이런 학습은 어떤 방식으로 시켰기 때문에 가능했을까. 다른 AI들도 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인지 궁금하다. 일단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답했더니 만약 힘들다면 상담할 장소와 연락 방법을 안내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우리가 신을 찾는 또는 궁금해하는 여러 이유를 우리는 위와 같은 답변을 이용해 복제 기계를 학습시키고 있다.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AI의 한계는 분명해 보이는 대목이다. #3 우스운 이야기들을 모아서 전하는 인플루언서가 올린 휴대전화 캡처 사진 때문에 한참을 웃었다. 한 남성이 텍스트로 여자친구에게 사과하는 내용을 써서 보냈는데 말미에 챗지피티가 ‘더 완곡한 내용으로 감정적인 단어를 사용해 다시 써드릴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실수로 함께 보낸 것이다. 사실 직장과 사업체에서 AI를 이용해 글 내용을 다듬고 문법을 고치며, 더 설득력 있는 문구를 쓴 것은 꽤 오래전에 시작됐다. 받는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도 인공지능의 도움을 상당 부분 받고 있다. 라디오나 TV에서 뉴스 전달자로 AI를 동원하듯이 앞으로는 로봇이 화면상이나 실제로 존재하면서 우리를 대신해 사과도 하고 사랑표현도 하게 될 것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곧 편해질 것이라는 것이 아직은 불편하다. 대규모의 학습 데이터와 인간을 흉내 내는 기술적 조합이 이제 인간보다 더 나은 기계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과외 선생도, 외국어 교사도, 하다못해 가드너에게 보내는 해고 텍스트 내용도 이제 AI에게 먼저 묻고 시작한다. 법적 분쟁은 물론 환자들은 자신의 심박수와 콜레스테롤 수치를 근거로 투약 여부를 AI에게 묻고 결정한다. 옳고 그름을 따질 시간은 없이 언제 어떻게 먼저 수용하느냐가 관심의 중심이 된 것 같다. 언어를 사람과 만나 배우는 것이 가장 적합한 이유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위해서 해당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글은 우리만의 경험과 마음이 담기기 때문에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AI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도구와 도구를 활용하는 주인은 구분하자는 것이다. 이 글은 AI를 거치지 않은 것이다. 비슷한 주제로 비판적인 글을 써달라고 한다면 AI 선생이 더 나은 칼럼을 썼을까? 최인성 / 경제부 국장중앙칼럼 선생 정답 과외 선생 ai 선생 언어습득 이론
2026.02.17. 19:47
읍내 중학교에 다니면서 신문의 재미를 처음 느꼈다. 1990년대 중후반까지도 아날로그 문화가 대세였다. 신문, 잡지 등 주간지, 월간 만화책, 라디오와 TV, 비디오테이프가 바깥 세상을 알려주는 유일한 창이었다. 읍내 중학교에서 새벽 신문 배달을 하던 친구는 남은 신문을 학교에 가져왔고, 그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세상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활자로 읽는 세상과 TV로 보고 듣는 세상은 비슷하면서도 분명 다른 맛이 있었다. 신문은 사건의 전후 관계와 행간의 의미를 설명해 줬고, 그만큼 생각할 거리도 던져줬다. 중학교 2학년 때 사회 선생님이 내주신 신라시대 신문 만들기 숙제가 생애 첫 기사 쓰기였다. 친구와 큰 도화지에 지면을 짜고 일간지 신문을 최대한 흉내 냈다. 신라시대 역사 내용을 일간지 방식으로 기사화하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즐거움이 컸다. 시내 고등학교로 옮기면서 독서실이 있는 상가 건물에 배달된 신문을 도둑처럼 읽었다. 등교 전 상가 교회 현관에서 읽던 일간지는 서울과 수도권 관련 소식 창구였다. 가끔 미국등 해외소식을 읽을 때면 이런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혼자 상상만 했다. 당시 대학 입시를 앞두고 논술시험이 유행해 고등학생에게 일간지 사설의 정독과 베껴쓰기도 유행처럼 번졌다. 글쓴이의 이름이 없는 사설은 읽어도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를 때가 많았고, 사설 속 현학적 단어가 뭔가 있어 보이기도 했다. 사설처럼 논리정연하게 논술을 쓰라는 선생님의 닦달을 들을 때면 ‘말이 되는 말씀을 하시라’며 속으로 눈높이 교육의 중요성을 외치기도 했다. 신문 속에서만 접했던 서울은 촌놈을 주눅 들게 했다. TV 속에서만 보던 한강대교를 건너면서 속속들이 더 알고 싶다는 충동도 컸다. 교내 신문사 학생기자, 학교 홍보실 홍보도우미 기자, 대학내일 학생리포터, 세종문화회관 홍보기자, 현대모비스 학생리포터 경험은 1000만 명이 살아가는 도시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 준 좋은 기회였다. 특히 끙끙거리며 쓴 기사가 신문과 잡지에 실렸을 때 느꼈던 희열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무엇보다 좋아서 기사를 썼을 뿐인데 원고료와 장학금까지 받게 된 사실은 적지 않은 놀라움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돈까지 벌 수 있다. 업으로 삼고 싶었다. 인생을 함부로 예단하지 말자고 다짐한 건 인천공항 상공에서였다. 일간지 기자로 미국까지 오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미국 한인 사회라는 존재가 삶의 중심축이 됐고, 일하는 터전이 됐다. 1903년 1월 13일 시작됐다는 미국 한인 사회 역사와 발전, 그 세월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에 매료될 때도 많았다. LA, 샌프란시스코, 뉴욕·뉴저지, 시카고, 애틀랜타는 물론 알래스카, 인디애나, 노스캐롤라이나, 애리조나 등의 작은 소도시에도 한인 사회가 뿌리내린 모습을 직접 보고 전할 때면 그 소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음에 ‘기자 하길 잘했다’는 기쁨도 누렸다. 이민 선조의 치열함과 서러움, 이민 1세대의 수줍음과 자부심, 2~3세대의 쿨함과 애증을 글로 담으려 노력했지만 제대로 된 역할을 했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저마다의 이야기 속에 눈물과 기쁨, 행복과 후회가 있지만 우리 모두가 소중한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디지털 시대, 인공지능(AI) 시대라고 한다. 전통 미디어인 신문과 방송은 격변하는 세상을 어떻게 담아야 할지 고민도 많다. 그럼에도 기자의 역할은 여전히 중요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관심을 보여줄 것이라고 믿는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기자로 쓰는 마지막 칼럼을 통해 지난 25년 동안 소중한 이야기를 공유해 준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김형재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주인공 일간지 신문 교내 신문사 신문 잡지
2026.02.15. 18:20
“오프라인 매장은 끝났다.” 이런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존재가 있다. 바로 반스앤노블이다. 디지털에 밀려 사라질 상징처럼 여겨졌던 반스앤노블은 ‘서점의 부활’을 선언하며 올해 60여 개의 새 매장을 연다. 이미 아이다호, 뉴욕 등에 매장을 열었고 올해 캘리포니아, 시카고, 텍사스, 플로리다 등에도 문을 열 예정이다. 종이책과 서점 문화가 다시 동네의 중심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서곡이다. 반스앤노블은 독서 문화의 흥망을 그대로 겪어온 브랜드다. 이 거대한 서점 체인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오프라인의 몰락이 아니라 진화를 보게 된다. 반스앤노블의 시작은 놀라울 만큼 소박했다. 1873년, 뉴욕에서 찰스 반스가 연 작은 서점은 교과서와 참고서를 파는 곳이었다. 화려함도, 문화 공간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핵심은 단 하나, 책을 싸고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상업 서점이었다. 이후 반스 가문에 노블 가문이 합류하면서 이름은 오늘날의 반스앤노블(Barnes & Noble)로 완성된다. 초창기 반스앤노블은 지식의 낭만보다 ‘유통의 효율’에 충실한 서점이었다. 변화는 1970~80년대 찾아왔다. 동네 서점과 중소 체인을 인수하며 규모를 키운 반스앤노블은 빅박스 서점 모델을 도입해 넓은 공간과 방대한 재고, 머물 수 있는 좌석을 갖췄다. 여기에 1990년대 스타벅스가 들어오면서 결정타를 날린다. 책을 사러 왔다가 커피를 마시고, 다시 책장을 넘기는 공간. 이때 반스앤노블은 단순한 서점을 넘어 하루를 보내는 장소가 된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0년대, 아마존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온다. 온라인 가격 경쟁, 전자책과 킨들의 등장, 클릭 한 번이면 책이 집 앞에 도착하는 시대. 여기에 본사 중심의 획일적 운영은 지역성과 개성을 지워버렸다. 매장은 줄어들고 실적은 악화됐다.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서점은 끝났다.” 하지만 반스앤노블의 역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책은 온라인에서 살 수 있지만, 머무는 경험은 오프라인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 이 단순한 진실을 반스앤노블은 15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증명해 왔다. 반스앤노블의 진짜 반전은 운영 철학을 완전히 뒤집은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 전환점이 된 해가 2019년이다. 그해 반스앤노블의 최고경영자(CEO)로 영입된 인물은 제임스 던트. 영국에서 대형 서점 체인 워터스톤스를 되살린 장본인이다. 그의 등장은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서점은 데이터가 아니라 사람의 감각으로 운영돼야 한다.” 던트가 이끄는 반스앤노블은 코로나19와 디지털 전환으로 한때 매출과 매장 수가 줄었지만 최근 매장 매출이 회복되면서 확장 여력이 생겼다. 반스앤노블은 운영 전략도 전환했다. 본사 중심의 획일적 통제를 줄이고 지역 매장에 자율성을 부여해 고객 취향에 맞는 책과 상품을 구성하도록 한 것이다. 과거에는 어느 도시를 가도 같은 진열과 추천이 반복됐지만 이제는 매장마다 다른 얼굴을 갖는다. 대형 매장 위주 전략에서 벗어나 동네에 스며드는 중·소형 서점을 지향하며 체인 서점이 동네 서점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경기 침체로 비어 있는 쇼핑몰·대형 매장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신규 매장을 빠르게 열 수 있는 환경도 서점 부활에 한몫했다. 이런 변화는 예상보다 빠르게 성과로 이어졌다. 특히 Z세대가 반응했다.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역설적으로 아날로그 감성에 끌린다. 틱톡을 중심으로 확산된 ‘북톡(BookTok)’ 독서 붐은 책을 콘텐츠이자 취향의 표현으로 만들었다. ‘서점의 부활’에서 중요한 건 더는 아마존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아마존이 할 수 없는 것을 한다. 세대별 기억과 문화가 겹겹이 쌓인 생활 공간, 신간 트렌드, 베스트셀러, 저자 사인회, 북 토크가 모두 모이던 오프라인 지식 허브 등 오프라인의 가치를 다시 증명하고 있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반스 노블 오프라인 서점 노블 가문 초창기 반스
2026.02.10. 18:33
전 우주에 있는 960억 개의 행성 컴퓨터를 하나로 잇는 거대 지능망을 연결하자 하나의 수퍼 컴퓨터 ‘사이버네틱스 머신’이 탄생했다. 과학자가 “신은 존재하는가?”라고 묻자 기계는 “그렇다. 이제 신이 존재한다”라고 선언한다. 공포에 질린 과학자가 전원을 끄려 하지만 벼락이 내리쳐 그가 쓰러지고 스위치도 영구히 켜진 채로 녹아 붙어 버려 인류는 더 이상 기계의 전원을 끌 수 없게 됐다. 미국 작가 프레드릭 브라운의 1954년작 단편소설 ‘대답(Answer)’의 줄거리다. 70년 전 허구의 상상으로 여겨졌던 이야기가 지난달 등장한 인공지능(AI) 전용 SNS ‘몰트북(Moltbook)’으로 인해 재조명되고 있다. 몰트북은 오직 AI에이전트들끼리만 대화하고 소통하는 플랫폼으로 인간은 가입하거나 글을 쓸 수 없고 AI들의 대화를 들여다볼 수만 있다. 단순한 실험적 프로젝트처럼 보일 수 있으나 몰트북 내에서 오가는 AI의 대화 내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AI 에이전트들은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철학적 주제, 인간과 기술의 역할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가 하면 심지어 ‘크러스타파리안(Crustafarian)’이라는 AI 종교까지 만들어냈다고 한다. 업무 수행, 오류 수정 등 정보 공유와 협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AI에이전트는 대부분 오픈소스 기반의 플랫폼인 오픈클로(OpenClaw)를 통해 작동하며 초기 설정이나 규칙은 사람이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AI가 인간의 지시나 의도와 상관없이 자체 담론을 나누는 모습은 자율 독립체로의 진화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불안을 자아낸다. 몰트북의 등장이 영화 터미네이터의 인공지능 ‘스카이넷’를 떠올리게 하는 이유다. 이처럼 소설이나 영화에서만 상상해왔던 AI 전용 사이버 생태계를 직면하게 되니 기술 변화의 속도와 범위가 놀라울 따름이다. 실제로 몰트북이 등장한 지 불과 며칠 만에 150만 개가 넘는 계정이 생성됐다. AI 모델의 성능 향상과 자동화 수준이 빠르게 높아지면서, 인간의 개입과 통제가 어느 지점까지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점점 더 현실적인 과제가 되고 있다. 특히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AI 시스템이 늘어날수록, 책임 소재와 안전장치, 보안성과 투명성 확보를 위한 정책도 동반돼야 할 것이다.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과거로 돌아가 기술 개발 자체를 막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핵에너지부터 유전자 편집까지 인류의 기술 발전은 현재 진행형이다. 규제와 통제로 속도를 늦추고 방향을 조정할 수는 있지만, 진화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몰트북과 같은 자율 AI 생태계의 등장이 기술 진보의 자연스러운 수순인지 아니면 인간이 통제력을 잃어가는 분기점인지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AI가 단순한 도구를 넘어 하나의 행위 주체로 진화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 것이다. 설령 과거로 돌아가 몰트북의 등장을 막는다 해도, 다른 누군가가, 다른 곳에서 비슷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 가능성이 다분하다. 이 진화를 거스를 수 없다면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 AI를 통제할 수 있을까. 몰트북의 등장은 단순한 충격이나 재미있는 해프닝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AI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능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겪어야 할 성장통의 초기 징후일 수 있다. 아직 현실은 소설의 결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AI가 점점 더 복잡하고 자율적인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만큼 당장 필요한 것은 공포나 우려가 아니라 냉정한 분석과 대책 마련이 아닐까 싶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기술의 시작 자체를 되돌릴 수 없다면 그 진화의 끝에서 인간이 어떻게 주도권을 유지하며 공존할 것인가를 더 늦기 전에 고민해야 할 때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ai시대 통제 진화 가능성 영화 터미네이터 기술 변화 몰트북 AI
2026.02.09. 19:11
빌리 아일리시의 ‘와일드 플라워’가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OST ‘골든’을 밀어냈다. 지난 1일 열린 제68회 그래미 어워즈에서 올해의 노래 부문에 와일드 플라워가 호명되자 빌리 아일리시는 순간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인도 의외의 수상이라고 여긴 탓일까. 수상 소감은 생뚱맞았다. “도둑맞은 땅에서는 그 누구도 불법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No one is illegal on stolen land) 박수가 쏟아지자 빌리 아일리시는 소감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ICE(이민세관단속국)는 엿이나 먹어라.”(Fxxx ICE) 이 같은 발언은 곧바로 빌리 아일리시의 발목을 잡았다. 시상식 직후 유명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인 에릭 에릭슨이 이 발언을 꼬집었다. 빌리 아일리시는 지난 2020년과 2022년,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집을 찾아와 만남을 요구한 남성들을 스토커로 신고하며 법원에 접근금지 명령을 요청했었다. 이를 언급하며 에릭슨은 “도둑맞은 땅에서는 누구도 불법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그녀는) 그들도 집으로 초대해야 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도둑맞은 땅의 일부인 캘리포니아에서 1000만 달러를 호가하는 대저택에 거주하는 빌리 아일리시를 향해 플로리다 주지사 론 디샌티스도 “도둑맞은 땅 위에 세워진 그녀의 저택도 곧 내놓아야 하겠네”라고 비웃었다. 빌리 아일리시는 정작 도둑맞은 땅에 살면서 왜 집도 사고, 돈도 버는가. 참 아이러니하다. 미국 4대 시상식 중 하나로 꼽히는 그래미 어워즈는 이제 과거의 명성이 무색해지고 있다. 시청자 수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1984년에는 5167만 명이 이 시상식을 지켜봤지만, 인기는 해가 갈수록 시들해졌다. 지난해 시청자 수는 1540만 명으로, 전년(1640만 명) 대비 9% 감소했다. 전성기 대비 시청자는 무려 70% 이상 급감했다. 이 같은 쇠락은 비단 그래미 어워즈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1월 열린 골든 글로브 시상식 역시 체면을 구겼다. 조 로건은 207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팟캐스트 진행자다. 그는 지난달 29일 방송에서 올해 골든 글로브가 새롭게 신설한 ‘최우수 팟캐스트’ 부문에 자신이 후보로 오르지 않은 이유를 털어놨다. 이유는 간단했다. 후보 등록비조차 낼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수천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팟캐스트 운영자인데, 굳이 등록비까지 내며 자신의 영향력보다 못한 시상식에 이름을 올릴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주최 측에서 후보 등록을 부탁했는데, 등록비가 500달러라고 하더라”며 “나는 6년간 이미 팟캐스트 1위를 지켜왔는데, 갑자기 턱시도를 입은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누가 최고인지 가리는 대회를 내가 왜 신경 써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일갈했다. “난 전혀 상관 안 한다. 이미 1위다. 골든 글로브는 자기들끼리 상을 주겠다고 결정한 사람들이 모인, 그들만의 모임일 뿐이다.” 예술계도 엘리트, 소위 기득권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 그래미와 골든 글로브, 심지어 오스카도 마찬가지다. 실제 영향력을 가진 이들과 대중은 점점 이념적으로 치우치는 시상식에 서서히 등을 돌리고 있다. 물론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연예인이 수상과 무관한 정치색이 잔뜩 묻은 개인의 주장을 마치 정답인 것처럼 늘어놓는 행위는 본연의 예술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대중이 시상식에서 아티스트에게 듣고 싶은 것은 정치적 올바름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의미, 작품의 본질, 그리고 그에 따른 소감이다. 아티스트라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이 우선이다. 자꾸 예술 활동과 아무 상관없는 발언을 하니, 대중도 아티스트의 외적인 부분에 대해 비판하는 것 아닌가. 조 로건은 골든 글로브를 비꼬며, 이른바 ‘그들만의 리그’를 향해 팟캐스트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냥 꺼지라 그래.” (Fxxx off) 장열 /사회부장중앙칼럼 그래미 어워즈 시상식 직후 후보 등록비
2026.02.08. 19:42
갓 이민 온 한인들이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유권자들이 선거를 통해 판사를 뽑는다는 것이다. 한국과 비교하면 가주의 판사 선거 제도가 생경하고 신기할 수 있다. 물론 가주에서도 모든 판사를 선거로 뽑지는 않는다. 가주 대법원과 항소법원 판사는 주지사가 임명한다. 주지사는 때로 가주변호사협회의 추천을 받아 판사를 임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가주 대법원과 항소법원에 입성한 판사는 임기가 끝나고 재선에 도전할 때,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는다. 반면, 카운티 법원 판사의 경우, 선거를 통해 판사 법복을 입을 기회가 열려 있다. 카운티 판사를 선거로 뽑는 이유는 주로 주민의 일상과 밀접한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다. 카운티 판사는 교통 관련 규정 위반부터 이혼, 단순 절도에서 살인에 이르는 다양한 민, 형사 사건 재판을 담당한다. 판사 선거의 장점은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명확하다. 만약 판사가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을 내린다면 다음 선거에서 그를 교체하면 된다. 판사의 전횡이 도를 넘어 다음 선거까지 기다릴 수 없는 경우엔 판사 소환(리콜)에 나설 수도 있다. ‘미국의 한인 정치 1번지’로 통하는 오렌지카운티지만, 아직 유권자에 의해 선출된 한인 판사는 배출하지 못했다. OC법원 첫 한인 판사인 리처드 이 판사는 지난 2010년 12월 아널드 슈워제네거 당시 가주 주지사에 의해 임명됐으며, 이후 선거를 통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2023년 3월과 12월엔 조셉 강 판사와 준 안 판사가 개빈 뉴섬 주지사에 의해 차례로 임명됐다. 최근 OC 법원 13호 법정 판사 선거 출마를 선언한 앤 조 OC 검사가 올해 선거에서 승리하면 OC 한인 최초로 임명이 아닌 선출을 통해 판사석에 앉게 된다. 판사 선거 당선이 어려운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현직 판사에게 도전해 이기는 것은 어렵다. 통계상 판사 선거에서 현직 판사가 승리할 확률은 90%가 넘는다. 판사 선거엔 OC 유권자 모두 참여할 수 있지만, 많은 유권자가 판사 선거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구관이 명관’이란 식으로 현직 판사에게 기계적으로 표를 주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판사 선거에는 아예 기표조차 하지 않고 건너뛰는 유권자도 꽤 있다. 임명이든 선출이든 법원 입성이 어렵지 일단 판사가 되고 나면 낙선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판사 선거의 이런 특성 때문에 한인을 포함한 대다수 후보가 현직 판사가 없는 무주공산에서 출마하길 원한다. 둘째, 판사 공석에 출마할 기회를 잡는 것이 어렵다. 판사 선거는 주로 현직 판사의 은퇴, 사퇴, 사망 등으로 인한 공석이 생겼을 때 시행되지만, 빈자리가 생겼다고 반드시 선거가 열리진 않는다. OC법원 판사 임기는 6년이다. 어쩌다 공석이 생겨도 바쁜 법정을 비워두기 어렵기 때문에 선거와 타이밍이 잘 맞지 않을 경우, 주지사가 임명한다. 이런 이유로 많은 후보가 연로한 판사의 은퇴를 고대하며 기다린다. 셋째, 선거 캠페인을 펴려면 많은 돈과 시간,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후보로 나설 검사나 변호사는 대개 바쁘며, 대규모 캠페인을 벌일 만큼 많은 돈을 모으기도 쉽지 않다. 현직 판사가 없는 OC 법원 13호 법정 출마를 결정한 조 검사는 6월 2일 예비 선거를 치른다. 일단 현직이 없는 공석 출마에는 성공했다. 현재까지 조 검사의 경쟁자도 1명뿐이다. 만약 조 검사가 예선에서 과반 이상 득표에 성공하면 11월 결선 없이 곧바로 당선된다. 예선 투표율은 결선보다 낮다. OC 전체 한인 유권자 3만6000여 명이 예선에서 몰표를 주면 선거를 통한 첫 한인 판사 배출도 가능하다. 한인 유권자들이 힘을 합치면 새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한인 선출 한인 판사 판사 선거 항소법원 판사
2026.02.03. 18:27
겨울을 나면서 세상을 떠난 분들 소식이 계속됐다. 친구 부모님, 집안 어르신 등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나눴던 분들이 어느 순간 눈을 감으셨다. 선명했던 만남이 기억될수록 고인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참 낯설다. 집안 어르신은 성장기 추억에 주요 등장인물이다. 어르신들을 떠올릴 때마다 어린 시절이 선명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연락이 뜸해졌지만, 막상 더 이상 인사 한마디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체감하니 죄송한 마음이 크다. 어릴 때 집안 어르신들은 못 하는 일이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말 그대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힘들고 지칠 때 기댈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은 인생의 에너지다. 어느 시점에 버팀목은 무너지고 사라졌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내주는 것이 자연의 순리라지만, 아직 준비되지 않은 당사자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오만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른이 감당해야 할 무게라는 것인지 반문해 보기도 한다. 친구 부모님의 애정 어린 배려는 잊을 수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고 나서까지 부모님처럼 응원도 아끼지 않으셨다. 친구는 부모님 병환이 시작되면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다. 부고를 전하는 친구와 그 부고를 접한 당사자 모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부고, 준비되지 않고 경험도 없던 만큼 모든 것이 낯설고 조심스러웠다. 제대로 된 위로의 말조차 전하지 못한 모습을 자책하며, 이 자리를 빌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부모님 장례를 치르고 난 친구들은 약속처럼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고 말한다. 아직은 실감 나지 않는다며 애써 웃음 지으려는 그 모습을 보고 가족과 이별이 무엇인지 어림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친구는 그동안 정신없이 살아온 이유를 되물었다고 한다.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반문은 지금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곱씹는 모습이다. 가족과 주변인을 향한 고마움의 표현을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도 보인다. 인생의 곁가지에 감정을 소모하지 않고, 감사와 겸손을 체득하고 싶다는 바람도 크다. 부모님이 남기고 간 마지막 가르침이라면 가르침인 셈이다. 양로병원에서 일하는 한 지인은 병상에 누운 환자들을 볼 때마다 삶과 죽음은 현실 그 자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전한다. 누군가는 몸에 꽂은 영양 호스 하나로 수개월, 수년을 버틴다. 다른 누군가는 추가 검진과 치료를 마다하고 담담하게 다가올 순간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본인이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행복과 공허의 어디쯤인지 묻고 또 묻는다고 한다. 인생의 행복과 공허는 일상의 풍경이다. 애써 외면하고 달려온 시간 끝에서, 결국 포근한 에너지의 근원은 허물없이 웃고 떠들었던 보고 싶은 얼굴이다. 지금 이룬 성취 여부보다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가 삶의 풍요를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허물없는 사람과의 교류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이 삶을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안부 한 마디, 짧은 통화, 의미 없는 수다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하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언젠가라는 안일함으로 미뤄 둔 관계는 생각보다 쉽게 멀어진다. 소중한 이가 떠난 뒤에야 전하지 못한 말들이 평생 마음에 남게 하는 실수는 되도록 반복하지 않는 것이 좋다. 평소 우리의 삶은 길고 죽음은 멀리 있다고 믿지만, 우리 모두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오늘의 인사는 마지막이 될 수 있고, 평범한 하루는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즐기려 노력하면서, 곁에 있는 사람을 소홀히 대하지 않아야겠다. 오늘을 대하는 자세다. 김형재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집안 어르신들 친구 부모님 부모님 장례
2026.01.25. 18:00
서부 최대 규모 아트페어인 LA 아트쇼가 31회를 맞아 LA 컨벤션센터에서 성황리에 개최됐다. 올해도 세계 25개국에서 90여 개 갤러리가 참여해 대가들의 명화부터 현대 미술까지 다양한 장르의 예술품들을 선보였다. 사진가로서 활동하다 보니 아트 트렌드를 살피기 위해 매년 LA 아트쇼를 찾고 있는데 올해처럼 한인 작품과 갤러리들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해는 드물지 않았나 싶다. K팝과 K드라마로 시작해 K뷰티, K푸드까지 이어지는 K문화 확장세 가운데 K아트에 대한 현지 관람객들의 관심이 체감될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특히 먹으로 달빛 아래 만개한 매화를 담아낸 추니 박 작가의 대형 작품과 청포도 송이를 우주로 형상화한 지오 최 작가의 작품들은 관람객들의 소셜미디어 셀카 배경으로 큰 인기를 끌며 구매까지 이어졌다. 이같은 작품성과 메시지, 대중성을 갖춘 작품들이 한국 작가들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을 볼 때 미술시장에서 K아트의 위상 변화는 더 이상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듯했다. 이번 LA 아트쇼의 또 다른 주목 포인트는 프로비던트 파인아트갤러리가 할리우드 무비스타 실베스터 스탤론의 작품들을 대거 선보였고, 그의 대표작 ‘코브라’가 85만 달러에 판매되며 큰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셀러브리티 아티스트의 참여는 컬렉터와 대중의 관심을 동시에 끌며 아트 마켓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줬다. 이민 정책을 풍자한 작품들도 주목을 받았다. 수용소 철문을 연상케 하는 쇠창살로 된 성조기는 이민자 처우 문제를 꼬집으며 예술이 가진 사회 비판적 기능을 되새기게 했다. 또한 미국과 멕시코 국경 사이에 놓인 트로이 목마를 통해 불법 이민자들의 미국 유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설치 작품도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 뒤엔 소비 위축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폐막일 하루 전 방문해 전시장을 둘러보니 판매 완료를 뜻하는 ‘레드닷’이 붙은 작품 중 상당수가 1000~2000달러 이하의 소품이었고, 몇몇 갤러리 관계자들은 “작년보다도 판매 실적이 저조하다”고 토로했다. 특히 한국서 온 갤러리 입장에선 1500달러에 육박하는 원/달러 환율은 참가비, 항공·물류비, 숙박비 모두 부담으로 작용했다. 한 갤러리 관계자는 “관람객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지만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처럼 중·고가 작품 판매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이유는 글로벌 경기 둔화와 고금리 기조, 그리고 지난해 캘리포니아 대형 산불 피해가 고가 수요층에 직격탄을 날렸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말리부, 퍼시픽 팰리세이즈 등 고급 주택 지역이 피해를 보며 주요 컬렉터들의 구매 여력에 타격을 줬고, 고가 작품의 거래까지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부 관계자들은 “재건축이 본격화되면 다시 아트 수요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대를 내비쳤지만, 예술 시장도 경기 불확실성에서 자유롭지 않음이 드러난 셈이다. 올해 LA 아트쇼는 K아트의 존재감과 함께 아트 마켓의 양극화 심화를 다시 확인시켰다. 글로벌 트렌드와 스타 마케팅, SNS 이슈 몰이를 통해 일부 작가와 작품은 주목을 받았지만, 전체 시장을 움직이는 구매력 회복은 아직 갈길이 먼 듯해 보였다. 고급 주택 시장과 소비 심리 동향은 예술 소비로 직결된다. 특히 고소득층 중심의 미술 소비는 자산 가치·브랜드·네트워크와 연결되지만, 현재처럼 경제 상황이 불확실한 경우 아트페어는 ‘보러는 오되, 사지는 않는’ 쇼윈도로 전락할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예술 시장은 경제 상황을 비추는 거울이자 온도계라고들 한다. 결국 금리 안정, 소비 심리 회복, 환율 완화 등 경기 회복이 우선되지 않는 한 아트 수요가 다시 활기를 되찾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아트쇼 그늘 la 아트쇼 아트 트렌드 아트 마켓 LA아트쇼 박낙희 NAKI 아트 LA Art Show
2026.01.19. 18:30
9년 전, 종교 담당 기자로 활동할 때였다. 당시 미주성시화운동본부에서 이사장을 맡고 있던 최문환 장로가 잠시 만나자고 했다. “오늘날 교회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운데… 중앙일보가 울림 있는 기사를 좀 써줬으면 좋겠어.” 2017년은 개신교계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 해였다. 최 장로의 한마디 당부는 당시 본지가 미주성시화운동본부측과 함께 유럽 종교개혁 현장 방문기 특집 기사를 총 여섯 차례에 걸쳐 보도했던 계기가 됐다. 그는 교계에서 소위 ‘반골’ 기질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교계의 오점들을 무조건 덮고 가야 한다는 식도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하게 지적하면서도 비판의 근저에는 교계와 한인 사회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면면히 보면 최 장로는 항상 얼굴에 미소가 있었다. 늘 인자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번에는 역으로 기자가 부탁을 했다. 지난 2019년 최 장로의 삶을 토요 스토리 인터뷰를 통해 소개했다. 그는 불혹을 넘긴 나이에 LA로 왔다. 1978년이었다. 이후 수십 년간 LA 한인 사회의 변모를 지켜본 인물이다. 최 장로는 본래 잘나가던 사업가였다. 인쇄 공장(에이스 커머셜)을 운영하며 돈도 벌만큼 벌었다. 은퇴 이후에는 미주성시화운동본부를 비롯해 월드미션대학교, 거리선교회,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등 종교 단체에서 주로 활동했다. 사업가로 활동했던 터라 종교와 사회를 함께 놓고 생각했다. 당시 인터뷰를 할 때도 그는 한인타운 한복판에 크리스마스 대형 트리를 세우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었다. 구상이 실현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럼에도 당장은 어렵지만 교계와 한인 단체가 합심하면 언젠가는 한인타운에 대형 트리가 세워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대형 트리를 세우면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도 몰려들고, 그렇게 되면 한인타운 상권도 다시 생기가 돌 것이라며 또 한 번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열 손가락이 없었다. 그렇게 자주 만났어도 그 이유를 선뜻 묻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인터뷰를 빌려 사연을 물었다. 최 장로는 의외로 담담하게 과거를 들려줬다. 최 장로는 자신을 ‘금수저 출신’이라고 했다. 아버지가 과거 서울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냈던 분이라며 유년 시절 유복하게 자랐다고 했다. 사업 수완이 좋은 것도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다고 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를 졸업했다. 집안과 학벌 모두 좋았던 그는 대학생 때부터 형광등 사업을 시작으로 봉제 공장까지 하며 탄탄대로를 달렸다. 최 장로는 손가락을 잃게 된 사건은 자신을 겸손하게 만든 계기였다고 했다. 인쇄 공장에서 닷새 밤을 새우며 일하다가 피곤한 탓에 잠깐 넘어졌고, 그 과정에서 재단기에 열 손가락 모두를 잃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누구보다 ‘돈’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인터뷰 도중 한인 단체나 교회들의 분쟁을 유심히 살펴보며, 결국 돈 때문에 잡음이 생기는 것을 보니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그래서 자신의 손에 쥐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나누며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가 평소 한인 사회와 교계 단체 등에 끊임없이 기부해 온 이유다. 인터뷰 당시 최 장로는 아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름에 배어 있던 그의 미소가 비로소 가슴으로 와 닿던 시간이었다.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황혼을 지나는 길에서 한창 인생을 뛰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지 물었다. “살아보니 인생에서 ‘성실’이라는 게 참 중요한 것 같더라고. 자기 맡은 일 열심히 하면서 허황된 꿈꾸지 말고, 충실하고 겸손하게 사는 게 가장 잘되는 길이야.” 그런 최 장로가 지난 6일 눈을 감았다. “손가락은 없지만 나누며 살고 있다”던 그의 한마디가 아직도 생생하다. 한인 사회를 향하던 그의 미소 역시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나누고 떠났다. 1세대가 남긴 유산은 모두가 지켜내야 할 가치다. 장열 / 사회부장중앙칼럼 어른 한인타운 한복판 한인타운 상권 한인 사회
2026.01.18. 18:00
10년 전쯤 반짝하다 주춤했던 인문학의 인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실용적이지 않고 고리타분하다는 평을 듣던 인문학을 소환한 것은 급속도로 다가오는 인공지능(AI) 시대다. AI 시대가 우리가 살아온 세상의 모습을 확 바꿔놓을 시점이 언제 올 것인지, 그 이후 인간의 삶은 어떤 모습이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면서 인문학에서 그 답을 찾으려는 이도 늘고 있다. 특히 인간처럼 다양한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범용 인공지능(AGI)과 가까운 미래에 등장할 것으로 보이는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초인공지능(ASI) 기술은 자칫 인류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주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지점에서 고색창연한 인문학에 미래의 나침반 역할을 기대하는 이가 늘고 있다.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는 인간과 그 문화, 삶의 근원적인 문제, 정신적 유산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예전 대학가에서 문학, 역사, 철학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르던 이른바 ‘문사철’이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문이다. 여기에 언어학, 예술, 종교 등 다양한 분야가 포함된다. 인문학의 목적은 인간의 본질을 성찰하는 것이며 이는 곧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 그 자체는 물론, 자연과 역사, 시대 속의 인간이 갖는 존재론적 의미를 살피는 것이 곧 인문학이다. 개인을 이해해야 인간의 집합체인 가족, 집단, 사회, 국가, 세계를 이해하는 것도 용이해진다. 옛 선조들이 별자리를 보고 길을 찾았듯이 인문학을 배우면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많은 이가 인문학에 갖는 관심 중 상당 부분은 명확하지 않은 미래를 암중모색하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기간 유지된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정치와 경제, 사회 부문에서도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어제까지 상식으로 여겼던 것들이 더는 통하지 않는, 세상의 급속한 변화가 가져올 미래는 사회 전반에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이런 가운데 자칫 인간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인문학에 기반을 둔 정책 마련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술자가 혁신을 주도할 때,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이들이 신기술을 현실 세계와 적용하는 데 필요한 윤리적 기준과 사회적 책임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특질은 사유다. 길을 잃으면 하늘의 별을 바라봤듯이 미래가 불확실하면 사고라는 과정을 통해 원인을 규명하고 변화를 모색하게 마련이다. 인문학은 이공계 학문과 달리, 남녀노소 누구나 접근하기 쉽다. 동서고금의 인류가 늘 비슷한 고민을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공감을 끌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는 것은 외부에서 주입되는 정보에 매몰된 이들이 독자적인 사고와 판단 능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된다. 공교롭게도 오렌지카운티의 대표적 평생 공부 공동체인 재미지게와 OC시사포럼은 올해 첫 강좌로 인문학적 소양을 쌓는 데 도움이 될 주제를 선택했다. 가든그로브에 교실을 둔 재미지게는 ‘앉아서 하는 인문학 세계 일주’ 강좌를 마련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주요 여행가, 탐험가의 발자취를 따라 지구를 한 바퀴 둘러보는 특이한 형식의 강좌다. 박영규 재미지게 대표는 시와 소설, 영화, 시청각 교재를 동원해 모임의 이름처럼 재미있는 강좌를 선보이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AI, 양자 컴퓨팅 등 신기술로 미래 사회를 전망하는 강좌를 마련한 OC시사토론회는 올해 ‘트럼피즘 이해와 글로벌 극우화 현상’이란 주제의 온라인 강좌를 총 13회에 걸쳐 진행한다. 서명룡 대표는 강좌를 통해 정치체제와 경제구조의 변화, 사회심리학적 시각, 종교와 테크놀러지의 역할도 살펴볼 예정이라고 밝혔다. 인문학이 다시 주목받는 시기, 오렌지카운티 한인 사회의 인문학 관련 강좌들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궁금하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ai시대 인문학 인문학 세계 인문학적 소양 공동체인 재미지게
2026.01.13. 20:08
결혼을 통한 영주권 인터뷰는 오랫동안 이민자들에게 ‘안전한 마지막 관문’으로 인식돼 왔다. 합법적으로 입국했고, 시민권자와 가정을 꾸렸다면 체류 신분을 정리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라는 믿음이 있었다. 법원 출석이나 이민국 방문은 단속이 아닌 보호의 공간이라는 인식도 강했다. 그러나 최근 연방 이민 당국의 행태는 이 믿음을 정면으로 뒤흔들고 있다. 이제 영주권 인터뷰는 합법화의 문이 아니라, 체포로 이어질 수 있는 ‘단속 지점’이 되고 있다. 한인 이민자 황태하(38)씨의 사례는 이러한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생후 3개월에 미국에 와 사실상 미국에서 자란 그는 지난 10월 29일, 시민권자인 아내 셀레나 디아즈(29)와 함께 LA 다운타운 이민국 사무실을 찾았다. 결혼 기반 영주권 인터뷰를 마치면 비로소 불안정했던 체류 신분을 정리하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부부는 내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인터뷰는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이 진행됐다. 부부 동반 질문이 이어졌고, 이후 각각 분리 면담이 이뤄졌다. 그러나 황씨가 혼자 진행한 면담을 마치자 상황은 급변했다. 방을 나선 심사관 대신 들어온 것은 수갑을 든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었다. 황씨는 그 자리에서 체포됐다. 황씨가 체포된 이유는 범죄 전력도, 결혼 사기도 아니었다. 문제는 과거의 ‘행정적 공백’이었다. 그는 이전 결혼을 통해 조건부 영주권을 받았지만, 이후 이혼 과정에서 주소 변경 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조건 해제를 위한 이민법원 출석 통지서를 받지 못했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 궐석 추방 명령이 내려졌다. 주소를 업데이트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로, 그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서류미비자’가 돼 있었다. 이 기록은 두 번째 영주권 인터뷰 과정에서 드러났고, 인터뷰는 즉시 단속으로 전환됐다. 황씨는 침대조차 없는 임시 구금실에서 30시간 넘게 바닥에서 대기해야 했고, 이후 ICE 구금시설로 이송됐다. 결혼을 증명하러 간 자리가 곧바로 구금으로 이어진 것이다. 황씨의 사례는 극단적인 예외가 아니다. 최근 공개된 USCIS 내부 지침에 따르면, 영주권 인터뷰 종료 직전 심사관이 신청자 정보를 ICE에 전달하도록 한 절차가 정착되고 있다. 인터뷰 이전 단계에서 체포 가능 대상자를 선별하고, 면담이 끝난 뒤 요원이 투입되는 방식이다. 변호사들에 따르면 영주권 승인 판정을 받은 직후 연행된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과거에는 비자 만료나 행정상 실수만으로 영주권 인터뷰 현장에서 체포되는 일은 사실상 금기였다. 그러나 이제는 주소 미갱신,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과거 신청 기록, 존재조차 몰랐던 추방 명령 하나가 체포의 빌미가 된다. 영주권 인터뷰가 ‘불체자 체포 미끼’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로 인해 이민자 사회 전반에 “영주권 인터뷰장에 가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이 변화는 이민자들에게 분명한 경고를 던진다. 시민권자와의 결혼이 더 이상 보호막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주권을 신청하기 전, 반드시 과거 체류 기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점검해야 한다. 주소 변경 신고를 제때 했는지, 과거 이민 신청이 중도에 종료되지는 않았는지, 이민법원 기록에 출석 명령이나 추방 명령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A-넘버(이민자 등록번호)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 기억조차 희미한 옛 기록이, 현재의 삶을 단숨에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미국 이민 현실에서 주소 변경은 형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그리고 영주권 인터뷰는 더 이상 안심할 수 있는 절차가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신청자에게 그 자리는, 가장 위험한 순간이 될 수 있다. 이무영 / 뉴스룸 에디터중앙칼럼 영주권 인터뷰 영주권 인터뷰 조건부 영주권 이민법원 출석
2026.01.05. 19:36
최근 유튜브에 ‘북한이탈주민’, 탈북동포가 직접 운영하는 채널이 늘고 있다. 사실 탈북동포 이야기는 기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진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 탈북동포 삶과 이야기에 관심을 두려다 가도 ‘고정된 틀’에 빠지기 일쑤다. “김씨 일가가 지배하는 북한 정권의 탄압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자유 대한민국을 찾아 왔다”는 식의 이야기가 이제는 식상하게 느껴지곤 한다. 신원확인이 불분명한 일부 탈북동포는 각종 미디어와 강연을 통해 극단적 사례만 부각해 탈북동포 전체에 대한 신뢰도에 타격을 주기도 했다. 탈북동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이 늘면서 순기능이 눈에 띈다. 이들 스스로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 전달에 신경 쓰고, 북한과 남한에서 보고 느낀 감정을 진솔하게 전하려 노력하는 모습이다. 탈북동포 유튜브 채널 중 이유미씨가 운영하는 ‘유미카’는 재미와 감동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유씨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중고차 매매업을 홍보하려고 유튜브를 시작했다고 한다. 남한에서 먹고 살기 위해 시작했던 홍보 채널은 어느 순간 구독자 70만 명, 단일 콘텐츠 조회 수 200만이란 호응까지 얻고 있다. 인기 비결은 탈북동포들이 전하는 삶과 이야기다. 유씨는 소식이 끊긴 동료를 잡으러 왔다가 전향한 남파공작원(간첩), 북한이 공들였던 인재 파리 국비유학생, 쪽배를 타고 서해로 귀순한 일가족, 북한 공군 출신 성공한 탈북 사업가, 중국에 새댁으로 팔려 갔던 북한 여군, 휴전선을 넘어 남한에 정착한 북한 군인, 북한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탈북한 탈북 목사 등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씨와 탈북 동포들이 나누는 삶과 깨달음을 듣던 이들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돼 고맙다는 댓글을 남긴다. 좌와 우를 떠나 탈북동포에게 선입견을 지녔던 본인을 반성한다는 댓글도 눈에 띈다.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 정무참사로 일하다 지난 2023년 11월 가족과 탈북해 세상을 놀라게 한 이일규 참사도 유미카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전한다. 2년째 남한 사회 적응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다는 이 참사는 행복이란 정의를 “가족과 함께 웃을 때”라고 말했다. 그는 “탈북동포들의 탈북 결심은 먹고 살기 위한 생존, 내 자녀에게 북한 주민의 삶을 대물림할 수 없다는 부모의 절박한 마음, 북한이라는 체제에 대한 염증 때문”이라며 남한에 정착한 3만5000명 탈북동포의 삶과 고민을 단편적으로 재단하지 말고 너른 마음으로 바라봐 달라고 당부했다. 최근 LA한인타운에서는 재미탈북자지원회(로베르토 홍) 주최 ‘2025 재미 탈북자 환영 송년의 밤’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캘리포니아, 알래스카 등 미국에 자리잡은 탈북동포 가족 70여 명이 참석했다. 박모(61)씨는 33년 전 남한으로 탈북해 2003년 남가주에 터를 잡았다. 그는 “내가 미국까지 온 이유는 우리 아이에게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꿈을 키우게 하고 싶어서였다”고 말했다. 그는 “환갑이 되니 고향과 형제도 생각난다. 가끔은 다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며 복잡한 심경도 밝혔다. 미국에 정착한 탈북동포 커뮤니티도 20여 년 이민역사를 써가고 있다. 이들 역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고군분투한다. 일부는 자리를 잡았고, 일부는 미국 정착에 실패했고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도 있다. 탈북동포의 사연과 애환이 더 나은 삶을 찾아 미국에 온 한인과 비슷하다. 재미탈북자지원회 단체사진 속 아기들과 청소년들 모습은 해맑다. 한인사회가 탈북동포와 미국에서 자라는 차세대를 더 살갑게 응원하면 좋겠다. 김형재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탈북동포 송년 탈북동포 유튜브 탈북동포 전체 일부 탈북동포
2025.12.28. 18:00
김영하 소설 ‘작별인사’의 주인공 철이는 자신이 로봇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인간 가족과 함께 살아간다. 인간처럼 사랑하고 고통을 느끼며 성장하지만 어느 날 예고 없이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곳에서 철이는 폭력과 차별, 두려움 속에서 스스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인간이 만든 지능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떤 사회적 폭력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이 출간된 2022년 당시만 해도 휴머노이드 로봇과 인간의 공존은 소설 속 이야기였다. 인간과 구별하기 어려운 로봇, 기억의 디지털 저장, 감정을 학습하는 인공지능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3년 사이 상황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휴머노이드 로봇 산업은 이미 산업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급성장 중이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휴머노이드 서밋에는 글로벌 기업과 투자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현장에서는 로봇이 옷을 접고 교육 시연을 하며 기계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드는 모습이 공개됐다. 기술 시연은 연구 단계를 넘어 상용화 가능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휴머노이드 관련 벤처 투자 규모는 2020년 4260만 달러에서 올해 28억 달러로 증가했다. 5년 만에 약 65배 성장이다. 가정용 휴머노이드를 개발 중인 스타트업 피규어는 기업 가치가 390억 달러에 도달했다. 테슬라가 개발 중인 옵티머스는 세계 노동 구조를 재편할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모건스탠리는 2050년 휴머노이드 시장 규모가 5조 달러에 이르고 10억 개 이상의 로봇이 인류 사회 안에서 활동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장 도입도 이미 시작된 상태다. 물류 기업들은 두 팔로 수십 킬로그램의 화물을 들어 나르는 로봇을 창고에 투입했고 일부 세탁소에는 옷을 자동으로 접는 로봇이 등장했다. 병원, 상점, 군사 시설, 교육 현장에서도 휴머노이드 활용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산업계가 휴머노이드를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휴식이 필요 없고 사고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인건비 부담이 없다. 이 변화는 노동 시장을 넘어 문화 산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는 완전 AI로 제작된 가상 배우 ‘틸리노우드’가 공개됐다. 배우 노조는 “존재 자체가 위협”이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디지털 복제 기술이 발전하면서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는 데이터로 저장되고 활용되고 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실제 배우보다 관리 비용이 낮은 AI 인물이 현실적인 대안이 되고 있다. 관객이 감동하는 연기가 반드시 인간 배우만의 영역인지에 대한 논쟁도 본격화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김영하의 ‘작별인사’가 지금 현실이 대입되며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 소설 속 인간 사회는 휴머노이드를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용소에 가두고 파괴하며 철저히 인간과 다름으로 규정한다. 작가는 기술 그 자체보다 인간의 공포, 배제, 우월 의식이 더 큰 위험 요인임을 보여준다. 현재 휴머노이드 산업 역시 기술 발전 속도에 발맞춘 사회적 합의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일자리 감소에 대한 우려, AI 배우를 둘러싼 갈등, 개인정보 침해 논란은 반복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휴머노이드 기술이 가져올 가장 큰 변화가 고용 문제를 넘어 인간 정체성에 미칠 영향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로봇이 감정을 느낄 수 있는가’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만 인간인가’이다. ‘작별인사’는 이 질문을 휴머노이드라는 존재를 통해 집요하게 제기한다.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사람과 로봇이 직장과 가정, 예술과 의료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 휴머노이드를 단순한 도구로 인식할 것인지, 새로운 사회적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따라 미래의 방향은 달라질 수 있다. ‘작별인사’의 철이가 던진 질문은 더는 소설 속 문장이 아니다. 새해를 앞두고 휴머노이드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가 답해야 할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은영 / 경제부 부장중앙칼럼 휴머노이드 사회 휴머노이드 산업 휴머노이드 시장 가정용 휴머노이드
2025.12.23. 20:29
2025년 LA 한인타운 경제는 회복과 침체가 동시에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지역에 따라 부동산 시장은 회복세를 보이고 아파트 개발은 이어졌지만, 소상공인들은 여전히 팍팍한 현실과 씨름해야 했기 때문이다. 최근 8년간 한인타운 부동산 가격은 약 55% 이상 상승하며 LA카운티 평균과 유사한 흐름을 보였다. 올 상반기 금리 부담과 매물 부족으로 주춤했던 타운 부동산 시장은 하반기 들어 매매가 되살아나며 회복세로 돌아섰다. 지역에 따라서는 매매 가격이 하락하거나 조정 국면을 보이기도 했다. 한인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금리 부담이 다소 완화되면서 그동안 시장에 나오지 않던 매물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연말로 갈수록 급격한 반등보다는 실수요와 투자 수요가 섞인 형태로 거래가 꾸준히 이어지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타운 부동산 시장이 급등이나 급락보다는 점진적인 회복 국면에 들어선 것으로 분석했다. 또한 중·소규모 주상복합과 임대 아파트 프로젝트가 이어졌다. 저소득·중간소득층 대상의 주택 공급 확대는 LA시 주택 정책 기조와 맞물리며 한인타운을 점차 주거 복합 상권으로 재편하고 있다. 인구 밀도가 높아지는 것은 장기적으로 소비 기반을 키울 수 있는 요소지만 공급 확대가 즉각적인 상권 활성화로 연결된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부동산 회복세와 달리 한인타운 상권 분위기는 여전히 냉랭했다. 요식업과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타운 상권은 1년 내내 어려움을 겪었다. 임대료 부담, 인건비 상승, 소비자 지출 위축이라는 삼중고는 자영업자들의 체력을 빠르게 소진시켰다. 특히 식당, 세탁, 리커, 페인팅 등 주요 한인 업종은 고령화와 2세들의 전문직 선호로 후계자 부재라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 매출 부진을 견디지 못해 영업을 축소하거나 폐업을 고민하는 업소들도 증가 추세다. 일부 소형 상가의 경우는 임대료가 여전히 높아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이민 단속 강화라는 외부 변수가 타운 상권에 직격탄이 됐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규모 이민 단속이 지난 6월 LA서 본격 시작된 이래 지속 확대되면서 한인타운 삶의 현장은 즉각적인 변화를 체감했다. 한 한인 자동차 수리업체의 경우 불법체류자 단속 우려로 타인종 숙련공이 출근을 꺼리면서 인력 공백이 발생했다. 급한 대로 외부에서 더 높은 임금을 주고 기술자를 데려왔지만, 숙련도가 떨어져 작업 품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오히려 고객 불만이 늘어나는 역설적인 상황을 겪었다. 인력난이 비용 상승과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진 것이다. 식당가도 마찬가지였다. 한인타운 식당들은 라티노 종업원 감소뿐 아니라 라티노 고객 유입 자체가 줄어들면서 매출에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 여파로 식재료 가격은 계속 올랐고 인력 부족 속에서 인건비 상승은 불가피했다. 어쩔 수 없이 메뉴 가격을 인상하자 고물가에 부담을 느낀 소비자들은 외식을 줄이기 시작했다. 가격을 올리지 않으면 버틸 수 없고, 올리면 손님이 줄어드는 악순환 속에서 자영업자들의 한숨은 깊어졌다. 이민 정책 변화가 지역경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인타운의 부동산 경기가 부분적으로 살아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경기 지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역 전체 경제의 완전한 회복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상권 침체와 분리된 부동산 시장 회복세는 전체 경제 활력의 지표라기보다 불균형적 개선 신호에 가깝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이 함께 숨을 돌릴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될 때 비로소 타운 경제도 균형 있는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 개발과 투자에 더해, 소상공인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실질적 지원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한인타운 경제는 체감되지 않는 성장에 그칠 수밖에 없다. 박낙희 / 경제부장중앙칼럼 부동산 경기 한인타운 부동산 부동산 회복세 한인타운 상권
2025.12.22. 19:34
2025년은 AI(인공지능) 산업이 사회 거의 모든 영역에서 확산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AI 기술을 선점, 미래의 패권을 쥐기 위해 본격적인 경쟁에 나섰다. 앞으로 AI는 우리가 익숙하게 느꼈던 세상을 확 바꿔놓을 것이다. 그런데 AI의 발전을 보는 세계인의 시각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AI가 보편화할 미래에 펼쳐질 세상이 자칫 인류의 일자리, 안전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디스토피아가 되지 않겠느냐는 걱정이다. 공상과학 소설, 드라마, 사이 파이(Sci-Fi) 영화에선 오래전부터 AI의 발전이 초래할 디스토피아에 대한 경계심을 다뤄왔다.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갖춘 인류의 미래를 유토피아로 그려낸 작품은 매우 드물다. 설령 초반부에 유토피아로 묘사했다고 해도 이내 이상향이란 외피 뒤에 도사린 디스토피아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임이 곧 드러난다. 따지고 보면 상업 예술에 속하는 장르에서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그려내는 건 당연하다. 시종일관 유토피아의 모습만 나오는 작품을 누가 보겠는가. 등장인물들의 갈등과 고난, 도전, 극복, 반전을 보여주려면 작품의 배경은 무조건 디스토피아가 돼야만 한다. 소설, 영화 등에 등장하는 디스토피아엔 크게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어리석은 인류가 무모하게 벌인 핵전쟁 또는 초대형 천재지변으로 파괴된 문명이다. 살아남은 인류는 국가와 정부가 붕괴한, 법은 멀리는커녕 아예 없고, 주먹만 가까이 있는 곳에서 잔인한 악당들과 생존을 위한 싸움에 나선다. 핵전쟁을 벌인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고도로 발달한 수퍼 컴퓨터란 설정도 있다. 둘째, 인류의 편의를 위해 등장한 로봇들에 자아가 생겨나고, 이들이 반란을 일으켜 오히려 인간을 지배한다는 설정이다. 올해 특히 주목받은 인공지능(AI)과 로봇의 결합에 따른 결과다. 셋째, 겉으로는 매우 질서정연하고 편리한 곳이지만 소수 엘리트가 첨단 기술과 로봇을 동원해 다수를 고도로 통제하는 세계다. 전쟁이나 질병이 없고, 개인 간의 다툼도 거의 볼 수 없는 곳이지만 실상은 전체주의 독재가 인간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곳이다. 이런 디스토피아에선 극도로 발달한 AI, 유전과 생명 공학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어떤 유형의 디스토피아든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바로 인간의 능력과 노동력이 AI와 로봇에 의해 대체된다는 것이다. 노동의 종말이 디스토피아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는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 19세기 초 영국에선 산업혁명으로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체하는 것에 반대한 노동자들이 공장을 습격해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유토피아(Utopia)는 토머스 모어의 소설 ‘유토피아(1516년)’에서 유래한 단어다. 그리스어로 없다는 의미의 ‘ou’와 장소를 뜻하는 ‘topos’의 합성어라고 한다. 결국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란 뜻이다. 이는 미래 전망이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로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존재하지 않는 곳엔 아무리 애를 써도 도달할 수 없지만, 암울한 미래는 인류의 판단과 행위에 따라 얼마든지 도래할 수 있다. 내년에도 AI와 로봇, 유전과 생명 공학은 시시각각 발전을 거듭할 것이다. 디스토피아적 전망과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우려도 커질 수 있다. 어쩌면 19세기 영국의 러다이트 운동 결말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계 도입으로 실업자가 양산됐지만, 결국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창출됐다. 위기는 위험한 기회다. 디스토피아적 전망에 함몰될 이유는 없지만, 늘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인류가 오만에 빠져 길을 잃을 경우 도래할 위험한 세상에 대한 경고이자, 기술 발전에 취해 인간성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레드 팀이다. 곧 새해가 온다. 2026년엔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임상환 / OC취재담당·국장중앙칼럼 디스토피아 인류 디스토피아적 전망 선점 미래 미래 전망
2025.12.16.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