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삶의 향기] 사랑과 집착의 경계

Los Angeles

2025.07.28 17:39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기사 공유
“가자지구 어린이들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프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공감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조언하셨을까.
 
대종사께서는 사랑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괴로워하거나, 본인이 해야 할 일에 지장을 주는 것을 애착이라 하며 사랑과 애착을 구분하였다. 모든 생령이 한 기운, 모두가 부처, 자비심을 가르치고 배우는 불교 입장에서 가자지구 어린이들을 보며 대자대비심을 내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넘어 진리적으로도 바람직한 모습이다. 다만, 그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본인 일에 지장을 받는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벗어난다.
 
낮에 직장에서 동료와 갈등이 있었다면, 아무리 반가운 친구와의 저녁 식사 자리도 편치 않다. 고통의 주된 원인은 특정한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그 일에 대한 착심 때문으로 봐야한다.
 
집착은 무조건 도외시해야 하는 것인가? 중학생 시절, 버스 안에서 어느 고등학생 누나가 과제를 잃어버려 울던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바느질 관련한 과제였던 것 같았는데, 들어보니 과제에 대한 걱정보다는 수일에 걸친 본인의 정성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땐 ‘운다고 달라질 게 있나’ 싶었지만,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과연 설교나 칼럼 원고를 잃어버린다면 그 소녀처럼 한참을 서럽게 울만큼 치열하게 매사에 정성을 들여왔나 하는 성찰을 하게 된다.
 
착심을 놓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매사에 담백하게 임할 것을 당부한다. ‘담백’을 거리를 두고 사랑하고, 대충 정성을 들이라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된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온 정성을 다해 과제에 임하되, 착 없이 하라는 말이다.
 
대종사께서는 무관사(無關事)에 동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나와 크게 관계없는 일에 마음을 과히 쓰지 말라는 뜻이다. 일체 생령이 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불교에서, 그것도 ‘사람’에 대한 연민을 무관사라 할 수 있을까?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정신기운을 소모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록 미국에 살지만, 가끔은 한국 정치에 관심이 간다. 원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속상하기도 하고, 정부 정책이 마음에 안 들면 마음이 편치 않다. 정치적 견해를 갖는 일은 여론 형성을 통한 정치참여라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지만, 며칠 밤잠을 설친다고 대통령이나 정책이 바뀔 리가 없는데 그로 인해 내일에 지장을 준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자녀의 일이나, 친구, 후배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관심과 집착은 구분해야 한다.
 
수행의 궁극 목적은 시끄러운 도시 한복판과 스트레스로 가득한 직장 관계에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조용한 곳에서조차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시끄럽고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 바른 판단을 할 리가 만무하다. 쿠션 위 명상이 중요한 이유다.
 
가자지구 어린이 때문에 고민하는 수행자에게 좀 더 폼 나고 근사한 조언을 하고 싶지만, 수행이 깊지 못한 탓인지 쿠션 위의 명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나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