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을 열광케 했던 월드컵도 이제 막을 내렸다. 생각해 보면 AI 시대에 이만큼 원시적인 경기가 또 있을까 싶지만, 이번에도 어김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월드컵을 맞이했다. 경기가 끝나면 이긴 팀의 선수와 국민들은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뻐하고, 패한 팀은 나라라도 잃은 양 참담해한다. 결승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선전, 32강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월드컵을 보면서 몇 가지 불교적 의미를 생각해본다. 먼저 느낀 것은 심판 판정에 대한 태도다. 몸싸움이 많은 경기다 보니, 반칙이 잦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정당한 몸싸움과 반칙의 경계가 애매하지만, 선수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그 기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판정을 하면 이의를 제기하거나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짓는 것이 기본이다. 일부러 그러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진심으로 억울한 눈치다. 문외한인 일반 관중이야 말해 무엇 하랴. 내로남불이나 확증편향은 쉽게 비난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내 편과 상대편에 대한 입장이 다르듯이,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에는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작은 실수는 인격으로까지 확대시킨다. 분별과 집착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 편’과 ‘남의 편’을 나누는 순간부터 우리의 눈은 흐려진다. 편을 나누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집착과 무지의 원인이 되도록 방치하지는 말자는 말이다. 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한 골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골을 넣은 선수는 가장 큰 환호를 받지만, 그 골은 결코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처음 공을 빼앗은 수비수, 공격의 길을 연 동료, 마지막 패스를 건넨 선수의 움직임이 모두 모여야 비로소 한 골이 나온다. 화면에는 잘 잡히지 않는 또 다른 선수의 헌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원불교에서는 내가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관계와 도움을 모두 은혜로 바라본다. 내가 가진 능력과 지금의 자리는 내 힘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나를 가르친 사람, 기회를 준 사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몫을 다한 사람들의 모든 은혜가 모인 덕분이다. 한 골 뒤에 여러 선수의 움직임이 숨어 있듯, 한 사람의 성공 뒤에도 수많은 도움과 배려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무상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경기 종료 직전에 승자와 패자가 바뀌고, 한순간의 득점으로 무명의 선수가 영웅이 된다. 반대로 세계적인 선수도 한 번의 실수로 비난을 받는다. 어제의 영웅이 오늘의 패자가 되고, 탈락 직전의 팀이 살아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허무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변하기 때문에 승리에 영원히 취해 있을 수도 없지만, 패배에 영원히 갇혀 있을 이유도 없다. 지금 어렵다고 가능성이 끝난 것도 아니며, 지금 잘된다고 그것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다음 월드컵에서는 승패를 넘어, 편에 따라 달라지는 판단과 성공 뒤의 은혜, 승패에 흔들리는 마음도 함께 살펴보는 건 어떨까. 재미가 배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월드컵 마음 마음 작용 다음 월드컵 은혜 승패
2026.07.20. 18:01
진입로 공사 허가를 알아보니, 시청에서 이웃 두 집의 서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뒷집과 아랫집이었다. 뒷집이 거절했을 때도 아쉽긴 했지만 크게 마음이 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아랫집이 거절했을 때는 서운함이 없지 않았다. 이유를 생각해봤다. 아랫집과는 아이 때문에 왕래도 있었고, 매년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때 선물도 빠지지 않고 전했다. 그때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내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거절을 당하니, “그동안 내가 어떻게 했는데….” 일상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이다. 불가에서는 보시를 강조한다. 보시는 단순히 물건이나 돈을 주는 것만이 아니다. 시간, 관심, 친절, 배려도 모두 보시가 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무상보시(無相布施)를 말한다. 무상보시는 ‘내가 주었다’는 상, 곧 ‘내가 했다’는 마음의 표식을 붙잡지 않는 것이다. 내가 베풀었으니 상대가 알아주어야 한다거나, 언젠가 나에게 갚아야 한다거나, 최소한 내 편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것이다. 무상보시는 베푼 일을 완전히 잊어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돈을 빌려준 것인지 그냥 준 것인지, 내 형편이 어떤지, 상대가 반복적으로 의존하는지 살피는 것은 지혜다. 문제는 기억 자체가 아니라, 그 기억을 마음속 채권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해줬으니 너는 나에게 빚졌다’는 마음이 생길 때, 보시는 공덕이 아닌 거래가 된다. 아랫집에게 선물한 것은 선의였고, 서명을 거절한 일은 그 집의 판단이었다. 두 일을 묶어서 “은혜도 모른다”고 판단하면, 과거의 보시가 현재의 원망으로 변한다. 작은 선의가 오히려 불화의 씨앗이 되는 경우이다. 가까운 사이가 원수로 돌아서기 쉬운 이유이다. 무상보시는 감정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니다. 서운함은 올라올 수 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다. 수행은 그 마음을 억지로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차리고 더 키우지 않는 데 있다. “아, 내가 베푼 것을 붙잡고 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공부는 시작된다. 보시할 때는,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가,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아직 그렇지 못하다면 무리해서 크게 베풀 필요는 없다. 능력만큼, 감당할 만큼, 자유롭게 베푸는 것이 좋다. 서운한 마음이 들거나 공로감이 앞설 때, ‘그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앞으로의 관계는 지금의 지혜로 다시 판단한다.’ 베푼 일은 과거로, 판단은 현재로 돌리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마음을 가볍게 해 줄 수 있다. 원불교에서는 인과와 보은을 말한다. 내가 새로 복을 지었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미 받은 은혜를 조금 갚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상을 내려놓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무상보시는 선행에 대한 기억상실이 아니라 집착을 놓는 연습이다. 상이 생길 때 자문해보자. ‘나는 지금 선의를 베푼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 장부를 만들고 있는가?’ 보시는 행할 때가 아니라, 붙잡지 않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공부 마음속 채권 마음속 장부 보시가 현재
2026.06.29. 18:07
일요일 법회 후 종종 단체로 탁구 시합을 한다. 보통 한 팀이 열 명쯤 된다. 자주 문제가 되는 경우는 공이 밖으로 나갔는지, 아니면 탁구대 끝에 살짝 맞고 나갔는지 애매한 경우다. 심판이 있기는 하지만 모두 아마추어라 정확한 판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애매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단, 정말 애매한 경우라면, A팀 안에서도 의견이 갈리고, B팀 안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게 맞다. 그런데 실제로는 거의 늘 A팀 열 명은 A팀에 유리한 쪽으로 보고, B팀 열 명은 반대로 본다. 같은 공을 보았는데, 판단은 개인이 아닌 팀에 따라 나뉜다. 우스우면서도 무서운 모습이다. 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단연코 정치다. 두 후보에게 비슷한 법적·윤리적 문제가 있어도 판단은 천양지차이다. 그 차이가 개인의 판단이 아니라 편에 따라 갈린다는 점에서 탁구의 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잘못의 크기가 먼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편이 먼저 정해지고 잘못의 크기와 성격이 나중에 조절되는 식이다. 우리는 보통 사실을 보고, 기준을 적용하고, 결론을 내린다고 생각한다. 유감스럽게도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먼저 정서적 끌림과 거부감이 생긴다. 그다음 편이 정해진다. 그리고 그 편에 맞는 근거를 찾는다. 마지막에는 그것이 객관적 판단처럼 굳어진다. 현대 심리학도 이를 인간 판단의 편향으로 설명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보는 마음이 이미 물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탁구공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공과 함께 ‘우리 편’을 본다. 후보자의 잘못을 보는 줄 알지만, 그 사람과 진영에 대한 애착과 반감을 함께 본다. 그래서 우리 편의 허물은 용인 가능한 실수가 되고, 상대의 허물은 허용할 수 없는 본질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같은 기준을 반대로 적용해 보아야 한다. 우리 편이 한 일을 상대편이 했다면 나는 어떻게 말했을까. 상대편이 한 일을 우리 편이 했다면 나는 용서했을까. 이 질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그것은 원칙이 아니라 편향이다. 둘째, 완전한 공정함보다 덜 불공정함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사람은 온전히 객관적이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나도 편향될 수 있으니 최대한 덜 기울어 보겠다”고 하는 편이 합리적이고 정직한 태도다. 그 정도만 해도 세상은 덜 거칠어질 것이다. 우리는 진실을 보지 못해서 틀리는 경우보다, 주로는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어서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상이다. 아상은 ‘나’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각, 입장, 체면, 소속을 지키려는 마음까지 포함한다. 수행은 다른 것이 아니다. 애매한 탁구공 앞에서 내 마음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알아차리는 것이 불교 공부의 시작이자 끝이다. 물론 쉽지 않다. 일상에서 접하는 일과 사람에 대해 편을 갖지 말라거나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는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편을 이루고 판단하되, 자신을 살피는 일을 소홀히 하지 말자는 것이다. 나와 다른 판단을 하는 사람들도 감정적으로 미워할 일만은 아닌 듯하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기준 이중 기준 불교 공부 탁구 시합
2026.06.08. 18:12
프리웨이 출구 쪽 신호 앞에 잠시 멈춰 있었다. 갑자기 뒤에서 “쾅, 쾅” 하는 소리가 났다. 두 번 이상 부딪히는 소리로 보아 3중 추돌쯤 되는 것 같았다. 다행히 앞차와 거리를 충분히 두고 있던 터라 사고는 내 차에서 멈췄다. 정차 중이어서 충격이 크지 않아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곧 짜증이 몰려왔다. 이 사고로 은행 상담 예약이 무산된 것도 불편했고, 뒤차의 과실이 명백하다 해도 보험사에 보고하고 처리하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뒤차 운전자의 행동은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했다. 내 뒤차의 운전자는 그 뒤차에 받혀 내 차를 들이받은 사람이었다. 그 역시 피해자였음에도 그는 자기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사고 관련자들의 건강 상태를 살폈다. 나는 차를 보았고, 그는 사람을 보았던 것이다. 요즘 BTS는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오랜 준비 끝에 세계무대에 다시 섰고, 멕시코에서는 수많은 팬들이 광장에 모여 그들을 기다리는 장면이 전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많은 한국인이 자부심을 느꼈다. 국위 선양, 문화 강국, 경제적 파급 효과 같은 말들이 댓글을 장식했다. 그 성취를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한 댓글들 사이에 유독 한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경제적 파급 효과가 뭐가 중요하냐. 저 사람들이 행복해하는데. 다들 즐거웠으면 좋겠다.” 이 댓글 앞에 필자는 한참을 멈추어 읽고 또 읽었다. 경제적 이익과 국위 선양에 가려 BTS 혹은 음악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오래전 북한산을 오르던 때의 일도 가끔 생각난다. 다람쥐 한 마리가 지나갔다. 옆을 지나던 두 중년 남성이 말했다. “저 꼬리가 꽤 비싸다던데, 얼마나 할까” 당시에는 불교 공부를 하기 전이라 그 마음을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으나, 삭막한 우리들의 모습에 우울했던 기억이 있다. 일상은 그렇다 치고, 참과 진실을 추구하는 종교는 어떨까. 많은 종교가 성전을 확대하고 신도를 늘리는 일에 정성을 쏟는다. 신도들이 잘 신앙하고 수행할 수 있도록 좋은 시설을 갖추는 일도 필요하고, 성자들의 가르침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려는 노력도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성전이나 신도를 통해 교세를 확장하는 것은 성자의 가르침을 바르고 효과적으로 전하려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지 종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직자들 또한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왜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까. 불교에서는 그 뿌리를 무지와 집착에서 찾는다. 무지는 단순히 지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이 근본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것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근본을 보지 못하니 엉뚱한 것에 붙들리고, 붙들릴수록 더 어리석어지는 것이다. 수행은 정말 중요한 것을 보기 위한 공부다. 차보다 사람을, 효과보다 기쁨을, 값보다 생명을, 교세보다 가르침을 먼저 볼 수 있는 마음의 힘을 기르는 일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말한다. “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가히 법문이 아닐 수 없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종교가 성전 경제적 파급 불교 공부
2026.05.18. 18:16
“철학은 캄캄한 방에서 검은 고양이를 찾는 것, 신학은 캄캄한 방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는 것, 종교는 캄캄한 방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인문학 분야에서 전해 오는 비유다. 종교에 대한 거리감을 풍자한 것으로 과한 면이 없지 않지만, 전적으로 부인하기도 어렵다. 부처님께서는 “불법이 생활이고, 생활이 불법”이라고 하셨다. 진리는 어떤 형태로든 삶과 연결되어야 한다. 불교 수행자로서 두 가지 작은 깨달음을 나누고 싶다. 첫째, 진리는 쉬워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는 삶의 본질적인 질문, 곧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진리가 소설책이나 만화책처럼 쉬울 수만은 없겠지만, 소수의 지식인이나 전문 수행자만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의 본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 둘째, 진리는 생활과 분리 되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인간의 감정과 일상을 포함한 우주 전체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일상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그 진리를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인간과 우주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불자들은 연기, 공, 무아 등을 평생 공부하지만, 체득은 고사하고 이론적으로라도 명확히 이해하는 경우를 많이 보지는 못했다. 한국만 해도 매년 2000명 이상의 전문수행자들이 동안거, 하안거 등 일 년의 절반을 수행에만 몰두한다. 수행의 깊이야 가늠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자식 문제, 취업 문제가 고민인 대중과의 소통에 한계를 보인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수행자일 뿐 아니라 전법자로서의 성직자 역할도 함께 고민해야 할 때다. 종교가 좀 더 친근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성직의 시작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출가식도 소박했으면 좋겠고, 성직자에 대한 과한 예도 현대에는 어색하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야 한다거나, 일체 생령을 제도하기 위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사무여한(死無餘恨)의 자세를 권하는 목사님, 교무님의 ‘친절한 안내’가 초보 신자들에게 어떻게 느껴질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세상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 일이 고귀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이제 막 동네 뒷산을 오르기 시작한 사람에게 에베레스트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정상에 서라고 다그치는 것과 같지는 않을까. 본인의 수준과 성향, 목표에 따라 공부 방법과 양이 다르게 설정되어야 하듯이, 종교생활도 각자의 수준과 목표에 맞게 이루어지면 좋을 것 같다. 표준은 일반 대중에 맞추고 대상의 필요에 따라 가감하면 될 일이다. 원불교 교무가 되겠다고 하니, 원불교 경전은 너무 쉽고 일반적인 내용이라 윤리교과서 같다며 다소 아쉬워했던 이모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종교 경전이 윤리 교과서와 달리 어렵고 추상적이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종교는 캄캄한 방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았다고 말하는 난해한 모습이기보다는 그 방에 있을지 모를 검은 고양이를 함께 손전등으로 비추며 찾는 모습이었으면 한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손전등 비추 종교생활도 각자 전문 수행자 불교 수행자
2026.04.13. 19:19
한국 노인 빈곤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비슷한 경제 규모를 갖고 있는 나라 중 가장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한다. 상대평가만을 고려한 것인지, 자산을 고려하지 않은 현금만 고려한 것인지 등 통계의 객관성, 효용성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러 수치를 종합해 볼 때, 문제가 가볍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기사에서 유명 교수님은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욕심 부리지 말고 형편에 맞게 생활하면 됩니다.” 성직자인 필자의 설교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질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인류의 오래된 화두이다. 물질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이 된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갈수록 돈을 갈구한다. 둘은 상관관계가 전혀 없는 것일까. 돈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하더라고, 최소한 비참함은 방지할 수 있는 것 같다. 돈이 행복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중요한 필요조건임은 부인하기 어렵다. 1989년 한국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영화가 개봉되었다. 성적 지상주의와 이로 인한 입시지옥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은 영화다. 지금도 유효하고 분명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렇다면 행복은 성적의 ‘역순’일까. 존경하는 선배가 책을 선물하면서 “능력이 있을수록 자신의 삶에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는 문구를 서명과 함께 적어 줬다. 학력, 학벌과 수입의 상관관계는 경험상, 통계상 명확하다. 성적이 좋으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다양해진다, 수입이 많으면 직업, 거주지 등 라이프스타일 선택의 범위가 넓어진다.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은 행복의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취업 낙제생이었고, 에디슨은 저능아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 학교와 성적 등 외적인 물질적 조건들의 순기능을 비하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행복이 성적순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고는 더욱 말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필자의 종단에서는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한다. 물질만으로도 행복이 보장되지 않듯이, 정신의 힘만으로도 완전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물질을 선용하라고 가르치지, 의미 없거나 도외시 할 것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소득이 일정 수준까지는 행복과 뚜렷한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대표적 연구들이 있고, 이후 연구들은 그 관계가 생각보다 더 길게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한국에서 그 수준의 연 수입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수입을 갖고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는 노년층의 욕구를 “형편에 과분한 욕심”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결핍과 비참함을 면하게 해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에 대한 갈망으로 볼 수는 없을까. 기사에 나온 교수님의 조언은 이론적으로는 틀림이 없고, 소수의 부자들에게는 적용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노년층에게는 공허하게 들릴 것 같다.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분수에 만족하세요” 이런 말은 현실에 적용할 때 보다 신중해야 한다.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 의한 물질 만능주의 폐해가 물질문명에 대한 거부감, 불편함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양은철 교무 Won Meditation Center [email protected]삶의 향기 물질 만능주의 성적 지상주의 물질적 조건들
2026.03.23. 19:23
OC한미시니어센터(회장 김가등, 이하 센터)가 오는 17일(화) 오전 10시부터 정오까지 가든그로브의 센터(9876 Garden Grove Blvd)에서 시니어를 위한 ‘장수 사진’ 촬영 행사를 연다. 회원 외 지역 시니어도 참여할 수 있는 이 행사는 한인 동호회 ‘사진러브’(회장 남상국)가 주관하며, 남 회장은 촬영 재능 기부에 나선다. 센터 측은 “장수 사진은 단순한 기록 사진을 넘어, 오랜 삶의 지혜와 품위가 담긴 모습을 격식 있게 담아내는 특별한 초상 사진”이라고 설명했다. 센터는 참가자에게 11x14 사이즈의 고품질 인화 사진을 제공할 예정이다. 참가 비용은 인화 등 실비에 해당하는 10달러다. 김가등 회장은 “시니어들이 삶의 향기와 품격 있는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자세한 문의는 센터 사무국(714-530-6705)으로 하면 된다.장수 촬영 삶의 향기 촬영 재능 장수 사진
2026.03.05. 19:00
누군가 고민을 상담해 오면 우리는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명쾌한 조언을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을 느끼곤 한다. 특히 선배나 지도자, 성직자의 위치에 있다면 강박의 정도는 더할 것이다. 가깝게 지내는 청년 교도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다. 20대 후반이고, 형은 직장에, 동생은 대학원에 다닌다. 한 집에 살게 되면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대치가 길어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모두가 은혜이니, 서로를 은혜로 생각해라’ ‘모두가 부처이니, 서로를 부처님 대하듯이 존경해라’ 교무로서 경전 내용을 전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고, 진리적으로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과연 이 말을 듣고 ‘아 그렇지, 바로 화해해야지’ 이럴까. 감정이 상해 있는 상황에서 내용의 옳고 그름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 같다. 경전에 “스승과 제자의 정과 의리가 부자(父子)같이 무간하여야 가르치고 배우는 데에 막힘이 없고, 동료 사이의 정과 의리가 형제같이 친밀하여야 충고와 권장을 주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한 뒤에야 정이 통하고 심법(心法)이 전해질 수 있다.”라고 하셨다. 서로 윤기(倫氣)가 흐르고 정과 의리가 쌓인 후에야 비로소 법이 전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정서적 친밀감과 신뢰가 부족한 상황에서 성현의 말씀은 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글은 글이고 나는 나)가 되기 십상이다. 지금 필자가 해야 할 일은 섣불리 경전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일일 것이다. 예비 성직자 시절, 간혹 후배들이 고민을 상담한 적이 있다. 속 시원한 조언을 해 줄 만큼 공부가 깊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였지만, 조언보다는 주로 듣는 편이었다. 교무가 된 지금 생각해 봐도, 첫째, 복잡다단한 인간사에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만한 시원한 조언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더구나 개인의 물리적 상황, 가치관 등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둘째, 상담 과정에서 고민의 내용이 구체화되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고,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조언을 구하러 왔지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해와 위로가 목적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후배들이 깊이 있는 조언을 해주는 선배들보다 필자를 조금 더 찾았던 이유가 아닐까 한다. 고민을 하소연하는 사람은 감정적으로 격해져 있다 보니 평소에 비해 객관적 입장에서 사안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한 걸음 떨어져서 사안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상담자의 편견과 집착 역시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이런 상황에서 바로 이성적, 논리적으로 상담자의 과실을 따지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상대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경청과 공감, 위로 후 시비 이해와 선후 본말을 따지는 것이 순서에 맞을 것이다. 일단 만나서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각자의 입장을 따뜻하게 들어주려고 한다. 성현들의 지혜가 담긴 경전의 말씀이 무용하다는 말이 아니다. 먼저 정과 의리가 통한 이후에야 비로소 진리와 법문은 본래 목적을 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조언 물리적 상황 지도자 성직자 공감 위로
2026.03.02. 18:11
동료 A에게 사춘기 시절 방황했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크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 역시 아니었기에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닌지 후회가 없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동료 B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한국을 떠난 지 제법 오래되었기 때문에, 동료 A는 동료 B와 내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했어야 했나, 아쉬움이 남았다. 불교 계문의 약 3분의 1은 말에 관한 것이다. 말과 관련된 속담과 격언을 접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구시화문(口是禍門·입은 재앙이 들어오는 문) 모두 경솔한 말, 험담, 과장된 말, 감정적인 발언이 재앙과 불행을 불러올 수 있으니, 말을 삼가라는 뜻이다. 불가에서도 말 한 번 한 것이라도 그 업인(業因)이 허공에 심어져서, 제 각기 선악의 연(緣)을 따라 지은 대로 과보가 나타난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곳이라 하여 어찌 사람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겠는가. 반대의 경우도 있다. 최근에 작은 상을 받았다. 가끔 안부를 여쭙는 스승님께서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 인사를 해 주셨다.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한 가까운 동료가 자신의 형에게 말을 했고, 그 형이 마침 스승님의 애제자 중 한 명이라 스승님에게까지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스승님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단지 게으름을 피우다 말씀을 못 드린 것뿐인데, 상에 대한 칭찬에 겸손함에 대한 칭찬까지 더해졌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하지 않았던가. 주머니 속의 송곳은 아무리 조심해도 튀어 나오기 마련이다. 말보다는 행실을 살펴야 하는 이유이다. 구시화문에 ’복(福)‘ 자를 더 해서 구시화복문(口是禍福門)이라 하기도 한다. 말은 화를 부르기도 하지만, 바르게 하면 복을 부르기도 한다는 말이다. 몇 년 전 과중한 업무에 원장 교무님에게 휴가라도 보내주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둘 듯이 투정을 부린 적이 있었다. “그래, 최근에 많이 힘들었겠네.” 원장님의 이 한마디에 모든 불만이 한 순간에 얼음 녹든 사라진 경험을 했다. 말 그대로 ’말 한마디로 천냥 빛을 갚은‘ 셈이 되었다. 말과 글에 신중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공개 게시판 글은 말할 것도 없고, 간단한 이메일이나 메시지조차도 두 번 세 번 확인하고 보내는 편이다. 불교적으로도 깨닫기 전에는 분별과 착심이 남아 있기 때문에 바르지 못할 말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깨달을 때까지는 입도 다물고 글도 쓰면 안 되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을 구시화문이 아닌 구시화복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첫째, 말과 글을 낼 때 편견과 착심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평소 착심을 놓는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둘째, 좋은 내용, 정확한 내용은 말과 글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 같으면 한 번 더 살펴야 한다. 편견과 공익의 정도에 따라 대중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경우도 있겠으나, 어떤 이유로든 대중이 불편해 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하기 어려운 경우가 없지 않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낮말 분별과 착심 재앙과 불행 불교 계문의
2026.02.09. 18:38
“믿음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아요.” 불교에 호감을 갖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현대인들에게 ‘믿음’은 불편함을 넘어 때로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바람처럼 불교는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불교 수행에서 믿음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는 단어일까. 검은색 볼펜을 수건으로 가린 채 묻는다. “이 수건 안의 볼펜은 검은색입니다. 믿으십니까?” 누군가는 믿을 것이고, 누군가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유도 다양할 수 있다. 수건을 걷고 볼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다시 묻는다. “이 볼펜이 검은색인 것을 믿으십니까?” 어딘가 어색하다. 이미 확인된 사실에 대해 굳이 ‘믿는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이 과학적·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생사와 무형한 마음을 다루는 종교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이유다. 우리 일상은 생각보다 믿음과 깊이 연관돼 있다. 식당을 고를 때, 미용실이나 병원을 정할 때 참고하는 후기와 입소문이 과연 100% 옳은 선택을 보증할 수 있을까. 결국 이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신념이나 믿음에 일정 부분 의지할 수밖에 없다. 태생적으로 믿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자연과학도 예외는 아니다. 관찰로부터 일반화를 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틀과 가설이라는 일종의 믿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의 사정이 이럴진대, 생사나 마음 같은 추상적 내용을 다루는 불교 수행에서 믿음이 필요 없을 리 없다. 불교에서는 믿음으로 법의 바다에 들어가고, 지혜로 건넌다고 한다. 믿음이 없으면 수행을 시작할 수 없고, 지혜에 이르면 믿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대승 불교를 관통하는 기본 인식이다. 깨달음 이후에는 믿음이 필요 없지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믿음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나는 이해되는 것만 받아들인다’는 현대인들의 인식 태도는 불법 수행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도 실제로는 적용되기 어렵다. 다섯 살 아이는 엄마가 주는 음식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 만약 “이 음식이 먹어도 괜찮은지 확실히 알 때까지는 먹지 않겠다.”고 한다면, 아이는 판단 능력을 갖추기 전에 굶어죽을 수도 있다. 일단 신뢰하고 먹어야 자랄 수 있고, 이후에야 판단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믿음은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제거해야 할 오류라기보다 불가피한 인식 방식의 하나로 봐야 할 것이다. 삼세인과나 천지의 은혜 같은 가르침은 한두 번의 설명으로 내 것이 될 만큼 간단하지 않다.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한 깨달음 이후로 이들을 유예한다면, 믿음이 불법 수행의 출발점이라는 불교의 전제와 어긋날 뿐 아니라, 만약 그것들이 진리라면, 그 선택이 가져올 손해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무턱대고 믿으라는 말은 아니다. 맛집을 찾기 위해 경험자의 평가와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듯, 성자의 가르침 또한 이성과 논리로 최대한 점검해야 한다. 이를 ‘합리적 믿음’이라 하여 맹목적 믿음과 구분하지만, 그러한 믿음 역시 여전히 오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불교에서 믿음은 끊임없이 점검되어야 할 불완전한 것이지만, 인간 인식의 한계 속에서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수행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불교 수행 불교 수행 대승 불교 불법 수행
2026.01.19. 18:50
새해가 되면 가톨릭은 교황의 신년 메시지를 통해 인류 공동의 과제를 말하고, 불교 조계종은 신년 법어로 수행과 사회적 책임의 방향을 밝힌다. 미국은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통해 한 해 동안 국가가 지향할 비전과 과제를 제시한다. 원불교 역시 매년 새해 첫날, 신년 법문이라는 형식으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요긴하다고 여겨지는 가르침을 세상에 전해왔다. 2026년 신년 법문의 주제는 “은혜로운 평등 세상, 함께 만들자”이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의 불안과 결핍은 오히려 커지고, 과학기술과 인공지능은 빠르게 발전하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고르게 돌아가지는 못하고 있다. 원불교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를 개교의 동기로 내세웠다. 물질문명을 도외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주체인 정신의 힘을 키워 물질을 선용하자는 취지이다. 이를 통해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올해 신년 법문은 평등을 향한 네 가지 실천을 제시한다. 첫째는 자력(自力)을 갖추는 일이다. 예비 성직자 시절, 필자에게 힘이 되었던 것은 도반들의 위로나 물리적 도움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자력을 갖추는 일은 개인의 발전을 위한 일이자, 서로를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신의 힘인 지식과 지혜, 육신의 건강, 스스로 설 수 있는 경제적 기반 모두가 자력의 요소다. 둘째는 잘 배우는 일이다. 인간은 존엄성에서 평등하지만, 배움의 과정에서는 앞선 이를 스승으로 예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나보다 나은 가치를 가진 이를 인정하고 배우려는 겸손함이 곧 평등의 시작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교육은 물론, 종교와 사회에서 배우는 도덕과 윤리 교육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셋째는 교육의 평등이다. 교육은 개인의 성공을 넘어 사회의 미래를 여는 공동의 사업이다. 내 자녀뿐 아니라 다른 이의 자녀도 함께 가르쳐야 한다. 배움의 기회가 특정 계층의 특권이 될 때 사회의 격차는 깊어지고, 교육의 문이 넓어질수록 이해와 신뢰는 자라난다. 교육의 평등은 사회 정의를 떠받치는 단단한 기반이다. 넷째는 공익심이다. 나눔은 단순한 물질의 분배에 그치지 않는다. 이웃의 삶을 살피고 마음을 기울이는 태도 자체가 은혜다. 공익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는 위기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힘을 갖는다. 나눔과 합력은 결국 자신을 위하는 길이며, 이러한 태도가 생활 문화가 될 때, 평등은 경전 속 수사가 아니라 일상의 질서가 될 수 있다. 여기서 평등은 해석이 분분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다. 게으른 사람도 똑같이 잘 살아야 한다는 결과의 평등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부모의 재산이나 학벌이 삶의 출발선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외면한 주장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이러한 차이들이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거나, 사람을 서열화하는 근거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평등이 무너진 사회에는 갈등과 불화가 쌓이고, 그 부담은 결국 모두에게 돌아온다. 평등은 평화로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평등 평등 세상 신년 법문 윤리 교육
2026.01.05. 18:50
예비교무 시절, 기숙사 규율부장을 맡은 적이 있다. 기숙사 규정에는 ‘밤 10시 소등’ 규정이 있었다. 규정 유지를 위해 10시가 되면 각 방을 돌며 점검을 했고, 때로는 강제 소등도 불사했다. “내일 과제가 있는데” “급하게 보내야 할 이메일이 있는데” 등 동료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다. 예외를 두기로 하면 한이 없고, 더구나 성직을 지망하는 예비 성직자에게 구성원 간 약속인 규정은 더 엄격히 적용돼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성직자가 되고 보니, 원칙과 현실의 경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교당 연말 탁구대회에서 상금으로 100달러를 받았을 때만 해도 소득 신고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이듬해 교화대상으로 상금 500달러를 받았을 때에도 별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법 원칙을 어긴 것은 분명하다. 의도적 탈세일까.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지금까지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일은 아니라 해도, 그래도 성직자라면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공항에서 부치는 짐이 2파운드 초과할 때, 사정을 해 볼지, 성직자답게 번거롭지만 원칙대로 할지 고민도 한다. 성직자로 사는 것도 만만치 않다. 물론 이런 류의 고민은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인들도 현금 소득의 신고 여부, 소규모 리모델링의 허가 여부 등 일상에서 원칙과 현실의 경계를 마주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원불교에서는 화이불류(和而不流·어울리되, 휩쓸리지 않음)를 말한다. 인간관계에서는 먼저 화합하라고 하셨다. 원칙보다 인정과 자비를 앞세우라는 말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고, 법과 원칙만을 앞세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원칙과 현실에 대해 어떤 표준을 가져야 할까. 첫째, 현실을 도외시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원칙이 현실보다 우선이라는 기준은 놓지 말아야 한다. 화이불류에서도 불류, 즉 화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세속에 흐르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마무리한다. 둘째, 현실 때문에 원칙을 어길 수밖에 없더라도, 이것이 옳지 않음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과거 토플 시험을 준비하며 기출문제를 공유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주관 단체에서도 금지한 일이었고, 문제은행 방식이라는 점에서 도덕적으로도 옳지 못한 일이었다. 현실적인 이유로 원칙을 어기더라도 최소한 이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자각만은 있어야 한다. 셋째, 반복적이거나, “다들 하니까”라는 변명을 하기 시작하면 하지 않는 게 맞다. 원불교 공부를 시작한 한 분이, 농담 반 진담 반 “원불교 때문에 못 살겠어요” 하신다. 아마도 이런 상황들이 종교인이 되니 더 고민스럽다는 한탄인 듯하다. 누구도 쉬워서 진리적 삶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만큼의 보람과 가치를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지난 명절 윷놀이로 딴 100달러까지 당장 세금 신고를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수행이란 100% 완결된 삶의 모습이라기보다, 원칙을 존중하고 그에 다가가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원칙 예비 성직자 기숙사 규정 원불교 공부
2025.12.15. 18:31
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수록 성직자의 권위도 예전 같지 않다. 오늘날 성직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첫째, 진리를 전달한다. 무술 오디션을 보면 짧게는 1년 길게는 5년 이상 독공을 한 사람들이 간혹 출연한다. 밥만 먹고 수련했다고는 하지만, 단기간이라도 체육관에서 정식 지도 받은 사람을 이기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올바른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점은 어느 분야나 다르지 않다. 지식으로야 불교 학자들에 비할 수 없겠지만, 수행과 삶을 통해 실천 가능한 형태로 진리를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겠다. 둘째,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준다. 현대 사회는 정보는 넘치지만, ‘의미’는 부족하다. 성직자는 단순한 교리 전달자가 아니라, 일상의 문제들을 해석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해설자 역할을 한다. 인공 지능의 등장 등으로 가치관의 혼란과 정신적 공백이 극에 달한 현대에 이 역할은 더욱 중요해 보인다. 셋째, 심리적, 정서적 지지자이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국적, 인종, 재산, 학력을 불문하고 현대인들은 갈수록 심각한 불안, 우울, 상실,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전문 상담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의 근본적 물음에 방향을 제시하는 존재로서 성직자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 넷째, 윤리적 감수성을 촉진한다. 갈수록 윤리적 회색지대가 많아진다. 학교에서 옳지 않다고 배운 일들이 일상에서 흔히 보이는 시대다.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인지 판단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성직자는 공동체 윤리 기준을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단,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을 성직자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성직자도 ‘인간’이다. 완벽을 지향하고 완벽에 가까질 수는 있겠으나, 모든 생각과 판단, 실천이 완전무결한 성직자가 실존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믿음이 부족해서, 수행이 부족해서, 심지어 마귀가 들어서 스승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주장은 이성보다 맹신을 앞세우는 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다. 전통 교리나 정서로 볼 때 이해가 가는 면이 없지 않지만, 현대인들에게 설득력을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불가에서 깨달음은 착심이 없는 상태이다. 내 국가, 내 종단, 내 가족도 그렇지만, 평생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 왔던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공산주의가 인간의 선함을 과신한 끝에 현실의 욕망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역사도, 인간을 완전한 존재로 전제하는 기대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보여준다. 성직자에게 절대적 권위가 부여될 때의 폐해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개인과 해당 조직은 물론 국가사회에 미치는 상징적 해악이 적지 않다. 성직자는 절대자여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수행으로 이를 극복하는 세상의 등불, 세상의 안내자이기 때문에 존경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일반고에서 근무할 때보다 명문고에서 근무할 때 수업준비를 열심히 했다던 고등학교 은사님 말씀이 떠오른다. 훌륭한 선생님은 훌륭한 학생이 만드는 것처럼, 훌륭한 성직자, 타락한 성직자도 주로는 신도들의 태도에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원 명상 센터삶의 향기 현대사회 성직자 오늘날 성직자 윤리적 회색지대 권위도 예전
2025.11.24. 17:50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산을 옮기리라”(마태복음). “믿음이 없으면 지혜가 생기지 않고, 지혜가 없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화엄경). “믿음은 법을 담는 그릇이다”(원불교). 모두 신앙생활과 마음공부에 있어 믿음의 의미를 강조하는 말이다. ‘1+1=2’ ‘하늘은 파랗다’처럼 과학적,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내용은 믿음이 필요 없다. 종교는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추상적 진리나, 마음, 사후 세계 등을 다루기 때문에 믿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종교생활을 하는 사람을 ‘믿을 신’자를 써서 신자, 신도라도 하는 것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한 제자가 성자에게 “제가 진정 믿으면 어떤 일이 가능합니까?” 성자는 “믿음이 바르면 바다도 건널 수 있다.” 제자는 그 말을 그대로 믿어서 물 위를 걸어 강을 건널 수 있었고, 이를 의심하며 물 위를 걸었던 다른 제자는 빠져 죽었다는 예화가 있다. 스승이 지붕에 소를 올려 매라고 하면 의심 없이 매어야 한다는 고사도 교무 수학기간에 들은 적이 있다. 이를 의심하는 것은 스승을 저울질 하는 것으로 비판 받거나, 중근병(수행자의 오만을 비유한 표현)이라 하여 치료가 필요한 ‘병’으로 간주된다. ‘재산을 바치면 업장이 소멸됩니다.’ ‘우리 종교를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은 마귀에 세력입니다.’ ‘저의 말은 진리이며 의심은 죄입니다.’ 잊을만하면 나타나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는 종교단체의 주장들이다. 필자가 수학기간에 들었던 기성 종단의 예화와 소위 말하는 사이비, 유사종교의 주장들이 완벽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을까. 사이비, 유사종교의 폐해는 말할 것도 없지만, 제도권 종교에서도 무조건적 믿음은 종종 문제가 된다. 대표적인 것이 ‘종단의 자율성’에 대한 해석이다. 종단의 자율성은 교리, 신앙, 의례, 조금 더 나아가 법규 제정에까지는 적용 될 수 있다. 단, 제정된 법규의 해석은 종단의 자율성을 벗어나는 영역이다. 즉, 교리적으로 진리와 믿음에 대한 규정은 단어의 사전적 의미, 사회적 해석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법규에 공화제라도 되어있으면 그것이 원리와 제도 중 어느 것을 의미한다는 정도의 해석 자율성은 가질 수 있지만, 사전적, 사회적 해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독재’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유감스럽게도, 기성 종단에서도 정당하지 못한 이유들로 법규의 왜곡된 해석과 적용이 일어나고, 이런 경우조차 최고 지도자에 대한 비뚤어지고 과도한 믿음으로 성자의 가르침과 공동체 질서가 훼손되는 위법이 용인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진실과 정의를 선도해야 하는 종단으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험상, 종교생활에 있어 믿음은 없어서는 안 되는 덕목인 것이 맞다. 다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개인의 수행과 사회에 적지 않은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비난해 마지않은 소위 사이비 종단들의 폐해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믿음이 조금만 비뚤어지고, 조금만 과장되면 어느 종단에서든 일어 날 수 있는 일들이다. 내가 다니는 교회나 성당, 절의 성직자 분께서 지붕 위에 소를 올려 매라고 하면 의심을 갖고 한번쯤은 이유를 물어보는 것이 현대인의 바른 신앙생활이라 하겠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 원 명상 센터삶의 향기 얼굴 사이비 유사종교 사이비 종단들 경험상 종교생활
2025.11.03. 17:44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들’(경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고, 더 많은 어려운 일들을 마주한다”. 이런 분들 적지 않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어려운 환경과 일들 역시 본인의 지혜롭지 못한 과거의 처리 때문이라는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전히 경계에 대한 각자의 마음 작용은 행복과 불행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경계를 대하면 수행자들은 보통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한다. 첫째, 성현들 가르침에 대조한다. 하나님 말씀, 부처님 말씀, 혹은 다른 성자나 평소 존경하는 스승님들의 말씀을 표준 삼아 처리한다. 둘째는, 맑고 지혜로운 본래 성품에 대조한다. 대종사께서는 “깨달은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맑고 지혜로운 본래 성품으로 판단하고 처리하기 때문에 좋은 결과를 맞이하지만,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집착에 기초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안 좋은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하셨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가족이 관련된 법적 분쟁이나 국가와 관련한 이슈에서 집착 때문에 바른 판단을 하기 어렵다. 두 번째 방법의 문제는 본래 성품을 회복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데 있다. 자동차 오일은 얼마 만에 교환하면 될까. 현대자동차 기술책임자,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교수, 50년 경력의 동네 정비소 아저씨의 의견이 제각각이다. 정확한 오일 교환 주기를 알기 위해 자동차학과에 등록하는 일반인은 없다. 대부분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해서 결정한다. 기계에 소질이나 관심이 있거나 직업으로 정비를 하려는 사람만이 자동차학과에 등록하여 전문적인 과정을 이수할 것이다. 격투기 체육관에서는 일반인반과 선수반이 있다. 일반인반은 건강과 체력 단련을 위해, 선수반은 전문 선수들의 시합을 대비한 반이다. 마음공부도 직업을 갖고 결혼생활을 하면서 마음공부를 하려는 일반인반과 관심과 적성이 있어 전문적으로 수행하려는 선수반으로 나누어 적절한 방식과 강도로 수행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일반 수행자의 경우, 전문가들의 의견을 고려하여 오일 교환 주기를 결정하려는 일반인들의 경우처럼, 성자들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경전 공부가 주가 되어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일까를 마음에 새겨두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여러 문제들에 적용하는 것이다. 전문 수행자의 경우, 자동차학과에 진학하여 스스로 차의 원리를 터득한 후 오일 주기를 확인하려는 사람과 같이 경전 공부뿐 아니라 마음의 원리를 직접 탐구하는 화두(논리를 벗어난 물음, 예: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대종사께서도 화두는 일정 수준 이상의 고급 수행자들을 위한 수행이라고 하셨다. 일반인반 수련생들이 가끔 선수반과 합동 훈련을 하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지만, 프로 선수 시합에서나 필요할 법한 고난도 기술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것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일반 수행자의 화두 수행을 말릴 것까지는 없지만, 주로는 경전 공부에 집중할 일이다. 화두 수행이 필요 없다거나 소홀히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님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겠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교무/ 원 명상 센터삶의 향기 일반인반 선수반 일반인반 수련생들 전문 수행자 고급 수행자들
2025.10.13. 19:00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He who knows one religion, knows none).” 독일 출신 비교종교학자 막스 뮐러(Max M ller, 1823~1900)의 말이다. 타종교에 대한 태도나 관계설정은 모든 종교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타 종교를 악마화 하는 종교도 있고, 종교 간의 대화를 강조하는 종단도 있다. 학문적 입장에서 이 말의 진의로 집착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수행자로서 반론을 제기해 본다. 첫째, 하나의 종교도 제대로 아는 것은 쉽지 않다. 한 종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경전, 교리 뿐 아니라 역사, 언어, 의례, 수행 경험까지 종합적으로 이해해야 함을 감안한다면, 여러 종교를 일정 수준 이상 이해하려는 시도는 피상적 수준에 머물 위험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설사 이론에 국한시킨다고 해도, 책 10권정도 읽고 한 종교를 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독서와 연구가 필요하다. 일단 일반인들은 그럴만한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다고 한들, 많은 책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는 데에는 상당 수준의 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20여 년간의 수행을 통해 얻은 작은 깨달음이 있다면, 진리는 쉬워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는 인간과 우주에 관한 근본적 질문에 대한 성자들의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삶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울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과 같은 질문들이다. 출가 수행자들이나,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종교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피상적으로라도 여러 종교를 섭렵하는 일은 생업이 있는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 수행자들에게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둘째, 한 종교를 제대로 알면 다른 종교도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어느 종교도 “우리 종교는 특정 부분에 관한 가르침이므로 부족한 부분은 다른 종교에서 찾으라”고 하지 않는다. 본인이 속한 종단도 과거 모든 가르침을 통합하여 현대인들에게 맞게 편리하고 쉬운 방법으로 공부할 수 있게 정리한 것이다. 이 법을 기본으로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공부하여 실력을 쌓은 후 다른 종단의 교서는 참고만 하라고 가르친다. 특정 무술을 마스터 한 사람은 다른 무술도 조금만 수련하면 원리와 실제를 어렵지 않게 체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대종사께서도, “그대들은 많고 번거한 옛 경전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뛰어난 역량(力量)을 얻은 후에 저 옛 경전과 모든 학설은 참고로 한 번 가져다 보라. 그 때에는 십년의 독서보다 잠깐의 참고가 다 나오리라”고 했다. 뮐러의 말은 학문적 입장에서는 의미가 있다 하겠지만, 수행과 실천까지 염두에 두었다면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타 종교에 대한 존중과 열린 태도는 여전히 중요할 것이고, 역사와 교리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 도움이 된다 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바른 종교를 올바른 방법으로 꾸준히 신앙 수행하는 것이리라. 한 종교를 제대로 아는 것과 다른 종교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둘이 아니다. [email protected] 양은철/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출신 비교종교학자 우리 종교 전문 수행자들
2025.09.22. 18:14
동양에서 하늘은 우주의 근원으로서 지혜, 공정, 덕의 궁극적 원리로 여겨진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 속에는 대중이 하늘과 같이 지혜롭고, 공정하고, 덕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반면, 중우(衆愚)정치라는 말도 있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고, 장기적 공익보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대중의 모습에 기초한 단어이다. 현실에서 보여 지는 대중의 모습은 하늘과 중우, 어느 쪽에 가까울까. 대중은 합리적이고 공익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운 한계들을 갖고 있다. 우선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고급 정보는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고, 왜곡된 정보를 접할 가능성도 크다. 둘째, 경제, 과학 같은 전문 지식이 필요한 사안을 판단할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대중이 각 분야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갖추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는 공통된 제언으로 강좌를 마무리하는 이유이다. 셋째,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은 객관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두려움, 분노, 혐오, 탐욕 등 감정이 판단을 흐리고 인종, 종교, 이념, 지역감정 같은 선입견이 사실보다 우선한다. 이는 집착이 지혜를 가린다는 불가의 견해일 뿐 아니라 실험에 의해 입증된 현대 인지과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넷째, 전체보다 개인의 이익이 우선이다. 장기적, 공익적 판단보다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이익을 선택하는 경향이 크다. 즉 ‘지금 당장 나에게 유리한가’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현대 민주주의에서 대중은 지혜롭고 정의로운 존재로 과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동양의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이다.),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나 현대의 집단지성(Wisdom of the Crowd) 등 사상적 근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다양하다. ‘모두가 부처’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괴팍한 직상 상사나 사고뭉치인 막내아들까지는 봐줄만 하다. 뉴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억대 사기범들과 연쇄 살인마에 이르면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는 두 가지 모습으로 구분한다. ‘부분적 부처’와 ‘완전한 부처’. 원래는 모두 부처이지만, 100% 발현되지 않은 사람을 부분적 부처, 100% 발현된 사람을 완전한 부처라고 표현한다. 누구든지 마음이 맑고 지혜로울 때는 완전한 부처인 것이고, 마음이 욕심과 어리석음으로 가려 있을 때는 부분적 부처가 되는 것이다. 모두가 부처라는 말은 현실 모습 자체가 아닌 수행을 통해 도달해야 하는 목표 혹은 누구나 완전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봐야 한다. 대중은 지혜롭고 정의롭기도 하지만, 한 없이 어리석은 존재이기도 한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현실의 모습이 그렇다기보다는 교육과 수행을 통해 달성 될 수 있는 목표 혹은 누구나 천심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민심이 천심’의 본의와 한계를 경계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지지가 절대적인 현대민주주의에서 정치인들의 이익에 의해 대중은 계속해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들에게 휘둘리는 중우(衆愚·어리석은 대중)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민심 천심 장기적 공익적 부분적 부처 현대 민주주의
2025.08.18. 17:38
“가자지구 어린이들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프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공감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조언하셨을까. 대종사께서는 사랑 때문에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을 괴로워하거나, 본인이 해야 할 일에 지장을 주는 것을 애착이라 하며 사랑과 애착을 구분하였다. 모든 생령이 한 기운, 모두가 부처, 자비심을 가르치고 배우는 불교 입장에서 가자지구 어린이들을 보며 대자대비심을 내는 것은 자연스러움을 넘어 진리적으로도 바람직한 모습이다. 다만, 그 마음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본인 일에 지장을 받는다면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 벗어난다. 낮에 직장에서 동료와 갈등이 있었다면, 아무리 반가운 친구와의 저녁 식사 자리도 편치 않다. 고통의 주된 원인은 특정한 사건 자체라기보다는 그 일에 대한 착심 때문으로 봐야한다. 집착은 무조건 도외시해야 하는 것인가? 중학생 시절, 버스 안에서 어느 고등학생 누나가 과제를 잃어버려 울던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바느질 관련한 과제였던 것 같았는데, 들어보니 과제에 대한 걱정보다는 수일에 걸친 본인의 정성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땐 ‘운다고 달라질 게 있나’ 싶었지만, 그 일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과연 설교나 칼럼 원고를 잃어버린다면 그 소녀처럼 한참을 서럽게 울만큼 치열하게 매사에 정성을 들여왔나 하는 성찰을 하게 된다. 착심을 놓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매사에 담백하게 임할 것을 당부한다. ‘담백’을 거리를 두고 사랑하고, 대충 정성을 들이라는 말로 오해하면 안 된다. 진심을 다해 사랑하고 온 정성을 다해 과제에 임하되, 착 없이 하라는 말이다. 대종사께서는 무관사(無關事)에 동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나와 크게 관계없는 일에 마음을 과히 쓰지 말라는 뜻이다. 일체 생령이 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불교에서, 그것도 ‘사람’에 대한 연민을 무관사라 할 수 있을까?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기보다 ‘감당할 수 없는 일에 정신기운을 소모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비록 미국에 살지만, 가끔은 한국 정치에 관심이 간다. 원하지 않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속상하기도 하고, 정부 정책이 마음에 안 들면 마음이 편치 않다. 정치적 견해를 갖는 일은 여론 형성을 통한 정치참여라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에서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지만, 며칠 밤잠을 설친다고 대통령이나 정책이 바뀔 리가 없는데 그로 인해 내일에 지장을 준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이다. 자녀의 일이나, 친구, 후배의 일도 마찬가지이다. 관심과 집착은 구분해야 한다. 수행의 궁극 목적은 시끄러운 도시 한복판과 스트레스로 가득한 직장 관계에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지만, 조용한 곳에서조차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시끄럽고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고, 바른 판단을 할 리가 만무하다. 쿠션 위 명상이 중요한 이유다. 가자지구 어린이 때문에 고민하는 수행자에게 좀 더 폼 나고 근사한 조언을 하고 싶지만, 수행이 깊지 못한 탓인지 쿠션 위의 명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걸 보면 어쩔 수 없나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사랑 집착 사랑 때문 가자지구 어린이들 마음 때문
2025.07.28. 17:39
‘보시(자시심으로 재산이나 불법을 베풂)’는 불교인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이다. 모든 것이 은혜임을 강조하는 원불교에서도 정신, 육신, 물질로 이웃과 세상에 도움을 주는 일은 교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베풀어야 할까. 우선 스스로가 행복해진다. 어려운 이를 도울 때 화가 나거나 불편한 마음이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내가 이만큼 베풀었다’는 관념과 상(相)이 없는 ‘무상보시(無相布施)’가 가장 바람직하지만, 단순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나 때로는 시혜자로서의 우월감을 즐기는 향락적인 동기가 어느 정도 섞여있다 할지라도, 베풀지 않는 것보다 나쁠 까닭이 없다. 둘째, 복(福)을 받게 된다. 가는 것이 곧 오는 것이 되고, 오는 것이 곧 가는 것이 되며, 주는 사람이 곧 받는 사람이 되고, 받는 사람이 곧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과의 원리이다. 수도인이 구하고자 하는 바는 지혜와 더불어 복이다. 주변을 보면, 복은 있지만 지혜가 부족한 사람도 있지만, 지혜는 있지만 복이 부족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인과에 따르면 짓지 않는 복을 받을 수는 없다. 불교인들은 “복 많이 받으세요.”보다 “복 많이 지으세요.”하는 인사를 더 많이 주고받는다. 셋째, 지혜를 얻게 된다. 우리는 누구나 완벽한 성품(불성)을 갖고 있지만, 무명과 욕심, 집착 등에 가려 어리석은 것이다. 대종사께서 물었다. “저 등잔불이 그 광명은 사면을 다 밝히는데 어찌하여 제 밑은 저 같이 어두운고?” 제자 답하기를, “저 등불은 불빛이 위로 발하여 먼 곳을 밝히고 등대는 가까운데 있어서 아래를 어둡게 하오니, 이것을 비유하오면 혹 사람이 남의 허물은 잘 아나 저의 그름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나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하면, 사람이 남의 일을 볼 때에는 아무것도 거리낌이 없으므로 그 장단과 고저를 바로 비춰 볼 수 있사오나, 제가 저를 볼 때에는 항상 나라는 상(相)이 가운데 있어서 그 그림자가 지혜 광명을 덮으므로 그 시비를 제대로 알지 못하나이다.” 지혜를 가리는 구름 중 가장 걷어내기 어려운 것이 ‘자신’에 대한 집착, 즉 아상(我相)이다. 자신의 이해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일수록 바로 보기가 쉽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성자들이 ‘나’를 놓기 위해 강조한 것이 명상과 더불어 이웃과 세상에 대한 베풂이었다. 외람되지만 정기적으로 몇 군데 교육기관에 약간의 장학금을 내고 있고, 과외의 수입이라도 생기게 되면 공중을 위해 기부를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복을 짓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지만 주된 목적은 지혜이다. 나에 대한 집착이 적을수록 온전하게 보고 듣고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이웃과 세상에 대한 베풂은 나에 대한 집착을 놓으며 명상보다 훨씬 쉬운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생각한다. 원불교에서는 경전을 ‘이해’하라고 하지 않고, ‘연습’하라고 가르친다. 연습 없이는 어떠한 성현의 말씀도 내 것이 되지 않는다. 남을 돕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부분부터 연습해보자.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명상 수행 지혜 광명 욕심 집착 정신 육신
2025.07.21. 18:36
LA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역사를 밟아가는 탐구생활과 같다. 로스 펠리즈에서 시작해 샌페드로 항구까지 23.3마일을 뻗어나가는 버몬트 애비뉴(Vermont Avenue)는 LA시 남북을 가로지르는 최장 도로다. 한인타운과 할리우드, USC 캠퍼스를 관통하는 이 길 위에는, 골드러시의 꿈을 안고 서부로 와 LA의 초석을 다진 한 인물의 겸손한 족적이 새겨져 있다. 원래 코행가 부족민의 산책로였던 이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도로는 동북부의 버몬트주(州)에서 유래했다. 버몬트주는 북쪽으로 캐나다의 퀘벡주와 국경을 접하며, 동쪽으로 뉴햄프셔주, 남쪽으로 매사추세츠주, 서쪽으로 뉴욕주와 맞닿아 있다. LA 역사 초기, 동부 출신 이주민들이 도시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고향의 지명을 붙이는 일이 잦았다. 버몬트 애비뉴가 기념하는 인물은 오즈로 W. 차일즈(Ozro W. Childs), 바로 버몬트주 출신의 개척가였다. 차일즈는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버몬트주에서 교육받았다. 이후 오하이오주로 이주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서부에 금광 개발 소식을 듣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골드러시의 굉음이 그를 서부로 이끌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짙은 안개는 버몬트 출신 청년에게 낯설기만 했다.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정착한 곳이 바로 LA였다. 그는 황금 대신 LA의 미래에 투자했다. 양철 세공 및 철물점을 시작한 그는 한 상인이 갖고 있던 모든 재고를 외상으로 넘겼받았다. 몇 년 후, 차일즈는 동업자의 지분을 모두 사들였고, 그 사업을 정리하면서 4만달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LA 남쪽 들판에 물을 대는 수로 시스템인 ‘산하 마드레(Zanja Madre)’의 확장 공사 계약을 따냈다. 그는 공사 대가로 그 지역의 땅을 받았는데 그 부지가 부를 축적하는 발판이 됐다. 그 땅이 현재 6가와 9가 사이, 메인과 피게로아에 이르는 다운타운 중심지다. 그는 황무지를 주택단지로 변모시켰고, LA를 대표하는 원예 사업가이자 성공한 은행가로 발돋움했다. 그가 세운 은행은 훗날 미국 최대 은행 중 하나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의 모태가 됐다. 그는 USC의 공동 설립자로도 이름을 올렸으며,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를 개관해 도시에 문화를 선물했다. 1869년에는 LA시의원으로 당선되어 도시 행정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의 삶이 더욱 빛나는 지점은 부와 명성을 쌓은 방식보다 그것을 사용한 방식에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자선 후원가(Benefactor)였지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거나 선행을 과시하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묵묵히 도시를 위해 헌신하고, 이웃을 위해 기부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남기기 위해 시정부와 거래했던 헨리 윌셔와는 결이 다른 행보였다. 윌셔가 도로 표지판에 ‘나’를 남기려 했다면, 차일즈는 도시 곳곳에 ‘우리’를 위한 터전을 일궜다. 그의 헌신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그의 이름 대신 그의 고향인 ‘버몬트’를 길 위에 새겨 넣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던 고인의 성품을 존중한, 가장 품격 있는 기념 방식이었으리라. 결국 윌셔는 자신의 이름을 남겼지만,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 세상은 흔적도 없다. 반면 차일드스는 이름 대신 출신지의 이름을 남겼지만, 그가 세운 대학과 은행, 그가 가꾼 도시는 여전히 LA의 심장부에서 살아 숨 쉰다. 진정한 유산은 도로 표지판이 아닌, 도시의 역사 속에 새겨지는 것임을 버몬트 애비뉴는 오늘도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그 길을 오가며 이름도 빛도 없이 LA를 가꾼 한 개척가의 진한 삶의 향기를 느낀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버몬트 개척자 삶의 향기 버몬트 애비뉴 버몬트 출신
2025.07.14. 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