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찾아보니 ‘취미’는 즐거움을 위한 활동이고, ‘특기’는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이나 재능을 의미한다고 써있다. 이 두 단어가 인생에서 어떻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지, 경험을 나누려한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둥지를 떠난 후, 우리 부부만 남은 집은 너무 적막했다. 하루는 길었고,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 문득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어린 시절, 제대로 된 미술 도구조차 없어 그림 그릴 엄두도 못 냈던 기억 때문일까. 망설임 없이 수채화 물감, 붓, 스케치북, 이젤까지 샀다. 그 순간의 뿌듯함과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집 발코니에 가득 피어있던 붉은 베고니아 화분을 처음 그렸다. 명암도 원근도 무시한 서툰 그림이었지만, 거실 벽에 기대어 세워둔 그 그림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격과 행복감에 온 마음이 베고니아로 가득 찼다. 손님들이 그림을 칭찬하며 “누가 그렸느냐”고 물으면, “취미로 시작했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라고 답하곤 했다. 학창 시절 이론만 배웠던 미술 시간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미국으로 이주한 후, 손녀의 아트 교실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나도 그림을 다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았다.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주 1회 수업을 결정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다시금 설렘으로 가득했다. 이제 정말 ‘그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고등학교 때 적성 테스트에서 내 공간 지각 능력 점수가 형편없이 낮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리력과 추리력은 만점에 가까웠지만, 예능 감각과 직결되는 공간 지각 능력은 80점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는 타고난 능력이 부족한 분야였던 것이다. 여행 중 멋진 풍경을 보면 사진으로는 만족 못 하고 늘 그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 자식들은 나의 그림을 좋아했다. 장미를 뭉개듯 그려도, 해바라기를 들국화처럼 그려도, 어른을 아이처럼 그려도 “엄마 그림이라 좋다”며 너그럽게 봐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인 사위의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분들이 내 그림에서 “아마추어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신선함이 있다”며 한국에서 그린 제라늄 그림을 부엌 벽에 걸어 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1년은 10학년 손자가 우리 집에서 지냈다. 운동에 특기가 있는 손자는 본인의 실력 향상을 위해 부모형제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전학을 왔다. 공부만 하는 집안에서 운동을 하겠다니,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처음엔 잠시 그러다 말겠지 싶었지만,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손자는 옆도 뒤도 안 보고 학교생활과 클럽 스케줄에 몰두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까지 보였다. 손자는 취미와 특기가 같은 경우였다. 스스로 즐겁게 운동하며 열심히 노력하니 성과 또한 뛰어났다.
이제 손자도 제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1년 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너무 오래 쉬어서 아직 엄두가 나지 않지만, 나는 붓을 놓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나를 잘 아는 동생은 잘하는 일을 하지 왜 그림으로 씨름하느냐고 하지만, 그저 즐거우니까 계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오롯이 즐거움을 위한 취미 생활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