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사는 딸이 스타벅스 광고 일로 시애틀에 갔다며 사진을 보냈다. 매사에 즉흥적인 나는 갑자기 시애틀에 관심이 갔다. 십여 년 전, 딸의 대학 졸업 가족여행으로 알래스카 크루즈를 탈 때 출발지가 시애틀이었는데, 반나절밖에 머물지 못해 아쉬움이 컸던 탓이다.
남편은 지도를 그려가며 꼼꼼히 계획을 짠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을 굳게 믿는 그는 하루하루의 동선과 맛집까지 찾아 날짜별로 메모한다. 반면 나는 ‘모르고 가야 더 많이 느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유튜브 몇 개 보는 걸로 준비를 끝낸다. 공부하고 가면 선입견 때문에 진정한 감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행기로 2시간 반 만에 도착한 시애틀은 풍성한 강수량 덕에 사방천지가 싱그러운 초록빛이다. 도심을 걷다가 예상치 못 한 장면과 맞닥뜨렸다.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고 무지개 깃발이 펄럭인다. 깃털과 반짝이로 꾸민 군중, 염색한 머리, 보디페인팅, 과하다 싶을 정도로 대담한 의상으로 치장한 사람들을 마주쳤다.
Chatgpt에 물으니 게이 축제인 ‘시애틀 프라이드 퍼레이드’라고 알려준다. 워싱턴주는 LGBTQ 커뮤니티의 중심지로 2012년부터 동성결혼을 합법화했으며 그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주라고 설명한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황홀한 유리 조형물이 가득한 ‘치훌리 유리정원’을 보았다. 스페이스 니들 유리 전망대에 올라 본 발아래 펼쳐진 시애틀 전경과 레이니어산, 올림픽 산맥이 장관이었다. 유람선을 타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니 행복했다.
챗지피티가 알려준 씨티패스를 끊어 여러 명소를 할인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었다. 여행지 시장 구경은 도시의 에너지와 생활방식을 가깝게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100년 넘은 전통시장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에서는 상인들이 생선 던지는 퍼포먼스를 구경했다. 풍성한 과일과 농산물, 꽃, 커피, 공예품 가게들도 볼거리였다. K푸드 열풍 때문인지 떡볶이를 파는 청년들도 눈에 띄었다.
울창한 침엽수가 하늘을 찌르는 숲길을 운전하니 가슴이 탁 트인다. 건조한 기후에 허덕이는 캘리포니아의 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만년설과 수줍은 듯 피어나는 야생화가 공존하는 레이니어산은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빙하가 녹아떨어지며 우렁찬 소리를 내는 폭포가 시원하다. 올림픽 국립공원에서 만난 이끼로 뒤덮인 원시림은 바닷속 같은 고요함과 평화를 선사하며 메마른 마음을 촉촉이 적셔준다. 윤기 있는 초록빛 융단이 끝없이 펼쳐진 느낌이다.
진정한 휴식과 깊은 치유의 시간이랄까,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흡족한 시간이었다. 검은 자갈과 붉은 조약돌이 깔린 해변과 쓰러진 거목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루비 비치는 내게 익숙한 태평양 모래사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Chatgpt와의 대화는 즐겁고 배울 점이 많다. 어떤 질문을 해도 ‘좋은 질문’이라며 칭찬하며 용기를 준다. 오랜 세월 함께한 남편과의 대화는 어떤가. 공감은커녕 훈계와 조언 일색이라 비난을 피하면 다행이니 서운할 때도 많다.
짧은 국내 여행을 하니 좋다. 시차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와이파이 걱정을 안 해도 좋다. 마음속에 꺼내 볼 추억이 생겼다. 도토리를 쟁여놓아 신바람이 난 늦가을 다람쥐처럼 마음이 든든하다.